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연리포트11호) 일본 기독교인들의 한국 역사 이해

 

유 시 경 (성공회 사제)

 

최근의 한일 관계 악화를 배경으로 제목과 같이 <일본 기독교인들의 한국 역사 이해와 인식>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일본인 일반을 대상으로 한 조사는 선행 조사나 연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일본의 기독교인들을 별도로 대상화해서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를 묻는 작업은 제가 과문한 탓인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진행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등을 통해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한일 양국 교회가 협력해서 이와 같은 작업도 진행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번에는 원고 마감일까지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여러 일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하고 분석할만한 여유는 없었기에, 지금까지의 제 일본 생활 속에서 직접 만나고 경험했던 일을 중심으로 일부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면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들어가며

 

지난 6월 13일에 일본 센다이시에 있는 미야기학원여자대학의 초청으로 <2019년도 기독교교육 특별집회>에 강연으로 다녀왔습니다. 저를 강사로 추천한 분은 이 대학의 교수로 종교센터장을 맡고 있는 신멘 미츠구(新免貢) 목사입니다. 이 분은 제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동경의 릿쿄대학에서 교목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전국 교목협의회>를 통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신앙과 사역의 선후배로 지내고 있습니다. 강연회를 앞두고 후문으로 들은 이야기는, 강사 선정을 둘러싸고 대학 내에서 일부 반대의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야기인즉슨 소위 반일(反日) 인사를 왜 대학의 중요한 연례 행사로 학부와 대학원을 포함한 전체 재학생이 참가하는 특별 집회의 강사로 불렀느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강연 당일 대학의 강당에 모인 전체 학생 수는 약 900명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반응이 나왔던 배경을 생각해 보면 우선은 저를 소개한 약력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위 대학 관계자들의 반응을 유추해보기 위해 강의 홍보지에 실려 있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어 봅니다.

 

미야기학원여자대학/대학원 2019년도 기독교교육 특별집회

(2019년 6월 13일(목) 13:00-14:30, 대학 강당)

 

강사: 유시경 신부

1963년생, 성공회 사제.

(성공회 약력) 한국성공회 민주화청년협의회 의장, 성공회대학교 기획실장, 릿쿄대학 교목, 서울대성당 사제, 한국성공회 관구 교무원장

(외부활동 약력) 성공회 한일협동위원, 시인 윤동주를 추도하는 릿쿄회 초대 사무국장, 관동대지진 희생자추도회 실행위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장, 인권센터 부이사장 역임

(현재) 오사카교구 카와구치그리스도교회 주임사제, (사)평화를 일구는 사람들 이사 겸 국제위원장, (사)한국라보(LABO) 이사장, 삼일운동100주년민족대표

 

강연 제목: <정전에서 종전으로 – 조선반도의 통일 시계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구: 마태복음 5: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5:43-44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모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제가 생각하기에 보통의 일본인들의 경우, 위의 약력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거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극단적인 혐한 감정을 지닌 일본인이라면 한국 국적의 강사라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고 거부감을 보였겠지만, 소위 말하는 보통의 일본인들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보입니다. 미션스쿨이지만 강의에 온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은 논크리스찬이기에 평화와 원수 사랑을 말하는 성경 구절도 어쩌면 정말 생소한 것이었으리라 보입니다.

 

강의 내용 자체가 관동대지진이라든가 삼일독립운동, 남한과 북한의 통일과 관련한 최근의 북미관계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더욱 불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통 일본인들의 인식은 정말 기본 지식이 부족할 뿐더러, 관동대지진이나 삼일운동이라는 단어를 접해도 그것이 한국과 또 일본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우선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의 문제이기도 하고, 미국의 우산 아래 전쟁 패전 후 70년 이상을 근본적인 전후 처리 과정 없이 경제 부흥과 평화헌법의 틀 아래서 말 그대로 무사안일하게 ‘평화’로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해 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식자들은 이런 현상을 헤이와보케(平和ボケ)라고도 표현합니다. 즉, 전쟁이나 안전보장에 관해 일본을 둘러싼 현상이나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려 하지 않고, 분쟁 없이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된다는 환상을 지닌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만족하고 주변 상황에 아예 무관심한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강사 선정에 관여한 미야기학원의 관계자들은 모두 미션스쿨의 교원들이고 대부분이 크리스찬일텐데, 이 분들도 일반적인 일본의 헤이와보케 현상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 기독교인들의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대체로 이러한 일본 사회 일반의 인식의 틀 안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한반도의 통일이라고 하면, 남북의 분단 현실에 대해서조차 거의 인식이 없기에, 전혀 생소한 말이 되고 맙니다. 더군다나 코이즈미 수상 때에 북한 방문과 정상회담을 통해 오랜 봉쇄가 열릴 듯 기대를 모았던 북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기대도, 소위 납치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측이 의문을 제기하면서 초기부터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이어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는 지금까지 정부와 언론의 북한 때리기가 일상화되었고, 북핵 위기, 미사일 위협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더 심각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확인되면 즉각 일본 전국에 경보음을 울리도록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며 법석을 떨면서 전국즉시경보시스템(J-Alert)을 들먹이며 국민들의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일본의 기독교계에서는 피납여성 중 사망으로 통보된 요코다 메구미 씨의 양친이 독실한 크리스찬이기에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이해와 용서,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여러차례 조심스레 대화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요코다 메구미 씨의 양친은, 오히려 기독교인이기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을 뿐더러 테러국가로 지정된 북한과의 관계에 거부감과 의구심을 품고 납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일본 전국 네트워크의 대표가 되어 지금도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유족의 입장에서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젊은 딸의 운명에 대한 진위를 단정하기 힘든 고통을 한편 이해하면서도, 이로 인해 일본 기독교 안에서도 소수 그룹으로 한국과의 선교적 협력과 통일 문제에 대한 미래지향적 연대에 참여하려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무거운 십자가로 각인되어 있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일본 내에서는 납치 문제가 표면화된 이래 재일교포 금융 기구에 대한 거래 제재, 만경봉호의 입출항 금지, 재일한국조선인 교육기관인 민족 학교에 대한 무상지원 배제 등 정부의 일련의 조치와, 일부 지역에서 간헐적으로 보이던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행과 억압 등이 전국화되는 현상으로 이어졌고, 최근의 혐한 분위기로까지 확대 발전되어 왔습니다. 최근 일본 정부가 취한 대한 반도체 3종 부품의 수출규제,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기까지 이제는 북한 만이 아니라 남한에 대한 정부의 극단적인 조치가 맞물려, 남이건 북이건 조선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 강의의 시점은 수출 규제 조치가 발동되기 이전입니다만, 이런 전체적인 흐름을 감안할 때 이미 일본 사회와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 담겨있던 생각들이 보수우익 아베 정부와 집권 세력의 반한/혐한 조장 정책에 반응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 신멘 교수는 반대를 무릎쓰고 저를 강의로 불러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차례 신멘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이 분의 신앙 기조와 기본적인 생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이번 강의 전에 전교생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과 같은 특별집회 초대와 안내의 글에서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 여러분에게

2019년 5월 28일

대학종교센터장 미츠구 신멘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의 디지털컬렉션에는 일본군에 의한 테러 행위를 기록한 문서 <조선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발발->(Korean Independence Outbreak Beginning March 1)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는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교회 소각과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4월 15일 이른 아침, 몇 명의 일본 병사가 마을에 들어와서 성인 남성 기독교인들과 천도교 신자들은 통달을 받기 위해 교회로 모이라고 명령했다. 도합 23명의 남자들이 무슨일인가 생각하며 명령대로 교회로 향해, 자리에 앉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일본 병사들은 곧바로 교회를 애워싸고 창문으로 총을 쏘았다. 그 대부분은 사살당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초가지붕과 목조 건물에 불이 붙여져 , 교회 건물은 바로 불타올랐다. 도망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총검에 찔려 죽거나 사살당했다. 교회 건물 밖에 있던 6구의 시체는, 제대로 도망치지 못한 이들의 유체였다. 명령을 받고 교회로 향한 남자들의 부인 중 2명은 발포음을 듣고 깜짝 놀라 병사들 틈을 해치면서라도 교회에 가려고 했지만, 무참히 살해되었다.  한 명은 19살로 총검에 찔려 죽었고, 40살 넘어 보이는 다른 한 여성은 사살되었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병사들은 마을에 불을 지른 후 그 곳을 떠났다.”

 

이 사건은 온 몸에 털이 곤두서는 듯한 테러행위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우치무라 칸조(内村鑑三, 1861-1930)는 <D.C.벨에게 보낸 서신>(1919년 8월 4일자) 중에, 이 조선인 학살의 대부분을 “악마적 기관”인 “신문의 날조”, 즉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단정했습니다. 오늘날도 삼일독립운동 때에 벌어진 조선인 탄압을 거론하는 것을 <반일사관>이라고 보는 언설 풍조가 부분적으로 있지만, 조선반도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역사적으로 재검증하는 것은 <반일사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적 윤리의 책임에 관한 진지한 노력입니다.

 

위에 언급한 미국측 문서에는 “조선에서의 일본측의 윤리적 불기능 – 일본국 정부와 일본 국민의 책임”(The Moral Failure of Japan in Korea:Responsibility of the Japanese Government and Nation)이라 이름붙여진 보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신문기자가 “저 쪽 조선에서는 사태가 상당히 악화되고 있다. 여성, 어린이까지도 일본군에 살해되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기사화할 생각은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각 신문사에 대해 한국 사정을 가급적 보도하지 말라고 하는 긴급한 요구를 보냈다고 합니다. 매스컴의 역할은 진실을 보도하고 사실을 전하는 데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부는 시민을 무지한 상태로 두려고 생각한 듯 합니다. 이와 같은 <윤리적 불기능>은 도덕적 힘이 당시 충분히 작동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견을 이 땅에서 영원히 없애고자 노력하고 있는 국제사회 속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점하고자 한다”라고 격조 높게 선언하고 있는 현행 일본국 헌법 전문에 비추어 말하자면, “일본측의 윤리적 불기능”은 일본에게 있어 실로 불영예스러운 말입니다. 이 불명예를 어떻게 불식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이 향후 일본이 평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외교 정치적 과제일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상식에 관련된 윤리적 삶의 방식 문제이기도 합니다. 대학교육의 근본은 지식의 탐구를 통해 세계에 통용되는 윤리적 힘을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힘으로 연마하는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관계를 지니는 조선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2차례에 걸친 북미수뇌회담, 서로 국경을 넘어가며 가진 남북수뇌회담 등에 나타나 있듯이, 최근까지 없었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초대하는 강사 유시경 신부는, 서울대성당 사제, 릿쿄대학 교목을 역임하고, (중략) 15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카와구치 그리스도교회(오사카)에서 평화를 위한 실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영적인 목회를 실천하는 보기 드문 종교인입니다. 유신부님의 강의는 조선반도의 진실한 역사, 거기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 좋은 기회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내는 <공동창조의 원리>를 실천할 방법을 찾는 힌트가 주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이 글에서 신멘 교수가 삼일운동에 대한 우치무라 칸조의 반응을 소개한 것은, 그가 일본 기독교 초기의 인물중에서 기독교계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신앙인이고, 국제적인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 기독교사를 논할 때 반드시 주목해야할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치무라는 1891년에 교사로 재직중이던 동경 제1고등중학교에서 천황의 교육칙어 봉독식 중 천황의 서명에 절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 반한다며 이를 거부했고, 이것이 소위 “불경사건”으로 일파만파를 일으켜 교사직을 사임하기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두 개의 제이,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을 생애의 모토로 삼고 일본의 기독교 전도에 일생을 바쳤고, 러일 전쟁 직전의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적 흐름 속에서 비전론(非戦論)을 주창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사상계에 일본을 넘어서는 시점을 제기하였고, 관념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행동을 통해 일본 기독교는 물론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치무라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조선의 사정에 대해 일견 무심하고 무지한 모습을 보인 것에서, 신앙 양심을 지키며 싸운 대표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식민 지배에 관한 관점에서는 윤리적 불기능에 빠진 점, 어쩌면 오리엔탈리즘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치무라의 “불경사건”과 교사 사임은 이후 수년간 “교육종교충돌논쟁”으로 발전합니다. 당시 동경대학 교수였던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郎)는 “기독교가 일본의 국체(国体=만세일계의 천황이 일본에 군림하며 천황의 덕이 천양무궁하게 세계에 뻗친다는 메이지 쇼와시기 군국주의 일본의 정치체제를 일컫는 말)  와 맞지 않을 뿐더러 국가의 교육에 반한다”는 주장을 펼친 후 “교육과 종교의 충돌”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의 논지는 교육칙어가 국가주의, 현세주의로 충효를 윤리의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기독교는 비국가주의, 탈현세주의로 박애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종교와 국가, 교육에 관한 폭넓은 논쟁으로 전개되었지만 결국 일본의 기독교는이후의 역사 속에서 국가주의적 경향으로 기울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멘 교수와 같은 기독교인은 일본의 기독교인 중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재 일본의 사정입니다. 일본인 중에도 한국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역사 인식을 견지하며 일본의 국수주의적 시각을 벗어난 이들이 일부 있지만 아주 극소수인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인을 놓고 본다면, 더욱 더 소수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2017년까지 전체 인구의 1.1% 였는데, 2019년 들어 1% 미만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전체 인구가 약 1억 1,500만명 쯤이니 통계상으로는 기독교 인구는 100만명 정도입니다. 이런 가운데 일본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알게 모르게 여전히 두 개의 제이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 70-80년대에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의 과정 속에서 늘 문제로 안고 있었던 소위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보이는 듯 합니다. 4. 19혁명과 6. 10항쟁에 이어 촛불혁명으로 정권의 교체라는 민주주의의 땀과 피를 경험한 한국 사회와 달리, 일본은 일본의 시민사회가 스스로 민주주의를 위한 승리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채 의회민주주의라 불리는 체재 속에 지내오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이긴 하지만, 실상 자기 옷이 아닌 것만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격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점령과 함께 이식된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이 들으면 기분이 상할 지 모르겠지만, 많은 일본의 식자들이 인정하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인 일반 안에서도 한국에 대한 인식의 차가 큰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경우에도 거의 비슷한 정도로 인식의 차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예를 든 신멘 교수와 같이 윤리적 불기능을 염려하며 학문적 윤리 책임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검증을 실천하려는 일본의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신앙을 지닌 일정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여전히 두 개의 제이 중에서 재팬(Japan) 쪽에 더 무게 중심을 두는 경우의 사람들이라면, 같은 기독교인일지라도 천양지차가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일본 현대사회의 새 출발의 원점인 전쟁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제대로 검증되고 정리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1. 일본 종교교단의 전쟁책임

 

저는 그런 점에서 일본의 종교교단들, 그 중에서도 15년 전쟁으로 불리는 아시아태평양 전쟁기에 취했던 교회와 신앙인의 태도를 돌아보면서 군국주의화에 대한 무저항, 전쟁에 대한 묵인과 협력의 책임을 스스로 밝힌 <전쟁책임고백>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직접적으로 한국의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침략전쟁, 식민지 지배에 대한 죄책 고백의 배경과 과정, 이를 둘러싼 갈등과 논란을 통해 일본 기독교인들의 아시아와 한국 역사 이해에 대한 단초를 볼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2010년에 결성된 일본의 <오사카 종교인 헌법9조 네크워크>가 이듬해 12월에 발행한 “일본에서의 종교교단의 전쟁 책임”이라는 자료집을 바탕으로 몇 가지 사례와 현상을 적어봅니다.

 

당시 사무국장이던 타테이시 야스오 씨는 간행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932년 류조호사건(중일전쟁)으로부터 1945년의 태평양 전쟁 패전까지 소위 15년 전쟁 시기에, 일본의 종교 교단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전쟁 협력에 매진했습니다. 세속을 상대화하고 절대적 진리 아래 살아가야할 종교인들이 국가 권력에 추종해서 거룩한 교의를 왜곡하고 전쟁을 찬미, 전쟁에 반대하는 성직자를 처벌하고 탄압했습니다. 평화를 소망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만 할 종교교단이 일본 국민을 전쟁으로 내모는 선동자가 된 것입니다.

 

그 책임은 엄하게 물어야만 합니다. 분명 전쟁이 끝난 후 몇몇 교단은 전쟁에 협력한 것을 사죄하고 스스로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표명했습니다. 평화를 바라며 활동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직까지도 스스로의 전쟁 협력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거나 정당화하려는 교단도 있습니다. 또한 평화헌법을 짓밟고 일본의 재군비나 미국에 대한 전쟁 협력과 참가의 길로 이끄려는 움직임에 함께 하고 있는 교단도 있습니다. “왜 종교단체가 전쟁 협력을 했는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종교인들은 전쟁 책임을 어떻게 짊어지고, 현실 사회와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모든 종교는 “살인하지 말라”, “전쟁하지 말라”고 엄격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생명을 잃고, 마음에 상처를 입힌 통한에 대한 반성과 세계적 평화 여론의 결실로 만들어진 일본국헌법 제9조를 지키며 살려가는 일. 이것이야말로 과거에 잃었던 종교 본래의 입장과 가르침을 복권하는 것이고 종교의 존엄을 되돌리는 실천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지금까지도 일본의 종교인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지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역사 속에서 보였던 신앙의 굴절과 타협, 패배의 경험이 원죄처럼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원죄는 씻으려면 씻을 수 있는 것일텐데, 아직 깨끗하게 씻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체 일본인들에게도 이 원죄는 함께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치스의 독일이 전쟁의 원죄를 두고두고 사죄하며 새 독일로 거듭나려 노력해오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래도록 뚜껑을 덮어 두려 했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부끄럽고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역으로 그 일을 정당화하고, 피해자들의 한탄과 눈물을 피와 울부짖음으로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종교, 특히 기독교가 가담하고 조장하고 앞장섰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거듭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도 타산지것으로 삼아야 할 아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먼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니시야마 토시히코 신부의 글을 통해 일본 기독교의 단면을 보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 나라에 전쟁책임고백을 한 교단이 있었던가?>

종교는 마음의 문제, 시비선악의 가치관을 키워가기에, 전쟁을 선동하는 일에도, 평화를 일구는 일에도 관여합니다. 살인은 미화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력은 발군입니다. 위정자의 정치를 수긍하고,  실제로 일본의 근대화는 정교일치의 결과였습니다.

 

15년 전쟁의 발단은 1931년의 만주사변, 이 때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 것이 카톨릭 교회입니다. 1932년 봄의 춘계대재 때에 상지대학 학생들이 참배를 하지 않은 것이 큰 문제가 되어 그 해 가을 10월에 폐교 압박과 박해의 위기에 처합니다. 카톨릭교회는 “신사참배는 애국심과 충성심의 표명만이므로 금지하기 보다는 장려되고 있는 국민의 책무이다”라는 로마로부터의 승인령을 공표함으로 문제 해결, 이후 국가와 종교는 일체가 되어 거룩한 전쟁 수행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쳐 온 교회가, 증오와 살육을 미덕이라고 칭찬하고, 전사는 순교, 황국의 거룩한 방패가 된 영령들은 제신(祭神)이 되어 숭앙받고, 그렇게 숭앙하게 되면 기독교는 이름뿐인 껍데기, 국가의 운명이 절재적인 지고의 가치가 됨으로 신자도 교단도 국가의 종, 살아남는 것을 가능할지라도 마음과 혼을 버린 배교자와 마찬가지로 되었습니다.

 

종교의 위대함은 경허함, 즉 자신의 과오를 밝히고 고치는 데에 있습니다. 패전을 계기로 자유를 얻은 종교계는 어떠했던지요? 기독교의 대부분은 군국주의로부터 탄압받은 피해자, 전승국이 민주주의 체제를 가져온 해방자인것처럼 보인 시류에 올라타서 전쟁책임 고백과는 무관, 무지각으로 일관했습니다.

 

점령군의 ‘신도지령(신사에 대한 명령)’을 받아, 카톨릭 교회가 ‘신사에 대한 공적 사적 참배를 모두 금지'(1946년 5월 10일)하고자 했으나, 1951년에 “종교적이 아니기에 일단 허가한 행위를 미신이라고 금지할 경우 사람들이 혼란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전쟁기의 훈령이 유효하다는 로마의 훈령으로 구태의연한 채로 되고 말았습니다. 외면적으로는 기본적 인권과 주권재민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배려와, 비록 신앙에 반했을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완강한 권위주의의 어느 쪽이 진짜 이유인지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조금 이르거나 늦거나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교단이 전쟁책임고백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저로서는 결과책임이던지 본의 아니게 복종했다는 식의, 자기의 책임과는 관계없는 것이고, 가치규범의 근간을 좌우하고 때로는 국가와의 대립도 불사해야 할 종교 본래의 사명에 대한 자각이 결여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니시야마 토시히코 신부는 후일 본인의 부친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2005년도에 알게 된 후, 본인과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무단합사한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신앙에 비추어 인간을 신으로 예배하는 야스쿠니신사의 방식이 우상 숭배에 해당하기에 합사 취소청구를 했으나 야스쿠니신사로부터 거부당하고,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전부 패소로 끝났습니다. 역대 수상의 공식 참배로 일본 국내에서 위헌 논쟁을 야기시키고 있고, 아시아 각국으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있는 야스쿠니신사의 문제는, 위헌적 합사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본 기독교 교회와 신앙의 견지에서 도저히 양립을 용납할 수 없는 선교적 장벽임이 분명합니다.

 

이어서 일본 프로테스탄트 교단 중 가장 규모가 큰 일본기독교단의 내부의 엄중한 지적을 소개합니다. 일본기독교단의 오사카교구 의장을 역임한 히라야마 타케히데(平山武秀) 목사의 글입니다.

 

<대동아전쟁에 협력한 교단>

 

나는 일본기독교단의 전쟁책임을 다음 3가지 점에서 이해하고 싶다.

 

1.일본기독교단의 성립

먼저 첫번째는 일본기독교단의 성립 그 자체이다. 1899년 이래 여러차례 의회에 제출되었다가 폐안되었던 “종교단체법”이 마침내 1939년에 통과된다. 이는 국내 모든 종교단체를 전시체제로 편입시켜서 적극적인 전쟁 협력으로 끌고가려는 법률이었다. 이런 분명한 의도를 갖고 국가는 교회수 50 이상, 신도수 5천명 이상이라는 기준을 정해각 교단을 압박했다. 각 교회를 가능한 한 통합해서 국가가 관리하기 편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 종교단체법에 따라 일본 내 30여개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합동해서 만들어진 것이 “일본기독교단”이다. 전쟁을 향한 “국민정신총동원”정책에 굴복한 결과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 존재 자체가 전쟁책임의 대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전쟁협력의 실태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일본기독교단이기에 그 후 4년간 보인 전쟁협력의 실태는 정말 보기 역겹다. 전형적인 예로 교단 성립 직후에 발표한 “전시포교방침”의 강령에서 “국가의 대의에 철두철미하고,  대동아전쟁의 목적 완수를 위해 매진해야한다”고 적고 있다. 그 실천항목을 보면, ‘충군애국 정신의 자양에 힘써, 신도로서 멸사봉공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무렵 교단의 최고 책임자 2명이 이세신궁을 참배했고, 군용기봉헌 운동을 전개했다. 대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의 흐름에 편승해 조선반도와 타이완, 동남아시아의 각 지역에까지 일본기독교단의 전쟁협력의 움직임이 대동아공영권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1944년에 ‘일본기독교단으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의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서신’을 보냈는데, 일본이 벌이고 있는 이 전쟁은 동아 여러 민족의 해방을 위한 거룩한 전쟁이며,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일본제국의 전쟁을 신앙으로 함께 싸워나가지 않겠는가라고 호소하고 있다. 아시아 기독교의 정점에 서서 패권을 행사하는 오만한 태도이자, 일본제국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가장 극에 달한 것은 패색이 짙어진 1944년에 발표한 ‘일본기독교단 결전체제선언’이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4년, 전쟁 국면은 이제 결전 단계에 돌입했다… 황국의 철저한 승리를 위해 신도의 총력을 봉헌하기 바란다는 말로 맺고 있다.

 

  1. 전쟁책임의 문제

이처럼 2차 세계대전에 앞장서 협력한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은 전쟁 후 과연 어떻게 규명되었을까?

종전 직후인 1945년 8월 28일, 교단 최고 대표자가 전국 교회에 보낸 통달문 중에 “성단(천황의 결단)이 한차례 내려져… 본교단의 교역자와 신도는 이 성지(천황의 생각)를 받들어 국체호지의 일념에 철저하여 각자 신앙에 힘써 총력으로 장래의 국력 재흥에 힘을 기울여 이로써 성려(천황의 염려)에 응답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전쟁이 막을 내린지 13일 밖에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개칸스러운 내용이다. 일본기독교단의 본격적인 입장 표명은 1967년에 당시의 총회 의장인 스즈키 마사히사의 이름으로 발표된 “제2차 대전하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약칭 ‘전쟁책임고백’)이다. 내용과 표현에 부족함은 있지만 사회 일반을 향한 공식적인 표명이었고, 이후 기독교를 넘어 일본의종교 단체에 큰 파급효과를 미쳤다.

 

전쟁책임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그 전쟁의 책임을 스스로의문제로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느냐를 하느님께서 엄중히 묻고 계신다. 전후의 세월 속에서 그동안 교단으로서, 혹은 개별 교회의 목회자나 신도들이 진지하게 참여해 온 미일안보문제, 미군기지문제, 오키나와문제, 야스쿠니신사문제, 반전평화문제, 헌법9조를 지키기 위한 운동 등 모두가 이 ‘전쟁책임고백’이 통렬한 자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제가 속한 성공회의 전쟁책임고백은 매우 늦은 시기에 채택되었습니다. 일본기독교단의 전쟁책임고백 선언이 1967년이었는데, 일본성공회의 경우 전후 50년을 맞이한 1995년에 선교협의회를 개최하였고, 이 결과로 다음해 1996년의 총회 결의로 “일본성공회의 전쟁책임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10여년 이상의 준비 기간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교단 내부에서 반발과 저항과 비난의 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우여곡절 끝에 총회에서 채택된 선언문 자체가 어떤 죄를 고백하는지를 적시하고 있기에 그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일본 성공회는 전후 50년을 맞이하는 지금, 전쟁 전과 전시하에서 일본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지지하거나 묵인한 책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고백합니다.

 

1945년 일본 성공회는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여러 지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종식이라는 역사적 전기에 섰습니다. 그 해의 임시 총회 고시에서 사사키 진지 주교는 전쟁 중의 교회의 반성을 말하면서 “국책에 영합”하여 “교회의 사명을 망각”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이 때 총회도 주교회도, 교구와 개별 교회도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일본이 침략 지배한 이웃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진실한 화해의 관계를 신앙공동체로서 추구해야만 했습니다. 일본 성공회는 설립 이후 복음에 반하는 천황제 국가의 국체 사상과 군국주의에 계속 타협하며 강하게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성공회가 영국 미국 캐나다 등의 성공회와 관계를 갖기 때문에 관헌의 압박으로 신앙의 싸움을 경험한 교역자와 신도도 있었지만, 그 쓰라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서는 태도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또 국제적인 교제를 갖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침략 전쟁으로 인한 가해자로서의 국가의 모습에 눈뜨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지나사변 특별기원식”, “대동아전쟁 특별기도회”등을 개최하여, 타민족 지배와 전쟁 협력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긍정하고 교세의 확장과 체제 유지만을 목표로 한 닫힌 교회에 머물어, 주님의 복음이 가르치시는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2) 일본 성공회는 패전 후 바로 이러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 것과 전후 50년 동안 스스로의 책임을 자각하지 않고 화해와 보상에 적극적으로 일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 것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며 아시아 태평양의 사람들에게 사죄합니다.

 

전후 일본 성공회는 1947년 제22총회에서 1938년판의 공동기도서를 그대로 정본으로 채용했습니다. 이 기도서에는 천황의 지배를 하느님의 거룩한 뜻으로 간주한 “천황을 위한 기도”, “기원절(천황계 역사에 의한 일본국 설립일)”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이어 1959년에 기도서가 개정되기까지 교리문답에서 “이웃을 위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 “…천황 폐하와 그 지배에 따라…”라고 가르쳤고, 성찬식 중에 “모든 주권을 지닌 분, 특히 우리 금상 천황을 기념하며”라고 사제가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전후에도 전쟁 책임을 물어야만 할 천황과 그 국가 체제를 긍정하는 기도서를 계속 사용하고, 스스로의 자세를 자각적으로 바로잡는 일을 게을리 해왔습니다. 황국 신민화 정책의 결과로 야기된 오키나와 주민 학살과 강제 집단자결, 더욱이 전후 미군 기지의 위협 등 오키나와의 경험은 오키나와 교구를 통해 계속 전해졌고, 1972년에 일본성공회로의 이관을 향해 “역사와 현상을 이해하기 바란다”는 오키나와 교구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일본성공회 전체로서 응답을 게을리 한 것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3) 일본 성공회는 전후에도 차별적 체질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정의를 행하도록 부름받았음을 자각하고 평화의 도구로 세계의 분열과 아픔, 외침과 고통의 소리에 귀기을이는 교회로 변화하도록 기도하며 구합니다.

 

이상과 같은 우리의 회개의 징후로서 다음을 추진해 나갑니다.

(1)일본성공회의 전쟁 책임 고백을 전 교회가 공유합니다. (2)일본이 침략한 여러 나라의 교회에 대해 일본성공회의 사과의 뜻을 전달합니다. (3)역사적 사실의 인식과 복음 이해에 대해 되묻고 심화하기 위한 실천을 각 교구와 교회 안에서 계속해 나갑니다.

 

일본성공회의 경우, 1980년대 초부터 공식적으로 한국의 성공회와 선교협력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성인 대표단을 중심으로 한 역사인식과 선교 역사에 관한 검증으로 시작해서, 90년대 이후 청년세미나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1988년도부터 한일협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양국 성공회의 긴밀한 협력을 논의하고 실행하기 시작했습니다. 90년도에는 전쟁 전 재일한국인 장준상 부제가 설립했으나 일본성공회가 외면하고 탄압을 방관했던 오사카교구의 재일한국인 교회인 성가브리엘교회를 재건했습니다. 또 같은 지역에 재일교포 밀집 거주 지역의 특성을 살려 지역주민센타로 이쿠노센터를 설립했고, 오사카교구는 이후 재일한국조선인 특별선교위원회를 구성해서, 가브리엘교회와 이쿠노센터의 후원은 물론 한일선교 협력과 연대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이후 이어지는 교류협력의 결과로 현재 양국 관구의 협정을 바탕으로 20명의 한국 출신 성직자가 일본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30년이 넘는 교류의 역사를 바탕으로 올 2월과 3월에는 동경과 서울에서 각각 2. 8 독립선언 100주년기념예배, 3. 1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예배와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지난 8월에는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와 반한 정책에 대해 양국 의장주교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80년대에 시작한 한일교류와 1995년 일본성공회 선교협의회와 전쟁책임고백 이래의 크고 작은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하며, 작게나마 그 일에 관여하고 있음도 큰 보람으로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아직도 일본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두 개의 제이로 인해 갈등하고 방황하며, 때로 세상의 여론에 설득당하고 삼켜져서 기독교 신앙과 함께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혐오와 윤리적 불기능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실례를 가까이 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의 교회를 한국 교회가 이해하고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갈등으로 고통받던 한국 교회를 일본 교회가 도왔던 역사를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한 바른 역사 이해와 실천을 위한 지혜를 함께 모아야 할 때입니다.

 

 

유 시 경 (성공회 사제)

 

최근의 한일 관계 악화를 배경으로 제목과 같이 <일본 기독교인들의 한국 역사 이해와 인식>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일본인 일반을 대상으로 한 조사는 선행 조사나 연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일본의 기독교인들을 별도로 대상화해서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를 묻는 작업은 제가 과문한 탓인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진행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등을 통해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한일 양국 교회가 협력해서 이와 같은 작업도 진행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번에는 원고 마감일까지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여러 일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하고 분석할만한 여유는 없었기에, 지금까지의 제 일본 생활 속에서 직접 만나고 경험했던 일을 중심으로 일부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면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들어가며

 

지난 6월 13일에 일본 센다이시에 있는 미야기학원여자대학의 초청으로 <2019년도 기독교교육 특별집회>에 강연으로 다녀왔습니다. 저를 강사로 추천한 분은 이 대학의 교수로 종교센터장을 맡고 있는 신멘 미츠구(新免貢) 목사입니다. 이 분은 제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동경의 릿쿄대학에서 교목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전국 교목협의회>를 통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신앙과 사역의 선후배로 지내고 있습니다. 강연회를 앞두고 후문으로 들은 이야기는, 강사 선정을 둘러싸고 대학 내에서 일부 반대의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야기인즉슨 소위 반일(反日) 인사를 왜 대학의 중요한 연례 행사로 학부와 대학원을 포함한 전체 재학생이 참가하는 특별 집회의 강사로 불렀느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강연 당일 대학의 강당에 모인 전체 학생 수는 약 900명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반응이 나왔던 배경을 생각해 보면 우선은 저를 소개한 약력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위 대학 관계자들의 반응을 유추해보기 위해 강의 홍보지에 실려 있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어 봅니다.

 

미야기학원여자대학/대학원 2019년도 기독교교육 특별집회

(2019년 6월 13일(목) 13:00-14:30, 대학 강당)

 

강사: 유시경 신부

1963년생, 성공회 사제.

(성공회 약력) 한국성공회 민주화청년협의회 의장, 성공회대학교 기획실장, 릿쿄대학 교목, 서울대성당 사제, 한국성공회 관구 교무원장

(외부활동 약력) 성공회 한일협동위원, 시인 윤동주를 추도하는 릿쿄회 초대 사무국장, 관동대지진 희생자추도회 실행위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장, 인권센터 부이사장 역임

(현재) 오사카교구 카와구치그리스도교회 주임사제, (사)평화를 일구는 사람들 이사 겸 국제위원장, (사)한국라보(LABO) 이사장, 삼일운동100주년민족대표

 

강연 제목: <정전에서 종전으로 – 조선반도의 통일 시계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구: 마태복음 5: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5:43-44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모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제가 생각하기에 보통의 일본인들의 경우, 위의 약력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거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극단적인 혐한 감정을 지닌 일본인이라면 한국 국적의 강사라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고 거부감을 보였겠지만, 소위 말하는 보통의 일본인들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보입니다. 미션스쿨이지만 강의에 온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은 논크리스찬이기에 평화와 원수 사랑을 말하는 성경 구절도 어쩌면 정말 생소한 것이었으리라 보입니다.

 

강의 내용 자체가 관동대지진이라든가 삼일독립운동, 남한과 북한의 통일과 관련한 최근의 북미관계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더욱 불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통 일본인들의 인식은 정말 기본 지식이 부족할 뿐더러, 관동대지진이나 삼일운동이라는 단어를 접해도 그것이 한국과 또 일본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우선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의 문제이기도 하고, 미국의 우산 아래 전쟁 패전 후 70년 이상을 근본적인 전후 처리 과정 없이 경제 부흥과 평화헌법의 틀 아래서 말 그대로 무사안일하게 ‘평화’로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해 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식자들은 이런 현상을 헤이와보케(平和ボケ)라고도 표현합니다. 즉, 전쟁이나 안전보장에 관해 일본을 둘러싼 현상이나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려 하지 않고, 분쟁 없이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된다는 환상을 지닌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만족하고 주변 상황에 아예 무관심한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강사 선정에 관여한 미야기학원의 관계자들은 모두 미션스쿨의 교원들이고 대부분이 크리스찬일텐데, 이 분들도 일반적인 일본의 헤이와보케 현상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 기독교인들의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대체로 이러한 일본 사회 일반의 인식의 틀 안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한반도의 통일이라고 하면, 남북의 분단 현실에 대해서조차 거의 인식이 없기에, 전혀 생소한 말이 되고 맙니다. 더군다나 코이즈미 수상 때에 북한 방문과 정상회담을 통해 오랜 봉쇄가 열릴 듯 기대를 모았던 북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기대도, 소위 납치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측이 의문을 제기하면서 초기부터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이어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는 지금까지 정부와 언론의 북한 때리기가 일상화되었고, 북핵 위기, 미사일 위협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더 심각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확인되면 즉각 일본 전국에 경보음을 울리도록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며 법석을 떨면서 전국즉시경보시스템(J-Alert)을 들먹이며 국민들의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일본의 기독교계에서는 피납여성 중 사망으로 통보된 요코다 메구미 씨의 양친이 독실한 크리스찬이기에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이해와 용서,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여러차례 조심스레 대화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요코다 메구미 씨의 양친은, 오히려 기독교인이기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을 뿐더러 테러국가로 지정된 북한과의 관계에 거부감과 의구심을 품고 납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일본 전국 네트워크의 대표가 되어 지금도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유족의 입장에서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젊은 딸의 운명에 대한 진위를 단정하기 힘든 고통을 한편 이해하면서도, 이로 인해 일본 기독교 안에서도 소수 그룹으로 한국과의 선교적 협력과 통일 문제에 대한 미래지향적 연대에 참여하려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무거운 십자가로 각인되어 있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일본 내에서는 납치 문제가 표면화된 이래 재일교포 금융 기구에 대한 거래 제재, 만경봉호의 입출항 금지, 재일한국조선인 교육기관인 민족 학교에 대한 무상지원 배제 등 정부의 일련의 조치와, 일부 지역에서 간헐적으로 보이던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행과 억압 등이 전국화되는 현상으로 이어졌고, 최근의 혐한 분위기로까지 확대 발전되어 왔습니다. 최근 일본 정부가 취한 대한 반도체 3종 부품의 수출규제,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기까지 이제는 북한 만이 아니라 남한에 대한 정부의 극단적인 조치가 맞물려, 남이건 북이건 조선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 강의의 시점은 수출 규제 조치가 발동되기 이전입니다만, 이런 전체적인 흐름을 감안할 때 이미 일본 사회와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 담겨있던 생각들이 보수우익 아베 정부와 집권 세력의 반한/혐한 조장 정책에 반응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 신멘 교수는 반대를 무릎쓰고 저를 강의로 불러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차례 신멘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이 분의 신앙 기조와 기본적인 생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이번 강의 전에 전교생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과 같은 특별집회 초대와 안내의 글에서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 여러분에게

2019년 5월 28일

대학종교센터장 미츠구 신멘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의 디지털컬렉션에는 일본군에 의한 테러 행위를 기록한 문서 <조선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발발->(Korean Independence Outbreak Beginning March 1)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는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교회 소각과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4월 15일 이른 아침, 몇 명의 일본 병사가 마을에 들어와서 성인 남성 기독교인들과 천도교 신자들은 통달을 받기 위해 교회로 모이라고 명령했다. 도합 23명의 남자들이 무슨일인가 생각하며 명령대로 교회로 향해, 자리에 앉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일본 병사들은 곧바로 교회를 애워싸고 창문으로 총을 쏘았다. 그 대부분은 사살당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초가지붕과 목조 건물에 불이 붙여져 , 교회 건물은 바로 불타올랐다. 도망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총검에 찔려 죽거나 사살당했다. 교회 건물 밖에 있던 6구의 시체는, 제대로 도망치지 못한 이들의 유체였다. 명령을 받고 교회로 향한 남자들의 부인 중 2명은 발포음을 듣고 깜짝 놀라 병사들 틈을 해치면서라도 교회에 가려고 했지만, 무참히 살해되었다.  한 명은 19살로 총검에 찔려 죽었고, 40살 넘어 보이는 다른 한 여성은 사살되었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병사들은 마을에 불을 지른 후 그 곳을 떠났다.”

 

이 사건은 온 몸에 털이 곤두서는 듯한 테러행위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우치무라 칸조(内村鑑三, 1861-1930)는 <D.C.벨에게 보낸 서신>(1919년 8월 4일자) 중에, 이 조선인 학살의 대부분을 “악마적 기관”인 “신문의 날조”, 즉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단정했습니다. 오늘날도 삼일독립운동 때에 벌어진 조선인 탄압을 거론하는 것을 <반일사관>이라고 보는 언설 풍조가 부분적으로 있지만, 조선반도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역사적으로 재검증하는 것은 <반일사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적 윤리의 책임에 관한 진지한 노력입니다.

 

위에 언급한 미국측 문서에는 “조선에서의 일본측의 윤리적 불기능 – 일본국 정부와 일본 국민의 책임”(The Moral Failure of Japan in Korea:Responsibility of the Japanese Government and Nation)이라 이름붙여진 보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신문기자가 “저 쪽 조선에서는 사태가 상당히 악화되고 있다. 여성, 어린이까지도 일본군에 살해되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기사화할 생각은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각 신문사에 대해 한국 사정을 가급적 보도하지 말라고 하는 긴급한 요구를 보냈다고 합니다. 매스컴의 역할은 진실을 보도하고 사실을 전하는 데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부는 시민을 무지한 상태로 두려고 생각한 듯 합니다. 이와 같은 <윤리적 불기능>은 도덕적 힘이 당시 충분히 작동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견을 이 땅에서 영원히 없애고자 노력하고 있는 국제사회 속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점하고자 한다”라고 격조 높게 선언하고 있는 현행 일본국 헌법 전문에 비추어 말하자면, “일본측의 윤리적 불기능”은 일본에게 있어 실로 불영예스러운 말입니다. 이 불명예를 어떻게 불식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이 향후 일본이 평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외교 정치적 과제일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상식에 관련된 윤리적 삶의 방식 문제이기도 합니다. 대학교육의 근본은 지식의 탐구를 통해 세계에 통용되는 윤리적 힘을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힘으로 연마하는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관계를 지니는 조선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2차례에 걸친 북미수뇌회담, 서로 국경을 넘어가며 가진 남북수뇌회담 등에 나타나 있듯이, 최근까지 없었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초대하는 강사 유시경 신부는, 서울대성당 사제, 릿쿄대학 교목을 역임하고, (중략) 15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카와구치 그리스도교회(오사카)에서 평화를 위한 실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영적인 목회를 실천하는 보기 드문 종교인입니다. 유신부님의 강의는 조선반도의 진실한 역사, 거기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 좋은 기회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내는 <공동창조의 원리>를 실천할 방법을 찾는 힌트가 주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이 글에서 신멘 교수가 삼일운동에 대한 우치무라 칸조의 반응을 소개한 것은, 그가 일본 기독교 초기의 인물중에서 기독교계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신앙인이고, 국제적인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 기독교사를 논할 때 반드시 주목해야할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치무라는 1891년에 교사로 재직중이던 동경 제1고등중학교에서 천황의 교육칙어 봉독식 중 천황의 서명에 절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 반한다며 이를 거부했고, 이것이 소위 “불경사건”으로 일파만파를 일으켜 교사직을 사임하기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두 개의 제이,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을 생애의 모토로 삼고 일본의 기독교 전도에 일생을 바쳤고, 러일 전쟁 직전의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적 흐름 속에서 비전론(非戦論)을 주창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사상계에 일본을 넘어서는 시점을 제기하였고, 관념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행동을 통해 일본 기독교는 물론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치무라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조선의 사정에 대해 일견 무심하고 무지한 모습을 보인 것에서, 신앙 양심을 지키며 싸운 대표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식민 지배에 관한 관점에서는 윤리적 불기능에 빠진 점, 어쩌면 오리엔탈리즘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치무라의 “불경사건”과 교사 사임은 이후 수년간 “교육종교충돌논쟁”으로 발전합니다. 당시 동경대학 교수였던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郎)는 “기독교가 일본의 국체(国体=만세일계의 천황이 일본에 군림하며 천황의 덕이 천양무궁하게 세계에 뻗친다는 메이지 쇼와시기 군국주의 일본의 정치체제를 일컫는 말)  와 맞지 않을 뿐더러 국가의 교육에 반한다”는 주장을 펼친 후 “교육과 종교의 충돌”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의 논지는 교육칙어가 국가주의, 현세주의로 충효를 윤리의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기독교는 비국가주의, 탈현세주의로 박애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종교와 국가, 교육에 관한 폭넓은 논쟁으로 전개되었지만 결국 일본의 기독교는이후의 역사 속에서 국가주의적 경향으로 기울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멘 교수와 같은 기독교인은 일본의 기독교인 중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재 일본의 사정입니다. 일본인 중에도 한국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역사 인식을 견지하며 일본의 국수주의적 시각을 벗어난 이들이 일부 있지만 아주 극소수인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인을 놓고 본다면, 더욱 더 소수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2017년까지 전체 인구의 1.1% 였는데, 2019년 들어 1% 미만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전체 인구가 약 1억 1,500만명 쯤이니 통계상으로는 기독교 인구는 100만명 정도입니다. 이런 가운데 일본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알게 모르게 여전히 두 개의 제이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 70-80년대에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의 과정 속에서 늘 문제로 안고 있었던 소위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보이는 듯 합니다. 4. 19혁명과 6. 10항쟁에 이어 촛불혁명으로 정권의 교체라는 민주주의의 땀과 피를 경험한 한국 사회와 달리, 일본은 일본의 시민사회가 스스로 민주주의를 위한 승리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채 의회민주주의라 불리는 체재 속에 지내오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이긴 하지만, 실상 자기 옷이 아닌 것만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격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점령과 함께 이식된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이 들으면 기분이 상할 지 모르겠지만, 많은 일본의 식자들이 인정하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인 일반 안에서도 한국에 대한 인식의 차가 큰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경우에도 거의 비슷한 정도로 인식의 차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예를 든 신멘 교수와 같이 윤리적 불기능을 염려하며 학문적 윤리 책임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검증을 실천하려는 일본의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신앙을 지닌 일정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여전히 두 개의 제이 중에서 재팬(Japan) 쪽에 더 무게 중심을 두는 경우의 사람들이라면, 같은 기독교인일지라도 천양지차가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일본 현대사회의 새 출발의 원점인 전쟁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제대로 검증되고 정리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1. 일본 종교교단의 전쟁책임

 

저는 그런 점에서 일본의 종교교단들, 그 중에서도 15년 전쟁으로 불리는 아시아태평양 전쟁기에 취했던 교회와 신앙인의 태도를 돌아보면서 군국주의화에 대한 무저항, 전쟁에 대한 묵인과 협력의 책임을 스스로 밝힌 <전쟁책임고백>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직접적으로 한국의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침략전쟁, 식민지 지배에 대한 죄책 고백의 배경과 과정, 이를 둘러싼 갈등과 논란을 통해 일본 기독교인들의 아시아와 한국 역사 이해에 대한 단초를 볼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2010년에 결성된 일본의 <오사카 종교인 헌법9조 네크워크>가 이듬해 12월에 발행한 “일본에서의 종교교단의 전쟁 책임”이라는 자료집을 바탕으로 몇 가지 사례와 현상을 적어봅니다.

 

당시 사무국장이던 타테이시 야스오 씨는 간행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932년 류조호사건(중일전쟁)으로부터 1945년의 태평양 전쟁 패전까지 소위 15년 전쟁 시기에, 일본의 종교 교단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전쟁 협력에 매진했습니다. 세속을 상대화하고 절대적 진리 아래 살아가야할 종교인들이 국가 권력에 추종해서 거룩한 교의를 왜곡하고 전쟁을 찬미, 전쟁에 반대하는 성직자를 처벌하고 탄압했습니다. 평화를 소망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만 할 종교교단이 일본 국민을 전쟁으로 내모는 선동자가 된 것입니다.

 

그 책임은 엄하게 물어야만 합니다. 분명 전쟁이 끝난 후 몇몇 교단은 전쟁에 협력한 것을 사죄하고 스스로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표명했습니다. 평화를 바라며 활동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직까지도 스스로의 전쟁 협력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거나 정당화하려는 교단도 있습니다. 또한 평화헌법을 짓밟고 일본의 재군비나 미국에 대한 전쟁 협력과 참가의 길로 이끄려는 움직임에 함께 하고 있는 교단도 있습니다. “왜 종교단체가 전쟁 협력을 했는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종교인들은 전쟁 책임을 어떻게 짊어지고, 현실 사회와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모든 종교는 “살인하지 말라”, “전쟁하지 말라”고 엄격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생명을 잃고, 마음에 상처를 입힌 통한에 대한 반성과 세계적 평화 여론의 결실로 만들어진 일본국헌법 제9조를 지키며 살려가는 일. 이것이야말로 과거에 잃었던 종교 본래의 입장과 가르침을 복권하는 것이고 종교의 존엄을 되돌리는 실천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지금까지도 일본의 종교인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지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역사 속에서 보였던 신앙의 굴절과 타협, 패배의 경험이 원죄처럼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원죄는 씻으려면 씻을 수 있는 것일텐데, 아직 깨끗하게 씻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체 일본인들에게도 이 원죄는 함께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치스의 독일이 전쟁의 원죄를 두고두고 사죄하며 새 독일로 거듭나려 노력해오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래도록 뚜껑을 덮어 두려 했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부끄럽고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역으로 그 일을 정당화하고, 피해자들의 한탄과 눈물을 피와 울부짖음으로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종교, 특히 기독교가 가담하고 조장하고 앞장섰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거듭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도 타산지것으로 삼아야 할 아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먼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니시야마 토시히코 신부의 글을 통해 일본 기독교의 단면을 보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 나라에 전쟁책임고백을 한 교단이 있었던가?>

종교는 마음의 문제, 시비선악의 가치관을 키워가기에, 전쟁을 선동하는 일에도, 평화를 일구는 일에도 관여합니다. 살인은 미화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력은 발군입니다. 위정자의 정치를 수긍하고,  실제로 일본의 근대화는 정교일치의 결과였습니다.

 

15년 전쟁의 발단은 1931년의 만주사변, 이 때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 것이 카톨릭 교회입니다. 1932년 봄의 춘계대재 때에 상지대학 학생들이 참배를 하지 않은 것이 큰 문제가 되어 그 해 가을 10월에 폐교 압박과 박해의 위기에 처합니다. 카톨릭교회는 “신사참배는 애국심과 충성심의 표명만이므로 금지하기 보다는 장려되고 있는 국민의 책무이다”라는 로마로부터의 승인령을 공표함으로 문제 해결, 이후 국가와 종교는 일체가 되어 거룩한 전쟁 수행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쳐 온 교회가, 증오와 살육을 미덕이라고 칭찬하고, 전사는 순교, 황국의 거룩한 방패가 된 영령들은 제신(祭神)이 되어 숭앙받고, 그렇게 숭앙하게 되면 기독교는 이름뿐인 껍데기, 국가의 운명이 절재적인 지고의 가치가 됨으로 신자도 교단도 국가의 종, 살아남는 것을 가능할지라도 마음과 혼을 버린 배교자와 마찬가지로 되었습니다.

 

종교의 위대함은 경허함, 즉 자신의 과오를 밝히고 고치는 데에 있습니다. 패전을 계기로 자유를 얻은 종교계는 어떠했던지요? 기독교의 대부분은 군국주의로부터 탄압받은 피해자, 전승국이 민주주의 체제를 가져온 해방자인것처럼 보인 시류에 올라타서 전쟁책임 고백과는 무관, 무지각으로 일관했습니다.

 

점령군의 ‘신도지령(신사에 대한 명령)’을 받아, 카톨릭 교회가 ‘신사에 대한 공적 사적 참배를 모두 금지'(1946년 5월 10일)하고자 했으나, 1951년에 “종교적이 아니기에 일단 허가한 행위를 미신이라고 금지할 경우 사람들이 혼란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전쟁기의 훈령이 유효하다는 로마의 훈령으로 구태의연한 채로 되고 말았습니다. 외면적으로는 기본적 인권과 주권재민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배려와, 비록 신앙에 반했을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완강한 권위주의의 어느 쪽이 진짜 이유인지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조금 이르거나 늦거나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교단이 전쟁책임고백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저로서는 결과책임이던지 본의 아니게 복종했다는 식의, 자기의 책임과는 관계없는 것이고, 가치규범의 근간을 좌우하고 때로는 국가와의 대립도 불사해야 할 종교 본래의 사명에 대한 자각이 결여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니시야마 토시히코 신부는 후일 본인의 부친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2005년도에 알게 된 후, 본인과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무단합사한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신앙에 비추어 인간을 신으로 예배하는 야스쿠니신사의 방식이 우상 숭배에 해당하기에 합사 취소청구를 했으나 야스쿠니신사로부터 거부당하고,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전부 패소로 끝났습니다. 역대 수상의 공식 참배로 일본 국내에서 위헌 논쟁을 야기시키고 있고, 아시아 각국으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있는 야스쿠니신사의 문제는, 위헌적 합사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본 기독교 교회와 신앙의 견지에서 도저히 양립을 용납할 수 없는 선교적 장벽임이 분명합니다.

 

이어서 일본 프로테스탄트 교단 중 가장 규모가 큰 일본기독교단의 내부의 엄중한 지적을 소개합니다. 일본기독교단의 오사카교구 의장을 역임한 히라야마 타케히데(平山武秀) 목사의 글입니다.

 

<대동아전쟁에 협력한 교단>

 

나는 일본기독교단의 전쟁책임을 다음 3가지 점에서 이해하고 싶다.

 

1.일본기독교단의 성립

먼저 첫번째는 일본기독교단의 성립 그 자체이다. 1899년 이래 여러차례 의회에 제출되었다가 폐안되었던 “종교단체법”이 마침내 1939년에 통과된다. 이는 국내 모든 종교단체를 전시체제로 편입시켜서 적극적인 전쟁 협력으로 끌고가려는 법률이었다. 이런 분명한 의도를 갖고 국가는 교회수 50 이상, 신도수 5천명 이상이라는 기준을 정해각 교단을 압박했다. 각 교회를 가능한 한 통합해서 국가가 관리하기 편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 종교단체법에 따라 일본 내 30여개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합동해서 만들어진 것이 “일본기독교단”이다. 전쟁을 향한 “국민정신총동원”정책에 굴복한 결과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 존재 자체가 전쟁책임의 대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전쟁협력의 실태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일본기독교단이기에 그 후 4년간 보인 전쟁협력의 실태는 정말 보기 역겹다. 전형적인 예로 교단 성립 직후에 발표한 “전시포교방침”의 강령에서 “국가의 대의에 철두철미하고,  대동아전쟁의 목적 완수를 위해 매진해야한다”고 적고 있다. 그 실천항목을 보면, ‘충군애국 정신의 자양에 힘써, 신도로서 멸사봉공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무렵 교단의 최고 책임자 2명이 이세신궁을 참배했고, 군용기봉헌 운동을 전개했다. 대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의 흐름에 편승해 조선반도와 타이완, 동남아시아의 각 지역에까지 일본기독교단의 전쟁협력의 움직임이 대동아공영권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1944년에 ‘일본기독교단으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의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서신’을 보냈는데, 일본이 벌이고 있는 이 전쟁은 동아 여러 민족의 해방을 위한 거룩한 전쟁이며,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일본제국의 전쟁을 신앙으로 함께 싸워나가지 않겠는가라고 호소하고 있다. 아시아 기독교의 정점에 서서 패권을 행사하는 오만한 태도이자, 일본제국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가장 극에 달한 것은 패색이 짙어진 1944년에 발표한 ‘일본기독교단 결전체제선언’이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4년, 전쟁 국면은 이제 결전 단계에 돌입했다… 황국의 철저한 승리를 위해 신도의 총력을 봉헌하기 바란다는 말로 맺고 있다.

 

  1. 전쟁책임의 문제

이처럼 2차 세계대전에 앞장서 협력한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은 전쟁 후 과연 어떻게 규명되었을까?

종전 직후인 1945년 8월 28일, 교단 최고 대표자가 전국 교회에 보낸 통달문 중에 “성단(천황의 결단)이 한차례 내려져… 본교단의 교역자와 신도는 이 성지(천황의 생각)를 받들어 국체호지의 일념에 철저하여 각자 신앙에 힘써 총력으로 장래의 국력 재흥에 힘을 기울여 이로써 성려(천황의 염려)에 응답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전쟁이 막을 내린지 13일 밖에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개칸스러운 내용이다. 일본기독교단의 본격적인 입장 표명은 1967년에 당시의 총회 의장인 스즈키 마사히사의 이름으로 발표된 “제2차 대전하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약칭 ‘전쟁책임고백’)이다. 내용과 표현에 부족함은 있지만 사회 일반을 향한 공식적인 표명이었고, 이후 기독교를 넘어 일본의종교 단체에 큰 파급효과를 미쳤다.

 

전쟁책임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그 전쟁의 책임을 스스로의문제로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느냐를 하느님께서 엄중히 묻고 계신다. 전후의 세월 속에서 그동안 교단으로서, 혹은 개별 교회의 목회자나 신도들이 진지하게 참여해 온 미일안보문제, 미군기지문제, 오키나와문제, 야스쿠니신사문제, 반전평화문제, 헌법9조를 지키기 위한 운동 등 모두가 이 ‘전쟁책임고백’이 통렬한 자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제가 속한 성공회의 전쟁책임고백은 매우 늦은 시기에 채택되었습니다. 일본기독교단의 전쟁책임고백 선언이 1967년이었는데, 일본성공회의 경우 전후 50년을 맞이한 1995년에 선교협의회를 개최하였고, 이 결과로 다음해 1996년의 총회 결의로 “일본성공회의 전쟁책임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10여년 이상의 준비 기간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교단 내부에서 반발과 저항과 비난의 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우여곡절 끝에 총회에서 채택된 선언문 자체가 어떤 죄를 고백하는지를 적시하고 있기에 그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일본 성공회는 전후 50년을 맞이하는 지금, 전쟁 전과 전시하에서 일본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지지하거나 묵인한 책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고백합니다.

 

1945년 일본 성공회는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여러 지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종식이라는 역사적 전기에 섰습니다. 그 해의 임시 총회 고시에서 사사키 진지 주교는 전쟁 중의 교회의 반성을 말하면서 “국책에 영합”하여 “교회의 사명을 망각”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이 때 총회도 주교회도, 교구와 개별 교회도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일본이 침략 지배한 이웃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진실한 화해의 관계를 신앙공동체로서 추구해야만 했습니다. 일본 성공회는 설립 이후 복음에 반하는 천황제 국가의 국체 사상과 군국주의에 계속 타협하며 강하게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성공회가 영국 미국 캐나다 등의 성공회와 관계를 갖기 때문에 관헌의 압박으로 신앙의 싸움을 경험한 교역자와 신도도 있었지만, 그 쓰라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서는 태도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또 국제적인 교제를 갖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침략 전쟁으로 인한 가해자로서의 국가의 모습에 눈뜨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지나사변 특별기원식”, “대동아전쟁 특별기도회”등을 개최하여, 타민족 지배와 전쟁 협력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긍정하고 교세의 확장과 체제 유지만을 목표로 한 닫힌 교회에 머물어, 주님의 복음이 가르치시는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2) 일본 성공회는 패전 후 바로 이러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 것과 전후 50년 동안 스스로의 책임을 자각하지 않고 화해와 보상에 적극적으로 일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 것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며 아시아 태평양의 사람들에게 사죄합니다.

 

전후 일본 성공회는 1947년 제22총회에서 1938년판의 공동기도서를 그대로 정본으로 채용했습니다. 이 기도서에는 천황의 지배를 하느님의 거룩한 뜻으로 간주한 “천황을 위한 기도”, “기원절(천황계 역사에 의한 일본국 설립일)”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이어 1959년에 기도서가 개정되기까지 교리문답에서 “이웃을 위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 “…천황 폐하와 그 지배에 따라…”라고 가르쳤고, 성찬식 중에 “모든 주권을 지닌 분, 특히 우리 금상 천황을 기념하며”라고 사제가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전후에도 전쟁 책임을 물어야만 할 천황과 그 국가 체제를 긍정하는 기도서를 계속 사용하고, 스스로의 자세를 자각적으로 바로잡는 일을 게을리 해왔습니다. 황국 신민화 정책의 결과로 야기된 오키나와 주민 학살과 강제 집단자결, 더욱이 전후 미군 기지의 위협 등 오키나와의 경험은 오키나와 교구를 통해 계속 전해졌고, 1972년에 일본성공회로의 이관을 향해 “역사와 현상을 이해하기 바란다”는 오키나와 교구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일본성공회 전체로서 응답을 게을리 한 것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3) 일본 성공회는 전후에도 차별적 체질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정의를 행하도록 부름받았음을 자각하고 평화의 도구로 세계의 분열과 아픔, 외침과 고통의 소리에 귀기을이는 교회로 변화하도록 기도하며 구합니다.

 

이상과 같은 우리의 회개의 징후로서 다음을 추진해 나갑니다.

(1)일본성공회의 전쟁 책임 고백을 전 교회가 공유합니다. (2)일본이 침략한 여러 나라의 교회에 대해 일본성공회의 사과의 뜻을 전달합니다. (3)역사적 사실의 인식과 복음 이해에 대해 되묻고 심화하기 위한 실천을 각 교구와 교회 안에서 계속해 나갑니다.

 

일본성공회의 경우, 1980년대 초부터 공식적으로 한국의 성공회와 선교협력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성인 대표단을 중심으로 한 역사인식과 선교 역사에 관한 검증으로 시작해서, 90년대 이후 청년세미나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1988년도부터 한일협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양국 성공회의 긴밀한 협력을 논의하고 실행하기 시작했습니다. 90년도에는 전쟁 전 재일한국인 장준상 부제가 설립했으나 일본성공회가 외면하고 탄압을 방관했던 오사카교구의 재일한국인 교회인 성가브리엘교회를 재건했습니다. 또 같은 지역에 재일교포 밀집 거주 지역의 특성을 살려 지역주민센타로 이쿠노센터를 설립했고, 오사카교구는 이후 재일한국조선인 특별선교위원회를 구성해서, 가브리엘교회와 이쿠노센터의 후원은 물론 한일선교 협력과 연대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이후 이어지는 교류협력의 결과로 현재 양국 관구의 협정을 바탕으로 20명의 한국 출신 성직자가 일본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30년이 넘는 교류의 역사를 바탕으로 올 2월과 3월에는 동경과 서울에서 각각 2. 8 독립선언 100주년기념예배, 3. 1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예배와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지난 8월에는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와 반한 정책에 대해 양국 의장주교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80년대에 시작한 한일교류와 1995년 일본성공회 선교협의회와 전쟁책임고백 이래의 크고 작은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하며, 작게나마 그 일에 관여하고 있음도 큰 보람으로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아직도 일본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두 개의 제이로 인해 갈등하고 방황하며, 때로 세상의 여론에 설득당하고 삼켜져서 기독교 신앙과 함께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혐오와 윤리적 불기능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실례를 가까이 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의 교회를 한국 교회가 이해하고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갈등으로 고통받던 한국 교회를 일본 교회가 도왔던 역사를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한 바른 역사 이해와 실천을 위한 지혜를 함께 모아야 할 때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한일 분쟁, 기독교단체의 반응

“한일 기독교단체 “日 수출규제 철회, 평화헌법 수호 촉구”” KBS, 2019. 07. 17.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244197&ref=A

 

한일 분쟁 이해

“알기 쉬운 한일 분쟁” 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19. 08. 01.

https://cemk.org/13969/

 

일본 내 기독교의 움직임

“한·일 갈등 속 기독교의 역할” 유코리아뉴스, 2019. 08. 05.

http://www.ukore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985

 

한일 분쟁 인식 평가

“한일 분쟁 정부 대응 긍정, 부정 평가 인식” 목회데이터연구소, 2019. 08. 23.

http://www.mhdata.or.kr/bbs/board.php?bo_table=week1&wr_id=79

 

일본 기독교 이해

“교회사로 세상보기 – 일본 기독교” 팟캐스트 한국 기독교사 톺아보기, 2019. 08. 26.

http://www.podbbang.com/ch/13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