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연리포트 11호)일본의 역사·사회 교과서 속에 그려진 한국

 

홍 이 표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 일본 선교사)

 

  1. 들어가며.

2018-2019년은 한일 관계에 특기할 만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노동자의 개인 청구권 소송이 승소로 결정되자, 이듬해(2019) 4월 12일, WTO에서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관련 재판의 한국 측 승소, 그에 이은 7월 1일 아베 정권의 수출 규제 발표와 8월 2일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또 다시 맞불을 놓은 한국 국민의 불매운동, 그리고 8월 22일 한국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종료 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으며, 양국 매스컴의 편향된 보도는 양국 국민의 오해와 편견, 감정적 적개심을 자극하고 있다. 한국 시민들은 불매운동을 전개하면서 처음에는 ‘노 저팬’(No Japan)이라는 구호를 사용했지만, 이후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과의 연대 협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노 아베’(No Abe)로 구호를 바꾸어 맹목적인 ‘반일 운동’이 아니라, 아베 정권의 그릇된 정책 방향을 규탄하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에 비해 일본의 매스컴은 우익 인사들을 대거 출연시키며 일본 국민들의 혐한(嫌韓), 단한(斷韓)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한국의 독립과 일본의 퇴거 이후, 70년 이상 한일 무역 수지는 일본이 늘 흑자를 유지해 왔다. 이는 과거 정치적 식민지가 해방 이후에는 경제적 식민지로서의 종속적 관계가 이어져 왔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최근 10년 동안 한국 기업들의 괄목할만한 성장, 특히 전자 및 반도체 분야의 추월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1인당 국민소득도 일본과의 격차가 상당히 좁혀져 장기 불황에 빠진 채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 보수 정권은 한국 경제에 타격을 안겨 그 성장세를 꺾어 보겠다는 심산이다. 스포츠는 물론 문화적 측면에서도 한류 붐을 중심으로 일본을 압도하는 현상은 그러한 집단 심리를 더욱 자극했을지 모른다. 한국은 늘 정치경제적인 일본의 하부 구조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식이 어리석은 외교정책으로 비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군 위안부나 징용공 노동자 문제에 대한 설문을 보면, 반수 가까운 일본 국민은 나름대로 양심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 무역 규제에 대해서는 81%의 일본 국민이 아베 정부의 조치에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7월 13일 분슌(文春) 온라인 설문조사, 반대는 18.7%, 7월 15일 아시히신문 여론조사는 찬성이 56%, 반대가 21%) 일본 경제산업성이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려는 조치에 대한 조사에서는 심지어 98%의 찬성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물론 이것은 일반 여론조사가 아닌 자체 조사) 이러한 의식의 기저에는 앞서 말한, 일본이 늘 한국에 비해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강박이 존재한다. 따라서 바짝 치고 올라온 한국의 경제적, 문화적 성장은 그러한 무의식적인 긴장감을 극대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국민 의식은 어린 시절부터 배우는 역사 및 사회 교과서 등의 한국에 대한 학습이 그 바탕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이 교과서 속에서 접하는 한국에 과한 내용과 첫인상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때마침 지난 2019년 4월 12일, 시민단체인 한국환경재단과 일본의 피스보트(Peace Boat)가 양국 국민 550명씩을 초대해 ‘한일 역사 교과서 비교 모임’을 열었다. ‘피스&그린보트’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정이 세워졌던 중국 상하이와 원폭 투하지역인 일본 나가사키, 그리고 4.3의 비극이 서린 땅 제주도를 연이어 방문하는 일정 가운데 하나로 크루즈 선상에서 이루어진 토론회였다. 이 행사를 주도한 영화감독 야마다 에이지(山田英治) 씨는 ‘한일 교과서 비교모임’을 주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과 일본 시민은 서로 다른 교과서로 배우기 때문에 역사 인식이 다릅니다. (…) 일본에서는 3·1운동 등 식민지 국가의 저항 운동을 가볍게 다룬 교과서를 많이들 채택해 가르칩니다. (…) 일본 교과서들은 근대사 부분을 아주 짧게 다루는데요. (…) 한국의 교과서는 고통을 겪은 역사적 사실을 자세하게 알리고 있지만, 일본 교과서는 조선 고유의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지키려는 인물을 소개하는 등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 일본은 마치 자신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것처럼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일본에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지 않나요. 일본은 이런 사실을 미화하고 있습니다.”[1]

한국과 일본의 상이한 교과서를 읽어 보면서 행사에 참가한 양국 시민과 학생들은 일본 교과서가 일제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의도적으로 은폐되고 있음을 아쉬워했다. 한 일본인 참가자는 “일본이 전쟁 이후로 많이 변화했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일부가 정치권력을 잡아서 이렇게 엉망이 됐다. 이대로 간다면 계속 오해하고, 서로 인식의 차이가 벌어질 것”이라면서 역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한일 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보았다. 수년 전 한국 사회에서도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던 정부 당국이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던 사건이 있었다. 일부 정치세력의 집권 시, 그 퇴행적 정책의 하나로서 ‘교과서’는 손쉽게 악용된다. 어린 학생들의 뇌리 속에 그릇된 역사관을 주입함으로써, 손쉽게 왜곡된 인식과 편견의 노예가 되도록 이끄는 우민화(愚民化)를 획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역사 및 사회 교과서에서 한국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왜 일본에서는 혐한 헤이트 스피치 운동이 끊이지 않으며, 일본 국민의 다수는 지난 무역 규제에도 찬성할 만큼 한국에 대한 멸시나 무시의 정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교과서 속의 한국은 어떻게 서술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 해답의 한 단초를 제공해 줄 것이다.

  1. 일본의 역사・사회 교과서 왜곡 과정: 우경화 흐름 속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 운동

일본 정부가 역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한국에 대한 서술을 왜곡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4월부터 배포될 일본의 초중고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한국의 고대, 근대, 현대사 내용이 왜곡되어 서술된 것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특히 근현대사 쪽에서 왜곡이 두드러졌다. 그 전까지는 없었던 조치로서 3.1 독립 운동을 ‘폭동’으로 서술하도록 수정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징용징병 등 강제 동원의 인원수를 삭제하거나 축소토록 지시했다. 82년 이전까지는 ‘침략’(侵略)으로 표현되던 한국강제병합이나 중일전쟁 등에 대해서도 가치중립적인 표현인 ‘진출’(進出)로 바꾸게 하였으며, 외교권을 박탁한 을사늑약에 이은 각종 내정 장악(경찰권, 행정권, 사법권, 군통수권 등)에 대해서도 ‘접수’(接收)로, 토지 수탈은 ‘토지소유권 확인’ 등으로,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에 대한 탄압도 ‘치안유지 도모’와 같은 미화된 표현으로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어말살정책을 “조선어와 일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식으로 왜곡해 서술했고, 1930년대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도 ‘신사참배장려’ 등의 부드러운 표현으로 서술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중요한 역사 갈등의 요소로 등장한 것은 1982년의 교과서 파동이었다. 1982년 검정 당시 일본 문부성은 검정 전에는 중 · 일 전쟁에 대하여는 ‘침략’을 ‘진출’ 또는 ‘침공’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중국과 한국 정부 및 시민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그 결과 한국 언론은 물론 일본 매스컴에서조차 일본 정부의 조치를 비판하며 시정을 촉국했다. 하지만 일본 관료들은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오류가 있는 것 같다”라면서 갈등을 부추겼다. 이에 격분한 한국 쪽의 반일운동은 거세졌고, 관망하던 한국 정부도 일본의 교과서 왜곡의 시정을 요구하며 한일 경제협력회담도 취소했다. 결국 1982년 8월 26일에 곤란해진 일본 정부는 시정하겠다는 각서를 한국 측에 전달했다. 이윽고 곤란해진 일본 정부의 관방장관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는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이웃 여러 나라들과 우호, 친선을 진행하는 가운데 있으므로, 이들(중국, 한국)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정부의 책임으로 시정한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어 11월 24일에는 오가와 헤이지(小川平二) 문부대신이 보완조치로서 개정된 ‘교과서 검정기준’, 즉 ‘근린 제국 조항’을 발표하여 일단 봉합되는 듯 하였다. 하지만 한국이나 중국 측이 수긍할만한 적극적인 시정 조치가 이어지지 않아 신경전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본 교과서 서술의 퇴행적 현상의 배후에는, 1981년에 보수 우파 인사들이 결성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있다. 이들은 “자위대법 개정 운동과 교과서 편찬 사업 등에 주력함으로써, 헌법 개정의 사상적 조류를 형성해 가려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수정주의적 교과서의 편찬 의지를 천명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앞서 소개한 1982년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던 것이며, 1986년에는 이 단체가 중심이 되어 고교 일본사 교과서인 『신편 일본사』를 편집, 발행하였다. 이 때 또 다시 한국과 중국 등이 반발하자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총리가 직접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문부대신에게 수정을 지시하여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30항목, 80여 개소를 수정토록 조치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일 양국의 학계나 시민사회는 교과서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일본 정부의 의도가 좌절된 데 대해 보수 우익 세력의 반발도 거세졌다. 후지오카 노부카스(藤岡信勝)라는 자유주의사관의 대표적 인사는, 1996년 검정 과정을 강하게 비판하며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서술 등에 대해서는 “정정의 신청을 권고해 달라”는 공개서한을 띄우기도 했다. 이후 그는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등과 함께 ‘새역모’(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발족시켰다. 이 모임은 기존 교과서가 자학사관(自虐史觀)의 산물이라 비난하며 그것을 극복한 ‘영광스러운 일본’을 부각시킨 교과서의 집필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물로서 2001년 후소샤(扶桑社)가 발행한 중학교용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였다. 이 교과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리한 이항 대립적 비약적 서술 경향을 보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자행한 침략 행위를 부정하면서, 조선을 식민지화 한 것도 중국의 불법과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그것을 막아 준 것으로 서술하였다. 대동아 전쟁도 자위전쟁(自衛戰爭)이자  아시아 해방전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문명국으로서의 일본과 열등한 주변 아시아국을 대비시키는 아시아 멸시관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러한 책이 실제로 일본의 학생들이 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과 중국 등의 반발이 다시 거세졌고, 일본 국내에서도 논쟁이 일어났다.

1980-90년대에는 교과서 문제에 적극 관여해 오던 일본 정부(문부과학성)였지만, 2000년대가 되자 태도를 크게 바꾸어 되는 태도를 크게 바꾸어, ‘집필자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정부가 침해할 수 없으며, ‘근린 제국 조항’에 입각하여 검정한 교과서임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도 비판하였지만, 한국의 시민들은 ‘일본 역사 교과서 바로잡기 운동 본부’를 설립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및 채택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역모의 교과서는 2005년, 2008년, 2011년 연속하여 검정을 통과하였고 점유율도 확대되어 갔다. 이처럼 곪아가던 교과서 문제는 한일 갈등의 단골 메뉴가 되었고,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교과서에 게재하는 문제가 등장하면서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다. 2012년에는 일본 고교 사회과 교과서 85종 중 총 39종에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실리게 되었고, 2013년 3월부터는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의 독도 기술 비율이 계속 증가해 갔다.

 

 

  1. 일본의 역사・사회 교과서 속에 묘사된 한국

  (1) 일본에 대한 한반도 영향력의 은폐・축소: 고대, 중세, 근세를 중심으로

그러면 일본의 역사 및 사회 교과서에 서술된 한국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수년 전 발간된 김종성의 책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2015)[2]는 일본의 교과서가 한국에 대한 어떤 중요한 부분을 은폐하고 가르치지 않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물론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교과서가 각각 자국과 한국에 대해 어떤 내용을 누락시키고 있는지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내용은 ‘제3장 일본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일본 역사’에서 (1) 한반도에서 문명을 전수받은 고대 일본, (2) 일본 신국 건설과 백제 유민, (3) 쇼군은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4)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환대한 이유, (5) 일본 경제 도약의 밑거름이 된 임진왜란, (6) 오키나와는 1879년까지 독립왕국이었다, (7) 20세기 초 일본 근대화의 비밀, (8) 정당방위로 포장된 일본의 침략 전쟁 등으로 정리돼 있다.

이 가운데, (1) 한반도 불교(문명) 전래사, (2) 백제 도래인 관련, (4) 조선통신사, (5) 임진왜란, (8) 주변국 침략 전쟁 등 다섯 가지 주제는 한국과 관련된 것이다. 앞의 세 가지는 고대 및 중세의 일본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한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은폐시키는 서술방식이며, 뒤의 두 가지는 일본이 자행한 이웃 국가 한국에 대한 침략 행위의 부당성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일본 교과서가 누락시켜 숨기고자 하는 역사적 열등감의 폐부를 지적하고 있다.

“야마대국의 성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외부 세력은 에가미 나미오가 인정한 것처럼 천손족으로, 규슈 바로 옆의 한반도와 만주에 자리 잡은 부여나 고구려와 관계있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 교과서에서는 한반도나 만주가 아닌 중국 내륙이 일본에 영향을 미친 부분만 소개하고 있다. 물론 중국이 야마대국의 성립 과정에 미친 영향도 있겠지만, 보다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한반도와 만주였다.”[3]

“일본 입장에서는, 한민족의 도움으로 중국과 교류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한민족과 무턱대고 전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한민족과의 교류에 그냥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타고 한반도에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한민족에게 의존하는 나라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4]

이처럼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대륙과의 역사적 관련성은 최소화하면서 자국의 역사적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반도와 관련된 사실은 유난히 숨기려는 경향을 보인다. 할 수 없이 한반도 등 외부세계로부터의 영향을 서술해야 할 때는, 대륙의 영향으로만 축소하여 막연하게 서술하고 마무리 짓는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후쇼샤(扶桑社)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신일본 교과서』의 고대사 왜곡을 들 수 있다. 이 교과서는 고대사부터 이미 일본중심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위성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임나(任那)라는 논쟁적 용어를 교과서의 소제목에 과감히 사용하였고, 한반도에서 건너 온 도래인도 ‘귀화인’(歸化人)이라는 근대적 용어로 치환해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쪽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본 불교의 한반도 전래사(傳來史)지만, 이 교과서에서는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화보 가운데 호류지(법륭사)의 백제관음상을 설명하면서도 “아스카 문화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녹나무는 중국, 조선에서 자생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만들어졌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녹나무는 중국과 한국의 남해안 및 제주도 등에도 서식하는 수종이며, 불상의 ‘이름’부터가 6세기 아스카 시대에 열도로 건너간 백제 도래인과의 관련성을 입증하고 있으나, 애써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며 일본의 독자성을 강조하려고 왜곡된 서술을 감행하였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탑인 호류지(법륭사) 오중탑도 백제 목탑의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그 관련성을 학계는 통설로서 인정하고 있지만, 일본의 후소샤 교과서는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다”고 기술하였다. 호류지를 건립한 성덕태자에 대한 백제와의 관련성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 등, “조화롭고 아름다운 5층탑이나 금당은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독특한 배치”임을 내세우며 일본 고유의 전통 문화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 전래사를 포괄적으로 서술할 때도 “불교는 나라의 보호를 받아 발전하였다. 인도나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의 이론을 연구하고 (…)”라고만 설명하여 한반도 전래설은 전혀 소개하지 않고 있다.

김종성의 책 이외에도 ‘한국역사교과서연구회’가 펴낸 『역사교과서 속의 한국과 일본』(혜안, 2000)이라는 책도 일본의 교과서 속 한국의 모습을 살피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책은 제1부 총론, 제2부 선사, 제3부 고대, 제4부 중세, 제5부 근세, 제6부 근대, 제7부 현대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2부 선사시대부터 제5부 근세까지의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살펴본 고대, 중세 등의 한반도 역사 은폐의 사례들은 이 책에서 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제2부 「선사」

한국의 한·일 선사문화 연구와 교과서 서술 / 일본 역사교과서의 원시일한관계사 기술

제3부 「고대」

한국학계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동향 – 임나문제를 중심으로 / 한국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고대 한일관계사 서술 / 일본의 고대일한관계사 연구동향 / 일본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의 고대일한관계사

제4부 「중세」

한국의 고려·일본관계사 연구동향  / 한국 고교생의 중세한일관계사 이해 / 일본의 중세일한관계사 연구동향 / 일본 역사교과서의 중세일한관계사 서술

제5부 「근세」

한국의 근세 한일관계사 연구동향 – 통신사행을 중심으로 / 한국 역사교과서의 근세한일관계사 서술 / 일본의 근세일한관계 연구동향 / 일본 역사교과서의 근세일한관계 서술 – 한국 교과서와의 비교

중․근세사에서는 우선 왜구의 구성원과 관련하여 각 교과서들 간에 차이가 존재하였다. 扶桑社를 포함한 총 4종의 교과서(大阪書籍, 帝國書院, 淸水書院)가 왜구에는 일본인 이외에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었다. 조선의 국호와 관련해서는 중세의 ‘조선’을 ‘조선’이라 칭하지 않고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 칭한 교과서가 존재하였다(日本文敎出版, 扶桑社). 임진왜란에서는 敎育出版, 淸水書院의 교과서가 침략의 명분을 당시의 조선에서 찾으려 하는 서술행태를 보이고 있었으며 日本文敎出版, 扶桑社는 임진․정유왜란을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으로서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조선통신사 항목에서는 淸水書院을 제외한 모든 교과서가 조선통신사를 막부 쇼군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 사절로서 묘사하고 있었다. 이렇듯 중․근세사 부분에서는 각 교과서들 간에 서술상의 차이가 존재할 뿐 어느 특정 교과서만이 한국관련 내용을 편향된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2) 근・현대사에서의 쟁점들에 대한 서술 경향

이러한 근대화 이전 시기에 대한 일본의 콤플렉스는 한반도로부터 문화를 수용하던 역사를 은폐 누락시키는 서술 경향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메이지유신의 근대화 이후에 형성된 일본의 ‘우월의식’은 뿌리 깊은 에도 시대까지의 ‘열등의식’의 또 다른 얼굴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근대화 혹은 문명화를 달성했다는 자만심을 갖자마자 한국, 대만, 중국 등의 이웃 나라를 ‘야만’과 ‘미개’로 멸시하기 시작했고, 무자비한 침략 전쟁은 그러한 전근대성을 계몽하기 위한 불가피성으로 정당화하고 미화했다. 근대화 이후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를 합리화 하면서, 그것은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자 동양 세계를 그들로부터 보호하긴 위한 ‘의전’(義戰)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전쟁’이 지닌 ‘야만성’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오류에 불과하며, 그것을 오늘날에도 일본의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모순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재정은 논문 「일본사 교과서에 기술된 식민지지배와 민족운동: 2007년도 검정 합격본의 경우」(2008)에서, “한국인의 민족운동과 이에 대한 일본인의 대응이라는 부분이 아주 소략하게 다뤄지고 있다”면서 “일본사 교과서는 3·1운동에 대해서만 기술할 뿐, 다른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5]고 분석하고 있다. 무단통치, 3.1운동, 간토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등이 어떻게 소개되는지 살펴본 이 논문은 한국에 대한 내용이 축소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근대사 부분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것은 대부분 ‘침략 전쟁’(청일, 러일), ‘식민지화’(한국병합), ‘독립운동’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되므로, 2000년대 이후 조금씩 분량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후소샤(扶桑社) 교과서를 중심으로 전쟁 당시의 일본군 승리를 예찬하는 등의 노골적인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공통된 것이기도 하지만 전쟁의 원인이 일본에 있지 않으며, 상대국이나 전쟁터가 된 조선 등의 약소국이 자초한 측면이 있음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일본의 이미지에 불리한 타격을 줄만한 내용은 가급적 교과서에 소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 정신대 및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도 대표적인 교과서 8종 가운데 4종의 교과서(帝國書院, 敎育出版, 日本書籍新社, 淸水書院)에서만 한 줄 정도로 간략히 언급하고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가 군부대 내에서 성노예로서 착취당한 사실을 명백히 인정한 교과서는 한 권도 없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조선에게 이득이 되었다는 서술은 교육출판(敎育出版)과 훗샤(扶桑社) 등 일부 교과서가 노골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교육출판(敎育出版)이나 일본서적신사(日本書籍新社), 시미즈서원(淸水書院) 등의 교과서는 서구 열강 틈에서 어리둥절해 하는 조선의 모습을 비웃는 풍자화를 게재해 당시 조선의 우매함을 꼬집는 듯한 편집을 시도하고 있다.

앞에서도 소개한 ‘한국역사교과서연구회’가 펴낸 『역사교과서 속의 한국과 일본』(혜안, 2000)이라는 책도 제6부 근대, 제7부 현대의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 침략의 미화와 독립운동 폄훼의 사례들은 이 책에서 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제6부 「근대」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사 연구동향 / 한국 중학교 국사교과서의 근대 한일관계사 서술과 수업 – 1860년대에서 1910년까지를 중심으로 / 한국 고등학생이 본 역사교과서의 일제지배정책사 서술/ 일본 학계의 ‘조선황민화정책’ 연구동향 / 일본 역사교과서의 근대일한관계사 기술 / 한국의 역사교육 사례 : 태평양전쟁과 조선인 희생자 문제 / 일본의 역사교육 사례 : 19세기 후반 일본인의 아시아관

제7부 「현대」

한국의 ‘재일 한인사’ 연구동향과 교과서 서술 / 한일 간의 ‘과거사’ 처리와 한국의 역사교과서 서술 – 1965년의 한일조약을 중심으로 – / 한국의 식민지시기 ‘전시노무동원’에 대한 연구동향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한국인의 인식 / 일본의 현대 일한관계사 서술

  (3) 한반도 침략 전쟁 미화와 강제병합의 정당화 

    : 청일러일전쟁과 한국 식민지화에 대한 서술 경향 

일본 우익 세력이 관여된 ‘새역모’가 주도해 편집한 후소샤(扶桑社) 역사 교과서는 앞서 살펴 본대로 한국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매우 노골적이다. 그에 비해 초등학생이 처음 접하는 사회 교과서의 일반적인 서술 경향을 고찰함으로써 평균적인 일본 교과서 속의 한국 이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일본에서도 가장 채택률이 높다고 알려진 소학교 사회과 교과서 3종(도쿄서적(東京書籍)의 『새로운 사회』 (新しい社會), 교육출판 및 일본문교출판 발행의 『소학사회』 (小學社會))의 ‘청일, 러일전쟁 시기와 한국강제병합 시기와 독립운동’ 등의 내용을 검토하려 한다.

일본의 초등학생들이 세계의 역사를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 소학교 사회과 교과서이다. 이러한 사회과 교과서에 대해 문부성이 발행한 『학습지도요령』(2008)에서 한반도와 대만, 중국대륙 침략의 시작점이기도 했던 ‘청일, 러일전쟁’에 대해서 “일본제국헌법의 발포, 일청∙일러전쟁, 조약개정(條約改正), 과학의 발전 등에 대해 조사하고 우리나라(일본)의 국력이 충실하고 국제적 지위가 향상된 것을 아는 것”[6]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당시 서구 열강과 일본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하나의 사례로서 청일 및 러일전쟁을 제시한 것이다. 기존 거대 열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 결과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이 높아진 사례로서 특히 백인국가인 러일전쟁의 승리를 강조한 것이다.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는 ‘일청, 일러전쟁’에 과한 조사의 예로서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일청, 일러전쟁」에 관해 조사하는 것은, 예를 들면, 일청전쟁의 가화조약 체결에 큰 공가가 있는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나 강화조약 체결에 큰 공로가 있는 고무라 쥬타로(小村寿太郎)의 공로 등을 조사하여, 우리나라(일본)가 냉엄한 국제환경에 놓여 있던 상황에서, 이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강화조약을 체결한 것에 의해,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다. 또 이들 전쟁에서 조선반도 및 중국 사람들에게 많은 손해를 준 것을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7]

이처럼 일본의 국익만을 앞세우며 이웃국가에 심대한 피해를 야기한 인물들을 강조하는 것은, 청일∙러일전쟁 등이 자국의 안전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인식시킬 위험성이 있다. 물론 말미에 인접 국가에 대한 손해의 언급이 조금 언급된다. 가장 채택률이 높은 『新しい社會6上』(東京書籍株式會社, 2014)의 러일전쟁 단원 구성을 보면 실제 학생들이 접하는 내용의 방향과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1-11. 세계에 걸음을 내딛은 일본

(1) 발전해 가는 일본 (114-115)

(2) 조약개정을 목표로 (116-117)

(3) 중국, 러시아와 싸우다 (118-119)

(4) 조선의 식민지화와 세계로 진출한 일본 (120-121)

(5) 생활 및 사회의 변화

교과서에는 한 프랑스인이 조롱하듯 그린 만평을 게재했는데, ‘일본, 러시아, 중국 삼국이 조선을 둘러싸고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읽고 이해해 봅시다’라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으로서의 당시 국제 정세를 바라보며 여러 생각을 하게 유도한다. 이후 청일전쟁에 비해 러일전쟁 때의 전사자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데, 그 만큼 자국 청년들의 희생이 컸음을 인식시키는 효과가 있다.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싸움’이라는 삽화에는, ‘여순 전쟁에서 일본군을 이끌었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나, 일본해(한국의 동해)에서의 전쟁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도고 헤이하치로 등의 군인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교과서 본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메이지 초기에 조선과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고 세력을 넓혀가려 했다. 조선에서는 중국(청)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일본과 청은 대립이 깊어 갔다. 1894년 조선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일본과 청은 각자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 양국 사이에서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거기다 대만 등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항하여 중국 동북부(만주)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러시아는 일본의 움직임에 간섭을 하고, 일본은 일청전쟁에서 손에 넣었던 영토의 일부를 청에 돌려주게 되었다. 러시아는 또 만주에 군대를 보내, 조선에서도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은 깊어져 갔고, 1904년에 일러 전쟁이 시작되어 일본은 만주와 러시아군을 공격했다. 일본은 많은 전사자를 냈으면서도, 일본해에서의 전쟁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했던 도고 헤이하치로 군대의 활약으로 전쟁에서 이겼다. 그 결과 강화 회담에서 카라후토(樺太, 사할린의 남부)와 만주의 철도 등을 얻고, 한국을 일본의 세력 아래 두는 것을 러시아에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전쟁의 비용 부담 등에서 괴로워 한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남았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한 일본의 승리는 구미제국(歐美諸國)으로부터 일본이 그 힘을 인정받고, 구미의 지배에서 고통 받는 아시아 나라들에게 용기를 북돋웠다. 반면에 일본인 사이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얕잡아 보는 태도가 점점 확대되었다.”[8]

여기서 한국에 대한 첫 번 째 부정적 표현이 등장한다. 즉,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내란’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해 폄하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일전쟁 촉발 원인이 마치 조선 내부의 불순세력에 의한 소요였던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을 학살로서 진압한 일본군의 무자비한 침략행위를 교묘히 가리는 서술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강화회담에서 철도를 얻고, “한국을 일본의 세력 아래 두는 것을 러시아에게 인정받았다”라는 표현은 한국 독자들에게 매우 거슬릴 것이다. 한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전혀 관계없는 주변 열강 러시아로부터 승인받음으로써 정당화 된다는 것을 학생들 의식 속에 주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침략성은 은폐되고 절차를 거친 합법적 통치로서 교묘히 포장하는 서술이 아닐 수 없다. ‘대동아공영권’ 적인 서구 백인 사회로부터의 아시아 해방이라는 관점이 은근슬쩍 스며들어 있는 서술 양태이다. 가볍게 넘길 수도 있지만 분명 위험한 측면이 있다.

‘조선인과 중국인을 얕잡아보는 태도가 생겼다’는 마지막 서술은 마치 일본인의 부정적 측면을 반성적으로 서술한 듯 보이지만,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로 극심한 피해를 본 인접 국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기엔 부족한 표현에 머물고 있다.

이어서 러일전쟁 승리 직후 진행된 을사늑약(1905)과 한국강제병합(1910)에 대해서는 ‘조선의 식민지화와 세계로 진출한 일본’이라는 주제를 통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동경서적주식회사, 2014, 120)

“일러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10년에 사람들의 저항을 군대로 제압해, 조선을 병합했다. 식민지가 된 조선의 학교에서는 일본어교육을 하고, 조선역사를 가르치지 않아 조선 사람들의 긍지가 심하게 상처받게 되었다. 그리고 토지제도가 바뀌어 많은 조선 사람들은 토지를 잃고 일본인인 새로운 지주의 소작인이 되었거나, 일을 구하러 일본 등에 이주하거나 하였다. 이런 상황에 반대하여 조선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끈질기고 강하게 이어갔다. 또한 1911년에는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가 조약개정에 성공해, 면세 자주권이 회복되었다. 이로 인해 불평등조약을 개정한 일본은 구미제국과 동등한 관계를 쌓기에 이르렀다.”[9]

한국병합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물인 것처럼 서술돼 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토지수탈에 대해서도 ‘토지제도가 바뀌어’라는 표현으로 적법한 절차적 변화인 것처럼 설명하고 잇으며, 고무라의 조약개정을 언급함으로써, 구미제국으로부터의 승인 절차가 완료된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이는 ‘야만적’ 침략행위를 ‘문명적’ 절차에 의해 이뤄진 것처럼 묘사하는 기만적 서술 양태가 아닐 수 없다.

『小學社會6上』(敎育出版株式會社, 2014)라는 교과서는 같은 시기에 대하여 “1-9. 근대 국가를 향하여, (1) 로르만톤호 사건과 조약개정 (106-107), (2) 일청, 일러전쟁 (108-109), (3) 일러전쟁 후의 일본과 세계 (110-111), (4) 산업의 발달과 생활의 향상 (112-113), (5) 사회 참의 권리를 요구 (114)”와 같은 목차로서 다루고 있다. 위와 같은 시기의 서술을 비교해서 읽어 보자.

“19세기 말에 일본은 조선에 불평등한 조약을 맺게 하고, 세력을 넓혀 가려고 했다. 이를 위해 조선에서의 지배를 강화하고자 했던 중국(청)과의 대립이 심해져갔다. 1894년 조선에서 국내 개혁과 외국세력의 퇴출을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청이 조선 정부의 요구에 응해 원군을 보내자, 일본도 그것에 대항하여 출병해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청에 승리하고, 대만이나 요동반도를 영토로 하는 것 외에, 많은 금액의 배상금을 얻었다. 또 청에게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조선에 세력을 넓혀갔다. (…) 일본 국내에서는 만주에서 세력을 넓힌 러시아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져, 러시아와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강해져 갔다. 결국 1904년 일러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여순 전투에서 13만 명 병사의 과반수 가까이가 사상(死傷)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해 해전에서는 도고 헤이하치로가 지휘한 군대가 러시아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일본은 점차 군대나 물자의 비용을 쏟아 부을 힘이 없어지고, 러시아도 국내에서 혁명이 일어나 양국은 강화를 맺었다.”[10]

이 교과서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을 불순한 세력에 의한 ‘반란’(反亂)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일본의 조선 출병이라는 침략행위를 청의 출병에 의한 불가피한 조치였음을 강조하며 ‘침략성’을 은폐하고 있다. 그리고 러일전쟁 시기의 수많은 희생을 강조하며 자국 학생들에게 충군애국의 조상들에 대한 존경심을 유도한다. 그런데 이 교과서는 청일∙러일전쟁보다는 그 후의 변화에 대해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일러전쟁에서는 일청전쟁 때의 4배 이상의 사람들이 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가인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는 전쟁터의 남동생을 생각하여, 전쟁에 대한 의문을 노래(和歌)로 표현했다. 이처럼 전쟁에 반대하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국민 대부분은 여순이나 일본해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뻐했다. 아시아 사람들 중에서도 일본이 대국인 러시아에 승리한 것을 기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국내에서는 전쟁 중에 2번이나 세금이 인상되고, 물가도 많이 올라, 국민의 생활은 고통스러워졌다. 러시아와의 강화 조약에서 일본은 카라후토(사할린) 남부와 남만주의 철도와 광산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배상금은 얻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운 생활을 참고 전쟁에 협력했던 국민으로부터는 강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1910년 일본은 조선 사람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토지제도의 변경이 이루어져, 그 결과 토지를 잃어 일본인 지주 아래에서 소작인으로 일하거나, 일본이나 만주에 건너가 광산 등에서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한편, 일본인 사이에서는 조선이나 중국 사람들을 경시하고 차별하는 생각이 퍼져 나갔다. 그 후, 조선 사람들은 독립을 목표로 일어나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운동을 끈질기고 강하게 이어갔다. 또한 1911년, 고무라 쥬타로가 외무대신인 시기에 일본이 수입품에 자유롭게 관세를 붙이는 권리를 확립하여, 불평등조약의 개정이 달성되었다. 결국 일본은 외국과 대등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어, 점점 더 국력을 충실히 해 갔다.”[11]

이 교과서도 앞의 ‘도교서적’의 교과서와 구성과 서술 전개 방식은 매우 유사하다. 문부성의 검정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편집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 교과서가 특별히 더 강조하고 있는 서술상의 특징은 러일전쟁을 곧바로 한국병합과 직접 연결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小學社會6上』(日本文敎出版株式會社, 2014)는 다음과 같은 목차를 구성하고 있다.

1-8. 국력의 충실을 목표로 한 일본과 국제사회

(1) 대일본제국 헌법과 조약개정

헌법의 공포와 국회개설 / 불평등한 조약을 개정

(2) 두 전쟁과 사람들의 삶의 변화

중국 및 러시아와 싸우다 / 일러전쟁 후의 조선 / 일러전쟁 후의 세계 모습 /

근대산업의 발전 / 세계에서 활약한 일본인 /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사람들

(116-127)

일본분쿄출판(日本文敎出版)의  『小學社會6上』(2014)는, 일본이 먼저 러시아를 기습 공격하여 전쟁이 시작되었고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러시아와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높았다”는 점을 강조하여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다. 앞의 두 권과 마찬가지로 도고 헤이하치로의 해전 승리는 반드시 언급하고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 백인 유럽 열강에 맞서 최초로 승리한 러일전쟁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독립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점은 문교출판에서 “시아 사람들 중에서도 일본이 대국인 러시아에 승리한 것을 기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서술과 더불어 한국이나 중국 등 인접 국가에서 수용되기 힘든 관점이다.

“19세기가 끝날 즈음, 구미제국은 아시아의 나라들에 진출해, 공장이나 철도 등을 만들어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였다. 일본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던 조선에서는 경제가 곤란해져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1894년 조선정부가 중국(청)에 원군을 요청하자, 일본도 청과의 조약에 근거하여, 군대를 보냈다. 내란이 수습되어 조선 정부는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양국은 들어주지 않고,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전쟁에 승리해 대만과 요동반도를 양도 받음과 동시에 많은 금액의 배상금을 받는 등이 강화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중국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했던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청에게 돌려주도록 일본에게 강하게 강요하고, 일본은 이 요구를 받아 들였다.

일청전쟁 후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일본은 청으로부터 얻은 배상금 등을 사용해 군비를 증가했고, 러시아의 세력 확대를 억누르고 싶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러시아와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높았고, 1904년에 일러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승리해 나갔고, 도고 헤이하치로가 지휘한 군함은 러시아 함대를 격파했다. 그 후 미국의 중개로 강화 조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가 조선으로부터 물러나는 등이 결정되었다. 아시아 국가인 일본인 유럽 국가인 러시아에 승리한 것은 구미 제국의 진출에 괴로웠던 아시아 제국(諸國)의 사람들에게 독립으로의 자각과 희망을 가져다주었다.”[12]

한일 역사학계 공히,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고 보는 반면, 일본의 초등학생 고학년이 공부하는 ‘사회과 교과서’의 세계사 부분에서는 일본 스스로가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벌인 불가피한 방어 전쟁이었다고 변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서술 경향 속에서 대표적인 ‘침략’의 현상적 결과였던 한국의 식민지화(병합)에 대해서는, 그 침략성이 은폐되고 오히려 유럽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일본이 대신 방어해주고, 심지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의 관점을 은근히 주입하고 있다.

그리고 러일전쟁의 전쟁터로서 만주나 일본해(동해)만이 언급되고 있는데, 러일전쟁은 한국에서 시작되었고, 한반도도 전쟁터로 변했지만,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피해에 대한 서술은 발견할 수 없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한국인의 피해를 은폐하고 오히려 해방시켜주었다는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한 서술 의도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러일전쟁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직접적으로 앞당긴 중요한 전쟁이다. 따라서 그 전쟁의 실제적 의미와 그 결과로서의 한국강제병합의 의미를 정확히 가르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본의 교과서는 그 점에서 매우 심각한 결점과 한계,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러일전쟁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러일전쟁이 한반도의 재산과 생명에 막대한 피해를 안긴 점도 자세히 설명하여 그 침략성과 불법성을 더욱 분명히 하여야 한다. 전쟁 당사국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전쟁에 반대하며 중립화를 선언했던 대한제국이었지만, 이는 깡그리 무시되어 일본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시작된 점, 그리고 그것은 일본의 기습 선제공격에 의해 촉발된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국 영토(시마네현)에 편입시켜 오늘 날의 문제로까지 이어지게 된 점 등을 한일 양국 교과서에서 정확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어 보인다.

  (4) 영토 문제

      :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서술

앞의 ‘청일∙러일전쟁 및 한국병합’의 과정은 결국 지금도 한일 간에 가장 예민한 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독도영유권’의 교과서 서술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 고등학교 지리 교과서나 공민 교과서 정도에서 독도를 영토문제로 슬쩍 언급하는 수준을 넘어서, 지금은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국수주의 강조의 중요한 사례로서 독도에 대한 일본고유 영토론의 교육을 강조해 나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영토 분쟁의 문제제기 수준을 뛰어 넘어 독도를 ‘역사 교육’의 범주로 확대하여 주변적 문제에서 핵심적 문제로 부상시켰음을 의미한다.

즉 2005년 이후 매년 『방위백서』에서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더니,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직접 “다케시마(竹島)는 일본 땅“이라 발언하기에 이르렀다. 러일전쟁 직후 독도를 현 관할 영토로 편입시킨 일본 시마네현은 2005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여 조례까지 제정하여 매년 기념식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부성이 주도하여 2008년에는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관련 언급이 나오더니, 급기야 2014년 4월 4일에 일본 문부과학성은 “독도는 역사적으로 국제법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령(혹은 점거)하고 있다”고 서술한 소(초등)학교 5-6학년 사회 교과서 4종을 검정 과정에서 합격시켰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다케시마(竹島) 문제”라든가,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등의 표현이 명기되자, 한국 정부는 “일본이 독도에 대한 도발 수위를 더욱 높인 초등학교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킨 것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크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 대신은 이러한 조치가 당연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독도‘ 문제와 더불어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 등에 대해서도 언급이 사라지고, 여러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서술이 증가했다. 현재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준비 중인 코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 지사는 매년 지사 명의로 발송하던 ’간토 대진 조선인 학살 위령 추도문 작성을 거부하며, 그러한 학살의 역사적 근거는 불확실하다며 망언을 3년 째 내뱉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독도 관련 도발과 여러 잔혹 행위에 대한 부정이 역사교과서를 통해서도 획책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식민지 시대의 침략행위의 책임에 대한 회피를 강화해 가는 방향과 맞물려 있다.

김영수는 「한국과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독도 관련 내용의 비교와 분석」(2013)이라는 논문에서 “한국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 독도 관련 역사적 사료만 기술하여 국제법적 논리를 결합하지 못했다. 한국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역사적 국제법적 논리를 소개해야 한다”[13]면서 보다 현실적인 교육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국제법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을 양쪽 모두 강조하며 접근하는 반면, 한국 측은 역사 고유영토론의 교육에만 안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일본 교과서에 ‘일본 영토로서의 독도’를 불법 점령하고 있다는 식의 내용이 일본의 어린 학생들이 배우고,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순간 한일 관계의 심각한 장해 요인이 될 수 있으므로 보다 냉정하고 치밀한 분석과 대응이 요구된다.

  1. 나가며

교토에서 수년 간 활동한 필자는, 방문객들이 오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제신(祭神)으로 한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로 안내한 적이 많다. 왜냐하면 그 신사 바로 앞에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조선에서 소금에 절여 가져온 조선 군사와 민중들 수 만 명의 ‘코와 귀’를 묻어 놓은 ‘귀무덤’(미미즈카, 耳塚)가 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에게 승전의 업적을 입증할 ‘코와 귀’를 가져 오도록 시켰다. 도요토미 사후에도 조선인의 귀와 코는 전리품처럼 그를 모신 신사 앞에 조성된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이곳에 가면 안내판에 일본어와 한글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무덤은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바 「분로쿠・게이초의 역」(한국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1592-1598)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에 조선 군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 날까지 전해 내려 오는 ‘귀무덤’(코무덤)의 유래이다. (…)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서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무덤’(코무덤)은 전란 하에 입은 조선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교토시, 2003년 3월)”

교토부(京都府)의 교육위원회(우리의 도교육청)는 초중고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및 사회 교과서의 ‘우리 지방 역사’라는 항목에서 반드시 이 귀무덤 내용을 소개해 왔다고 한다. 일본이 과거에 범한 침략 전쟁의 잔인한 결과물이 교토 시내에 ‘귀무덤’으로 존재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우경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5-6년 전 ‘귀무덤’과 관련된 내용이 ‘우리 지방 역사’의 항목에서 삭제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과서를 둘러싼 이런 식의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전방위적으로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우익단체’가 깊이 관여한 후소샤 교과서와 같은 노골적인 왜곡 교과서 이외에,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침략전쟁과 한국병합 관련 기술들을 앞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내용들 중에도 동학농민혁명을 ‘반란’, ‘내란’으로 표현하거나, 러일전쟁 승리를 아시아 민중들이 모두 기뻐하며 환영하였다는 등의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병합의 정당화 논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식민지 정책에 거족적으로 저항했던 3.1운동도 ‘폭동’으로 표현하는 등의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의 4.19 학생혁명, 광주민주화항쟁, 87년 민주화 운동,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중이 지니고 있는 불의에 대한 항거의 역사적 맥락을, 일본인들은 교과서를 통해 ‘반란・내란・소요・폭동’ 등의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실제로 현재의 일본인 다수는 수년 전 한국의 ‘촛불혁명’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교과서는 정치권력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무의식을 배양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집단적 운동은 사회 불안을 증폭시킨다는 편견을 심어줄 위험성이 있다.

과거에 일본의 침략성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이 언급되던 것과 달리, 2000년대 이후의 일본사 교과서에서는 식민지기 일본인과 조선인의 일상,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상호 이해와 연대의 사실을 소개하는 경향을 보인다. 정재정은 “일본사 교과서가 ‘식민지근대화론’을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에 이런 기술이 교과서에도 등장하리라고 전망할 수 있다”[14]고 말했는데, 그 전망은 조금씩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김가영은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독일과 일본 역사교과서의 비교분석」(2016)이라는 논문에서, 전범국으로서 과거극복을 훌륭히 했다고 평가되는 독일과 상대적으로 과거극복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일본의 과거사 청산 모습을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독일교과서는 생활사·민중사 위주의 서술을 보이고 있고, 일본교과서는 정치사와 지배층 위주의 서술을 주로 하고 있다.

둘째, 독일교과서의 서술은 여러 형태의 전쟁범죄에 대해 가해의 주체와 그 규모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반면 일본교과서의 경우 그들이 자행한 전쟁범죄의 모습보다는 원자폭탄, 학동의 집단소개(疏開), 연합국의 공습 등에 대해서만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자국민의 피해를 부각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셋째, 독일교과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논쟁적인 부분에 있어 여러 가지 관점을 제시하는 다원적 관점의 활용이다. 학생들에게 문제의식을 제시하는 사료와 질문을 통하여 스스로가 역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학습이 항상 강조되고 있다. 반면 일본교과서의 경우 토론을 요구하는 활동은 거의 없고, 개인의 입장을 정리해보는 탐구학습의 개수도 현저하게 적다.

넷째,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과거에 대한 대면에 있어서 부정적 과거를 거부하고 있는 반면, 독일은 부정적 과거 또한 자신들의 역사에 수용하고 있다. 독일의 역사교과서는 과거극복과 전쟁책임에 대해 독일인 전체의 책임임을 나타내는 서술이 강조되는 반면 일본의 경우 전쟁에 대한 책임과 반성의 모습이 부족하다.[15]

일본은 전쟁 피해자로서의 자국 이미지를 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부각시킴으로서, 확실한 전범국 독일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독일, 폴란드, 프랑스 등이 함께 공동 역사교과서를 편찬하여 상호 이해의 폭을 확대하였던 시도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를 모델로 삼아 「한·중·일」 3국의 역사공동편찬위원회가 『미래를 여는 역사』라는 대안적 교과서를 공동 집필한 바 있다. 각국의 국수주의 서술 경향을 줄이고 상호 이해를 증진시켜 미래지향적 역사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교과서 편찬 운동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사례가 국가적 지원과 정책적 배려 하에서 이루어진 반면, 동아시아 3국은 여전히 시민단체 차원의 미미한 운동에 불과하므로 더욱 많은 관심이 요구된다.

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교과서 왜곡을 넘어서 일본에서 제작되는 게임에서도 한국 역사를 왜곡한 사례가 자주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16] 일본의 여러 시민단체들은 이러한 교과서 및 게임 등의 왜곡을 감시하고 ‘왜곡 교과서 불채택운동’과 ‘역사바로알기’ 운동 등을 진행하고 있지만, 우익세력과 결탁한 일본 정부의 환경 속에서 힘겹게 분투하는 중이다. 이들 일본의 시민단체들과의 연대와 협력이 더욱 요구되는 이유이다.

(첨언)

이 글을 마무리하는 오늘(2019년 9월 11일) 아베 총리는 2012년 12월 2차 집권을 시작한 이후 9번째로 개각을 단행하였다. 이번 개각은 19명의 각료 중 가장 신임하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장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을 제외하고 17명의 각료를 대거 교체했다. 이번 내각은 아베 총리가 극우 성향의 최측근들로 포진시켜, 향후 한일 관계와 헌법 개정 및 교과서 문제 등 여러 사안에 있어서 더욱 우경화될 것으로 보인다.

눈에 띄는 것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놓고 한국과 첨예하게 대립해 온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무상이 일본 자위대를 총괄하는 방위상으로 옮겼고, 무역 규제를 주도한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는 헌법개정을 주도하기 위한 참의원 간사장으로 옮겼다. 이는 남은 임기 동안아베가 헌법개정을 통해 군대를 부활시킨 보통국가 전환에 명운을 걸었음을 말해 준다. 38세에 불과한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전 고이즈미 쥰이치로 총리의 아들은 환경대신에 임명되었다. ‘포스트 아베’ 감으로 불리며 젊은 층은 물론 광범위한 인기를 얻고 있는 그를 내각에 들여, 헌법개정의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내려는 심산이다.

재임명 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무장관은 과거에도 같은 자리에 있을 때(2014~2017) 현직 각료로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였고,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한 무라야마(村山) 담화에 대해서도 “침략이란 표현이 들어간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일본회의 및 야스쿠니 참배 조직의 맴버로서 올림픽장관에 임명된 하시모토 세이코(橋本聖子)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이 일본 국수주의를 명확히 드러내는 장이 되지 않을까 염려를 자아낸다.

또한 교과서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 한 인물들이 몇 명 있다. 앞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가 교과서에 등장한 것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전 문부대신은 헌법개정추진본부장은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새로 임명됐다. 그는 일본 교육기본법 개정을 주도한 뒤, 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나 난징(南京) 대학살 등의 내용의 삭제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가 향후 헌법개정과 선거대책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점은 일본의 교과서 문제가 얼마나 정치와 깊이 관련된 것인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 교과서 편찬을 관장할 문부대신에는 아베의 최측근이자 가장 극심한 우익 인사인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이 임명되었다. 그는 2012년 12월 아베 2차 집권 이후 당 총재 특별보좌관으로서 앞서 소개한 시모무라 등과 함께, 교과서에 위안부 문제와 난징(南京) 대학살 등의 삭제나 수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을 관장하는 부처이므로 향후 교과서를 둘러싸고 한일 갈등이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는 최근까지 자민당 간사장 대행으로 있으면서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에 대해서도 “군사전용이 가능한 물품이 북한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다”는 가짜 뉴스를 전파한 인물로서, 사실상 징용공 판결에 대한 경제 보복을 주도한 실세로 거론된다. 그런 인물이 향후 일본의 교과서 검정을 책임지게 될 예정이다. 이들이 주도해 온 교과서 왜곡 활동은 사실 아베 신조 현 총리가, 1990년대에 이미 해 오던 일들이다. 일본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한 ‘우경화’ 흐름은 반드시 동전의 앞뒤처럼 ‘혐한’과 같은 주변의 열등함을 함께 강조하며 더욱 강력한 동력을 얻게 된다. ‘교과서’는 그러한 ‘일본의 우월함과 한국의 열등함’을 일본 다음 세대들의 무의식 속에 주입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교과서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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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서울: 역사의아침,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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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교과서는 한국의 아픔을 감추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2019년 4월 13일.

「한일 시민단체들 “日 역사 교과서는 한국의 아픔 축소”」, SBS, 2019년 4월 13일.

[1] “일본 역사 교과서는 한국의 아픔을 감추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2019년 4월 13일. ; 「한일 시민단체들 “日 역사 교과서는 한국의 아픔 축소”」, SBS, 2019년 4월 13일.

[2] 김종성,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서울: 역사의아침, 2015.

[3] 김종성, 위의 책 「한반도에서 문명을 전수받은 고대 일본」, p.184.

[4] 김종성, 위의 책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환대한 이유」, p.218.

[5] 정재정, “일본사 교과서에 기술된 식민지지배와 민족운동: 2007년도 검정 합격본의 경우”, 『한일관계사연구』 제30권. 한일관계사학회, 2008, pp.245-293.

[6] 文部科學省, 『小學校學習指導要領』, 2008a, p.27.

[7] 文部科學省, 『小學校學習指導要領』, 2008a, p.98.

[8] 『新しい社會6上』, 東京書籍株式會社, 2014, pp.118-119.

[9] 『新しい社會6上』, 東京書籍株式會社, 2014, p.120.

[10] 『小學社會6上』, 敎育出版株式會社, 2014, pp.108-109.

[11] 『小學社會6上』, 敎育出版株式會社, 2014, pp.110-111.

[12] 『小學社會6上』, 日本文敎出版, 2014, pp.120-121.

[13] 김영수, “한국과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독도 관련 내용의 비교와 분석,” 『평화학연구』 제14권 제1호, 한국평화통일학회, 2013년, pp.243-262.

[14] 정재정, “일본사 교과서에 기술된 식민지지배와 민족운동”, pp.245-293.

[15] 김가영,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독일과 일본 역사교과서의 비교분석” 『역사교육연구』 제24호, 한국역사교육학회, 2016, pp.151-211.

[16] 고병희, “일본 게임에 나타난 한국 역사의 왜곡사례와 대응방안 연구” 『게임&엔터테인먼트논문지』Vol.2 No.2., 한국콘텐츠학회, 2006, p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