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

[기고] 자유무역협정은 이념 문제 아니다 / 최태욱 (한겨레, 4/10) (2006/06/07)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01:26
조회
1110
**[기고] 자유무역협정은 이념 문제 아니다 / 최태욱 (한겨레, 4/10)

▲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국제정치경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문제가 우리 사회의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가장 우려했던 바의 하나는 이것이 이념 논쟁으로 비화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이 협정의 이해득실에 대한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논의와 대화의 장은 사라지고 오직 이념이라는 거대한 추상적 존재만이 그 자리를 메워 본질이 왜곡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가 엉뚱한 좌우 이념이나 친미와 반미 대립으로 분열될 수 있음을 걱정한 것이다. 비슷한 우려의 목소리는 미국 쪽에서도 들려왔다.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발비나 황 연구원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말미암아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증폭되고 이것이 다시 미국에서 반작용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했다.
실제로 이러한 우려가 현실화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은 지난 5일치 <조선일보> 사설을 읽고 일었다. “청와대가 자주파와 동맹파의 패싸움장인가”라는 제목의 이 사설은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자주파’로 둔갑시켜 ‘동맹파’와 구분지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별 준비 없이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이대로라면 그 결과는 십중팔구 우리 경제와 사회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리라는 그의 주장이 조선일보로 하여금 그를 자주파로 인식하게 한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놓고 어떻게 자주파와 동맹파를 구분할 수 있는지, 그리고 국익의 관점에서 그러한 구분의 실익은 무엇인지. 단순한 이념 개념으로 개인의 복잡한 가치 판단을 총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분배 문제에서 ‘좌파’가 세계화를 지지한다고 하여 그를 ‘우파’로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내건 세계화 추진의 전제 조건과 명분이 무엇인지를 우선 살필 일이다. 마찬가지로 환경 문제에서 ‘진보’ 인사가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사회질서를 강조한다고 하여 그를 ‘보수’로 매도할 일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는 오직 구체적 영역의 개별적 가치 판단이 존재할 뿐 모든 영역에 걸쳐 수미일관 같은 방향으로 보거나 믿게 할 수 있는 획일적 이념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무수한 정책 영역 중의 한 사안에 불과하다. 여기서 내려진 특정인의 가치 판단으로 그의 이념을 규정할 수는 없다. 외교안보 영역의 동맹파가 협정의 조기 체결을 반대할 수도, 그 영역의 자주파가 이를 찬성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념이 아니라 정책이 문제다. 보수나 진보, 또는 동맹파나 자주파의 위상이나 시비가 아니라 이 구체적 정책이 사회 안정과 국민 복지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잘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또한 정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허심탄회한 대화와 논의가 필요한 것이며 여기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 이념의 틀은 이러한 건설적인 논의의 장을 붕괴시킨다. 일단 그 고정 틀에 들어가면 논리와 합리성 그리고 유연함 대신 억지와 무리 그리고 경직함에 지배된다. 그러한 사고로는 우리의 국익에 합치하는 정책 결정을 도출해낼 수 없다.

조선일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론지로 자임해온 신문이다. 오히려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 갈등이 깊어질 것을 우려하여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같은 민감한 이슈가 이념 논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고 건전한 논의의 장을 활성화시키는 데 앞장서야 할 위치에 있는 신문이다. 행여나 우리 국민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이념 문제인 것으로 착각하게 할 수 있는 논조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