공지사항

"2008년 한 일 생명 평화 역사 기행"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8-05-14 23:57
조회
1795
일정_포스터JPG

2008.한일_생명평화역사기행_참가신청서.hwp

2008년 한일 생명?평화?역사 기행 참가자 신청안내

2007년 8월, 53명의 ‘한일 생명?평화?역사 기행 1기’들이 6박 7일의 기행을 벅찬 감동과 함께 진행 하였습니다. 기행의 내용과 진행부의 보조, 참가자들의 호흡이 하나로 일치되어 많은 것을 익히고, 느끼고, 생각하고, 새로 거듭나는 기행이었습니다.
2008년 8월, 2007년의 기행을 좀 더 보강하여 기행 2기을 준비하였습니다.
생명, 평화, 역사을 탐구하는 청년들의 참가를 기다립니다.


◈ 기행의 목적:
- 일제치하 조선인 강제징용장소, 고난의 현장 방문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배우고 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한다.
- 원폭투하지, 평화자료관 등 전쟁과 원폭의 피해지 견학을 통해 전쟁없는 세상, 평화를 배운다.
- 유기농?직거래운동 현장방문, 교류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건강한 공동체 미래를 설계한다.
- 재일조선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조국의 통일과 다민족 문화에 대한 열린 의식을 갖도록 한다.
- 한?일간의 지속적인 교류의 장을 통해 묵은 민족감정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평화 관계의 역사를 쓰도록 노력한다.


◈ 2008년 기행 신청 도움 글 (2007년 기행후기 모음)
.... 떠나기 전에 기행을 준비하면서, 일본에서 기행 일정을 보내면서, 돌아와서 기행을 정리하면서...나는 행복했다. 주체할 수 없는 설레임과 기대감을 느꼈고, 전존재를 흔드는 충격과 깊은 도전을 받았으며, 은은하고 굵직한 감동과 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고 말한다. 일본을 찾는 한국 사람들은 두 번을 놀란다고 한다. 처음에는 두 나라가 이렇게도 비슷한 점이 많으냐며 놀라고, 시간이 지나면 어쩜 이렇게도 다른 점이 많으냐며 놀란다. 기행을 하면서 나는 여러 번 놀라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감사하기도 했다. 100여 년 전 강제 징용으로 끌려와 고되게 삶을 살아가신 우리 할배 할매들을 생각하며, 여전히 차별받으며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재일동포들과 우토로 주민들, 수많은 수난과 박해를 받았던 신앙의 선배님들을 생각하며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억압받고 있는 곳곳에서 작은 예수님 같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서 참 감사했다....

.... 정말 일본을 원수의 나라가 아닌 그냥 일본 자체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또 ,우리가 말로만 듣거나 TV 로 봤던 현장들을 내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어서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웃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 이제 다시 일상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계속된다. 기행을 통해 발생한 많은 사건을 개인적인 추억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적으로 기억해내며 오늘 하루의 순간순간에 생명,평화,역사의 가치를 구현하면서 살련다....

.... 생명을 위하고 평화를 위하는 길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고 ,
또 그것을 실천하는 길은 추상적이고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
작은 것부터 관심을 가지고 내 삶의 태도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일정표 : <첨부파일1> 참고.

◈ 기행 참가신청 대상 : 청년 49명

◈ 기행 기간 : 2008년 8월 16일(토) - 23일(토) 7박 8일

◈ 참가비 : 75만원 (단 ‘우토로’에서는 자유로운 헌금시간이 있습니다.)

◈ 접수방법 :
- 신청서를 다운받아서 작성 후 이메일(CISJD@CHOL.COM)이나
팩스(02 - 313-0261)로 신청서를 보낸다.
전화 접수도 가능합니다.(02 - 312-3317 김숙희 간사)
- 기행경비 중 20만원을 선입금 한다.
(신한 308-01-176638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선입금 된 기행경비는 출발일 10일 전까지만 환불 가능합니다.)
- 참가신청서 : <첨부파일2 >참고.

◈ 접수마감 : 2008년 6월 30일 (조기접수 마감이 예상되오니 신청을 서둘러주십시오)


◈◈◈ 기행지 소개 ◈◈◈

◈ 고쿠라 교회 : ‘재일(在日) 대한(大韓) 그리스도교 소창(小倉)교회’.
재일 인권 운동가이셨던 최창화 목사님이 설립하신 교회로 지금은 주문홍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계신다. 고쿠라교회는 재일동포를 죄인 취급하는 지문 날인 거부운동의 중심역할을 했으며, 재일동포들의 인권회복과 삶의 동반자로 계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 영생원 : 규슈 지역과 홋카이도는 태평양 전쟁 때 조선인들이 끌려간 대표적인 지역이다. 강제징집을 당한 조선인들은 채광을 비롯해 석탄과 철광석 수송에 필요한 항만과 철도·도로 등 건설에 투입돼 가혹한 노역에 시달렸다. 이때 규슈지역 탄광에 끌려와 일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이 화장되어 여기저기 절간에 유기되어 있었다. 최창화 목사님의 주창으로 이런 떠도는 유골들을 찾아내어 영생원을 마련하고 안치하였다. 1973년 당시 타가와(田川) 이이쯔카 등의 절에서 유골 157기의 유골을 안치하였으나 유족이 판명되는 대로 송환하고 있다. 현재는 탄광희생자 뿐 아니라 최창화 목사 부부를 비롯하여 재일동포 유골이 안치되어있다. 고국을 그리워하던 망자들의 한을 위로하며 멀리 동해가 보이는 언덕 위에 마련하였단다.

◈ 오다야마 묘지 : 해방 후 일본으로 끌려갔던 한국인들이 귀국을 하다 현해탄에서 조난당하여 사망한 유체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귀향의 일념만으로 귀국길에서 올랐으나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유체가 버려진 체로 잊혀져가다가 전후 36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묘지를 가다듬고 추도비를 세웠다고 한다. 1990년부터는 매년 9월에 시민운동 주체로 이곳에서 추도회가 열리고 있다.

◈ 우라까미 교회당 : 1600년대 기독교 대박해 시절에 박해를 피해 숨어든 기독교인들이 250년간의 철저한 탄압을 피해 비밀 결사체로 신앙 공동체를 유지한 곳이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후 그들의 후손이 세운 교회당이자, 1945년 원폭이 떨어진 중심지 교회당이다. 원래의 우라카미 성당은 30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14년 완공됐지만, 1945년 불과 3초만에 쓰러진다. 원폭 투하로 교회당이 전파되고 지금은 자리를 200미터 정도 옮겨진 언덕에 세워져 있다(1959년 완성). 일본에서 가장 미사 참석 규모가 크고 아침 새벽 미사에만 약 100명 이상의 신도들이 참여하는 곳이다.

◈ 나가사키 카톨릭 회관 : 나가사키 가톨릭 회관은 유스호스텔을 겸한 곳으로 우라까미 성당, 여기당, 평화공원을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으며, 일본 기독교의 역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신부님들의 기숙사이기도 하여 늦은 밤에는 특히 정숙해야 한다.

◈ 여기당 : 나가사키시 명예시민, 나가이 다카시 의학박사의 병실 겸 서재.
시마네현 출신인 나가이 박사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을 졸업 후 방사선의학을 전공했다. 당시는 결핵환자가 많았고 의료기구도 불충분했기 때문에 방사선을 다량 받아 만성 골추성 백혈병을 선고 받았다. 2개월 후, 원폭을 피폭, 대부상을 입고 부인까지 잃었으나, 피해자 구호활동에 적극적으로 대응, 결국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자로서의 불굴의 연구심과 가톨릭 신자로서의 두터운 신앙심으로, 병상에 있으면서도 십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박사는 이 건물을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에서 [뇨코도(여기당)]라고 명명하고, 여기서 두 아이와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온 세계 사람들에게 전쟁의 어리석음과 평화의 귀중함을 계속해서 발신, 1951년 5월 1일 43세로 영면했다.

◈ 나가사키 평화 공원 :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지 인근에 세워진 공원이다. 원폭투하중심지(원폭공원) 북쪽에 있는 공원으로 1955년에 조성되었다. 공원의 북쪽 끝에는 10m 높이의 평화기념상이 있다. 높이 든 오른 손은 원폭의 위협을, 옆으로 뻗은 왼손은 영구적인 평화를 상징한다. 온화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기원함을 의미한다.
폭탄 투하시 현 공원 자리에는 우라카미 형무소가 있었으며, 이 형무소에 수감됐던(죄수와 교도관을 포함하여) 134명은 모두 즉사했다.
공원의 남쪽 끝에는 '평화의 분수'가 있다. 이 분수는 물을 갈구하며 죽어간 원폭 희생자 영혼의 영면을 기리며 1969년에 세워졌다. 매년 8월 9일에 이곳에서는 위령제를 지내며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

◈ 원폭 투하지 :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한 순간에 7만 4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고 그때의 참상을 잊지 않으려고 원자폭탄 투하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원자 폭탄 낙하 중심지에는 화강암 탑이 세워져 있다. 공원 안에는 원자 폭탄 투하 당시 붕괴된 우라카미성당의 일부 잔해가 있어 그 위력을 실감나게 해 준다.
일본인 위령탑과 일본 양심세력이 세운 조선인 피해자 위령비가 있다.

◈ 원폭 자료관 :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대한 각종 자료를 모아 놓은 곳으로 원폭 피해의 참사를 잊지 않고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1996년에 세워졌다. 피폭의 흔적을 전시하고 있으며 원폭 피해의 실태와 대책 또한 보여주고 있어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평화와 전쟁에 관한 영화와 애니메니션을 감상할 수 있는 비디오실도 있다.

◈ 26인 순교비 : 임진왜란이 끝나기 일년 전 1597년 2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금지령으로 오사카, 교토에서 잡혀온 스페인 선교사와 일본인 최초 선교사 총 26명(이중 가장 나이 어린 희생자는 12세와 13세 소년이었다)이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 곳이다. 당시 일본의 수도 교토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인 나가사키까지 약 1,000Km를 걸어서 끌고 와서 십자가 처형을 한 곳에 세워진 순교 기념비 및 기념 공원이다. 그 옆에 있는 일본 26성인 기념관에서는 그리스도교 전래 초기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 평화자료관 : ‘오까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이곳에는 ‘공식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제국주의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역사를 폭로한 자료가 담겨있다. 평생을 전쟁 피해자들에 대해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일본의 무책임함을 고발해온 오까 마사하루 씨의 뜻을 따라 설립했다는 나가사키 평화 자료관에는 강제연행, 난징대학살, 조선인 피폭자, 전후 보상 문제 등이 자세히 거론되어 있다.

◈ 소또매 : 큐슈 운젠지역 위치한 소또매가 자아내는 경치는 이국적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과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뒤에는 일본의 기독교 역사가 가지고 있는 아픔이 서려 있다. 159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이면 다 죽여도 된다는 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러한 일본 기독교 대박해 시절,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또매 지역'으로 몰려들어 200년을 은거하며 살았다고 한다. 소또메는 엔도 슈샤쿠의 대표작 [침묵]의 장소적 배경이었던 곳이며 엔도 슈샤쿠의 문학 기념관도 그곳에 있다.

◈ 민속 자료관 : 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곳에 그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그런데 그곳은 기독교인 박해가 워낙 심했던 지역이었고 또 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기독교 관련 유물들도 많이 전시되고 있었다.

◈ 동지사 대학 : 교토에 있는 일본 최초의 기독교계 대학이자 민족시인 윤동주 선생이 교토에서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다닌 곳. 한국의 윤동주시인과 정지용시인을 배출한 학교로, 윤동주시인의 조국애의 정신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있다. 시비에는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序詩)"가 자필로 새겨져 있으며,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鄕愁)"는 그가 당시 이곳에서 바다건너 조국을 그리며 쓴 작품으로 전해진다.

◈ 귀무덤 :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병사들이 전공을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해 잘라간 조선인 병사와 민간인 희생자의 귀와 코가 묻은 곳으로, 400년 동안 일본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신사 앞에 봉분 형태로 남아있다.

◈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 : 교토 지역에서 유기농 직거래 운동 및 대안적 삶과 환경 운동을 하는 생활과 생명의 공동체이다. 이 단체의 대표인 스치다 다카시 교수는 교토 대학 물리학과 교수였는데 현대 과학의 본질적인 문제를 인식하면서 사임하고 이 단체를 만들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우토로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함께 일하는 평화-생명 운동가이다. 스치다 다카시교수는 대표적인 저서 ‘공생공빈’을 통해 대안적인 삶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는 분이다.

◈ 우토로 :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51번지에는 65세대 약 200명의 재일 조선인이 살고 있다. 일제 시대 군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재일동포 노동자들과 그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일본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전후보상은 커녕 최소한의 인도적인 배려도 없이 공사현장의 함바자리에 남아 차별과 빈곤을 이겨가며 살아온 우리동포들이다. 갑자기 날라온 철거명령으로 억울하게 쫒겨날 처지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국내외 인권 운동가들에 의해서 알려진 곳이다. 현재 미흡하마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으며 우토로 살리기 모금운동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 오사카성 :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하기 시작해 3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완성한 성이다. 성이 완공된 당시에는 지금의 5배나 큰 규모였고 오사카를 손에 넣었던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을 꿈꾸며 이 거대한 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1615년 그의 아들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쟁에서 성이 불타는 등 그 후로 잦은 전란과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천수각은 1931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5층 8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7단까지 전시관으로 꾸며져 오사카성의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 오사카 여름전투 등에 관한 자료를 전시해 두었는데, 사실적인 모형을 이용한 디오라마, 미니어처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여 흥미를 끈다.
가장 높은 층에는 오사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 오사카민족학교 : 오사카 지역에 있는 조총련계 민족학교.

◈ 가마가사키 : 가마가사키현에는 5만여 명의 노숙자들이 밀집해 있다.
가마가사키는 오사카시 니시나리구에 있는 일용노동자의 거리 이다.

◈ 인권센터 : 인권센타의 전신은 국가의 동화대책심의회 답 갑(1965년 8월)에, 동화문제해결은 행정의 책무라는 인식이 드러나는 중에, 같은 해 12월 오사카부 동화대책심의회 답 갑에 따라 근로복지관(가칭)의 건설촉진이 나온 것을 접수하여, 동화지구 출신자의 채용 안정을 도모하며, 문화, 기술, 생활향상을 위한 교육, 민생, 상공, 위생, 노동의 각 분야에 걸쳐 상담지도를 행하기 위한 종합적 복지시설로서, 1969년 6월에 오사카부, 오사카시의 공동사업으로 부락해방센타(현재 서관)가 건설된 것이 시작이다.
1974년 4월에는 부락해방의 제 과제에 응하기 위한 연구. 교육의 종합 센타인 부락해방 연구교육 센타(현재 동관)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동화문제의 해결을 시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이 존중되어지는 넉넉한 사회 실현에 이바지하기 위한 시설로서, 2002년 4월에 두 개의 시설을 일체화 하는 것과 함께, 명칭도 오사카 인권 센타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 이쿠노구 : 이쿠노구는 외국인등록수가 전국 시 제 1위이며, 구민의 4명의 1사람은 외국적주민이다. 구내 산업은 개인경영의 상점, 공장이 많은 것이 특징이며, 그중에도 금속가공 고무제품관계의 제조업이 많은, 대표적인 중소기업 동네이다. 구내는 그 대부분이 비재난 지역이며, 전쟁 전 부터 있어온 마을 형태가 남아있고. 주.상.공이 혼재되어 있는 지역도 많고, 도로는 비좁다.
또 이쿠노구는 망요(万葉)시대부터의 역사가 남아있는 지역으로, 현재에도 단지리 지장보살제와 같은 지역전통 행사가 소중히 지켜지는 변두리의 좋은 점이 남아있는 인정미가 넘치는 곳이다.
재일한국인이 밀집되어 살아가는 곳으로 일본유일의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쓰루하시 : 일본에서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은 오사카인데, 그 가운데 이쿠노[生野]구 쓰루하시[鶴橋]의 코리아타운에 집중적으로 모여 산다. 1920년대 쓰루하시 부근의 히라노[平野]운하를 건설할 때 끌려온 한국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쓰루하시 전철역 주변에 있는 '조선시장'은 코리아타운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곳이다.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한국에서 판매하는 물건이 수입되어 거래되고 있다.
한국 식품점을 중심으로 한복집과 불고기집 등이 늘어서 있어 한국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 하는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일본 사람들도 많이 찾아온다. 한복을 입고 북한말을 쓰는 조총련계도 많이 볼 수 있다. 조총련계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이 한 곳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국경 없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 KCC : 재일 한국인 기독교센타. 오사카에 있는 재일 한국인 기독교 시설로 주로 재일 동포들의 인권문제와 법률문제 등을 상담하는 일을 돕고 있다. 인권 문제로 재일 한국인 지문날인거부운동과 함께 현재는 재일 외국인의 다양성의 인정과 외국인이 살기 좋은 곳은 일본인도 살기 좋은 곳 이라는 슬로건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 일본 빈민 운동, 노동 운동의 아버지이자 평화 운동가, 고배 생협, 북오사카 생협, 동경대학 생협, 메이지대학 생협 등을 설립한 일본 생협 운동의 아버지. 일본 생협의 이념적 지표인 ‘사랑과 협동’, ‘사람과 꿈’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제시한 이념이다. 초대 일본 생협 이사장, 일본 사회당 발기인이자 열정적 복음주의자 그를 갖가지 테마로 기념하는 기념관이 일본에서 6개가 있다. (6개의 테마는 생협 운동, 평화 운동, 농민 운동, 빈민 운동, 교육 운동, 복음 구령 운동 등이다)

◈ 고배 협동학원 : 일본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설립한 생협으로서 일본 최대의 생협이자 세계 최대의 생협이다. 여기에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 기념관이 있다.

◈ 고배 유기농 협회 : 일본은 1980년대부터 유기농운동과 직거래운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정착되어가고 있다.

◈ 빈민어린이탁아소 :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의 모든 활동 근저는 빈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빈민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탁아소, 공부방들을 만들고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직접 교육교재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보살피기도 했다.

◈ 고배 청년학생센터 : 고베 지역에서 이주 노동자 인권 운동과 한국인과의 교류와 연대 운동 그리고 남경 대학살 등을 알리는 다양한 인권 운동과 유기농 운동을 하는 중심지이다. 기독교계 기관으로 그 중심에 히다 유이치 선생이 있다.

◈ 야스타 교수 : 고배 대학 농업경제학 교수를 역임한 크리스챤으로서 고베지역 유기농 운동의 지도자

◈ 해저탄광 : 1942년 일본 최대의 해저탄광인 야마구치(山口)현 우배지역 조세(長生) 탄광에서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이 작업 도중 바닷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모두 갱 속에 수장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지층이 낮아 자주 침수되는 이 탄광에서는 대피하는 것이 작업에 지장을 준다며 갱 입구를 차단하고 탄을 캐도록 했으며, 갱도가 바다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생명에 위협을 줘 일본인 탄부들은 동원하지 않고 조선인 징용자들을 갱 속에 몰아넣었다고 한다. 조세탄광은 1942년 2월3일 새벽 수몰사고가 발생, 조선인 134명을 포함해 모두 183명의 광부들이 매몰됐다. 탄광이 있던 장소에는 추모비가 세워져있고 사고난 2월 3일에는 매년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당시의 해저탄광공기통이 2개 남아있고 희생자는 지금도 사고현장에 잠들고 있다.

◈ 후쿠오카 타가와시 지쿠호 지역 탄광, 석탄?역사박물관 :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자국의 남성 노동력이 부족하자 전쟁에 필요한 석탄을 캐기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 연행했다. 이렇게 연행된 조선인은 약 67만 명. 주로 탄광과 시멘트 공장 등에서 일했다. 이들은 홋카이도, 오사카 등 일본 전역에 배치됐으며, 후쿠오카 지역에만 약 20만 명이 끌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 역사에서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후쿠오카 타가와시(市)에 위치한 '석탄 역사박물관'에는 강제 연행 당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 대한 자료는 전시돼 있지 않다. 강제연행 후 이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수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1만 여 명으로 추정할 뿐이다. 다른 지역에서 탄광노동을 하다가 숨진 조선인들까지 합치면 6만4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 숱을 팔 때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 말만하면 몽둥이를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싶소 (중략) 십오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하루 놀라다가 뚜드려 맞았네. 몽두리 맞고서 굴안에 끌려와서 천장이 떨어져서 이세상 이별했네(중략) 감독놈은 몽두리를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숱담아 내라했네-” 일제시대에 강제징용 당해 후쿠오카의 지쿠호 탄광 지역에서 일하던 조선인이 남긴 시다. 이 시는 당시 타국에서 노예노동을 하던 조선인들의 실상을 잘 보여 준다

◈ 휴가(日向)묘지 : 후쿠오카현 타가와시 휴가(日向) 묘지-휴가집안의 묘지-에는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일본인 묘지 틈에 조선인 유골 37구가 잡풀 속에 묻혀 있다. 조선인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표시라고는 탄광에서 나온 지름 20~30㎝ 정도의 돌덩이가 전부다. 돌아가신 후에 조선인동료들이 몰래 여기에 매장하고 돌덩이로 표시를 해 두었단다. 그러나 이마저도 주변에 개와 고양이 등 애완동물 무덤들이 들어서면서 한데 뒤섞여 버리고 말았다. 연료가 아까워 화장도 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고 방치하였다. 해방 후 30년이 지난 1974년 5월에야 재일강제연행 피해자인 한사람에 의해 그곳에 조선인들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