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세계화 20돌, 행복하십니까?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5-01-20 21:42
조회
1692
[한겨레21] 세계화 20돌, 행복하십니까?


정승일 | 대안연대회의 정책위원·베를린자유대학 박사


빛은 흐려지고 그늘은 깊어가는 금융세계화… 한국 경제개혁의 방향성에 대한 반성과 점검 필요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즈>는 지난 5월6일치 기사에서 미국의 마케팅 교수 테오도어 레빗이 1983년 5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기고한 글에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면서 이제 우리는 세계화 20돌을 맞이했다고 썼다.

레빗이 지적한 것은 전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문화적 차이를 불문하고 같은 마케팅 전략을 펼치는 맥도널드 햄버거 등의 사례였는데, GM 등 미국기업의 다국적기업화가 시작된 60년대이래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세계화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그의 글이 처음이었다. 그 뒤 세계화라는 용어는 금융세계화, WTO 체제, 항공교통 증대, 인터넷 보급 등과 결합되면서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인 90년대를 열었다.


파생금융상품은 금융시스템 파괴하는 시한폭탄

많은 사람들은 간편해진 해외여행과 인터넷을 지적하면서 세계화의 편리성을 지적한다. 세계화가 일정 부분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오늘날 세계화로부터 고립된 폐쇄적 삶은 후진성과 시대착오를 의미한다.

특히 인터넷과 같은 쌍방향 통신이 내포한 원리적 평등성과 다양성은 낙관적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지만 세계화는 다자간 호혜평등과 다양성이 아니라 일방주의와 획일성,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이는 금융세계화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많은 주류학자들은 금융세계화가 저렴한 이자율의 해외은행 대출 이용, 파생상품 거래를 이용한 위험분산 기회, 범세계적 차원에서 자원배분 등을 통해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고 기업효율성을 높여주며, 특히 시장규율을 증대시킴으로써 모럴해저드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글로벌 스탠더드로 불리는 미국식 주주가치 자본주의의 장점도 강조된다.

물론 글로벌 금융, 주식시장의 긍정적 효과가 단기적으로는 관찰된다. 하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보르도와 아이헨그린 같은 학자들은 60년대까지 20년 동안 개발도상국에서 1회의 금융위기가 일어났는데 반해, 73년 이후 98년까지 26년간 무려 45회의 금융위기가 일어났다고 지적하고 있다.

폴린은 주주가치 자본주의에서는 기업의 장기적 투자가 어려우며 실물경제의 성장과 고용촉진보다 금융, 주식투기가 더 중요해진다고 주장한다.

금융세계화의 단점으로 그간 지적되어온 점이 파생상품 거래의 위험성이었다. 최근에는 미국의 조지 소로스, 워런 버핏 등 유명 투자자들이 파생금융상품을 금융시스템을 파괴하는 시한폭탄이라고 비판하였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국제 파생금융상품 시장은 90년 3조달러에서 지난해 141조달러로 늘어났다. 파생상품 거래의 위험성을 막기 위해 토빈세 등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IMF 등에 속한 주류 경제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은 파생상품 거래만이 아니라 국경을 넘나드는 은행간 단기채무와 포트폴리오 투자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는 유럽, 일본, 미국의 은행들이 동아시아의 은행, 여타 금융회사, 대기업에 빌려주었던 대출금을 급속하게 회수하면서 발생했다. 급작스런 대출회수에 직면한 한국, 타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은 국가적 부도를 피하기 위해 IMF 구제금융에 의존해야만 했다. 결국 급격하게 늘어난 은행간 국제 단기채무가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원인이었다.


한국 금융위기 원인 다시 살펴야

97년 동아시아, 특히 한국의 금융위기는 그 원인을 둘러싸고 국제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위기의 원인을 한국 정부의 경제개입과 재벌에서 찾았다. 관치금융과 재벌경영에 따른 정경유착과 모럴해저드, 비효율성이 집중적으로 부각되었고 그로 인한 시장규율 부족과 과잉투자가 위기의 원인이라는 주장이었다.

크룩만, 돈부시 등 미국의 유명학자 대부분이 이 입장을 취했고 한국의 정책결정자, 학자들도 이를 따랐다. 경제민주화를 지향하던 한국의 진보적 시민단체와 진보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IMF와 김대중 정부가 취한 경제개혁보다 더 급진적이고 철저한 시장개혁을 원했고 한국경제를 ‘철저한 시장규율’에 의해 지배되는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바꾸고자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로 명명된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가 이들의 개혁모델이었다.

하지만 스티글리츠, 제프리 삭스 같은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동아시아, 특히 한국의 경제위기 원인을 다른 데서 찾았다. 이들은 세계화된 금융시장은 근본적으로 ‘정보 비대칭성’의 문제를 심화시키며 따라서 남이 투자하면 자기도 투자하는 부화뇌동적 투자, 즉 떼거리 행동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에는 소로스와 크룩만도 이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80년대 말,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를 개발도상국들에 권고하는 국가발전 모델로 채택했다. 자유시장과 자유민주주의, 이를 위한 금융, 주식시장 개방과 자유방임주의가 목표로 선언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독재’(개발독재)로 낙인찍혔다.

90년대 초반, 월스트리트는 ‘이머징 마켓’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키면서 신흥시장에 대한 투자를 폭발적으로 늘려나갔다. ‘이머징 마켓’이란 금융시장을 월스트리트에 개방한 동아시아, 남미, 동유럽의 신흥성장국들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93년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구호로 금융시장을 대폭 개방했다. 이에 따라 이들 신흥시장에 급격한 국제자금이 유입되는데, 이 풍부한 유동성은 이들 경제에 거품을 만들어낸다. 한국에서는 재벌기업이 대규모 과잉투자를 감행한다. 대우그룹이 시티은행 등 국제은행들의 전폭적인 자금 지원을 받으며 동유럽 이머징 마켓에 투자한 것도 이 시기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며 이머징 마켓에 떼거지로 흘러든 국제자본은 이들 나라에서 과잉투자, 부동산가격 폭등, 주가폭등 등 거품경제를 만들어냈다. 이 거품이 꺼지면서 금융위기를 일으키는데 94년의 멕시코-아르헨티나 금융위기가 그 첫 번째였으며 97년의 동아시아 위기가 두 번째, 그리고 98년의 러시아, 동유럽 위기가 세 번째였다. ‘이머징 마켓’신드롬이 끝나자 월스트리트는 이번에는 ‘신경제’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이머징 마켓에서 탈출한 글로벌 자본이 이번에는 인터넷과 정보통신 산업으로 유입되었다. 또 하나의 떼거지 행동, 즉 금융경제학자들이‘자기강화’ 메커니즘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다시 출현했다. 몰리는 돈이 만들어낸 호황과 자산가치 상승이 다시 또 돈을 몰리게 하는 현상이다. 글로벌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시한폭탄 돌리기’ 게임에서 게임을 주도한 월스트리트는 막대한 수익을 얻었지만 세계경제는 거품경제와 그 파산으로 멍들어갔다.


국제자본이 부추키는 거품경제에 대비할 때

일본의 이토 같은 학자는 90년대의 파국적 금융위기들을 가르켜 “21세기형 금융위기”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지금 21세기에 접어든 인류는 앞서 경험한 4개의 금융위기보다 훨씬 심각한 거품붕괴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즉 95년 미·일 역플라자 합의 이후 고달러 상태에서 미국으로 국제자금 유입이 지속됐으나 지난해 말부터 달러가치 하락에 따라 자금이탈 추세로 역전되고 있다. 이것이 앞으로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에 악순환의 ‘자기강화’메커니즘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인 미국식 주주가치 자본주의의 파탄 가능성은 그간 미국을 모델로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해온 한국 정부와 그리고 더 급진적인 시장개혁을 주문해온 일부 시민단체와 진보언론, 나아가 ‘시장의 자율성’을 명분으로 자기반성을 회피해온 재벌 모두가 되돌아보아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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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한겨레21>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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