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

폭력과 죽임의 문화를 넘어서(부제: 서울, 버지니아, 여수, 바그다드 그리고 엠마오) -조헌정 목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5-02 21:45
조회
1475
2007년 5월 첫째 주일

폭력과 죽임의 문화를 넘어서(부제: 서울, 버지니아, 여수, 바그다드 그리고 엠마오)
-본문 : 예레미야 2장 31-37절: 루가복음 24장 25-35절-

조헌정 (향린교회 당회장, 기사연 기회위원)

[두개의 서로 다른 죽음]

시간이 약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2주전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두 사람의 죽음의 기억은 우리의 뇌리 속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빈곤을 뼈저리게 경험한 54세의 택시노동자 허세욱님은 한미FTA가 더 큰 빈부의 격차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서울 한 복판에서 자기 몸을 불사른 분신자살은 남한 사회에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미국 버지니아의 작은 대학 도시에서 33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일어난 조승희 총격살인 사건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자랑하는 미국 안에서 그것도 지성의 보루인 대학 교실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세계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허세욱님에 대해서는 2주전 부활주일 하늘뜻펴기를 통해 그의 매우 훌륭한 실천적인 나눔의 삶에 대해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그때는 소생의 희망이 강하게 얘기되고 있었을 때입니다. 조승희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언론이 매우 자세히 언급하고 있어 오늘 그를 다시금 얘기하는 것이 식상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다시 이 두 사람의 삶과 죽음을 얘기하고 싶은 것은 첫째 이 두 사람은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이 선택한 자살이라는 죽음의 방식이 그러합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조승희와 같이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졌을 때,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고 그 분노를 폭발적으로 드러내고 이 지겨운 삶을 그만 끝내고 싶다는 갖게 됩니다. 또 동시에 허세욱님과 같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이 믿는 진리의 길을 따라야겠다는 생각도 갖습니다.

허세욱님의 분신이나 조승희의 살인과 자살 속에는 우리들의 숨은 모습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 오늘 제가 이 두 사람의 얘기를 다시금 꺼내는 첫째 이유이고, 둘째는 이 두 사람의 걸어온 삶과 저 개인적으로 살아온 삶의 궤적 사이에 겹쳐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허세욱님은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눈 기억은 없지만, 거리 시위나 촛불 집회에서 자주 보던 얼굴입니다. 조승희의 경우도 직접 만난 기억은 없지만, 제가 16년을 목회하였던 바로 그 워싱톤 지역에서 초등학교로부터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어머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면서 세례도 받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조승희를 기억하던 한 한인 목사님은 TV에 나타난 영상을 보고 ‘처음으로 그가 full sentence(하나의 완전한 문장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 목사님은 ‘내가 그때 좀 더 사랑을 베풀고 관심을 가졌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고 있을 것인데 바로 목회자로서 저 또한 같은 후회의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의 이유는 언론은 주로 이 두 사람의 삶을 사회현상학적으로 혹은 정신질환자로 바라보고 있는데 저는 이를 보다 심층적인 종교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환경인가? 의지인가?]

우리가 이 두 사람이 걸어온 삶의 환경만을 갖고 말한다면 이 두 사람은 서로 죽음의 방식을 바꿔야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부자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고 총기로 32명을 살해하고 자신의 목에 총을 겨눠 삶을 끝장내는 폭력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은 사실 조승희가 아닌 허세욱님이 되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허세욱님은 가난이 운명처럼 굴레 지워진 가정에 9명의 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판자촌을 전전하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바닥 일을 다 해본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 층에 해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54세라는 인생의 완숙기에도 하루 12시간 노동에 120만원이라는 월급만을 손에 쥐고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54년의 인생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가정도 갖지 못한 채 하루 12시간 노동을 해서 한 달 120만원을 벌고 있다면... 그런데 신문을 보니 어떤 재벌의 아들은 매일 밤새도록 친구들과 몰려다니면 술을 퍼먹다가 누군가와 패거리로 싸웠고 그 싸움판에 아버지까지 끼어들었다는 한편의 코메디같은 그런 기사를 보았을 때, 저의 이 부당한 사회를 향해 부의 대물림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이 사회와 가진 자에 대한 분노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승희와 같은 폭력적 분노를 터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허세욱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주어진 삶에 더욱 충실하면서 자신의 주위를 더 밝게 아름답게 만드는 작은 실천운동을 펴나갔습니다.

반면 조승희는 8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실상 당시 90% 이상의 한인이민자들은 모두 거의 빈손으로 건너왔습니다. 그의 가정이 겪었던 고생은 이민자 누구나가 겪는 일상이었지 특별한 고생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벅찬 노동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한인들은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으로 추방의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승희. 그는 부자 집의 아들은 아니었어도 적어도 미국에 거주하는 합법적 신분만은 보장받은 대학생이었습니다. 합법적 신분을 갖추지 못해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을 가지 못한 한인 청년들도 얼마든지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는 결코 불행한 한인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돈이 없는 학생들이 다니는 2년제 칼리지도 아니었습니다. 명문 버지니아공대 4학년생인 사회적 엘리트였습니다. 인종차별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그건 그가 미국사회의 상층부까지 올라갔을 때의 이야기이고 적어도 당장의 그의 미래는 그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지 사회에 모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좀 더 큰 안목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더라면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 먹지 못해 굶어가는 모습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추어 보았더라면 그는 달리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안의 가능성보다는 자신의 한계만을 보았고 스스로를 편견의 감옥 안으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팔뚝에 Ishmael Ax(이스마엘의 도끼)라는 글자를 새겼습니다. 아브라함의 둘째부인 하갈에서 태어난 장자이면서 서자이기에 본부인 사라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나고 나서 부당하게 쫓겨남을 당했던 이스마엘과 자신을 동일시 여겼던 것입니다.

인간이 단지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면 허세욱님은 조승희와 같은 분노에 찬 죽음을 선택했어야만 했고 조승희는 허세욱님과 같이 지역사회를 섬기고 세상을 좀 더 밝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여러 단체에 참여하고 운동하며 일하는 봉사자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로 갔습니다. 이 사건만 두고 본다면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허세욱님을 본다면 인간은 오히려 의지의 동물이고 자기 운명을 책임지는 동물이라 단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지를 품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은 변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의지만 품는다면 120만원의 월급도 쪼개고 쪼개서 여러 단체에 기부할 수도 있고, 12시간의 중노동 속에서도 이웃을 위한 봉사나 여러 집회에 참석하면서 보다 정의롭고 보다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몸으로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숨 가쁘게 차를 몰아 하루 일당을 채워야 하는 운전 중에도 그는 손님들과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대화를 계속하였고, 경찰서에 붙잡혀간 시위자들이 풀려나기를 기다려 한밤중에 그들을 집에까지 데려다주는 선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남한 사회에 있어 교육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일류 대학에 자녀들을 보낼 수 있는가?입니다. 유치원을 선택할 때부터 외고입학과 일류대학 그리고 미국박사 이것이 강남에 사는 젊은 부모님들의 희망이자 꿈입니다. 이 희망과 꿈에 비춘다면 버지니아공대를 다니는 조승희의 부모님들은 강남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2주전까지도 그렇게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딸은 프린스톤 대학을 나왔고 아들은 버지니아공대 4학년을 다니고 있었으니... 그러나 지금 현실은 정반대의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앞으로 조승희의 살인사건에 관련하여 미국 교육계에서는 소수계 이민자들의 이중문화와 인종차별이 자주 언급될 것이고 종교계에서는 헐리웃이 만들어내는 폭력전쟁영화들과 컴퓨터의 폭력게임의 희생자로 자주 언급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무기 소유에 대한 논쟁도 또 다시 가열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조승희와 같은 실패자는 한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 빈익빈 부익부의 미국식 신자유/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었다는 사회책임론도 얘기될 것이고 여기에 장기간의 이라크 전쟁이 불러온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 상실도 그 원인으로 얘기될 것입니다.

그날, 조승희가 마치 이라크전투에 참여나 하는 듯이 군인 복장으로 대학교실에서 스승과 동료를 향해 100발의 총알을 난사한 그날, 지구 반대편 이라크 바그다드에서는 4곳에서 일어난 폭탄으로 인해 175명이 살해되었고 이 숫자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이후 지난 2년 동안 하루 최고의 사망자 숫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라크인 175명의 죽음의 기사는 조승희와 그가 죽인 미국인 32명의 숫자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진정 인류를 똑같이 사랑하는 신앙인이라면 그날 미국 버지니아에서 조승희를 포함한 33명의 가족들이 울부짖는 통곡 소리 뒤에 바그다드에서 더 크게 울리는 175명의 이라크 가족들의 울부짖음과 통곡소리를 들었어야 마땅했습니다.

[남겨진 교훈들]

저는 조승희의 사건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누고 쉽습니다. 첫째 분명 조승희의 경우 개인의 성품 혹은 정신질환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주 어린 을 때부터 너무 말이 없어 걱정거리였다고 할머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신장애가 선천적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승희 부모님 또한 이웃들이 말하기를 10년이나 같은 구역 내에 살아도 그들과 대화를 나눈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성품은 그의 부모님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바라기는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성적과 대학진학에만 관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성품과 인성 그리고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조승희의 아버님이 허세욱님과 같이 배운 것은 짧고 여유의 시간이 많지 않다하더라도 틈틈이 동네에 있는 기관을 찾아가서 자원 봉사하고 그리고 아들 조승희에게 그런 삶을 가르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 아버지가 세상이란 돈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이웃을 배려하도록 가르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심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없는 살림이지만, 조그마한 저축예금을 깨서라도 한 일주일 아들과 함께 인도와 같이 가난한 나라들을 함께 여행이라도 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지난 15년 동안 고국 땅 한번 밟지 못했으니 이런 생각은 꿈에라도 갖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과연 이런 여행이 사치에 불과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 자녀들과 더불어 가난한 제3국에 여행을 다녀오시는 일이 10개의 학원을 보내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저는 학원도 보내지 못했지만, 그러한 해외여행도 함께 하지 못한 후회가 많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40대의 부모님들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육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돈과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는 이미 늦습니다.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라고 말합니다. 200개의 넘는 나라 가운데 10위이면 엄청난 일 아닙니까? 자원이나 나라의 크기를 감안하면 1등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별로 만족이 없습니다. 더 많이! 이것이 우리의 구호입니다. 도대체 저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 많이 가져야 만족할 것인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더 많이! 라는 구호 아래 불평과 불만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인간상이 어떠하리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얼굴색은 달라도 피의 색깔은 같다.]

두 번째 조승희의 경우 분명히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다른 인종들로부터 영어발음을 잘 못한다고 놀림을 받은 것들이 분노로 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남한 땅에는 그런 인종차별이 없나요? 여러분은 흑인을 깜둥이로 부르고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들을 그 얼굴색과 한국어 발음 때문에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버지니아 공대 총기참사 사건의 가해자가 한인 재미교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각종 방송언론에서는 1주일 내내 대미관계에 이상이 생길까 한미 FTA에 악영향이 미칠까봐 전전긍긍이었습니다. 조문단을 구성해 대통령이 방미해야 한다느니, 주미대사는 미국한인교회에 릴레이 금식기도회를 해야 한다느니, 각 교단은 앞 다투어 추모기도회 일정을 잡고, 심지어 한국인 모두가 이 일에 책임이 있는 양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정서는 미국인이 미국에서 일으킨 총기난사 사건으로 한국이 자제 할 것을 당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달 전 여수 외국인보호소에서 화재가 나 무고한 이주노동자들이 불에 타 죽은 사건에 대해서 한국정부와 교회가 보여준 행태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납니다. 대통령은 버지니아 사건과 관련해 세 차례 씩이나 조의를 표했고,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까지 하는 극진한 예의를 보였으나, 자국에서 일어난 화재참사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조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법무부장관 면담까지 거부했습니다. 교회 또한 교단 차원에서의 추모예배는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 국민이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 근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얼굴색은 달라도 피의 색깔은 갖습니다.

지난주 MBC에서 방영한 PD수첩에서는 필리핀에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간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필리핀 여성들을 상대로 동거하다가 애를 낳으면 도망가 수많은 미혼모가 발생하여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고발했습니다. 주한미군 흑인들조차도 한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미국으로 데리고 갔는데, 우리는 미군만도 못한 만행을 지금도 필리핀에서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미국에 건너가 있는 200만 명의 한국교포들을 염려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700만 명의 교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와 있는 5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과 가난한 나라에서 시집 온 20만 명의 이주여성들에게도 차별 없는 동일한 마음으로 대할 때 우리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룸메이트의 증언에 따르면 조승희는 방안에 있을 때는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나 컴퓨터의 폭력게임들이 그의 정신에 악영향을 주었으리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루 평균 세 시간의 TV와 컴퓨터 화면에 노출되어 있는 어린아이들은 어떤 지적 판단을 갖기도 전에 수십만 번의 폭력과 섹스와 살인 장면을 보고 자라납니다. 이런 매스미디아의 영향에 대해 좀 더 깊게 고민하고 이를 바꿔가려는 교회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American Vertigo(미국의 현기증)]

조승희의 사건 밑바닥에는 총기소유를 허용하는 미국사회의 맹점이 있습니다. 2000년 한해만 하더라도 미국 안에서 3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총기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중 자살자가 1만 6천 5백명이고 살인사건 희생자가 1만 명, 단순 총기사고로 죽은 사람이 1276명입니다. 어린이 총기사망자수는 OECD 국가의 12배입니다. 물론 미국사람이고 해서 누구나가 다 총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총기소유를 허용하는 미국이 세계 최강의 부유한 나라라고 하는 것이 문제이고 남한은 이 미국이라는 나라와 어떻게 하면 자유무역을 통해 하나가 될 것인가? 하는 일에 매진한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2001년 911테러 3년 뒤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1년 가까이 미국 구석구석을 여행하였습니다. 그가 여행한 거리는 서울 부산을 3백번 왕복한 거리에 해당합니다. 이 여행에서 느끼고 본 것들을 책으로 출판했는데, 제목이 ‘어메리칸 버티고’(미국의 현기증). 여행 도중 레비는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위대한 서부의 총기류 쇼’라는 플랭카드를 내건 무기 전시회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배릿 82A1' 50구경 라이플의 훈련용 버전이 8천 달러에 팔리고 있는 사실을 목격합니다. (배릿은 대인 살상용을 넘어 장갑차를 잡는 특수부대용 무기) 그리고 이 총을 사는데 필요한 서류가 미국 시민권과 자동차 운전면허증뿐이라는 것을 알고 너무나 놀랍니다.

얼마 전에도 지적했지만 이제는 남한도 무기 수출국가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정태인선생을 통해 한미FTA에 대해 강연을 듣겠지만, 자유무역이라는 이름하에 자유경쟁을 하게 되면 힘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먹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이는 단순히 경제에 국한하지 않고 언어 문화 법 사회적 관습과 제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국민 의식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 또한 상식에 속하는 일입이다. 따라서 미국사회의 총기소유로 인한 사회와 정신적 폐단은 단지 미국인들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조승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8년 전에 일어난 컬럼바인 고교 총기사건을 다룬 영화 ‘볼링 퍼 컬럼바인’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이 고발하려 했던 것이 바로 미국사회에 내재된 공포와 공격의 악순환구조입니다. 양극화의 심화와 이에 따른 사회, 경제적 불안의 확대 그리고 사회복지시스템의 부재, 그 속에서 커지는 개인의 좌절, 그리고 그 고통의 마지막 병적 출구가 된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는 미국인들의 무기 소유에 대한 집착을 ’공포와의 병적 유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병적 유희가 다른 형태로 우리 남한 사회에도 번져갈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종교적인 관점에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유서에서 허세욱씨는 자기가 죽더라도 친구들 모두가 비정규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니 자기를 위해 어떠한 돈도 거두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유골은 미군기지에 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라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반면 조승희는 편지와 영상녹음을 통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고자 애를 썼고 신용카드에 큰 빚을 남겼습니다. 허세욱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지만, 조승희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생명을 죽일까 하여 총질을 시작하기 전 쇠줄로 건물 현관문을 걸어 잠궜습니다.

허세욱님 또한 분노 속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극단적인 길을 선택했지만, 그 가는 길에 끝을 통해 평화와 희생 그리고 사랑을 남겼지만, 조승희는 폭력과 미움과 저주를 남겼습니다. 똑같이 자살이라는 마지막 길을 선택했지만, 왜 이런 차이를 가져오는 것일까? 저는 그것을 용서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조승희는 마치 오늘 구약 예레미야 본문에서 유대백성들이 스스로 외쳤던 것처럼 ‘나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내가 무슨 천벌 받을 일을 했단 말인가?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소리를 들은 하느님은 ’죄 없다고 한 바로 그 때문에 이제 나는 너희를 벌하리라.’고 답합니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허세욱님은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 의인이었고 조승희는 자신을 의인으로 여긴 죄인이 되었습니다. 허세욱님은 마치 십자가상의 예수님과 같이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 하옵소서’라고 용서의 상태에서 자신을 헌신의 제물로 드렸지만 조승희는 자신의 죽음을 향한 결단을 예수에 비유하였지만, 이는 예수를 전연 잘못 이해한 것이고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용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과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단순한 심리적인 차이가 아니라 자기 운명의 고리를 깨뜨리는 허세욱님과 악마 앞에 굴복한 조승희라는 두 극단적인 인간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용서의 힘]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고 싶지만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용서는 과연 강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신앙의 행위인가요? 이제 읽어드리는 기도문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좋은 뜻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하지만 그들이 저희에게 준 고통만을 기억하지 마시고 그 고통으로 인해 저희들이 얻게 된 열매인 저희들의 우정과 충성심, 겸손함과 용기, 관대함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통해 성장한 저희들 마음의 위대함도 생각하소서. 그리하여 마지막 심판 날에 저희가 맺은 이 모든 열매들이 저희에게 고통을 준 그 사람들을 위한 용서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이 기도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여인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잘 알려진 독일의 라벤스부르크 처형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라벤스부르크 수용소는 쥐가 들끓고 혹한과 기아와 죽음의 공포가 짓눌렀던 악마의 소굴이었습니다. 라벤스부르크의 가스실에서 10만 명이 넘는 어린이와 여성이 처형당했습니다 악의와 중오, 어둠과 공포만이 판을 치는 이 절망의 땅에서 이런 용서의 기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놀랄 따름입니다.

이 기도문을 쓴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강한 여성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 벌벌 떨어야만 했던 가냘픈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 그는 부활의 소망과 그 순간에 자신에게 임하는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것이고, 경비병들의 포악함 속에서 인간의 죄 된 모습을 보았을 따름입니다. 용서는 위로부터 임하는 하느님의 은혜이자 선물이지 자기 안에서부터 나오는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고 그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을 때, 남을 용서하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지니아공대 추모의 장소에 누군가가 남겨놓았던 글귀를 기억합니다. ‘조승희 너는 우리를 쐈지만, 결코 승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를 용서하기 때문이다.’

[제 삼일의 회복]

예수님은 자신의 삶 속에서 권력자들에 의한 십자가의 죽음을 보았고 그리고 사흘 후에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 놓여 있는 중요한 신앙의 건널목을 용서라고 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 누구나 다 부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하지 못하는 자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단지 우리들이 이해하는대로 죽었던 몸이 재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과 함께 계속 살아가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부활은 하늘의 삶입니다. 용서받고 용서한 자로서의 거듭난 삶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성서가 증언하는 부활 예수의 모습은 개인적 사건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복음서는 부활한 예수를 체험한 제자들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단지 사실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부활이 제자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인 사회를 향해 오히려 해방과 구원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종교적 결단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갈릴래아 하느님 나라 운동의 지속이자 확산이었습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은 각기 독특한 자신들만의 시선으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 네 복음서가 갖는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때로부터 그들은 예수를 배우는 제자를 넘어서 예수를 전파하고 제자를 만들어가는 사도로 변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의 방관자가 아닌 주체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루가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 반전이 매우 극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자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그 가운데 엠마오가 고향인 두 제자도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가 너무나 아쉬었던 것입니다. 불과 일주일전 나귀를 타고 성전을 입성할 때의 백성들의 함성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맴돌고 있었고 채찍을 들어 성전의 장사치들을 쫓아내실 때의 그 단호한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힘없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현실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쉬움을 나누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어떤 나그네가 그들 가운데 함께 하여 얘기를 나누게 되고 그리고 해가 저물어 고향에 도착하여 떡을 나눌 때에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앞에 앉은 나그네가 바로 부활의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단지 머리나 마음의 깨달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성서는 증언합니다. 바로 그 순간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 그들은 그들의 발걸음을 되돌려 예루살렘으로 향해 갔다고 말입니다. 오랜만에 고향집에 돌아왔으니, 그리고 하루해가 이미 저물었으니 당연히 하루 쉬었다 아침에 길을 떠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날의 어둠을 뚫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갔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방금 전에 스승이 죽었던 그 실패의 장소를 향해, 죽음의 위협을 피해 나왔던 그 도시를 향해, 세 개의 십자가에 적셔 있는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들은 다시금 그 살해의 현장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왜요? 폭력과 죽임의 문화를 넘어 사랑과 살림의 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리고 어둠을 뚫고 밤새도록 걸어 골고다 언덕에 도달 했을 때 그들은 예수는 죽었다는 얘기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저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예수를 그들은 서로의 얼굴 속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 바라기는 여러분 또한 옆자리에 앉아 있는 형제 자매들의 얼굴 속에서 폭력과 죽임의 문화를 넘어서서 평화와 살림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제 삼일의 부활예수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