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과학과 종교의 관계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8-03 23:3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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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_종교.doc

과학과 종교의 관계

김기석 (성공회 대학교 교수, 기획위원)

1. 서론: 과학과 종교

대중들에게 흔히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는 상호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동설을 지지했던 갈릴레이에 대한 로마교회의 재판이나, 다윈의 진화론을 둘러싼 헉슬리와 윌버포스 주교 사이의 논쟁은 이러한 비우호적 관계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버틀란드 러셀은 1935년에 출판한 ‘종교와 과학’이란 그의 책 제목 아래에 ‘독단과 이성의 투쟁사’란 부제를 달았다. 말할 나위 없이 여기서 독단은 종교를, 이성은 과학을 지시한다. 또한 두 영역의 만남을 “종교와 과학의 갈등의 역사” 또는 “기독교왕국에서의 과학과 신학의 전쟁의 역사” 로 묘사한 책들이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저작들은 모두 과학과 종교가 서로 화해될 수 없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본 것은 아니다. 화이트 헤드는 “종교의 원리는 영원한 것이지만, 그러한 원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지속적인 발전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종교적 표현 방식을 수정해 나간다면 과학은 종교에 유익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종교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학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존 폴킹혼이 지적하듯이, 20세기의 대표적인 서구신학 사조였던 신정통주의 신학(바르트)이나 실존주의 신학(불트만) 모두 ‘계시’ 또는 ‘실존’ 이라는 게토 속에 스스로 고립시킴으로써 과학으로부터 신학을 근본적으로 고립시켜왔다. 또한 20세기 후반에 제기된 제 3세계 신학 역시 민중의 구조적 억압과 빈곤의 상황에 응답해야 하는 ‘정치-경제적’ 신학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안병무의 민중신학) 의 절심함으로 인해 자연과학이 이룩한 새로운 발견과 영감에 대해 적극적인 성찰을 담아낼 수 없었으며, 여성신학이나 기타 상황신학들도 과학과 관계에 있어서는 위 여타 신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생태학적 신학이다. 최근의 생태학적 신학은 자연이나 창조세계를 신학의 주요 테마로 다룸으로써 과학과의 대화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30여년 전부터 과학과 신학, 또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간학제적 연구(Interdisciplinary research)가 진척되었는데, 이얀 바버는 이 분야를 개척함에 있어서 이정표를 세운 공로를 남긴 학자로 평가된다. 그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갈등, 독립, 대화 그리고 통합이라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2. 과학과 종교의 관계 유형

2. 1. 갈등
첫 번째 유형인 갈등 관계는 과학과 종교의 양쪽에서 각자의 입장을 대표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이 맞부딪힘으로써 조성된다. 과학 쪽에서는 과학적 물질주의, 물질적 환원주의 또는 과학만능주의가 있고, 반대편에는 성서적 문자주의에 입각한 창조과학회(또는 과학적 창조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과학적 물질주의 또는 물질적 환원주의는 세계의 근본은 물질이며 환원적 방법 만이 진리 탐구의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과학만능주의는 모든 문제의 해결은 결국 과학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과학주의의 관점에서 종교란 과학시대 이전의 구시대적 유물로 치부된다. 반면 성서적 문자주의는 성경의 모든 문자는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말씀으로서 과학의 영역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에 관하여 진리의 원천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창조과학회는 정상과학에서 인정되는 진화론 등의 과학이론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 구절에 부합하여 창조과학이라 이름 붙여진 새로운 과학을 제안하고자 노력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이 만날 때 과학과 종교는 서로 충돌한다. 한국적 상황에서도 이러한 갈등 관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과학만능주의와 창조과학회 간의 대립에서 나타난다. 최근 네티즌 사이에는 과학만능주의적 입장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을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입장은 반 기독교적 정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의 대부분 목회자들은 과학을 외면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에서는 창조과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과학과 대립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2. 2. 분리
한편 분리 관계는 위에 언급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적 입장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신학자들은 흔히 객관적 영역과 주관적 영역으로 과학과 신학을 분리하는 전략을 사용해왔다. 즉 성경적 우주관이 과학적 발견과 부합하지 않게 되자, 물리적 세계를 설명하는 영역에서는 객관적 진리로서의 과학에게 진리의 권위를 내어주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문제 또는 윤리적 실천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주관적 진리로서 신학의 유효성을 한정해왔다. 이것은 바로 칸트가 구분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이분법적 도식을 승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신정통주의 신학이나 실존주의 신학에서는 창세기의 창조설화를 세계의 생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세계의 시작에 관한 히브리적 신앙의 표현양식, 즉 창조에 관한 계시 또는 신앙적 고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현대과학과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언어분석철학의 연구에 근거하여 과학과 종교를 분리 시키기도 한다. 이는 두 영역이 각각 완전히 상이한 언어체계를 사용하고 있어서 서로 대화하거나 공유할 어떤 공통분모도 존재하지 못한다고 간주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만일 과학과 종교가 완전히 독립적이라면 갈등은 피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건설적 대화를 통한 상호간의 영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사라진다는 문제점을 바버는 지적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를 분리함으로써 잠정적인 화평은 얻을 수 있지만 최종적인 지적 만족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한쪽에서만 통하고 다른 쪽에서는 통하지 않는 진리는 완전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마치 지방자치체 단체장처럼 한정된 구역 안에서만 주권이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전 우주의 하느님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 비추어볼 때에도 과학과 종교의 분리는 만족스러운 결론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2. 3. 대화
이얀 바버는 세 번째 유형인 대화의 관계로서 두 영역 사이에 경계질문(boundary questions)이 존재하고, 또한 방법론적 평행(methodological parallels)이 있음을 지적한다. 경계질문이란 궁극적으로 과학과 종교가 추구하는 질문이 결국은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왜 근대과학이 세계 여러 문화권 중에서 하필 유대-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서 출현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설명될 수도 있는데, 하나의 가능한 설명은 창조의 교리가 과학의 출현을 도왔다는 것이다. 갈등의 관계 유형에 젖어있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설명이 언뜻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그 설득력을 널리 인정 받고 있다. 창조의 교리는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성서를 근거하고 있는데, 두 사상 모두 이 세계가 이해가능하며 질서가 있는(intelligible and orderly) 곳으로 주장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의 질서정연한 순환을 보면서 이 세계 속에 어떤 수학적 법칙 내지는 합리적 질서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이러한 법칙과 질서들은 단 하나의 원리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히브리 창조신앙은 세계가 하느님의 선한 의지에 따라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이 세계는 여러 고대 종교에서 믿어온 것처럼 신의 몸으로서 신성성이 깃든 장소가 아니라고 간주함으로써 물질의 비신성화를 통한 범신론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세계를 지배하는 신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간주함으로써 세계를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앙의 모티브는 각각 다르지만 이 세계의 근본적 원리에 대한 궁극적 질문(경계질문)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대화를 격려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질문을 통한 과학과 종교의 대화의 예는 빅뱅 우주론과 창조신앙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대과학의 빅뱅 우주론은 우주가 저절로 자기충족적으로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특이점(singular point)이라 불리는 과거 어느 순간에 시공간의 급팽창으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과학적 우주론에 관한 토론에서 “왜 우주가 특이점을 가지는가?”라는 질문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인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의 교리와의 대화를 불가피하게 불러온다. 또한 진화론에서 그 목적과 방향성에 관한 경계질문은 ‘계속된 창조(creatio continua)’와 대화를 가능케 한다.

한편 경계질문과 약간 상이한 방식으로 양자 사이에 대화를 가능케 하는 방법론적 평행은 과학과 종교의 방법론적 유사성의 비교를 통한 대화이다. 이는 과학은 객관적이고 종교는 주관적이라는 순박한 이분법을 벗어남으로써 가능해졌다. 20세기 초반 칼 포퍼로 대표되는 논리실증주의(positivism)는 과학을 주관적 가치로부터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행위로 파악했으나, 1950년대 이후의 과학철학의 연구 결과는 과학탐구 행위가 결코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작업이 아니라 개인과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토마스 쿤은 그의 기념비적 저서인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이론과 데이터 등이 당대의 지배적인 과학 공동체가 공유하는 패러다임에 의해 의존한다는 점을 과학역사에 관한 세부적인 관찰을 통해 지적하였다. 여기서 패러다임은 과학 공동체의 탐구행위를 규율하는 개념적, 형이상학적, 방법론적 전제들의 집합이다. 한편 종교적 전통 역시 어떤 공동체의 패러다임에 의존적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데이터에 대한 해석이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듯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겪은 개인의 종교적 경험은 당대의 지배적인 종교전통의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해석된다. 이러한 방법론적 병행은 과학과 종교의 두 영역에서 각각 관측자료 및 데이터-개별적 종교체험, 이론-교리 등으로 짝 지울 수 있다.

2. 4. 통합
네 번째 유형인 과학과 종교의 통합 관계를 살펴보자.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바버는 세 가지 경우를 예시하고 있는데, 1)자연신학(natural theology), 2)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 그리고 3)체계적 종합(systematic synthesis)이다. 자연신학은 자연 속에서 디자인의 증거를 찾아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접근방식으로서 과학적 설명들을 신학적 목적으로 활용한다. 자연의 신학은 과학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과학이론들의 함축성을 수용하여 신학적 논술을 재구성하는데 참고한다. 체계적 종합은 과정철학의 예에서 보듯이 과학과 종교의 내용을 동시에 수용하여 체계적인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증명론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자연신학적 논술이다. 그는 우주론적 논증에서 모든 사건(존재)은 원인이 있어야 하므로 결국 필연적으로 제1원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근대과학의 위대한 설립자들은 자연의 조화로운 상호관련성에 대하여 경외하는 입장을 보여주곤 했다. 뉴턴은 우주가 완벽한 시계처럼 정해진 질서와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운행하는 기계로 보았다. 뉴턴은 과학자로서 자신의 완전한 세계에 대한 신념에 부합하여 신학적으로는 이러한 세계를 고안한 설계자로서 신을 상정하였다. 윌리엄 팔레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황야에서 시계를 발견했다면 그는 당연히 그것을 만든 시계공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며 우주를 설계한 하느님의 존재를 자연신학적으로 논증하였다. 이러한 자연신학은 흄의 자연신학 비판과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서 심각하게 위협을 받았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종교적 믿음이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시에 의해 그 근거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자연신학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최근에 다시 자연신학적 토론을 가져온 것은 현대 과학적 우주론에서 제기된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 논쟁이다. 최근 빅뱅우주론의 정립과정에서 우주물리학자들은 우주 안에 지적 생명체가 출현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의 확률은 극단적으로 적은 범위 안에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는 이 우주 안에 지적 생물체의 존재를 가능케하기 위해서 우주의 모습을 결정하는 몇 가지 우주상수들과 법칙들을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미세조정(fine tuning) 해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인류원리의 함축성을 두고서 약한 인류원리 및 강한 인류원리, 참여적 인류원리 등 몇 가지 상이한 해석들이 있는데, 이는 설계논증과 관련된 자연신학적 토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존 폴킹혼은 자신이 과학과 신학의 토론을 이끌고 있는 이유는 과거 아퀴나스 시대의 자연신학처럼 신을 직접 증명하고자 의도하지는 않지만 우주의 배후에 존재하는 하느님을 넌지시 암시하는 수정된 자연신학을 제안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자연의 신학은 자연신학과 달리 과학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종교적 경험과 역사적 계시에 근거한 종교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전통적 종교의 교리를 현대의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재구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과학과 종교는 크게 보아 각자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세부적인 주제들, 예컨데 창조, 섭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여 종교적인 설명을 할 때에 과학적 발견을 참조해서 새롭게 기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떼이야르 샤르뎅은 역사의 종말, 인간의 본성 등의 주제에 대하여 전통적 신학의 도식에 머무르지 않고 진화론적 성찰을 통해서 재구성하였다.
바버가 분류한 체계적 종합이란 과학과 종교를 하나의 종합적인 형이상학의 구도 하에 체계적으로 결합시켜 일관된 하나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것이다. 과정철학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데 과정신학의 거대한 구상 속에서 물질과 정신, 육체와 마음, 자연과 인간, 시간과 영원은 이원론적 구분을 뛰어넘어 하나의 연결된 개념으로 종합된다. 이 두 종류의 카테고리들은 일반적으로 과학과 종교가 각각 주도권을 행사해온 것들이다. 과정신학에서 신은 세계를 초월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한다. 신은 전지전능한 통치자이기보다 새로움과 질서의 원천으로서 사건들 속에 내재하며, 그들이 지닌 원초적 본성이 귀결적 본성의 과정으로 발전해 가도록 설득하는 분으로 사유된다.

3. 결론

지금까지 이얀 바버의 구분에 근거하여 과학과 종교의 네 가지 관계 유형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 유형론은 과학과 종교의 간학문적 토론을 시작할 때 항상 제일 먼저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바버 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각자 다른 기준을 가지고 두 영역의 관계 유형을 규정하였다. 폴킹혼의 경우는 과학과 신학의 토론에 있어서 ‘동화(assimilation)’와 ‘공명(consonance)’이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동화란 과학적 함축성에 동화하여 종교적 진리를 사유하는 것을 말하며, 공명이란 과학적 설명과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 각각의 자치권을 일정 정도 보장하면서 양자 사이에 조화로운 울림(공명)을 찾는 노력을 말한다.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1)과학주의, 2)과학 제국주의, 3)교회 권위주의, 4)과학적 창조론, 5)두 언어 이론, 6)가설적 공명, 7)윤리적 중첩, 8)뉴에이지 영성 등으로 보다 세부적으로 분류하였다. 바버의 분류에서 네 번째 타입인 대화와 통합 관계는 시각에 따라서 세 번째 유형과 엄밀히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문제점을 생각할 때에 테드 피터스의 분류는 유용할 수 있다.

오늘날 현대 서구문명의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이 가운데 동양 종교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주장은 우리에게 있어 한국 상황에서의 과학정신과 기독교정신의 관계성을 돌아보게 한다. 자연과 인간을 조화롭게 보아온 동양의 정신적 전통을 담지하고 있으면서도, 서구로부터 도입된 과학정신과 기독교 사상이 서로 조화되고 있지 못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다. 과학정신의 진수가 아닌 외피로서의 과학주의가 세속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기독교의 다양한 전통 중에서도 유독 편협한 문자적 해석에 기반한 창조과학회가 과학에 대응하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입장처럼 알려져 있다. 이 두 흐름이 첨예하게 부딪히면서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성숙한 대응과 깊이 있는 학문적 토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문제와 생명파괴에 대하여 전통적 가치에 기반하여 진지한 종교적 성찰을 위해서도 과학에 대한 신학적 관심이 절실하다. 필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진리가 과학적 진리와 믿음의 진리라는 서로 다른 형태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의 진리일 것이라는 직관을 가지고 있다. 단 하나의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서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태도로써 간 학문적 연구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