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스승의 목소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38
조회
1021
(2006년.1월 22일 주현절 셋째주일)

설교제목 : 스승의 목소리
성경본문:이사야 30징:18절-26절
교독:49 빌립보서 2장
찬송:204, 363

18: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서리니 이는 너희를 긍률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19: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서 거하는 백성들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 네게 응답하시리라.
20: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21: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22: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을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면서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23: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비를 주사 땅 소산의 곡식으로 살찌고 풍성케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너희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24: 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육지창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25:크게 살육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 각 고산, 각 준령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26: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어떤 소요 속에 휘말려들어갈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사실 전쟁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일반 백성들이야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도자들의 욕심 때문에 전쟁에 휘말리기도 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도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이에 끼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우리 역사를 ‘고난’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한 분도 있습니다만, 괴로움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날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충돌하는 경계선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었습니다. 널뛰기처럼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는 두 힘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널의 한가운데 앉아서 균형자 역할을 하는 사람의 몸이 이리저리 기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몸을 의탁할 때도 있었고 이집트의 힘에 몸을 맡길 때도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활동을 했던 주전 8세기는 앗시리아의 융성기입니다. 무서운 기세로 제국의 서남부 지역을 휘몰아치는 앗시리아의 기세에 눌리던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힘을 의지하여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인 이사야는 지도자들의 그런 선택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사30:3)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일반이라.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려 들어가리니 애굽왕 바로는 그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36:6)

떠오르는 해처럼 세력이 승한(旭日昇天) 앗시리아에 비하면 이집트는 서산에 지는 해 신세(西山落日)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말은 어느 쪽이 더 강력한지에 대한 판단을 잘못했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어느 쪽이 되었건 힘을 바탕으로 한 제국은 믿을만한 게 못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무기의 그늘’이거나 ‘가시나무 그늘’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무기의 그늘 아래서의 삶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고, 가시나무 그늘 아래서는 뜨거운 볕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세태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는 이사야의 말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도를 버린 이스라엘의 파멸은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배가 불룩 튀어나온 담벼락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듯, 토기장이의 항아리가 깨져 산산조각 나듯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힘은 없고, 파멸의 시간은 다가오는데 앉아서 당하라는 말입니까? 불안에 떨고 있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해 이사야는 말합니다.

“ 너희는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사30:15)

구원의 길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등지고 걸어온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향해 서야 합니다. 그런 후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저는 이 말씀과 만나는 순간 전율을 느꼈습니다. 진정한 힘은 고요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희망
이사야는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대한 파도가 해안을 덮치듯 밀려오는 앗시리아의 세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들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산꼭대기에 남은 그들의 깃발만 외롭게 펄럭일 때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야말로 하나님께서 백성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백성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 그것을 차마 볼 수 없어 가슴 아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 베푸실 날을 기다리십니다. 백성들이 돌아와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날을 말입니다. 외세의 도움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고, 터무니 없는 말에 귀가 솔깃했던 지난 날을 부끄러워하며 주님께 돌아올 때 공의와 은혜의 하나님이 일어서십니다.

그 긴 기다림의 시간은 하나님께도 고통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겪는 고통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그들이 전심으로 당신께로 돌아설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백성들이 돌아섰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르짖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을 감싸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낮 동안 내내 놀다가 밤 늦게 숙제를 시작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졸음은 쏟아지고, 과제는 벅차고, 마음의 압박감 때문에 거의 사색이 된 아이들을 보면서 저는 제가 그 숙제를 해주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야 했습니다. 아이의 고통을 보며 마음이 미어지면서도 끝끝내 자기 손으로 그 일을 해내도록 한 것은 무정한 아버지여서가 아니라, 아이를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법도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응석꾸러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 주님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30:20)

고통과 시련을 통해 우리는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고통과 시련이 우리의 스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스승은 우리에게 마땅한 삶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 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30:21)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스승은 우리 뒤에서 우리를 지도하십니다. 먼저 우리에게 이 길로 가라, 저 길로 가라 간섭하시기보다는 우리가 선택한 길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에게 바른 길을 일깨워주십니다. 그 스승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인생의 방향을 선택해주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보지는 못하지만, 우리를 보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마음에 떠오르시나요? 제 마음에 떠오르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성령님의 가르침을 신뢰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내면에는 엄청난 영적인 에너지가 공급됩니다.

● 우상을 내던진 삶
이렇게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스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금과 은을 입힌 우상들을 마치 불결한 물건을 내던지듯 버리게 됩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ㅎ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모든 것을 잃었기에 그는 불행합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삶에 한없는 복을 내리십니다.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 소산의 곡식으로 살찌고 풍성케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너희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일 것이요.”(30:23)
“크게 살육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에 각 고산, 각 준령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30:25)

돌아보면 우리 삶은 은총의 징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무엇이든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게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평화와 생명의 씨앗에 물을 주고 키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당장 결실이 보이지 않아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확신이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줍니다. 가장 큰 시련의 때에도 주님의 은총은 계속됩니다. 사실 인생의 폭풍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짐이 없었다면, 십자가를 지닌 주님과 발걸음을 맞출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시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연약하지 않았다면 약할 때 더 강해지는 신앙의 신비를 경험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사야가 경험한 하나님은 상처를 싸매시는 분이십니다. 매 맞아 생긴 백성들의 상처를 고치시는 날을 가리켜 예언자는 “달빛이 햇빛처럼 밝아지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지는 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대체 어떤 경험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우리 마음에서 어둠이 물러가는 날,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진 날,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내 사는 꼴을 돌아보고, 세상을 보면 마음이 어둡습니다. 평화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곧 정의라는 생각이 지배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힘을 정의로 알았던 앗시리아도 이집트도 바벨론도 로마도 무너졌습니다. 연약해 보이지만 사랑과 공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알려주시는 스승이 계십니다. 그 스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면 우리가 걷는 길에는 평화와 생명이 뒤따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고, 자유인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