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모든 외채는 불법이다!- 2회 세계사회포럼 외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2-04-02 00:03
조회
2003
모든 외채는 불법이다!
- 2회 세계사회포럼 외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류미경(투자협정 WTO 반대 국민행동 사무국)


풍부한 자원, 그러나 빈곤하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 시에 있는 한 체육관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각 국 언어로 된 플래카드와 각 국 전통문양의 천으로 장식되었다. 무대 앞은 다양한 채소와 과일로 만들어진 각 대륙 모형으로 장식되었고, 실업노동자, 소농 조직들의 깃발이 객석 곳곳에서 펄럭였다. 체육관 입구에는 씨앗과 농산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남반구의 풍부한 자산으로 가득 메워진 이 곳에서는 2월 1일, 2일 이틀동안 '외채와 금융시스템에 관한 국제 민중법정'이 열렸다.
잠깐 민중법정이 시작되기 전 이틀동안 진행된 준비회의 풍경을 소개한다. 앙골라, 말리, 짐바브웨, 아르헨티나, 브라질, 니카라과, 필리핀, 그리고 한국까지,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활동가들이 모이니 의사소통이 문제가 되었다. 사회자는 곧바로 '같은 나라의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나라끼리 모여 앉으면 통역하기가 쉬울 것 같다'고 제안했다. 각각 영국과 미국, 프랑스, 스페인의 식민지로 세 팀이 만들어졌고, 일본과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한국과 브라질이 남았다. 그렇게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지닌 나라들을 분류하는 방식치고는 너무도 간단했다. 참석자들의 씁쓸한 웃음은 이어질 민중법정에서 쏟아져 나올 이야기들을 미리 보여주는 듯 했다.

국제민중법정의 배경과 구성

이 법정은 남반구 외채거부운동 네트워크인 '주빌리 사우스(Jubilee South)'와 이를 지지하는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되었다. 북반구의 정부와 은행, 초국적 기업, 그리고 IMF, 세계은행, 기타 국제금융기관들이 발생시킨 외채가 남반구 민중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매개가 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남반구 민중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부당하게 계약된 것이라서 갚을 필요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 법정을 개최한 취지였다. 이에 앞서 2000년 1월 브라질에서는 주빌리2000을 중심으로 교회, 정당,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직접 '정부가 IMF와 맺고 있는 협약을 유지해야 하는가?' '공공예산을 계속 외채를 갚는데 지출해야 하는가?'를 놓고 전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500만이 넘는 국민들이 참여하여 90% 이상이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성과를 이루어 냈다. 이러한 경험이 하나의 아이디어가 되어 그 범위를 남반구 전체로 넓힌 국제민중법정이 열리게 된 것이다. 주빌리 사우스는 작년 7월 제노아 G8 정상회담 반대투쟁에 즈음하여 열린 '외채의 불법성'에 관한 회의에서 이에 대한 계획을 제출하였고, 법정을 준비하면서 대략 남반구 45개국의 외채에 관한 사회운동들을 조직하였다. 물론 각 국의 사회운동들이 외채문제에 관한 대중적인 투쟁을 확산해 내는 것도 민중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과제였다. 'Court'가 아닌 'Tribunal'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이 민중법정은 사법권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견표명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각 국의 법적, 윤리적 전통, 면밀한 조사와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제출하는 의견에 최대한 공신력을 얻으려고 했다.
민중법정 참석자들은 기소, 판결, 배심원, 증인, 변호로 각각 역할을 나누었다. 판결은 라틴아메리카 각 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민중들의 투쟁의 힘으로 군부독재 세력들을 재판에 회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5월 광장 어머니회(Madres de Plaza de Mayo), 과테말라 진상규명위원희 출신의 활동가를 포함하여 5명이 맡았다. 또한 1908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아르헨티나의 아돌프 뻬레스 에스끼벨을 비롯,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인 데니스 부르투스, 쿠바 노동자센터(CTC)의 뻬드로 로스, 탄자니아의 의원 로즈마리, 하이티 출신의 세계여성행진 활동가 마리아 프란츠 요아킴 등 총 10명이 대륙과 계층을 대표하여 배심원의 역할을 맡았다. 증인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각 국에서 노동자, 실업노동자, 원주민, 여성, 소농, 청소년 등 각 계층을 대표하는 2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기소는 멕시코 자유무역반대행동네트워크(RMALC)의 알레한드로 빌랴마르 등이, IMF와 WB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전달해주는 정도의 변호는 벨기에 제3세계 외채탕감 위원회의 에릭 투상이 맡았다.

기소: "남반구 외채문제의 책임은 IMF, 세계은행 그리고 북반구 정부에…."

개회가 선언되고 첫 순서인 기소를 통해 민중법정은 현재 남반구의 모든 국가들이 지고 있는 외채가 불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외채로 인한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IMF, 세계은행과 북반구 정부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채의 불법성이 제기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남반구 민중들에게는 외채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의 자본을 증식하고자 하는 북반구 채권자들이 외채를 통해 모든 부담을 남반구 민중에게 전가한 것일 뿐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직후 유럽에 자신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파괴된 유럽의 재건을 촉진시킨다는 명목으로 미국은 유럽의 16개 국가에 차관 형태로 125억 달러를 원조했다. 한 편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채굴권을 국유화하고, 이에 따라 유가가 급등하자, 집중된 석유 달러를 리사이클링 할 필요가 생겼고, 이를 남반구에 차관을 주는 형태로 해결한 것이다. 북반구의 산업국에 천연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대가, 수출 주도형 전략으로의 전환을 지원하는 대가, 혹은 남반구 국가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댐 건설 등의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대가 등의 명목으로 이러한 차관이 남반구에 도입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계약은 남반구의 독재정권이 민중들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체결한 것이다. 이들은 해외 금융기관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으며, 북반구의 채권자들은 차관을 통해 불법적인 독재정권을 지원한 것이다. 남반구의 민중들이 낄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후 1970년대 말, 미국은 일방적으로 이자율을 4-6%에서 많게는 20% 이상으로 높였고,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 남반구의 채무국들은 이제 이자를 갚기 위해 빛을 더 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둘째, 대부분의 외채는 이미 몇 배로 상환되었다. 1982년 이후 지난 20년 간 자금의 흐름은 남반구에서 북반구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98년, 41개의 중채무빈국(HIPIC)들은 그들이 빌려온 것보다 1조 6800억 달러나 많은 금액을 상환했고, 같은 99년만 해도 3000억 달러의 외채 상환이 이루어졌다. 결국 1981년 이후 3세계 국가들은 그들이 빚진 금액보다 6배나 많은 3조 7000만 달러를 북반구로 이전시켰음에도 여전히 2000억이나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식민지배 당시 수탈해 간 남반구의 천연자원 등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결과이다.

셋째, 외채는 남반구에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대다수의 남반구 정부들에게 금융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국내 경제의 성장 가능성을 희생하였고, 대다수 민중들이 교육, 보건, 주택보급, 의료, 고용 등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노약자와 어린이들에 대한 복지, 원주민들의 생존조건, 토지개혁 역시 희생당해 왔다. 특히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에서는 매년 보건의료와 사회보장을 위해 쓰이는 예산보다 4배나 되는 금액을 외채를 갚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출을 통한 수익은 자국민의 소득재분배에 기여하기보다는 외채를 갚는데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에이즈 등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한 국가 예산 확보가 외채 상환과 이자 지불에 밀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방치되며, 이로 인하여 경제활동 인구가 감소되어 저개발의 악순환은 지속된다.

넷째, 외채는 IMF와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는 매개가 된다. 채무국들은 외채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다시 차관을 제공받아야 하고, 이를 위해 치명적인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한다. 구조조정은 수출 지향적인 성장과 금융과 무역의 자유화, 긴축재정, 사유화와 탈규제화를 부과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식료품 가격의 상승과 실업률의 증가, 정부 서비스의 감축, 빈곤을 심화하며 남반구 국가들의 경제를 산업화된 북반구의 이익을 위해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공급하는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채무불이행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북반구의 채권자들은 부채를 주식, 혹은 환경개발권과 맞바꾸어 채권국들을 투기자본의 놀이터로 만들고, 생태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증언: "외채와 IMF 구조조정은 남반구 민중들을 죽음의 늪으로 내몰았다"

기소가 끝난 다음에는 곧바로 증언이 이어졌다. 증인들은 자신의 지역적, 계층적 특성을 드러내는 의상을 차려입고 증언대에 올랐다. 각 국의 사례를 통해 증인들은 외채가 불법적이고 민중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외채로 인해 보건예산이 삭감되어 의료 서비스가 취약한 짐바브웨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병에 걸렸지만 의약품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세상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한 젊은이의 증언은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도입된 차관과 이자 지불 상환을 통계로 비교 분석하여 발표하는 등 객관성을 강조한 증언도 있었다. 민중법정 참가자들은 이틀동안 쏟아진 증언을 경청하며 서아프리카 말리에서 전체 인구 80%를 차지하는 농촌의 민중들이 식량사정이 열악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전체 예산의 13%를 외채 상환에 쓰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했다. 나이지리아의 증인은 자국의 외채가 281억 달러나 되는데, 군부독재자들이 스위스 은행과 미국계 은행 비밀계좌로 빼돌린 500억 달러의 재산을 환수하면 외채를 충분히 갚고도 남는다고 이야기 해, 남반구의 독재정권과 해외의 은행은 오직 금융시스템을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민중들의 삶과 사회적 가치들을 팽개치는 데 뜻을 같이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필리핀의 증인 역시 4488조 페소에 이르는 외채를 갚기 위해 예산을 40%이상을 사용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민주노총 금속연맹의 김희준 전 부위원장 역시 증인으로 참석하여 98년 만도기계 부도 이후 이루어진 구조조정의 과정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사례를 통해 '97년 말 한국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도입된 IMF 구조조정이 한국사회를 초국적 자본이 금융적 이익을 최대한 남길 수 있는 신흥 주식시장으로 탈바꿈시켰고, 이 과정에서 재벌에게는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특혜를 부여한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와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였다'고 이야기했다. 총파업 투쟁이 전개되는 대목에서는 모든 참석자들이 환호하였다.
증언 사이에는 각 대륙을 대표하는 공연도 진행되었다. 아프리카의 '아만다!(민중에게 권력을!)'라는 힘찬 구호로 시작하는 전통리듬에 맞춘 춤, 필리핀 민중가수의 노래, 아르헨티나 12월 봉기를 재현한 퍼포먼스 등이 무대 위에서 펼쳐질 때마다 박수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객석에 있던 많은 라틴아메리카 참석자들은 아르헨티나의 공연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판결 : "모든 외채는 불법이다."

증언이 모두 끝나자 배심원들은 판결문을 통해 "남반구의 외채는 사회적인 고려 없이 다수의 민중들에게 전적으로 손해를 입히고 있다. 이는 남반구 엘리트들의 요구에 의하여 국내외의 법적 틀을 초과하여 생성된 것이다. 이는 주권을 손상시켰고, 불법적이며, 불공정하여 윤리적, 법적, 정치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는 결정을 발표하였다. 동시에 ①외채 상환을 빌미로 남반구의 자연적 유산과 자원들을 유출시키고 민중들을 착취한 죄, ②천연 원료를 싼값에 채취하고 사들여 산업 생산품을 높은 값에 되파는 불공평한 교환 체계를 유지하여 외채를 증가시킨 죄, ③남반구 채무국들이 제대로 상환을 했음에도 외채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늘어나게 만든 높은 이자를 부과한 죄, ④남반구에서 국제 은행과 기업 간의 사기 조작으로 존재하지 않는 부채를 만들어 내고, 생산을 옹호하는 대신 착취의 메커니즘으로 소수만을 부유하게 한 죄, ⑤구조조정과 기타의 경제정책으로 민영화를 부추기고, 사회적 일자리 창출과 경제의 재활성화에 투자되어야 할 돈을 외채를 갚는 데 사용되도록 한 죄, ⑥ 민중과 UN, 인권단체에 의해 거부된 독재자들이 권력을 지탱하고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차관을 주어 독재체제를 지원한 점, ⑦남반구 민중의 인권을 침해하면서 오직 초국적 기업과 북반구의 산업국의 이해만을 옹호하는 경제통합 정책을 부과한 죄, ⑧ 외채 재협상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채무국들을 정치·경제적으로 침체된 상황에 놓이게 한 죄, ⑨민중들을 기만하여 이미 몇 배로 상환된 채무를 계속 징수하고 있는 죄 등에 대해 북반구의 은행, 초국적기업, 정부, IMF, 세계은행, 기타 금융기구들, 그리고 남반구의 정치엘리트들이 공범이라며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배심원들은 권고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민중법정 참석자들에게는 불법적인 외채를 탕감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제안했고, 각 국의 의회에는 외채에 대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회계를 발의하여 실질적인 외채가 얼마나 되는지 규명해내고, 여전히 상환할 것이 남았다면 이를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했다. 남반구의 채권국 정부에는 외채에 대하여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하여 이를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외채 이자의 지불을 중단하도록 하는 판결을 얻어낼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과, 이자 지불을 대신하여 모든 민중의 삶을 위해 지속가능한 발전 프로젝트를 위해 지출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주요 피고들에 이 법정의 결과를 전달하고 성실한 답변을 촉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민중법정 참석자들은 4월 중순 IMF 봄 총회에 즈음하여 워싱턴DC에 다시 모인다. 이곳에서는 불법적인 외채 탕감 캠페인이 민중법정의 공식적인 결과로 시작될 것이다. 더불어 4월 17-18일에 주요 피고들에 대한 최종선고가 이루어진다.

이번 국제민중법정을 개최하는데 까지 이른 주빌리 사우스의 활동은 아직까지는, 주요한 국제 행사를 계기로 한 대규모 캠페인 정도인 것이 사실이다. 이는 국제연대운동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99년, 북반구 NGO들이 중심이 되는 '주빌리 2000' 캠페인에서 분리한 이후, 주빌리 사우스는 그 규모나 내용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내었다. '주빌리 2000'과 함께 하던 아일랜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독일 등의 외채탕감 캠페인들이 '주빌리 2000'을 계승한 '주빌리 플러스' 보다 주빌리 사우스와의 연계를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번 민중법정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좌익 정당들과 Via Campesina(국제 소농 조직), MTD(실업노동자운동)등의 기층 대중조직들이었는데, 이는 앞으로 주빌리 사우를 중심으로 하는 외채 거부 운동이 전 세계 기층 민중들의 대중투쟁을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매개가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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