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

일어나 함께 가자-미리암의 노래 (구미정 목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6-01 21:46
조회
2990
2007년 5월 셋째 주일

일어나 함께 가자 - 미리암의 노래
본문 : 출 2:23-25, 3:7-10, 15:19-21)

구미정 (예수마실교회 담임목사, 기사연기획위원)


억눌린 자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유대교 사상가 에밀 파켄하임은 출애굽을 가리켜 ‘뿌리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이집트에서의 탈출,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경험이 된다는 뜻입니다. 구약신학자 폰 라트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줄기찬 신앙은 과거에 행해진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밝힙니다. 그에 의하면 창조신앙은 비교적 후대에 발전된 것으로, 보충적이고 이차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해방신앙은 창조신앙에 우선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도르테 죌레는 ‘태초에 해방이 있었다’는 명제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표상이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 해방행위에서 생겨났음을 확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상황 하에 해방의 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토록 확실하게 증거하는 이야기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자유와 해방임을 보여줍니다. 억눌린 사람에게는 억압자에 대항해서 자기 편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위의 성서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시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신음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약자의 하나님, 억눌린 자의 하나님, 억울하고 한 많은 백성들의 하나님이십니다. 로버트 브라운은 출애굽 이야기 속에 네 가지 중요한 줄기가 있다고 요약합니다. 첫째는 사회학적인 단계로서 인간들 사이의 계급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적인 단계로서 하나님이 그러한 계급 갈등과 투쟁을 아신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행동하는 단계로서 하나님이 투쟁하는 자들의 편에 계신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파트너쉽의 단계로서 하나님이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출 2:24-2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억압당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듣고 보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앎이 아니라, 참여적이고 투신적인 생생한 앎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가 철저하게 우리의 고난 현장임을 암시합니다. ‘듣고 보고 보살펴줄’ 만큼의 거리,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부당한 정치권력과 군사문화와 외세와 분단의 현실 한가운데서 고통 중에 신음하며 울부짖는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가슴을 쓸어주고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이 고달픈 압제의 연속이요 투쟁의 연속이라는 사회학적 사실은, 하나님이 그런 우리의 현실을 아신다는 신학적 선언과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작업입니다. 우리의 고난을 ‘듣고 보고 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주도하시는 해방 투쟁에 우리를 부르시고 참가하게 하십니다.

오직 모세? 출애굽의 또 다른 주역들
우리는 흔히 출애굽을 이끈,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적인 지도자로 모세를 꼽습니다. 많은 구약의 주석가들이 출애굽기 1-15장에서 나타나는 결정적인 사건들을 모세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모세라는 인물은 그 옆에서 대변인 역할을 하던 아론 외에도, 그의 그늘에 가려진 무수한 여성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우선 히브리 노예들이 낳은 남자 아이를 무조건 죽이라는 이집트 왕 바로의 명령에 대항하여 모세를 살린 히브리 산파들, 십보라와 부아(출 1:15-22)가 있습니다. 당시 바로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곧 신의 명령을 저버리는 것이고, 이는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모험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십보라와 부아는 생명을 탄생케 하고 살려내는 직업인으로서 차마 갓 태어난 목숨을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집트 왕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할 줄 알았던 경외심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 목숨을 걸고서 모세를 살리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 이야기의 서두는 단연 십보라와 부아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지자들’에 대한 언급에서 그들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일신상의 안일이나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민족의 어머니로서 목숨을 내걸고 민족의 앞날과 생명살림을 위해 사투를 감행한 그들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함으로써, 이 세상의 ‘죽음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의 지혜와 용기로 인해 목숨을 건진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의 정성으로 생명을 유지해 갑니다. 성서는 모세가 하도 잘 생겨서 남모르게 석 달을 길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출 2:2). 그런데 상상해 보십시오. 건강한 남자아기를 ‘남모르게’ 숨겨 기르는 일이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이었겠습니까? 이집트의 노예였던 요게벳이 젖 줄 시간도 없이 강제노역에 시달릴 때 미리암은 얼마나 종종대며 동생을 보살폈겠습니까? 행여 남들에게 들킬 새라 밤새도록 전전긍긍하며 아기를 돌보다 이른 아침에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해야 했던 요게벳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러한 어머니와 누이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모세는 석 달간 집에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집에다 아기를 숨겨둘 수 없”(출 2:3)을만큼 아기가 자라자 요게벳과 미리암은 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살리기 위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세는 생명의 은인으로 또 한 여성을 만나게 되니, 그가 바로 이집트 공주지요. 히브리 노예들이 낳은 남자 아기는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아버지에게서 그런 딸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가 모세를 살린 것은 단순한 자비나 동정심 그 이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결단은, 아무리 아버지의 명이라도 생명을 죽이라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인식, 그리고 아무리 노예의 목숨이라도 파리 목숨처럼 그렇게 간단히 전체주의의 횡포 아래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집트 공주가 모세를 데려다 기르기로 작정한 것은 가부장적 전체주의에 대한 항거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출애굽 사건을 다룰 때 놓쳐서는 안 될 여성이 모세의 아내 십보라입니다(출 2:16-2). 그는 모세가 이집트 왕궁생활 40년을 청산하고 동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채 미디안 광야로 피신했던 광야생활 40년 동안 모세를 지도자로 준비시킨 반려자입니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목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경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무리의 광야생활을 인도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임은 자명합니다. 왕자처럼 호화로운 신분에서 추락하여 광야의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 십보라의 역할이 지극히 컸으리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십보라는 모세의 광야생활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가르치고 돌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십보라의 헌신적인 원조가 궁극적으로 히브리 노예들을 광야로 이끌어내 해방 공동체로 규합한 모세의 지도력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이집트 군대에게 쫓기면서 좌절과 실망의 연속을 맛보며 광야생활을 시작한 모세에게 십보라가 없었다면 출애굽의 여정이 과연 순탄했을까요?
이와 같이 모세는 히브리 산파인 십보라와 부아, 어머니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 그리고 바로 공주와 아내 십보라가 있었기에 생명을 유지, 보전하며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연령과 계층과 신분을 달리한 여성들 간의 아름다운 연대가 한 생명을 살리고, 한 민족을 구하는 놀라운 해방의 역사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영웅이란 ‘드러난’ 주인공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역사가는 한 명의 영웅에 주목할지 모르나, 역사의 참된 주인은 ‘숨겨진’ 다수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 사건은 출애굽기 1, 2장에 등장하는 여인들처럼 이름없는 영웅들의 사심없는 연대로 말미암아 가능했던 일입니다. 인간의 생명존엄성이 무시되고, 주/종 관계로 인간을 차별화하는 거대한 가부장적 군사주의와 전체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리는 힘은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의 투쟁과 연합에서 나옵니다. 출애굽의 장엄한 서막은 바로 그런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이끈 여예언자 미리암
출애굽 사건에서 아무리 스포트라이트가 모세에게만 쏠린다고 해도, 아론과 미리암의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서는 특히 미리암에 관해,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억압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을 향해 가는 해방과정에 활동한 인물이되 ‘카리스마적인 민족의 영도자인 모세를 보조한 누이’ 정도로 간략히 묘사하고 넘어갑니다. 그래서 미리암에 대해 설교하는 경우라도, 기껏해야 그의 어린 시절의 영특했던 일화를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거나, 아니면 민수기 12장의 보도를 확대해석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지도자(모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이라는 식으로 왜곡 전달해온 것이 그간의 관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어린 마음에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온갖 지혜와 용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됨(출 2:4-8)이라든지, 미리암의 노래(출 15:20-21)가 암시하듯 홍해바다를 건너면서 혹은 건넌 이후의 그의 행적 등을 추적해보면, 오히려 모세의 보조자로서가 아니라 모세를 지도자로 준비시키고 이끌어낸 민중의 대표자요 예언자의 모범인 미리암을 만나게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그분의 역사적 개입을 깨닫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예언운동을 주도하며 그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개입을 드러내며, 그 의미를 민중들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예언자로서 미리암의 모습을 찾을 때, 우선 성서가 미리암을 예언자로 평가하고 있음을 봅니다(출 15:20).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갈대 바다의 노래(출 15:1-18)에서 미리암의 매김 노래(1절과 21절이 동일)를 선창으로 노래가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미리암의 노래(21절)가 앞의 갈대 바다 노래의 모태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같은 구약학자는 그 노래마저도 성서편집자들의 차별 대상이었다고 지적하면서, 편집자들은 “미리암의 입에서 나온 노래를 가로채고 이스라엘의 노래로 구성하여 말재주가 없는 모세에게 주어버렸다”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다윗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남편들을 아내들이 노래와 춤으로 반기는 풍습(삼상 18:6-7)이 있었고, 그 아내들 중에도 선창자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리암의 인도(선창)하에 감사 예배의식 같은 것을 거행했는데, 그것이 관례로 남아 하나의 전통이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미리암은 장대한 출애굽 사건의 중심에 서있는 승리의 지도자인 셈입니다. 트리블이 칭찬하는 대로, 그는 가부장제의 모든 권력(파라오/지배계층)을 소멸시킨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춤을 춘 최초의 여예언자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단지 한 두 줄에 불과한 미리암에 대한 미약한 정보만으로는 그가 어떻게 감히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행위를 앞장서서 찬양하는 예언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집트 왕궁에서 40년,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며 나름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등장할 훈련을 받는 동안, 고통받는 민중들과 더불어 해방의 꿈을 키우며 출애굽을 준비한 인물로서, 민중의 대표요 상징으로서 미리암을 재조명해본다면 어떤가요?
광야로 도망했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도 자신의 권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징표 세 가지를 확인한 다음에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지도자로 세움을 받았고), 그것도 모자라 ‘말 잘 하는’ 형 아론을 공동대표로 세운 다음에야 하나님의 명을 받들 수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미리암의 노래는, 민중들의 해방열기를 북돋우며 탈출을 위해 구체적인 준비를 해온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미리암이 받던 민중적 신뢰를 반영합니다. 승전가를 부르는 미리암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집단적 힘을 대표하는 인물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충실하게 따른 예언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모세와 아론, 미리암이 담당했던 역할을 굳이 구분하자면, 모세와 아론은 바로왕과 싸우면서 장로들을 설득하는 책임을 졌다고 하면, 미리암은 여자들과 아이들을 가르치고 준비시키는 지도자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미리암은 늘 밑바닥 공동체 안에 가장 고통이 심한 민중과 더불어 존재하면서 그들에게 해방의 힘과 존재의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을 것입니다.
출애굽 공동체에게 홍해는 불가능이자 가능이요, 절망이자 희망이었습니다. 겨우 이집트에서 도망쳐 나왔는가 싶었는데, 앞에 가로놓인 홍해는 또 다른 난관이요 장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억압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신 것처럼, 자연 역시도 눌린 자들의 편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기적은 하나님의 해방행위에 자연이 협력한 극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애굽 왕을 설득하기 위해서 자연변화를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생활을 무사히 견딜 수 있도록 자연을 통해 도움을 주셨습니다. 천지만물 우주의 운행조차도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와 해방을 갈구하는 백성의 갸륵한 바램에 조응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집트에서 확실히 벗어났음을 확인한 이스라엘은 이제까지의 해방과정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자연질서가 ‘협력하여 선을 이룬’ 것임을 깨닫고 감사에 겨워 춤추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부터, 아래서부터, 일찌감치 해방운동을 준비하고 이끌어온 미리암의 선창은 이스라엘 전체의 기쁨을 대변하며, 이제껏 억눌리기만 했던 이스라엘 민중 전체의 숨통을 트이는 환희의 절정이었습니다.

민중을 위해, 민중과 함께 한 민중의 대변자 미리암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민수기의 보도에 나와 있듯이,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것도 모세의 권위에 도전해서라기보다는 광야생활 중에 병든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하다가 그 역시 전염병이 옮은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광야생활의 어려움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의 고통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식생활과 위생 및 건강생활의 문제, 그리고 공동체 외부와의 싸움과 내부의 갈등관계 등이 그 어려움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미리암은 민중의 그런 궁색한 광야생활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돌보며 아픈 병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죽어가는 백성들과 함께 했기에 전염병(문둥병)에 감염되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점은 그가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몹쓸 병에 걸렸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예언자요 지도자요 치유자요 위로자로서 민중과 더불어 살다가 병이, 그것도 문둥병이 옮았을 때 하나님의 은총으로 7일 만에 깨끗이 나아 광야 진군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데 있다고 할 것입이다.
좀 다른 각도에서 출애굽한 해방공동체 내부의 갈등과 미리암의 질병을 연결지어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광야의 지난한 생활은 백성들의 불만을 낳았을 것입니다. 급기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의 불안심리를 잠재우려고 시도하기까지 합니다. 모세는 구스 여인과 결혼하여 스캔들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바야흐로 해방공동체의 총체적 위기상황입니다. 이러한 때 미리암이 모세를 비판했다면(그래서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전통적 해석은 접어두고), 그건 아마도 사적이고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해방공동체가 마침내 정착하게 되는 가나안 땅에 모세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다시 말해 평등공동체로 새출발하는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민족영웅의 독점권력에 종속되어선 안되겠다는 하나님의 큰 뜻, 강한 의지를 헤아려보면, 미리암은 아마 모세의 내면에 심각하게 자리잡기 시작한, 하나님의 계시를 독점하고 획일적인 지도력을 수립하려는 가부장적 야망에 쐐기를 박으려고 비판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올곧은 예언자로서의 미리암이 새롭게 조명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모세를 비판함으로써, 모세와 아론 사이에 감돌던 분열의 조짐을 잠재웠을 뿐만 아니라, 지도층과 민중 사이의 불화를 일소시키는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감당하였을 것입이다. 따라서 모세의 권위를 두둔하는 하나님의 편애(민 12:8)는 후대의 첨가로 보는 것이 편집사적으로 올바른 이해가 되겠습니다.

오늘날 미리암은 누구인가?
우리는 출애굽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세 명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의 역학관계를 통해, 또한 여성신학적 해석에 힘입어, 이스라엘의 영웅적 지도자 모세의 보조자가 아닌,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해방의 열기를 불어놓고, 모세가 지도자가 되기까지 이끌어낸 예언자로서의 미리암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해보았습니다. 이 미리암은 홍해 사건을 통해 억눌린 자들의 신음소리에 화답하시는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지를 확인하고, 평등공동체를 세우려는 강인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미리암의 노래는 민중의 승전가였으며, 미리암의 비판은 민중의 집단적 비판이었습니다. 그는, 이 연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기까지, 아니 홍해를 건넌 후에도 그 모진 광야생활을 견뎌내도록 쉼 없이 백성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격려하고 화해시키고 치유하고 돌본 민중의 어머니, 해방의 누이였습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 분단의 아픈 상처가 각인되어 있는 이 계절에 누가 나서서 미리암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 땅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해방이 넘실대는 그 날까지 함께 가자고 등 떠밀며 손 내미는 어머니와 누이의 역할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제 몸을 화해의 제물로 내어놓기까지 분열과 압제와 폭력의 한 가운데로 담대히 걸어갈 미리암은 어디에 있을까요?
침묵 가운데 조용히 우리 각자에게 미리암이 되라고 말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구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