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3.1절 기념주일 예배 설교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41
조회
1746
(2006년 2월 26일 주현절 여덟째 주일, 3·1절 기념주일)

성경본문: 베드로후서3장 8절-13절
찬송:162 344
교독문: 53.(계시록 21장)

<본문주해>“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10절 전반절)
베드로 사도는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10절)

오신다던 주님이 오시지 않자 초대교회는 지리멸렬의 위기에 처했다. 기대도 설렘도 없는 믿음처럼 허망한 것은 없을 것이다. 주님 오실 날만을 고대하면서 온갖 불편을 감내했던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교회를 떠났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믿음의 열정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베드로는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긴 기다림의 시간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성도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8절)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르다고 말한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조급증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 느려 보인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하나님 믿기도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이 일어날 때에 일어나도록 하신다. 물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그건 우리의 한계이지 하나님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하고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 이뤄질 때 우리들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변한다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는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에 또 하나의 통찰을 덧붙이고 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

지금은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받을 수 있도록 심판을 연기하고 계신 집행 유예의 시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지금은 적당히 살아도 되는 시간이 아니라, 치열하게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삶을 조율해야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굳게 잡을 것은 굳게 잡아야 한다.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추수의 때가 되어야 한다. 불이 나면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불이야' 하고 외치면서 잠든 사람들을 흔들러 깨운다. 임박한 심판의 시간을 내다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예언자들은 스스로를 나팔을 불어 잠든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는 파수꾼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을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나팔수로 부르셨다.
지금은 비상 시기이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날(10절)이 다가오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 우리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집착했던 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베드로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한다.(11b-12a) 우리가 온 몸과 마음으로 추구해야 할 '거룩한 행실'은 무엇인가? 욕망을 절제하는 것, 이웃에 대한 섬세하고 부드러운 이해와 배려, 덜 쓰고 많이 나누는 것, 복의 매개자가 되기를 꿈꾸며 사는 것…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이런 초대를 시시하게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구원의 길은 언제나 낡은 길처럼 보이고 매력이 없어 보인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고리타분해 보인다. 방주를 예비하는 노아를 보면서 사람들은 비웃었다. 쓸데없는 짓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노아가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흥청망청 살았다(참조: 마24:38-39). 그들은 자기들이 멸망의 가장자리에 와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능력이 된다. 더럽고 속된 일에서부터 자기를 구별하고, 항상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심판의 날은 멸망의 날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는 날이다.

너무 과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요한계시록 11장7절)의 말씀처럼 무저갱의 문이 열리고 사탄이 풀려 나와 온 세계 사람들을 미혹하고, 사람들을 모아 싸움을 붙인다는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두렵다. 지금이야말로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자다가 깨야 할 때'(로마서13장:11절)이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베드로전서5장 8절) 시대이기 때문이다.

<결론> 며칠 있으면 ‘3.1 절’ 87주년이 온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

‘기미독립선언문’의 한 구절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말로 읽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 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 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 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절)라는 본문의 말씀과 너무나 똑 같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온다고 믿었던 33인의 민족대표들의 믿음은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13)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어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나됨을 잃지 않고, 속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북받쳐 살아가는 사람은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고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었던 분들과 같은 신앙의 독립군이다. 죽은 물고기는 물살에 떠밀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신앙의 독립군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민족이 일제에 침탈당하지 10여년, 언제 독립을 찾을지 막막한 가운데서도 민족해방은 반드시 오는 어김없는 시세요 변하는 세계의 조류라고 믿었던 바로 이 마음과 이 확신이야말로 난폭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견지해야 할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힘의 시대에 살면서 도의의 시대를 바라보는 것, 엄혹한 겨울을 살고 있지만 온화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를 보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가야만 할 우리의 길이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덜 쓰고 많이 나누는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체질화한 폭력적인 삶의 습성들을 내려놓고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하루만에 모든 걸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피에르 신부)

신앙의 독립군은 어떤 일이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하지 않는다. 그것이 선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기에 행하는 것이다. 그 행위가 비록 강물에서 물 한 컵을 덜어내는 보잘것없는 일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는다.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만 있으면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작하면 이루어주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너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11)라는 베드로의 질문 앞에 서 있다. 이 물음 앞에 자꾸 서다보면 우리는 신앙의 독립군이 될 수 있다. 이 힘겨운 유예의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사람들을 행해 분명한 나팔 소리를 발해 죽어가는 심령들을 깨우고, 마침내 새벽처럼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