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제 10회 고난의 현장 방문 보고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8-09-19 23:53
조회
1986
고난의_현장_방문
할렐루야!
본원의 주관으로 2008년 8월 25일(월)~30일 (토)의 5박 6일에 걸쳐 간사이 지방(교토, 오사카, 나라, 고베)의 재일 동포 고난의 현장을 방문한<한국교회재일동포인권선교협의회> 제 10회 재일동포고난의 현장 방문이 전북 지역 목회자·기독자 등 11명으로 이루어졌다.

1980년 초반 재일 동포 지문날인거부 운동에 연대하여 재일동포의 인권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한 한국 기독교(NCC-K)는 재일동포의 차별철폐운동을 전개해 온 일본의 개신교·가톨릭·재일 교회 등으로 구성된 <외국인등록법문제전국기독교연락협의회>(외기협)과 연대하여 1990년 제1회 ‘외등법문제 국제심포지움’을 개최하였다. 그것을 이제까지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재일동포의 차별문제를 배워 알기 위해 한국기독교인들에게 일제하 재일동포들의 고난의 현장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이 1991년 8월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큐슈(九州), 히로시마(廣島), 간사이(關西,) 가나가와(神奈川), 간토(關東), 홋카이도(北海道) 등지에 있는 탄광, 비행기장, 지하공장, 등 징용된 조선인들이 고난당하고 희생된 지역을 방문하게 되어 금년이 그 열 번째 방문이다. 매 방문 때마다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각 지역 <외기련>이 안내를 하여 고난의 현장방문을 도와 왔다. 이분들의 수고에 감사드린다.-운영자


제10차 일본 재일동포 고난의 현장 방문 보고

1)출발
2008년 8월 25일 (월) 오전 10시 제 10차 고난의 현장방문팀 11명이 5박 6일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실은 <한국교회재일동포인권선교협의회> 전북 지역회장 백남운 목사(전주 효자동 교회)가 위원장으로 있는 <전북 인권선교협의회> 팀 11인(목사 3인, 장로 3인, 사모 2인, 청년 2인)이 전주·인천공항간 리므진으로 전주를 떠난 것은 새벽 5시였다.
1시간 45분의 비행 후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을 도착한 일행을 관서 KCC 주임간사인 김성원 (金成元)장로(오사카 한국인 교회)와 무라타 미노루(村田 稔)신부(일본 가톨릭 사카이 불록 공동선교 사목)이 8인승 승용차 2대를 가지고 마중해 주었다.

2) 또 하나의 ‘우토로’-오사카부 다카츠키(高槻)시 조선인 강제 노동의 현장(다카츠키지하창고 혹은 ‘다치소’)
오후 1시 30분 간사이 국제 공항을 출발한 일행은 곧 바로 오사카 부 동북쪽에 있는 다카츠키라는 산골 마을로 향하였다. 1시간 30분을 가 도착한 다카츠키 지하창고 유적지 명판이 있는 곳에서 <다카츠키 ‘타치소’ 전적보존회(‘타치소’보존회)>(‘타치소’는 타카츠키 지하 창고의 일본어 ‘타카츠키 치카 소코’의 앞 글자 한자씩의 약자) 대표 하시모토(橋本) 씨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하시모토 씨의 안내로 제1 터널과 제 3 터널을 들어 가 그 당시 조선인들을 포함한 노역자들의 고난의 터를 눈으로 확인하였다. 하시모토 씨로부터 들은 ‘타치소’를 둘러싸고 겪었던 조선인들의 고난사는 또 하나의 우토로의 역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치소’
‘타치소’는 아시아태평양전쟁말기 일본 각지에 계획되었던 지하 창고·공장들 가운데 한 곳이었다.1944년 여름, 사이판 함락에 의해 ‘(일본)본토결전’이 현실화되자, 그 준비로 육군의 본토결전의 지휘소로서 각지의 군사령부를 지하에 설치하는 계획을 시작했다. 긴기(近畿)·추우코쿠(中國)·시코쿠(四國)· 토카이(東海) 지방의 방위를 담당할 중부군(사령부는 오사카 성안의 전 오사카시 박물관)의 지하 지령소로 선정된 곳이 이곳 타카츠키시 나리아이(成合)지구였다.
1944년 (소화 19년) 9월 나리아이 마을(成合の村)의 지주 25인은 평당 3전의 임대료로 토지를 강제 수용당하였다.
그 해 10월에 들어 가, 30여개의 터널 군 중 제1턴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육군부대나 학도병으로 동원된 남녀학생, 각 촌에서 의용대들로 소집된 농민, 그 고장의 소학교 학생들도 참여했지만, 다이나마이트에 의한 굴삭 등 가장 가혹하고 위험한 터널 굴삭작업의 중심에는 3,500인(그 중 600인은 강제연행)의 조선인이 있었다.
전후 나리아이 키타(成合北) 초(町)에 있었던 조선인 함바(飯場;식당 겸 기숙사)에 기숙하여 온 조선인들 가운데는, 귀국하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 하고, 살기 위해 ‘타치소’ 공사에서 나온 ‘즈리’(폐석)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함바 터에 삶터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던 토지는 그 마을의 지주가 군에 강제적으로 빼앗긴 곳이었다. 1965년 지주들로부터 토지명도소송도 일어났었고, 생활의 곤란함과 더불어 언제 쫒겨날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주거지의 개량 등도 생각하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의 생활을 강요당헤 왔다. 1975년에 겨우 상수도가 깔렸고, 1983년에 지주들과 나리아이기타의 마을 주민들 간에 ‘토지 매매’가 이루어졌다. 그 후, 그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운동의 결과 타카츠키시도 도로 포장이나 구획정리 등의 환경정비사업을 행하게 되었다. 현재 나리아이키타의 마을에는 재일 동포 100 여명이 살고 있다.

<‘타치소’ 보존회>의 일본인들의 노력에 의해 ‘타치소’의 고난이 알려지고, 반성이 거듭된 결과 마침내 1995년에 지방정부이지만 오사카부 타카츠키시의 손에 의해 ‘전쟁의 상흔’에 대한 명판을 건립되게 되었다. 보존회는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사과표시가 나타나지 않은 불안전한 기념비이라고 부끄러워했지만, “‘’가장 위험하고 과혹한 터널 굴삭의 분야에는 강제연행이라는 수단으로 모집된 3,500명 이상이라고 말해지는 조선인노동자가 투입되어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고들 합니다.” 라고 조선인의 강제연행 사실을 기록하고, “우리나라는 먼저의 전쟁에서 많은 인명을 잃은 것, 동시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재화(災禍)와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충고하면서 ‘항구적인 평화의 길을 갈 것을 맹세’ 한 것은, 아직도 일제의 강제징용 등을 부인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본 중앙정부에 태도와 비교하여 볼 때 의미 있는 묘비라고 느껴졌다.

3) <외기협> 간사이 지역 대표자들의 환영식
이날 저녁 6시 30분 제 10차 일본 재일동포 고난의 현장 방문을 주선하고 안내하는<외등법 문제 일본 기독교 전국 연락협의회>(외기협) 간사이 지역 대표자들의 환영식이 ‘<재일 대한 기독교 센타>(KCC ;관장, 이청일 목사)에서 개최 되었다. 이 환영회에는 일본 가톨릭 오사카 교구 이케나가 쥰(池長 潤) 대주교, 일본 침례교 동맹 <오사카 신세이교회(大坂 新生敎會)> 타케우치 (武內) 목사 부부(武內 英和 목사, 武內 美代子 목사), 일본 자유 감리교 <오사카 난코 기독교 교회(大坂 南港 基督敎 敎會> 오이 기요미(大井 淸美) 목사, 재일대한기독교회 간사이 지방 회장 전성삼 목사, 이청일 목사, 무라타 신부, 김성원 장로 등이 우리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전주 오죽선을 선물로 드리며, 우리의 답사여행을 받아 주고 환영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환영회는 일본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입으신 못자국과 같은 상처를 지니고 한국인을 포한한 아시아인들에 대한 죄책을 아파한다며, 앞으로 두 나라의 불행한 과거사를 딛고 평화로고 선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미래를 만들도록 노력하자는 오이 목사의 인사로 마치었습니다.


4) 한·일 공생공영의 마을- 교토 히가시(東) 9조 40번지 <히가시마치노초(東松の町)>
1955년 교토시가 인구증가에 따른 주택개량사업에서 재일 조선인을 제외시키고 이들을 몰아 낸 이래, 교토시 최대의 빈민가로 악명을 떨쳐 똥구조라고 불리었던 히가시 구조(東九條) 40번지.
‘불법점거’라는 이유로 1982년까지도 수도·전화· 없었던 곳. 연례행사와 같은 화재사건으로 비바람을 막아준 ‘하꼬방’과 생명이 화재로 희생당하기 일 수였던, 버려진 교토의 ‘청계천’.(사진 3691~3695)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묵묵히 버티어 온 조선인 120세대와 그들을 지원해준 소수의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공동노력으로 교토부가 1996년 4월에 ‘<히가시마츠노키 초’(東松の木町)>라는 정식 ‘초’(町)로 이름붙이고 동년 10월에 공동주택 1동을 완성하였으며, 1999년 12월에 제2동, 2004년 제3동이 준공하여 ‘한·일’ 공생공영의 모범을 보여 준 마을(사진3697~3701).
2008년 8월 26일 화요일.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현장 방문 두 번째의 날, 이 <히가시마츠노키 초>를 방문. 평생을 , 이곳에서 일본인들과 공생을 위해 몸 받쳐 싸워 온<희망의 집 가톨릭 보육원>(사진 3696) 원장인 고희의 재일 2세 최충식 목사(사진 3687~3695)의 안내로 그와 함께 변해 온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구조의 50년 변천사를 들었다. <재일 대한 기독교 총회>소속 목사로서 가톨릭 보육원 <희망의 집> 원장의 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70평생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말하여주었다.
1967년 학교를 가지 않고 이곳에서 배회하는 아이들(주로 재일 조선인)을 위해 가톨릭 교회는 이곳에 보육원을 세웠다. 10여 년 간 6명의 원장이 바뀌는 등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27년 전 개신교의 그를 원장으로 초빙한 이유는 그가 재일 한국인이며, 이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 지역 사정을 잘 알고, 복지학을 전공했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재단의 유일한 한국인 책임자이며, 일본 가톨릭 시설의 유일한 개신교 목사 원장인 그는 1980년대 시작된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개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5) 아직도 살아있는 일제 식민지 ‘우토로’
이날 우리는 최 충식 목사님의 안내로 ‘남대문’이라는 동포 식당에서 광우병의 염려 없는 군 쇠고기(야키니쿠)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히가시마츠노키 초>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토쿄부 우지시(宇治市) 우토로를 방문하였다. 우토로 정내회 김 교일 회장(사진 3703 의 중앙)과 간사 청년 이 무율 씨(사진 3907 왼 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8번째)가 우지차(宇治茶)를 준비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우토로에 관한 특별기획인 ‘ MBC 그것을 알고 싶다‘의 비디오를 시청하였다.( 20분, 사진 3705~3707 ) 그리고 인혁당 관련자들의 ’우토로를 위한 특별 헌금’ 전달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갔다가 방금 돌아 온 김 회장으로부터, 우리 정부의 우토로 헌금에 관한 견해를 전달해 들었다. 노 정권 하에서 국회의 동의가 끝난 우토로 지원금 30억 원에 대해 이 정권은 그 지출에 대해 정부가 임의로 할 수 있는 구조(법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부의 입장에 대해 분개하면서, 우리 일행은 서 무율 씨의 안내로 우토로 지역을 탐방하였다.(3709~3717)
우토로의 토지가 분쟁이 되기 시작한 1987년 이래 우토로 주민 조직인 <우토로 정내회>와 우토로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일본인 조직<우토로를 지키는 모임>과 <우토로지원한국위원회 >( 1995-2000)과 <한국우토로 국제대책회의>(2004~현재) 등이 우토로 문제로 공동 연대 활동을 해 왔다. 그 결과 시민 모금( 5억원), 정부 지원 (30억원) 등으로 우토로 토지 6500평 중 3,000평을 구입하기애 이르렀으나, 모금 초기와 지금의 환율 차이로 약 7억원이 부족한 상태여서 더 모금해야 한다고 한다. 사족이지만 최충식 목사는 자기가 지문날인 거부 운동을 할 때,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일본인들의 지원을 받은 것을 인연으로 한국인들의 문제인 우토로 문제에 관련되게 되었다고 하니 아이러니칼 한 일이었다.

*) 신라 문화가 스며있는 일본의 국보 <뵤도인>(平等院)
우토로 방문을 마친 우리는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우지시의 유명한 문화제인 <뵤도인>을 방문하였다. <뵤도인>은 일본 화폐 10엔 주화의 그림(사진3716)으로 사용될 정도로 일본이 자랑하는 국보의 하나이다.(사진 3715~3724) 그런데 지하에 설치된 박물관에 가 보니, 이 일본의 국보의 조각들과 범종이 신라의 고적들과 관계가 있다고 기록되고 있었다.

6) 한·일 연대의 센터 ~<고베청년·학생센터>
8월 27일 수요일, 우리는 오사키 서쪽에 위치한 고베 시 <고베청년·학생센터>(원장; 히다 유이치 씨 60세)를 방문하였다.
히다 유이치(飛田 雄一)씨는 30여 년 동안 이 청년 학생 센터를 통해서 조선인 징용의 역사를 발굴·연구·안내하여 왔고, 유기농산물과 관련하여 한국 각지 등 70여회 방한한 분이다. 요즘에는 한국의 산들이 좋아 산행을 위해서도 방한을 한다고 하였다.
2007년부터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주최의 “기독청년 생명·평화·역사 기행” 단을 안내하며 한국청년들에게 생명과 역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사진;3726)

7) 조선 관계 외국인 선교사 묘지 방문
이날 두 번째 방문지는 고베시 배후에 있는 로코산(六甲山)뒷쪽 중턱에 있는 후타다비(再度)공원의 외국인 묘지였다. 고베 외국인 묘지들에는 메이지(明治)이래 일본과 관계가 있던
외국인 묘지 약 2500기가 있었는데 1961년 그때까지 노하마(野浜)와 카수가노(春日野)에 있던 묘지들이 후타다비 공원묘지로 통합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조선과 관계있는 미국인 선교사 W.B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과 카나다 선교사 L.L. 영(Luther Lisgar Young 1875~1950) 두 사람이 묻혀 있다.
스크랜톤 선교사는 미국 감리회 한국의료선교사로 한국명은 시란돈(施蘭敦). 어머니는 이화여대를 세운 스크랜톤 부인이다. 예일 대학과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885년 2월에 조선에 선교사로서 파견되었다. 북미 장로교회 선교사 H.G. 알렌이 경영하는 제중원, 정동병원, 상동병원들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 상동병원 내에 상동교회를 창립하여 목사로도 활동하였으며, 또한 한글성서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으로도 위촉되어 성서사업에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당시의 정권에 가까이 하여 커다란 병원을 세운 선교사들도 있었으나, 그는 민중 속에서 ‘맨발의 의사’로서 최후까지 봉사하였다. 1907년 6월 22년간의 조선선교사로서 일을 마치고 1922년 3월에 고베에서 사망하여 외국인 묘지에 매장되었는데, 고베에서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사진;3736)
영 선교사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로 한국명은 영재형(榮在馨). 묘지에는 그의 이름이 한글로 조각되어 있다.(사진;3729) 함흥, 성률, 원산 등의 선교부에 배속되어 주로 교회 목회에 종사하였으나, 1925년부터 교파를 떠나 선교활동을 하였다. 1927년에는 일본에 부임하여, 고베를 근거지로 하여 큐슈에서 사할린까지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를 개시하여 해방 전까지 그가 설립한 교회만도 61교회에 달했다. 1934년에는 조선인 교회만으로 구성된 <재일 조선기독교회(대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42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귀국하였으나, 종전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 와 전후의 교회 재건에 진력하다가 1959년 2월에 일본에서 사망하였다.(이상 히다 유이치의 글 “고베시립 외국인묘지에 있는 조선인 관련 선교사들을 방문하다.” (무궁화 통신 167호 게재)
우리 일행은 한국 개신교 초기에 복음전파에 공이 큰 두 분의 선교사의 업적을 기리며 두 분의 묘지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다.(사진; 3730~3736)

8) 카가와 토요히코(賀川 豊彦) 목사의 흔적을 찾아서
다시 우리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 사회운동의 태두 카가와 토요히코 목사의 기억을 더듬었기 위해 <고베 청년학생 센터>의 부근에 있는 <고베중앙신학교> 터에 세워진 기념비를 방문하였다 .(사진;3737~3739) 카가와 목사는 1920년대, 일본의 빈민 노동 농민 운동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회 계몽운동의 선구자로서 고베 중앙신학교 출신이었다.

9) 조선인 무연고 유골탑이 있는 토호쿠지(東福寺)
토호쿠지(사진;3744)에는 1945년 6월 고베 대공습이 진행되는 가운데, <카와사키 제철>과 <고베 제강>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 유골이 약 50인 분의 뼈가루가, 길이 120 센티, 높이 60 센티 정도의 상자 세 개에 넣어져, 현재 버마의 파고다 양식의 불사리탑(佛舍璃塔)에 다른 일본인 무연고자들과 함께 매장되어 있다.(사진 3740)
효고현(兵庫縣) 내에는 태평양 전쟁 시에 미국에 의한 공습이 총 55회 있었다. 약 77만인이 전화(戰禍)를 입었는데 조선인도 2만 5백인이 전화를 입었다고 추정된다. 희생자의 수는 확정할 수 없으나, 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다고 상상된다. 그 가운데에는 강제연행되어 당시 고베에서 노동하고 있던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다.
그 파고다 앞에서 방문단은 희생당한 무명의 조선인들을 생각하며 묵상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3742)

10)조선 기독교사 연구자, 한석의 씨와 청구문고.
고베 역 북쪽에 있는 오쿠라야마(大倉山) 공원에 있는 고베 시 중앙 도서관 별관 특별실에 조선사 도서관 <청구문고>가 들어가 있다. 이 문고는 실업가이자 조선 기독교사 연구자인 고(故) 한석의(韓晳曦) 씨가 오랜 동안 수집한 약 3만 여종의 수집품이 저장된 것으로 일본 국내에서 조선근대사를 중심으로 한 기초 자료(사진 3746)가 체계적으로 수장되어 있는 도서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사진;3745) 문고에서는 매월 제 2 일요일에<재일조선인운동사연구회>(關西部 대표: 히다 유이치)와 <조선근대사연구회>(대표;水野直樹)가 열리고 있다. (글: 히다 유이치)

11)고베 전철 조선인노동자 기념비
고베 전철은 동쪽으로는 유명한 관광지 아리마(有馬) 온천과 미타(三田)에, 서쪽으로는 과거의 주요한 관광지였던 코야(廣野) 골프장과 미키(三木)에 연결되는 노선을 지닌 고베의 동맥의 하나이다. 고베 전철은 고베아리마전철(1927~28년 부설)과 미키전철(1936~37년 부설)이 1947년에 병합하여 설립되었다. 1920년대, 30년대의 부설공사에 많은 조선인들이 종사하였다. 그 수는 1200명에서 1800명으로 추정된다. 산간을 달리는 노선에서는 많은 사고가 일어났다. 공사의 과정에서 과혹한 노동조건을 반영하는 듯 4회에 걸쳐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요구는 매 1회 임금지불, 함바(飯場) 집세 철폐 등이었으나, 1927년에 1200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참가한 이 스트라이크는 전전(戰前)에 있어서 일본에서도 유명했던 노동쟁의였다.
1992년부터 <고베전철부설공사 조선인희생자조사·추도회>가 구성되었다. 추도회는 ‘한신아와지다이신사이’(阪神淡路大震災)(1995년 1월 17일) 후인 1996년 11월 24일, 김성실(金城實) 씨 제작의 ‘조선인 노동자 동상’(사진;3749, 3754)을 건립하였다. 낙성식에서는 유족대표, 추도회 대표, 한국영사관 대표 등이 제막하였다. 고베시 효고구 에야마(會山) 공원의 남동쪽 변두리에 설치되어 있는 이 동산에서 매년 10월 제 3일요일에 추도집회가 열리고 있다.(글; 히다 유이치)
방문단은 조선인 노동자의 탑 앞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생각하며(사진; 3747, 3748) 그들을 추모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3749~3756)

12) 조선인·중국인 등의 조적이 담긴 ‘고베항 평화의 비(碑)’
‘고베항 평화의 비’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시기 고베항에서 조선인·중국인 강제연행자 및 연합군 포로가 항만하역과 조선(造船) 등으로 가혹한 노동을 강제당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역사를 기록하여 아시아 평화와 공생을 맹세하기 위해, <고베항에서 전쟁하 조선인·중국인 강제연행 조사회>(대표 安井三吉 고베대학 명예 교수)가 세운 것으로 일·영·한·중 4개국으로 각인되어 있다. 올해(2008년) 7월 21일 제막된 이 비석은 화교들이 할애한 <화교총회관(KCC)> 앞마당 모퉁이에 ‘비핵 [고베 방식]의 비’(사진; 3763)와 함께 서 있다.
방문단은 새로 세워진 이 탑들 앞에서 순간 같은 동지가 된 <고베 화교총회> 사무국장인 진 시앙(金 翔) 씨 부부와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3762)
또한 고베 지역에서 조선인의 고난을 연구하고 홍보하며, 또한 생명 농업을 통해 한국과 일본 간에 화해의 가교를 놓고자 애쓰며 일생을 보낸, 오늘의 안내자 ‘좋은 일본인’ 히다 유이치 씨에게 감사의 선물을 증정하였다. 우리의 선물은 보잘 것 없으나, 우리의 감사의 마음과 화해의 진심이 전달되기를 바라면서.....(사진;3760)

*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오사카 성
이후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임진왜란의 주범이자 일본 기독교(천주교)의 박해자인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생각하며 그의 허장성세의 표상인 일본제일성 오사카 성을 탐방하였다.(사진;3765,3767)
돌아 와 우리의 안내자인 김성원 장로와 윤호신(윤호신) 장로가 시무하고 계시는 <재일 대한 기독교 오사카 교회>(정연원 목사)에서 저녁 수요예배를 드렸다.

*고대 한·일 관계사를 찾아서.
8월 28일(목), 29일(금) 양 일은 방문단의 일행이신 서승 장로님의 안내로 백제 문화의 일본 유입지인 <이소가미 진구(石上神宮)>, 아스카(飛鳥) 유적지, <호류지(法隆寺)>, <오미진구(近江神宮)>, <왕인(王仁) 박사 묘지> 방문하고 일본문화에서 묻어 나오는 우리 조상의 숨결을 느꼈다. 도중에 일본 문화의 정수인 킨카쿠지(金閣寺), 키요미즈테라(淸水寺)에도 발걸음을 옮겼다.

13) 재일고난의 역사를 정리하며-<코리아 NGO 센터> 김광민 씨의 증언
8월 30일 토요일
오전에 우리는 <코리아 NGO 센터>의 김광민 씨(사진;3836 오른쪽)로부터, 일본에서의 차별 받고 본국(한국)에서도 멸시 받고 있는 재일 코리안(한국·조선인)으로서의 서러운 경험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민족교육운동에 투신하게 된 내력을 들었다.(사진;3833~3838)
재일 코리언 3세인 김씨는 가내공업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부모들이 일본인이 누리는 모든 권리와 혜택에서 배제된 채 차별과 가난과 멸시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민족의식이 싹터, 대학생이 되어 조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는 군사독재 시대에 조국을 찾은 많은 동포 학생들이 조작 간첩단에 억루되어 고생을 하는 시절이라 모친은 김씨의 조국 유학을 말렸으나, 조국을 알고 싶은 의욕에 불타 조국에 유학을 하였으나, 그가 부딪친 현실은 “조선족 중국인들은 어려운 가운데에서 모국어를 잊지 않고 잘하는데 부자 나라 일본에서 떵떵거리며 살다 보니, 한국말도 제도로 못 한다”는 비난과 냉대였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낀 김씨는 모국어를 철저히 배워 자신의 속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하여 재일 코리언의 사정을 조국에 알려야겠다는 결심으로 종로구 창신동 빈민촌 (1980년 당시) 탁아소에서 봉사하고 사는 등 5년 동안 모국어를 연마하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조국의 빈민촌의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고, 조국 동포들에 대한 섭섭함이 동질성으로 바뀌기도 하였다고 고백하는 그는 일본으로 돌아 와 일본 학교에 다니는 동포 아이들에게 한글과 조국의 문화를 가르치는 민족학급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의 정교한 한글 구사력을 통한 1시간 을 넘은 강의를 통하여, 우리는 재일 동포의 고난의 현실이 과거만의 일이 아니고 오늘날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과의 격려와 연대의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 의미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참고로 <코리아 NGO 센터>의 사업 가운데 김광민 씨가 담당하고 있는,
‘재일 코리안의 민족교육권 확립’ 사업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다음 세대를 짊어질 아이들을 중심으로, 재일 코리언의 민족적 동질성과 자존심을 북돋아주기 위해 민족교육권 확립을 향한 노력을 경주한다.

* 공립학교에서의 민족학급의 운영 및 민족교육의 추진
* 민족학교의 자격·차별시정과 공적 조성(助成)의 확충에의 지원
* 민족교육실천의 전국적 홍보와 교육개혁에 대한 조사연구, 제언 활동
* 민족 강사의 연수 프로그램 개발과 충실화)

<참고> 사진을 원하사는 분은 본원 사무국(02-312-3317 김숙희)으로 연락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