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계약법 새로 읽기-I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11-14 23:26
조회
2829
십계명과 계약법을 새롭게 읽자
이영재(구약학 박사, 연구실장)

출19:1~민10:11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문단은 ‘시나이 단화’(Sinai pericope)라고 불린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시나이 광야에 있는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각종 법을 계시하셨다. ‘시나이 단화’는 이 장면을 보도하고 있다. 이 문단에 십계명과 계약법과 성막법과 제사법과 정결법과 성결법과 기타 각종 법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집중 계시되어 있다. 시나이 단화는 토라(오경)의 정중앙부분에 가로 놓여 있다.
지금까지 계약법은 이스라엘 국가 이전에 성립된 매우 고대의 법전으로 간주되었다. 한국민주화 운동의 시절에 기독청년들은 갓월드의 봉기설과 지파들의 평등체제수립의 이론을 학습하였다. 그 당시 청년들이 이제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즘을 이끌어가는 중심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서구에서 이미 20년 전에 갓월드의 ‘Tribes of Yahweh'의 이론은 무너졌다.
근년에 들어서 십계명과 계약법이 포로기나 포로이후기의 디아스포라에서 나온 법이라는 연구들이 속출하고 있다.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십계명과 계약법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제국의 경제운동이 신자유주의세계경제라는 모양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이 시대에 십계명과 계약법을 포로민 또는 이주민의 눈으로 다시 읽는 일이 요긴하다. 바빌로니아제국, 페르시아제국, 더 나아가 헬레니스트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포로민 또는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들이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살았던 사상의 모체가 십계명/계약법이다.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언약의 두 돌판이 놓여진다. 이것은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되는 법궤/증거궤/언약궤로 표상된다. 하나님은 백성을 만나 자신의 뜻을 알려주기 위해서 법궤의 뚜껑 위에 현존하신다. 금송아지로 대표되는 제국의 만신들은 사람이 만들어낸 우상에 불과하다. 제국의 모든 통치 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무너진다. 제국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열국 가운데 백성공동체를 설정하신다. 디아스포라의 신앙공동체 안에 새로운 윤리, 새로운 경제공동체, 새로운 법제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체제를 향한 꿈이 피어올랐다.
우리는 87년 국민국가로 정립하였다. 그 후 우리는 미래사회를 위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우리는 광야를 행진하는 시대를 맞았다. 한국기독교의 사회운동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체제의 대안이 무엇인지 궁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연구는 이 시대에도 지속되는 종교개혁의 함성에 부응하는 작업이다. ad fontes(원전으로 돌아가자)!


제 I 장. 하나님의 백성 취임: 출19:1~24:11

시내단화를 삼부로 나눈다면 출19:1~24:11은 제일부에 해당한다. 제이부는 출24:12~40:38이고 제삼부는 레1:1~민10:11이다. 이러한 구분은 위의 서론부에서 상론한 그대로이다.
제일부를 학계에서는 흔히 ‘시내단화의 전반부’라고 부른다. 독일학자들은 ‘vordere pericope’라고 한다.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은 시내단화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 전반부에서는 하나님께서 시나이산에 강림하셔서 백성에게 십계명과 계약법을 알려 주시면서 제일차 계약을 맺으셨다. 후반부에서는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바람에 일차로 주어진 계약이 깨어진 후 다시 계약을 체결하는 장면을 다룬다. 그래서 출24:12 이하의 부분을 ‘후반부’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삼부작 구도로 파악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제일부’, ‘제이부’, ‘제삼부’라고 부른다. 제일부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에 하나님의 산에 당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처음으로 계약을 맺는 장면을 다룬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 가운데 현존하시기로 작정하시는데 미리 백성 공동체와 계약을 체결하신다.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겠다고 서약한다.
제일부의 문단을 구분해 보자면 출19:1~2; 출19:3~8; 출19:9~25; 출20:1~17; 출20:18~21; 출20:22~23:33; 출24:1~11의 일곱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계약법은 출20:22~26; 출21:1~23:19; 출23:20~33의 세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세한 구분은 아래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주석서의 제1권 ‘광야에서’를 저술할 때 사용한 방법 그대로 본문을 사역한 후에 해설을 곁들이고 그 다음에 본문의 공시읽기와 통시읽기를 차례대로 수행할 것이다. 그 다음에 최종본문의 신학을 감상하면서 설교의 주제들을 찾아내어 해설하려고 한다.
이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역시 하나님의 강림,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과 계약, 모쉐의 위상,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을 계시하는 율법, 이 네 가지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주제야말로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신학사상의 전개라는 방식으로 펼쳐져 있다. 그러므로 이 계시의 사건을 역사의 재건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토라의 저자가 무슨 신학을 펼치고 있는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1. 출19:1~25: 시나이산 신현현
‘신현현’(神顯現, theophany)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사건을 가리킨다. 그냥 ‘현현’(顯現, epiphany)이라고만 하면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과 같은 어떤 현상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경우를 가리키지만, ‘신현현’이라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모습을 나타내시는 사건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시나이산에 몸소 강림하셨기 때문에 출애굽기 19장의 사건을 ‘시나이산 신현현’의 사건이라고 부른다.
우리말 성경에서 히브리어 ‘????시나이’란 단어를 ‘시내’라고 번역해 왔다. 그러나 이 용어는 물이 흐르는 작은 개천을 가리키는 우리말 ‘시내’ 단어와 혼동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시나이’라고 발음 나는 그대로 번역했다. ‘시나이광야’ 또는 ‘시나이산’이라고 표기한다. 우리말에서 ‘낙동강’, ‘한강’이라고 ‘강’ 자를 띄어 쓰지 않고 명칭에 붙여 쓰듯이 ‘시나이’란 명칭도 ‘강’이나 ‘광야’란 명사에 붙여 표기한다.
제2권부터는 히브리어 본문을 따로 제시하지 않기로 했다. 히브리어 표기를 제시해도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다. 히브리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히브리어 성경이나 사전 등을 갖추고 있을 터이니 굳이 히브리어 본문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만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또 본서의 내용을 작문하는 과정에서 히브리어 단어를 언급하는 경우에도 히브리어 표기를 극히 자제하였다. 한글은 모든 음가를 표기할 수 있는 우수한 글자이기에 그 장점을 십분 살려서 한글로 히브리어를 표기해 주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분들을 배려한 작은 정성이다. 하지만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읽을 수 있도록 수련을 쌓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하는 사람의 자세일 것이다.

[본문] 출19:1~25
`yn")ysi rB:?d>mi WaB'Þ hZ<?h; ~AYæB; ~yIr"+c.mi #rMiB; Wn?x]Y:w:) yn:?ysi rB:?d>mi Wabo'Y"w: ~ydIªypir>me W[?s.YIw: 2
~yhi_l{a/h'-la, hl'Þ[' hv,?moW 3
`lae(r"f.yI ynE?b.li dyGEßt;w> bqo?[]y: tybe?l. rm;ato hKo? rmo?ale rh"?h'-!mi hw"hy> wyl'?ae ar"'q.YIw:
`yl'(ae ~k,Þt.a, abi?a'w" ~yrI?v'n> ype?n>K;-l[; ~k,t.a, aF'?a,w" ~yIr"+c.mil. ytiyfiÞ[' rv<?a] ~t,?yair> ~T,?a; 4
yti_yrIB.-ta, ~T,Þr>m;v.W yli?qoB. W[m.v.Ti [;Am?v'-~ai hT'ª[;w> 5
`#rh; hL,ae… vAd+q' yAgæw> ~ynIßh]Ko tk,l,?m.m; yli²-Wyh.Ti ~T,?a;w> 6
`hw")hy> WhW"ßci rv<?a] hL,ae?h' ~yrI?b'D>h;-lK' tae… ~h,ªynEp.li ~f,Y"?w: ~['_h' ynE?q.zIl. ar"Þq.YIw: hv,?mo abo?Y"w: 7
hf,_[]n: hw"ßhy> rB<?DI-rv,a] lKo± Wr?m.aYOæw: 'wD"x.y: ~['?h'-lk' Wn"[]Y:w: 8
`hw")hy>-la, ~['Þh' yrE?b.DI-ta, hv,²mo bv,Y"?w:
%M'?[i yrI?B.d:B. ~['h' [m;?v.yI rWb?[]B; ?!n"['h,( b[;?B. ?^yl,ae aB'? ykiønOa' hNE"hi hv,ªmo-la, hw"÷hy> rm,aYO"w: 9
`hw")hy>-la, ~['Þh' yrE?b.DI-ta, hv,²mo dGE?Y:w: ~l'_A[l. Wnymi?a]y: ^ßB.-~g:w>
`~t'(l{m.fi WsßB.kiw> rx"+m'W ~AY?h; ~T'?v.D:qiw> ~['?h'-la, %lE? hv,mo-la, hw"?hy> rm,aYO"w: 10
`yn")ysi rh:?-l[; ~['Þh'-lk' ynE?y[el. hw"±hy> drE?yE yviªyliV.h; ~AYæB; yKi? yvi_yliV.h; ~AYæl; ~ynIßkon> Wyðh'w> 11
Whce_q'B. [:gOæn>W rh"ßB' tAl?[] ~k,²l' Wr?m.V'hi rmo?ale bybi?s' '~['h'-ta, T'?l.B;g>hiw> 12
`tm'(Wy tAm? rh"ßB' [;gE?NOh;-lK'
hy<+x.yI al{ vyaiÞ-~ai hm'?heB.-~ai hr<?Y"yI hro?y"-Aa lqeS'yI lAq?s'-yKi( dy"? ABø [G:"ti-al{ 13
`rh")b' Wl?[]y: hM'heÞ lbe?YOh; %vom.Bi
`~t'(l{m.fi WsßB.k;y>w:) ~['?h'-ta, vDEq;y>w: ~['_h'-la, rh"ßh'-!mi hv,²mo dr,YE?w: 14
`hV'(ai-la, WvßG>Ti-la;( ~ymi_y" tv,l{ ?v.li ~ynIßkon> Wyðh/ ~['?h'-la, 'rm,aYO'w: 15
rh'?h'-l[; dbeK' !n"?['w> ~yqiør"b.W tl{'qo yhiy>w: rq,Boªh; tyOæh.Bi( yviøyliV.h; ~AY"b; yhiy>w: 16
`hn<)x]M;B;( rv<?a] ~['Þh'-lK' dr:?x/Y
`rh")h' tyTi?x.t;B. WbßC.y:t.YI)w: hn<+x]M;h;(-!mi ~yhiÞl{a/h'( tar:?q.li ~['²h'-ta, hv,?mo ace'AYw: 17
vae_B' hw"ßhy> wyl'²[' dr:?y" rv,'a] ynEP.mi? AL?Ku !v:?[' 'yn:ysi rh:?w> 18
`dao)m. rh"ßh'-lK' dr:?x/Y rBe?d:y> hv,?mo dao+m. qzE?x'w> %lEßAh rp'?AVh; lAq? yhiy>w: 19
`hv,(mo l[;Y:?w: rh"ßh' varo?-la, hv,²mol. hw"?hy> ar"'q.YIw: rh"+h' varo?-la, yn:ßysi rh:?-l[; hw"±hy> dr,YE?w: 20
`br"( WNM,Þmi lp;?n"w> tAa?r>li hw"hy>-la, Ws?r>h,y<-!P, ~['_B' d[e?h' drEÞ hv,?mo-la, 'hw"hy> rm,aYO?w: 21
`hw")hy> ~h,ÞB' #ro?p.yI-!P, WvD"_q;t.yI hw"ßhy>-la, ~yvi?G"NIh; ~ynI±h]Koh; ~g:?w> 22
yn"+ysi rh:?-la, tl{ []l; ~['?h' lk;?Wy-al{ hw"?hy>-la, 'hv,mo rm,aYO?w: 23
`AT*v.D:qiw> rh"ßh'-ta, lBe?g>h; rmo?ale WnB'' ht'do?[eh; hT'?a;-yKi(
%M"+[i !roæh]a;w> hT'Þa; t'yli?['w> drE?-%l, hw"hy> wyl'?ae rm,aYO"w: 24
`~B'(-#r"p.yI-!P, hw"ßhy>-la, tl{[]l; Ws±r>h,y<?-la; ~['ªh'w> ~ynI?h]Koh;w>
s `~h,(lea] rm,aYO?w: ~['_h'-la, hv,Þmo dr,YE?w: 25
[사역]
<1> 이스라엘 자손이 미츠라임 땅에서 나온 지 삼월 초하루 되던 날 바로 이 날에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들어섰다. <2> 그들이 르비딤에서 천막을 거두어 떠나 시나이 광야로 왔으며 그 광야에 천막을 쳤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그 산 앞에 천막을 쳤다. <3> 그러자 모쉐는 그 하나님에게 올라갔다. 야훼께서 그 산에서 그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곱의 집에게 말해 주고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보고하되 이렇게 일러라. <4> “너희는 내가 미츠라임에게 행한 일과 내가 너희를 독수리의 날개에 실어 너희를 나에게 데려 온 일을 목격하였다. <5> 이제 너희가 내 목소리를 잘 듣고 나의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중에서 빼낸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6>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나라이자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상은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해 주어야할 말씀들이다” 라고.’ <7> 모쉐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에게 외쳐 야훼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이 모든 말씀들을 그들 앞에 두었다. <8> 모든 백성이 일제히 대답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야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겠습니다.’ 그러자 모쉐가 백성의 말을 야훼에게 회보하였다. <9> 야훼께서 모쉐에게 말씀하였다. ‘보라, 내가 먹장구름 속에서 너에게 오는 것을!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내가 너와 말할 때 백성이 듣고 또한 너를 영원히 믿도록 하기 위해서다.’ 모쉐는 백성의 말을 야훼에게 보고하였다. <10> 야훼께서 모쉐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이 자기 옷을 빨게 하여라. <11> 사흘째 되는 날을 위해 준비하여라. 왜냐하면 사흘째 되는 날에 야훼께서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시나이 산 위로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12> 너는 백성 주위에 경계를 치고 이렇게 말하여라. “그 산에 올라 그 산 자락에 접촉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산에 접촉하는 자는 누구나 반드시 죽여야 한다. <13> 그 산에 손을 대지 말라. 왜냐하면 짐승이든 사람이든 돌에 맞아 죽거나 화살에 맞아 죽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나팔을 불거든 그들은 그 산에 오를 것이다”라고.’
<14> 모쉐는 산에서 백성에게로 내려오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았다. <15> 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을 위하여 준비를 하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 <16> 사흘째 되는 날에 아침이 되자 소리와 번개와 먹구름이 그 산 위에 있었다. 엄청 센 나팔소리도 울렸다. 진 안에 있는 모든 백성이 벌벌 떨었다. <17> 모쉐가 그 하나님을 만나러 백성과 함께 진에서 나아오자 그들이 그 산 기슭에 섰다. <18> 시나이 산에 연기가 자욱한데 그 위로 야훼께서 불 속에서 내려오셨다. 연기가 용광로의 연기처럼 올랐고 그 모든 산이 몹시 떨렸다. <19> 나팔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엄청 세게 울리는 가운데 모쉐가 말씀드리니 하나님께서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20> 야훼께서 시나이 산 위 곧 그 산꼭대기에 내려 오셨다. 야훼께서 모쉐를 산꼭대기로 부르시니 모쉐가 올라갔다. <21> 야훼께서 모쉐에게 말씀하셨다. ‘내려가 백성에게 야훼를 보려고 달려들지 말라고 경고하여라.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죽을까 하노라. <22> 또한 야훼에게 나아올 제사장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하여 야훼께서 그들 가운데 돌진하지 않도록 하여라.’ <23> 모쉐가 야훼께 아뢰었다. ‘백성이 시나이 산으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여 말씀하시기를 “그 산에 경계를 치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4>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려가라. 아하론이 너와 함께 올라오너라. 제사장들과 백성은 야훼에게 올라오려고 돌파하지 말라. 그가 그들에게 돌진하지 않도록 말이다.’ <25> 모쉐가 백성에게 내려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스투마]

<사역해설>
1절. 삼월 초하루(???? ?????? 박호데쉬 하쉴리쉬). ‘박호데쉬’의 ‘박’에 ‘ㄱ’받침을 붙인 것은 ‘호데쉬’의 ‘호’가 거친 숨소리를 내는 후음 철자 ‘?’이기 때문이다. 앞 글자에 ‘ㄱ’받침을 붙여서 그 거친 숨소리의 음가를 나타내었다. ‘?바’는 히브리어 전치사로서 ‘~ 안에’라는 뜻이다. ‘ㄱ호데쉬’는 음력으로 ‘초생달’ 또는 ‘신월(新月)’을 가리키므로 ‘초하룻날’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하쉴리쉬’의 ‘하’는 정관사이며 ‘쉴리쉬’는 ‘세번째’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세번째 초생달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을 좀 의역하여 ‘삼월 초하루’라고 번역하여 음력에 기초한 것임을 나타냈다.
1절. 나온 지(???? 러체에트). ‘러체에트’의 ‘?러’는 전치사이고 ‘???체에트’는 ‘나가다’를 뜻하는 동사 ‘???야차’의 동명사형이다(‘부정법구성형’이라고도 한다). 전치사 ‘?르’는 ‘~을 위하여’, ‘~에게’, ‘~쪽으로’, ‘~의 소유이다’, 등등 다양한 뜻을 전달한다. 여기서는 ‘~후에’라고 해석해야 한다(NRSV/NKJV/Childs, '~ after').
1절. 시나이(????). 우리말 역본들에서 ‘시내’라고 번역했다. ‘시내’란 번역어는 실개천을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 ‘시내’와 혼동하기 쉽다. 히브리어 음가는 ‘시나이’이므로 그대로 음역해 주었다.
2절. 천막을 거두어 떠나 ~ 천막을 쳤다(????? ~ ?????와이스우 ~ 와약하누). ‘와이스우’와 ‘와약하누’에 쓰인 ‘와’는 영어의 ‘and’나 ‘but’에 해당하는 접속사 ?(와브)이다. ‘이스우’는 ‘말뚝을 뽑아 천막을 걷어 출발하다’란 뜻의 동사 ‘???나사’의 미완료형이다. [접속사 와브 + 미완료형 동사]의 꼴은 대체로 완료형을 표현한다. ‘천막을 거두어 떠났다’라고 완료형으로 번역해야 한다. ‘약하누’도 마찬가지이다. 이 동사는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ㄱ하나’의 미완료형이다. ‘와이스우 ~ 와약하누’의 두 동사들은 늘 결합하여 하나의 형태로 나타나는 상투어로서 토라를 최종 마무리한 저자가 이스라엘의 광야여정을 표시할 때 사용하는 어귀이다. 이 상투어는 출13:20에 처음 나타나 민33:48까지 매우 빈번하게 쓰인다(참. 출15:22, 27; 17:1; 18:5; 민1:50). 특히 민33장의 광야여정목록을 구성하는 문단에서 상투어로 쓰이고 있다. 신명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상투어를 번역하되 이후에 나오는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번역해 주어야 마땅하다. 나는 이 상투어를 ‘천막을 거두어 떠나 ~ 천막을 쳤다’라고 좀 길지만 분명하게 번역했다.
3절. 그러자 모쉐는 ~ 올라갔다(???? ??? 우모쉐 알라). ‘우모쉐’는 [와브 + 주어 + 동사]의 어순을 띠고 있다. 문장의 주어가 동사 보다 먼저 나오는 꼴은 문단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분절법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위기의 전환을 표시하는 ‘그러자’라는 접속어를 넣어서 번역해 주었다.
3절. 하나님(?????? 하엘로힘). ‘엘로힘’(하나님)에 정관사 ‘하’가 붙어있어 ‘그 하나님’이라고 번역해 주어야 한다. 히브리어 어법에서 정관사는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냥 ‘엘로힘’이라고 하면 다른 신들을 가리킬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 어법에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으레 성서의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 정관사 ‘하’를 굳이 번역해주지 않아도 무방하다.
3절. 그 산에서(?? ??? 민-하하르). ‘??민’은 영어의 ‘from'에 해당하는 전치사로 ‘~로부터’라고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는 그냥 ‘~에서’라고만 해도 뜻이 통한다. 산을 뜻하는 명사 ‘??하르’에 정관사 ‘?하’가 붙어 있다. 이 경우에는 이것이 무슨 산을 가리키는 지 불분명하고 또 여기서 갑자기 등장한 산이기 때문에 반드시 정관사 ‘그’를 붙여 주어야 마땅하다. 여기서 ‘그 산’이라고 함은 출3:1에 나온 ‘그 하나님의 산’과 출3:12의 ‘이 산’을 가리킨다. 출4:27에 의하면 아하론이 ‘그 하나님의 산’에 나아와 모쉐를 영접하였다고 한다. 이 경우에도 동일한 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지만 출3:1의 장면설정과 좀 맞지 않는 듯하여 어색하긴 하다. 여하튼 출19:3의 정관사를 살려 ‘그 산에서’라고 번역해야 함은 틀림없다.
3절. 그를 불러(????? ???? 와이크라 엘라이브). ‘?와’는 접속사이고 ‘????이크라’는 ‘부르다’란 뜻의 동사 ‘???카라’의 미완료형이다. 이 역시 [와브 + 미완료형]의 꼴을 보이는 완료시제이다. 그러므로 ‘그를 불렀다’라고 번역할 것이다. 이 ‘카라’ 동사에는 ‘만나다/마중하다’란 뜻도 있다. 출19:17에 나오는 ‘카라’ 동사는 ‘만나다’란 뜻으로 쓰였다. ‘카라’ 동사는 출19장에 네 차례 쓰인다(출19:3, 7, 17, 20).
3절. 야곱의 집에게(???? ???? 러베이트 야아콥). 이 표현은 창46:27에 나오는데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집 사람이 칠십 명에 이르렀다고 보도한다. 이 보도는 출1:1의 ‘????베이토’(그의 집)에서, 출1:6에서 ‘???예레크-야아콥’이란 표현으로 변형되었다. 출2:1에는 ‘레위의 집’이란 표현과 평행된다. 출6:14에 ‘베이트-아보탐????’(아버지들의 집)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각 지파를 가리킨다. 출13:3, 14의 ‘종들의 집’(베이트 아바딤?????)이란 어법과 히브리어 연상작용이 진하게 풍긴다.
3절. 너는 ~ 말해 주고 ~ 보고하되(?? ???? ~ ?????코 토마르 ~ 워타게이드). ‘코’는 ‘이렇게’란 뜻이고 ‘????토마르’는 ‘말하다’란 뜻의 미완료 이인칭 남성단수형이다. ‘너는 이렇게 말하여야 한다’란 뜻이다. ‘코 아마르 아도나이’란 예언자 상투어를 여기에서 응용한 문구이다. 여기에 평행되는 위치에 ‘선포하다’란 뜻의 동사 ‘???나가드’의 히필형 이인칭 미완료 단수형 ‘???? 타게이드’를 사용했다. 이 어귀들을 통해서 모쉐의 예언자 직분이 표현된다. 이 단어는 모쉐가 백성에게 말하는 동작을 표현하는데 9절에도 이 단어가 쓰여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동작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동사는 두 곳에서 동일하게 번역해 주었다. 9절로 미루어 모쉐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듯이 백성을 존대하여 백성에게 ‘보고하여라’란 뜻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모쉐에게 백성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뜻으로 해석해 보았다.
5ㅎㅅ절. 보물(???? 서굴라). ‘서굴라’는 왕이 침실의 은밀한 곳에 감추어두는 가장 아끼는 보배함 속에 든 보물을 가리킨다. 한글개역의 ‘소유’란 번역은 이 뜻을 잘 나타내지 못한 번역어이다. 표준역이 ‘보물’이라고 번역한 것이 더 알맞다.
5ㅎㅎ절.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 ?? ???? 키-리 콜-하아레츠). 이 ‘키’절은 한글성경에서 문장의 맨 앞으로 끌어내어 번역해 주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서에서 이 어절은 문장의 맨 끝에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위치를 고수하였다. 이 어절은 ‘너희는 모든 민족들 중에서 빼낸 나의 보물이다’란 바로 앞의 어절을 수식하고 있도록 번역해야 한다. 이것을 문장 맨 앞에 두면 ‘계약을 지키라’는 5ㅈ절의 권면문까지 수식하게 되어 혼동을 일으킨다. 한글개역의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란 번역 보다는 ‘땅’(????하아레츠)를 강조해 주어야 ‘모든 민족들’이란 관념과 잘 통하게 된다. 표준역은 어순을 임의로 바꾸어 뜻이 곡해되기 쉽다: ‘이제 너희가 ~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표준역).
6절.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나라이자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 ?? ????? ????? ??? ??? 워아템 티흐유-리 마믈레케트 코하님 워고이 카도쉬). ‘워아템’은 [와브 + 주어 + 동사]의 어순을 취하는 꼴로서, 주어를 특별히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그러므로 주어를 ‘너희는???’이라고 또렷하게 번역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과 죄 많은 세상 사이에서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역할을 맡은 제사장들의 공동체를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맡는 한, 자기중심의 죄에 빠져 허덕이는 세상의 왕국들 사이에서 그 공동체는 하나님께 구별되어 거룩한 민족이 된다. 이런 이유로 ‘제사장들의 나라’란 번역어 앞에 ‘나에게’란 번역어를 두는 것이 좋다. ‘나를 위한’이란 번역은 곤란하다.
7절. 그는 ~ 백성의 장로들에게 외쳐 ~ 그들 앞에 두었다(????? ????? ??? ???? ?????? 와이크라 러찌크네이 하암 와야셈 리퍼네이헴). 모쉐가 백성의 장로들을 소환하였다고 번역하는 것보다 모쉐가 장로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 전언하였다는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부르다’ 또는 ‘만나다’를 뜻하는 동사 ‘카라’ 다음에 전치사 ‘러’가 나온 것을 그대로 직역하여 ‘~에게 외쳤다’라고 직역하였다.
8절. 우리가 준행하겠습니다(???? 나아세). ‘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사’의 일인칭복수 미완료형이 ‘나아세’이다. 즉 ‘우리가 행할 것입니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이것은 명령을 준행할 것을 서약할 때 쓰는 ‘준행맹세귀’로서 상투어이다. 출24:3, 7에 반복된다. 그러므로 이 상투어의 번역은 늘 동일하게 해 주어야 마땅하다.
8절. 야훼께 회보하였다(???? ~ ?? ????와야쉡 ~ 엘야훼). ‘???슈브’(돌아오다/돌려주다) 동사에 전치사 ‘엘’(?? ~에게)을 사용하였기에 한글개역이 번역 ‘회보하다’란 표현을 채용했다. 개역개정판에는 ‘여호와께 전하매’라고 하여 ‘슈브’ 동사의 의미를 오히려 삭감하였다. 표준역은 ‘그대로 말씀드렸다’라고 번역했다.
9절. 너를 영원히 믿게 하기 위해서다(????? ...... ??? ?? ?????? ?????바아부르 ...... 워감-버카 야아미누 러올람). 동사 ‘???아만’은 ‘~를 믿다’, ‘~에게 충실하다’란 뜻으로 출4:1, 5, 8, 9, 31; 14:31; 민14:11; 20:12에 나온다. 이 모든 경우에 동사를 일정하게 ‘믿다’라고 번역해 주어야 그 신학의 흐름을 나타낼 수 있다.
9절. 먹장구름(??? ???? 브압 헤아난). 먹구름을 뜻하는 ‘??아브’란 명사는 구성형으로서 ‘????헤아난’을 받는다. 직역하면 ‘구름의 먹구름 속에서’가 될 것이다. 이것은 16절의 ‘먹구름’(아난 카베드)과 동일한 표현이다. ‘먹장구름’과 ‘먹구름’이라고 각각 번역함으로써 서로 연관성이 있음을 나타내 주었다.
9절. 보고하였다(???? 와야게드). ‘선포하다’란 뜻의 동사 ‘???나가드’가 출19:3에 이어 여기서 또 사용되었다. 3절에서는 모쉐가 백성에게 말하는 동작을 가리키고 여기서는 모쉐가 하나님께 말씀을 올리는 동작을 가리킨다. 그러나 두 곳에서 모두 동일하게 ‘보고하다’라고 번역해 주었다.
11절. 준비하여라(???? ????? 워하유 너코님). ‘?????너코님’은 ‘준비하다’란 뜻의 동사 ‘???쿤’의 니팔(수동태) 분사 남성절대형으로 ‘???하야’ 동사와 결합되어 있다. 직역하면 ‘준비됨이 있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준비하여라’란 말로 표현하였다. 이 단어는 출19:15에도 나온다. 참조. 출16:5.
12절. 백성 주위에 경계를 치고(?????? ??? ???? 워히거발타 하암 사비브). 23절에 ‘그 산에 경계를 치고’(???? ?? ???하거벨 엩-하하르)라고 되어 있다. 12절에는 백성을 중심으로 경계를 치도록 명하고 23절에는 산을 중심으로 경계를 치라고 명한다. 13절에 주어진 내용은 ‘산에 접촉하지 말라’는 것으로 산이 중심이 되고 있다. 13절 끝에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때 백성이 산에 오르도록 명령한다.
16절. 먹구름(???? ??? 워아난 카베드). ‘???카베드’는 ‘무겁다’란 뜻의 형용사이다. ‘무거운 구름’이란 먹구름을 가리킨다. 우리말로 ‘무거운 구름’이라고 표현하면 틀린 말이 된다. 이것은 9절의 ‘먹장구름’이란 표현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먹구름은 히브리말로 ‘??아브’인데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16절. 천둥소리(??? 콜로트). 히브리어 ‘???콜’은 목소리를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천둥소리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천둥소리’라고 번역해 주었다.
22절. 야훼께서 그들 가운데 돌진하지 않도록 하여라(?? ???? ??? ???? 펜-이프로츠 바헴 야훼). 동사 ‘???파라츠’는 ‘돌파하다’란 뜻인데 ‘????이프로츠’는 이 동사의 미완료형이다. ‘???바헴’의 ‘?바’는 전치사로서 ‘에 대항하여’(against)란 뜻이다. 야훼께서 백성을 향하여 돌진한다는 뜻이다.
24절. 돌진하지 않도록 말이다(?? ???? ?? 펜-이프로츠 밤). 위의 22절 해설을 참조하라.

<공시읽기>
1. 짜임새.
출19장의 짜임새를 분석해 보자. 우선 출19:3~8이 하나의 문단으로 구분될 수 있다. 왜냐하면 3절이 [와브 + 주어 + 동사]의 분절법을 띠고 있기 때문에 3절에서 새로운 문단이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절에 명령준행 상투어 ‘준행하겠습니다’가 나오는데 이것은 위의 3절 이하의 내용을 마감한다. 특히 이 상투어는 출24:3, 7절에 반복되어서 출19:3~8의 문단이 출24:3~8의 문단과 상응하는 문단임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또 ‘백성의 말을 야훼께 보고하였다’라는 말이 8절 끝과 9절 끝에 나오는데 이 반복귀는 9절에 있는 야훼의 명령을 둘러싸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9절의 명령은 10절 이하의 내용과 3~8절의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가교의 구실을 하고 있다. ‘먹장구름’은 16절의 ‘먹구름’을 예고하며 야훼께서 모쉐와 대화할 때 백성이 그 내용을 듣고 모쉐를 백성이 믿게 될 것이라는 내용은 19절의 장면을 예고한다. 그러므로 9절의 내용은 그 이하의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서론의 구실을 한다. 9절의 여는 말이 ‘모쉐가 백성의 말을 야훼에게 보고하다’란 말과 중첩되는데 이 말은 3절의 명령 ‘보고하여라’란 말의 실행부분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3절에서 시작된 문단은 9절에서 끝나도록 만들어 놓고 9절의 중심내용은 그 이하의 문단에 연결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 모양은 아래와 같은 교차구도를 띠는 연결고리의 모양으로 표현될 수 있다.

출19:10~25 출19:3~8 9ㅎ절 9ㅈ절

위의 모양은 9절을 통하여 앞 문단과 뒤의 문단이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러한 작법을 가리켜서 ‘연결고리’라고 부른다. 독일인 학자들은 이러한 기능을 가리켜 ‘베어클람메룽’(Verklammerung)이라고 칭한다.
출19:10~25의 문단은 10~15절이 한 단락으로 신현현을 준비시키는 명령과 준행을 내용으로 하고 있고 16~20절은 신현현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21~25절은 신현현 이후의 경고문으로 되어 있다. 10~15절의 단락은 산을 거룩히 여겨서 접촉하지 말라는 명령이 들어 있고 15~20에도 산을 거룩히 여겨서 접촉하지 말라는 명령이 들어 있어 서로 상응하도록 짜여 있다. 그러므로 9절을 첫 단락에 포함시킨다면 다음과 같은 짜임새를 제시할 수 있다.

가. 출19:9~15, 신현현 준비: 성결준비와 산 접촉 금지
중앙. 출19:16~20, 신현현: 산꼭대기로 강림하여 모쉐와 대화하심
가′. 출19:21~25, 신현현 결과: 제사장의 성결준비와 산 접촉 금지

위의 모양을 보면 문단의 짜임새가 [가 - 중앙 - 가´]의 교차구도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차구도는 지금까지 분석한 토라의 다른 문단들에서도 일관되게 입증되어 왔듯이 토라의 최종저자가 전권에 걸쳐서 일관되게 사용하는 저술기법이다.
그러므로 출19:1~2와 출19:3~8의 두 문단까지 더하면 19장 전체의 짜임새는 아래와 같다.

A. 출19:1~2, 백성이 그 산에 도착하여 진을 치다 // A′. 민10:11
B. 출19:3~8, 시나이산 서곡 // B′. 출24:3~8
가. 출19:9~15, 신현현 준비: 성결준비와 산 접촉 금지
중앙. 출19:16~20, 신현현: 산꼭대기로 강림하여 모쉐와 대화하심
가′. 출19:21~25, 신현현 결과: 제사장의 성결준비와 산 접촉 금지

A는 민10:11과 상응하고 B는 출24:3~8에 상응한다. 이 두 요소는 시내단화 전체의 짜임새에 봉사하는 부분으로 출19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2. 본문의 위치와 역할.
출19:1~2(위의 A)은 시나이산 도착을 알리고 민10:11은 시나이산 출발을 알리는데 이 두 문장은 시나이산 본체를 양끝에서 서로 상응하면서 포괄형을 이루고 있다.
출19:3~8(위의 B)은 시나이산에서 벌어질 모든 사건들과 주어질 법문들의 취지를 밝히는 ‘시나이산 서곡’이다. 이 문단은 창12:1~3과 출15:22~27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고비마다 등장하는 서문이다. 시나이산에서 야훼께서 백성을 가르치시는 이유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이 문단은 시내단화 제1부를 매조지는 계약체결예식을 보도하는 출24:3~8의 본문과 상응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전자는 문단을 열고 후자는 문단을 닫는다.
출19:9~25은 앞으로 언급될 성막제작과 성직임직식과 레위기의 정결법을 의식하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초미의 관심사가 다루어지고 있다. 만남은 하나님이 친히 사람에게 다가 오심으로서만 가능하다는 대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시나이산 소재는 이 문단에서 나오는 동시에 출241~2, 9~11에도 나온다. 이 둘은 서로 상응하도록 앞뒤에 배치되어 있다.

<통시읽기>
지금까지 토라의 최종저자는 신파본을 주요 자료로 사용하였다고 나는 주장해 왔다. 이 주장의 연장선상으로 이제는 출19장의 신파본을 재건해 볼 차례가 되었다. 이 작업에는 통시읽기의 방법이 필요하다.
출19:1~2의 문장에 여러 사람의 손길을 탄 흔적이 엿보인다. ‘시나이 광야로 들어섰다’는 1절의 진술이 2절에서 ‘시나이 광야로 왔으며’라고 다시 반복된다. ‘진을 거두어 떠나 ~에 진을 쳤다’라는 여정을 나타내는 상투어가 2절에 사용된다. 또 2절에서 ‘그곳에서’와 ‘그 산 앞에’가 중복되고, 또 ‘진을 쳤다’란 어귀가 바로 그 앞에 나오는 ‘진을 쳤다’란 어귀와 중복된다. 주석가들은 이러한 중복되는 현상을 보면서 이 문장이 한 사람에 의해 작문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자료들을 조합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학자마다 다르게 1~2절을 J자료와 E자료의 조합물이라고 간주해왔다. 이와는 달리 반시터즈는 1절은 P의 작문이 명백하다고 보고 2절을 J(포로기만큼이나 늦은 J)의 솜씨로 판단한다. 반시터즈는 1절이 여정(旅程)을 알리는 표시이기 때문에 P의 솜씨라고 판단하고 2절을 J의 여정에 속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J의 여정이라는 것이 애매하다. 나는 본서 제1권에서 출15:22~18:27을 광야 제1부로 간주하고 그것을 통째로 P의 작품이라고 판별하였다. 그러므로 ‘르비딤’에 관련된 솜씨는 모두 P의 솜씨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르비딤’을 가지고 J라고 판단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나는 출15:22에서 ‘슈르광야로 들어갔으며 ~ 물을 찾지 못하였다’는 언급이 P의 작품이고 ‘얌수프에서 나와서 사흘길을 그 광야로 걸어갔다’는 부분을 신파본(Dtr)에 본디 있던 부분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야훼께서 모쉐에게 말씀하실 때나, 모쉐가 파라오에게 말할 때나, 광야로 사흘길을 들어가서 그곳에서 야훼께 제사를 지내겠다고 한 언급들이 앞에 나왔는데(출3:18; 5:3; 8:27[힙23]) 출15:22의 ‘사흘길을 광야로 걸어갔다’란 언급은 앞의 언급들을 실행하는 부분이다. 신파본의 시나리오는 애굽에서 나온 후 사흘길을 광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사흘 동안 신현현을 준비하고 제칠일에 호렙산에서 신현현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3일 + 3일 + 1일 = 7일). 그렇다면 출19:1~2은 출15:22의 신파본 요소를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통시읽기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출15:22ㅈㅅ의 표현 ‘이스라엘’은 출19:2ㅎㅎ의 ‘이스라엘’과 상통한다. 그리고 ‘사흘길을 그 광야로 걸어갔다’는 진술은 ‘바로 이 날에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들어섰다’란 표현과 상통한다. 신파본에는 처음에는 아마도 ‘호렙’이란 용어만 쓰이다가 나중에 ‘시나이’란 명칭이 혼용되게 되었다고 본다면 ‘시나이 광야’란 표현이 들어온 시점을 명백하게 규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아마도 신파본이 P본으로 발전하는 중간시점에 ‘시나이’란 명칭이 들어온 듯하다(참조. 느헤미야 9장). 그러므로 출19:1뿐만 아니라 출19:2도 신파본을 초본으로 P가 개정한 결과물로 보아야 마땅하다. 다만 그 가운데서 신파본의 요소만을 가려내어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신파본 요소는 1절에서 ‘바로 이 날에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들어섰다’와 2절에서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그 산 앞에 진을 쳤다’의 두 요소로 압축된다. 그렇다면 신파본은 ‘모쉐가 이스라엘을 수프바다에서 인도하여 사흘길을 광야로 걸어갔으며(출15:22신파본), 바로 이 날에 그들은 호렙 광야에 도착하여 그 산 앞에 진을 쳤다(출19:1~2신파본)’라고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출19:1~2은 자료들의 조합물이 아니라 신파본을 초본으로 삼은 P가 자신의 시나리오에 따라 그 초본을 개정한 결과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래의 본문에서 밑줄친 부분은 신파본의 요소들이다.

<출15:22> 모쉐가 이스라엘을 수프바다에서 이끌어 낸 후 그들은 [슈르P]광야로 들어갔다. 그 광야에서 사흘길을 걸어갔다. [물을 찾지 못하였다.] <출19:1> [이스라엘 자손이 미츠라임 땅에서 나온 지 셋째달 초하루 되던 날] 바로 이 날에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들어섰다. <출19:2> [그들이 르비딤에서 진을 거두어 떠나 시나이 광야로 왔으며 그 광야에 진을 쳤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그 산 앞에 진을 쳤다.

그러므로 신파본에서 출15:22은 곧바로 출19:1~2로 이어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출15:22~18:27의 광야 제1부 이야기는 모두 신파본의 초본을 응용하여 P가 친히 작문한 솜씨이다.
3절은 ‘우모쉐’의 분절법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문단이 시작됨을 알린다. 이 기법은 1~2절을 작문한 P의 솜씨이다. 왜냐하면 3~8절의 ‘시나이산 서곡’ 문단을 도입하기 위한 문단장치가 3절 도입부에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모쉐는 하나님에게 올라갔다’란 3ㅈ절은 P의 솜씨이다. 3절의 ‘하나님에게 올라갔다’와 ‘야훼께서 그 산에서 그를 불렀다’란 두 문장의 관계는 어색하다. 두 번째 문장은 ‘시나이 서곡’인 출19:3~8을 도입하는 문장이다. 나중의 문장 ‘야훼께서 그 산에서 그를 불렀다’란 어절은 위의 신파본 마지막 어절인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그 산 앞에 진을 쳤다’란 어절과 자연스레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신파본의 요소로 판단된다.

[신파본]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그 산 앞에 진을 쳤다. 야훼께서 그 산에서 그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4절의 ‘독수리 날개’ 표상은 신속함을 나타내며 본디 신파본에 있던 요소이다. 왜냐하면 신파본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수프바다를 건넌 이래 이스라엘은 사흘 만에 신속하게 하나님의 산에 당도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4절은 미츠라임 사람들에게 행한 일을 보았다고 언급하는데 이것도 신파본에 있었던 요소로 판단된다. 신파본에는 열 가지 재앙이 아니라 ‘일곱 가지 기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도했다고 상정할 수 있다. 5절은 신명기에서 아주 판에 박힌 상투어이므로 신파의 솜씨로 판단된다. ‘서굴라’(보물)이란 매우 인상 깊은 용어는 신명기에 무려 세 차례나 반복되기 때문에(신7:6; 14:2; 26:18) 신파본의 요소로 의심할 수 없다. 신7:6; 14:2은 5절의 문장과 거의 동일하다. 6절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민족’이란 표상도 신7:6; 14:2에 나오는 ‘거룩한 백성’이란 표상을 그대로 판에 박은 것이다. 그러므로 6절도 신파본에서 따온 것임이 분명하다. 7절은 8절과 한 덩어리이다. 8절의 ‘회보하였다’란 표현은 9절을 유도하기 위한 최종저자 P의 솜씨로 보인다. 3절의 명령어 ‘보고하라’는 7절에서 실행되는데 ‘이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두었다’라고 하여 동사 ‘???심’을 동원한 점이 이채롭다.
‘장로들을 불러서 말씀을 그들 앞에 놓았다(와야셈)’라는 수사법은 이곳 말고 다른 곳에도 나오는지 알아보자. 출4:15에 보면 야훼께서 모쉐에게 명하시기를 아하론에게 말하고 아하론의 입에 말씀을 ‘넣어라’(워삼타)고 명한다. 이 어귀는 계약법 서두 출21:1에 아주 판박이로 나온다. 또 이 어귀는 신4:44을 꼭 빼닮았다. 비교해 보자.

출21:1, ‘이것은 그들 앞에 놓은 율례이다.’
(워엘레 하미쉬파팀 아쉘 타심 리프네이헴)
출19:7, ‘야훼께서 명하신 이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놓았다.’
(와야셈 리프네이헴 엩 콜-하드바림 하엘레 아쉘 치봐후 아도나이)
신4:44, ‘이것은 모쉐가 이스라엘 자손 앞에 놓았던 토라이다.’
(워쫕 하토라 아쉘-삼 모쉐 리프네이 브네이 이스라엘)

말씀을 ‘~ 앞에 놓았다’란 어법은 이상의 세 군데에 한정되어 있다. 위의 비교문에서 분명하게 보이듯이 출19:7의 어법은 계약법 초두의 출21:1을 의식한 작문이며 신4:44의 어법은 출19:7; 21:1의 어법을 모쉐의 회상기 속에서 응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7절의 수사법은 신파본에 있던 요소이다.
6ㅎ절의 ‘이상은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해야할 말씀들이다’란 어귀는 3~6절의 신언(神言)을 마무리하는 문구이다. 여기에 7~8절이 붙어 있다. 8절의 준행상투어는 출24:3, 7에 두 차례 나오는 준행상투어와 상응하는 모양이 신파본에 있었던 것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작법이 최종저자에 의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준행상투어가 레위기에 자주 나오는 상투어이기 때문에 그것을 신파본의 요소로 단정하기 쉽지 않다. 이 쟁점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관건은 ‘????나아세’라는 상투어에 달려 있다. 이 어귀가 신명기나 신명기사가의 작품들에 얼마나 흔히 쓰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민32:31을 보자. 르우벤과 갓지파가 요단동편에 거주하려고 할 때 모쉐가 명한 것을 준행하겠다는 준행상투어가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신3:18~20으로 미루어 본디 신파본에 있던 것으로 판명된다. 또 수1:16에 여호수아의 명령을 다 이행하겠다는 준행상투어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 출19:8과 출24:3, 7에 나오는 상투어들은 신파본의 것으로 판단해도 되겠다. 그렇다면 신파본에서 이미 출19:3~8의 ‘서곡(序曲)’과 출24:3~8의 ‘결곡’(結曲)이 상응하도록 짜여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신파본은 본디 [서곡] + [호렙산 신현현] + [신파의 십계명: 신명기 5장] + [계약법] + [결곡]의 내용으로 짜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추정이 인정된다면 8절은 신파본에 있던 구절이다.
준행상투어는 레위기에 여러 차례 나온다. 레위기는 순전히 P의 작품이다. 신파본에 사용되던 준행상투어를 P가 자신의 레위기 문집에서 채용하여 즐겨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성결법(레17~26장)에 일곱 차례 되풀이 언급되고 있다(레19:37; 20:8, 22; 22:31; 25:18ㅈ, 18ㅎ; 26:3). ‘~을 지켜 행하라’는 어귀를 ‘준수명령어’라고 하여 영어로는 execution formula라고 부른다. 이 준수명령상투어는 신명기학파의 문집에도 세 차례 나온다(신7:12; 29:8; 느1:9). 여기서도 P는 Dtr을 채용하여 자신의 문집에 응용하였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9절 끝에 있는 ‘모쉐는 백성의 말을 야훼께 보고하였다’(9ㅎ)란 어절이 9ㅈ절에 있는 야훼의 말씀과 모순을 일으킨다. 9ㅎ절의 동사 ‘나가드’는 위의 3절의 동사와 동일하다. 내가 보기에 9ㅎ절은 8ㅈ절의 바로 뒤에 놓이면 자연스럽다.

출19:8ㅈ, 모든 백성이 일제히 ‘~ 준행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출19:9ㅎ, 모쉐는 백성의 말을 야훼께 보고하였다.

따라서 8ㅎ절의 ‘모쉐가 백성의 말을 야훼께 회보하였다’란 어절은 9절을 도입하기 위한 장치로 판단된다. 이러한 장치가 본디 신파의 솜씨인지 아니면 나중에 마무리한 P의 솜씨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모쉐를 믿는다’란 어귀의 용례들을 일일이 살펴보아야 하겠다.
토라에서 동사 ‘???아만’은 일관된 신학의 의도를 보여준다. 다음의 용례들을 살펴보자: 출4:1, ‘저를 믿지 않고’; 출4:5, ‘그들이 믿을 것이다’; 출4:8, ‘그들이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번째 표징을 믿을 것이다’; 출4:9, ‘두 번째 표징도 믿지 않으면’; 출4:31, ‘백성이 그들을 믿었다’; 출14:31, ‘이스라엘은 주와 주의 종 모쉐를 믿었다’; 민14:11,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겠다더냐?’; 민20: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를 믿지 않았다.’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목이 곧은 본성을 증명한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모쉐와 아하론의 말을 믿고 야훼를 믿기까지 수많은 징표들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시나이산 출발 이후의 파란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야훼를 불신하였고 카데쉬-므리바에서는 아하론과 모쉐까지도 야훼를 불신하고 말았다. 이것은 신9장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너희가 줄곧 나를 거역하였다’란 것이 신명기의 광야 40년 세월에 대한 이해이다.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공로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은총 덕분이다. 이것은 신명기학파의 의인론 신학이다. 동사 ‘아만’은 이러한 의인론 신학의 진술에 봉사하는 한 요소이다.
그러나 출19:9절을 신파본의 일부였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16ㄸ절들을 미리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16ㄸ절은 ‘먹장구름’에 싸여 강림하시는 야훼의 신현현을 보도한다. 또 모쉐와 야훼를 믿는다는 표상은 토라 전체에 걸쳐 가로놓여있는 대주제이다. 이 대주제는 토라의 최종저자가 만들어낸 창안물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9ㅈ절은 최종저자 P의 솜씨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P가 신파본의 요소를 활용한 결과물일 것이다.
10절에 ‘옷을 빨라’는 정결의 명령은 레11~15장의 정결법을 겨냥한 발언인 듯 보인다. 그래서 혹시 이것이 P의 솜씨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11절은 사흘째 되는 날을 위해 준비하라고 명령한다. 10절의 명령은 14절에서 시행되고 11절의 명령은 15절에서 시행된다. 14절에 모쉐의 하산 언급이 있는데 이것은 3ㅈ절의 등산 언급을 전제한 것이다(그러자 모쉐는 하나님에게 올라갔다[P]). 이것을 빼고 읽으면 ‘이스라엘은 그 산 앞에 진을 쳤다. 야훼께서 그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라고 된다. 야훼께서 산에서 말씀하시고 모쉐는 산 아래에서 말씀을 듣고 아뢴다. 이러한 장면은 14절의 ‘모쉐가 산에서 내려왔다’는 언급만 없으면 일관된 장면묘사로 이어진다. 이 일관성은 20ㅎ절 이전까지 이어진다. 모쉐와 백성이 산 아래에서 야훼의 말씀을 듣는 장면은 신5장에 수록된 모쉐의 회고담과 일치한다. 야훼께서 산 위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모쉐와 백성은 산에 오르지 않고 말씀을 들었다(신5:4~5). 이것은 출19:17의 진술과도 동일하다. 그 후에 백성이 무서워하므로 모쉐가 야훼와 백성의 중간에 서게 되었다(신5:5ㅎ, 27). 그러므로 14절의 하산 언급은 P의 솜씨이고 옷을 빨았다는 실행표지도 역시 P의 손길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10절도 P의 손길로 간주해야 한다.
12~13절은 하나님의 산을 침범하지 말라는 일관된 전언이다. 이것은 성막/회막의 표상을 예비하는 장치로 간주된다. 즉 성전신학을 표현하기 때문에 P의 솜씨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잇는 20ㅎ~25절은 모두 P의 솜씨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16~20ㅈ절은 모두 신파본인가? 이 중에 나팔소리에 관련된 심상이 왠지 어색하게 들린다. ‘나팔소리’는 민수기에서 시나이산 출발의 장면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쇼파르’의 소리가 아니라 ‘??????하초츠로트’ 소리가 언급된다(민10:2, ‘나팔’). ‘쇼파르’ 소리는 출20:18에도 언급된다. 또 희년법을 보도하는 레25:9에 두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신5:22~27의 신현현 회상기에는 나팔(쇼파르) 소리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출19장의 나팔(쇼파르) 소리는 레위기의 희년신학을 의식하고 도입된 P의 작품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 17절이 어색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맞이하러 모쉐가 백성을 데리고 진에서 나왔다는 동선이 16절의 ‘진 안에서 백성이 벌벌 떨었다’는 진술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백성을 산기슭에 세웠다는 동작은 산을 침범하지 말라는 명령을 준행했음을 표현하려고 도입된 P의 추가문임에 틀림없다. 20ㅈ절의 하산언급도 18절의 하산언급과 중첩되기 때문에 P의 추가 솜씨로 보인다.
이제 지금까지 분석한 대로 P의 손길을 빼고 신명기학파의 손길을 모아서 적어보면 아래와 같은 신파본이 나온다.

<출15:22> 모쉐가 이스라엘을 수프바다에서 이끌어 낸 후 그들은 [슈르P]광야로 들어갔다. 그 광야에서 사흘길을 걸어갔다. <19:1> 바로 이 날에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들어섰다. <19:2>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그 산 앞에 진을 쳤다.
<3> 야훼께서 그 산에서 모쉐를 불러 말씀하셨다. ‘야곱의 집에게 말해 주고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보고하여 이렇게 일러라. <4> “너희는 내가 미츠라임에서 행한 일과 내가 너희를 독수리의 날개에 실어 너희를 나에게 데려 온 일을 목격하였다. <5> 이제 너희가 내 목소리를 잘 듣고 너의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중에서 빼낸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6>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나라이자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상은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해주어야 할 말씀이다.’ <7> 모쉐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에게 외쳐 야훼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이 모든 말씀들을 그들 앞에 두었다. <8> 그러자 모든 백성이 일제히 대답하여 ‘야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9> 모쉐는 백성의 말을 야훼께 보고하였다.
<10> 야훼께서 모쉐에게 말씀하셨다. <11> ‘사흘째 되는 날을 위해 준비하여라. 왜냐하면 사흘째 되는 날에 야훼께서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호렙산 위로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모쉐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을 위하여 준비를 하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 <16> 사흘째 되는 날에 아침이 되자 천둥소리과 번개와 먹구름이 그 산 위에 있었다. 진 안에 있는 모든 백성이 벌벌 떨었다. <18> 호렙산에 연기가 자욱한데 그 위로 야훼께서 불 속에서 내려 오셨다. 연기가 용광로의 연기처럼 피어올랐고 온 산이 몹시 떨렸다.
<신5:6//출20:1~2>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야훼라. .... ’

위에서 재건한 신파본은 신명기의 회고담과 거의 일치한다. 시나이산이란 용어는 모두 호렙산으로 바꾸었다. 신명기는 시나이산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파본을 재건해 놓고 보니 호렙산 신현현기는 워낙 분량이 적은 본문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명기의] 십계명을 위한 서문 으로 작성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설교명상>
지금까지 본문의 공시읽기와 통시읽기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를 종합해 보면서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진 본문을 있는 그대로 감상해 보기로 하자.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본문이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중심되는 신학을 우리가 받아 보는 일이다. 우선 신파본을 살펴보자.

1. 주일성수와 유월절 신학
신파본에 의하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사흘 만에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흘을 기다려서 홍해를 건넌 지 칠일 째 되는 날에 신현현을 맞는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신16:1~8에 따른 유월절 시나리오에 부합한다. 신16:8에는 엿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이레째는 야훼 앞에서 ‘성회’(聖會, ????, 아체레트)로 모인다. 그러므로 신파본의 기본 신학은 유월절 신학이다.
유월절은 호렙산 신현현을 핵심되는 목적으로 삼는다. 곧 삼일은 광야행진, 삼일은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마지막 날 일곱째 날에는 성회로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사를 가진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광야생활과 정결한 생활을 바탕으로 제칠일마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신명기학파의 초본에는 사흘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유월절 안식일 기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오늘날 교회가 지키는 주일, 수요기도회, 주일의 집회 순례의 박자에 잘 맞아 떨어진다. 유월절을 지키는 일은 신파본을 작성한 분이 처한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대는 포로기나 포로이후기 초엽으로 볼 수 있고, 유월절 신학을 중심으로 뭉친 공동체는 아마도 바빌로니아에 처한 신앙공동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19장의 말씀을 설교하려면 우선 주일성수를 강조할 것, 그리고 주일에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만나도록 성도들에게 힘주어 설득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설교자가 하나님을 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알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성도들에게 보고하고 있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준행하겠습니다’라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지도 점검할 것을 본문말씀은 촉구한다.

2. 설교자와 성도의 올바른 관계
6ㅎ절의 ‘이상은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해야할 말씀들이다’란 어귀의 ‘엘레 하드바림’은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상투어이다(신29:1[힙28:69]; 29:29[힙30:1]).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이라 하지 않고 모쉐가 이스라엘에게 전할 말씀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모쉐의 말씀 전달자의 직책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이 어귀는 마치 출19:18~21을 전제하고 있는 듯 보인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모쉐에게 말씀을 중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모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아하론에게 전달하고 아하론이 백성에게 또 다시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설교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설교자는 우선 성서를 주석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아야 한다(출33:11). 말씀을 잘 정리하여 교인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 설교는 주일마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성도들은 열심히 받아 듣고 ‘준행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한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데는 모쉐를 믿는 일이 전제되어 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어색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우선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자를 믿어야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을 만나서 말씀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받은 말씀을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설교자의 진실함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설교자의 선포가 성도들의 심령에 살아 역사한다.
백성이 모쉐를 믿을 수 있게 된 데는 하나님께서 모쉐와 대화하는 것을 백성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9절은 하나님께서 모쉐와 말하는 것을 백성이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먹장구름에 쌓여 모쉐에게 내려온다고 이야기한다. 먹장구름은 시각을 가로막는다. 먹장구름에 쌓여 오면 야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린다. 야훼의 목소리를 들은 백성은 모쉐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야훼의 목소리를 이미 들었다면 모쉐의 전언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16절에 의하면 소리를 들었으나 너무나 무서워서 백성은 벌벌 떨었다고 한다(또한, 출20:18). 마침내 출20:19에 이르러 백성은 모쉐의 중개를 요청한다. 신1:28에 의하면 백성의 두려움은 야훼를 경외하는 표지가 된다.
말씀의 전달자는 야훼께 선택을 받고 소명을 받고 특별한 소임을 받아야 한다. 백성은 야훼와 모쉐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쉐도 믿는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모쉐를 믿을 수 있다. 설교자를 성도들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민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영웅이 될 수 없는 법이다.

3. 설교자는 자기를 한껏 낮추어야 한다.
설교자는 받은 말씀을 백성에게 보고해야 한다(출19:3). 설교자는 또한 백성의 말을 야훼께도 보고해야 한다(출19:9ㅎ). 이 두 경우에 동일한 동사 ‘나가드’가 쓰였다. 개역개정본에서는 ‘말하라’와 ‘아뢰었다’로 각기 다르게 번역했다(표준, ‘일러주어라’와 ‘아뢰었다’; 공역, ‘가르쳐 주어라’와 ‘아뢰다’). 같은 히브리어 동사를 3절에서는 ‘일러주다’라고 아랫말로 번역하고, 9절에서는 ‘아뢰다’라고 하여 존대말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모쉐가 백성에게 말할 때는 아랫말로 해도 되고, 하나님께 말할 때는 존대말로 해야 한다는 편견에서 나온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나 한글개역본에는 두 곳에서 모두 ‘고하다’라고 올바르게 번역해 주고 있다. 나는 이 두 경우에 동일한 원어를 동일한 역어로 조절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고하다’라는 번역어는 모쉐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우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말 어법에는 ‘신하가 임금에게 무엇을 고하다’라고 하면 어색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어떤 용어로 통일하면 좋겠는가?
히브리어 동사 ‘나가드’의 히필형은 ‘말해주어서 어떤 사실을 알린다’, ‘보고하다’, ‘가르쳐주다’, ‘선언하다’를 뜻한다. 3ㅎii~iii절은 평행법 모양을 취하고 있다.

3ㅎii절, 야곱의 집에게 이렇게 말해 주어라(코 토마르).
3ㅎiii절,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보고하라(타기드).
위의 평행법에서 ‘코 토마르’와 ‘타기드’는 동일한 뜻으로 제시되었다. ‘코 토마르’는 ‘코 아마르 아도나이’라는 예언상투어를 살짝 변용한 어법이다. 따라서 ‘타기드’도 결국 이 예언상투어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3ㅎiii절과 동일한 단어를 쓰는 9ㅎ절의 ‘와야케드’도 예언자의 전언상투어를 살짝 응용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3절과 9절에서 양쪽 모두 ‘보고하다’란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본다.
백성을 하대하는 일도 없고 야훼께 무례한 일도 없게 하려면 ‘보고하다’란 번역어의 느낌이 좋다. 모쉐는 야훼의 말씀을 백성에게 보고해야 하며, 백성의 말을 야훼께 다시 보고해야 한다. 백성을 대할 때 마치 야훼를 대하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이러한 모쉐의 입지는 오늘날 설교자의 입지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성도들 앞에서 말씀을 전할 때 자칫 성도들 앞에서 교만해 지기 쉽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마치 자기가 의롭고 능력 있어서 성도들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회개를 선포하는 양 착각하기 쉽다. 성서의 뜻은 그 반대다. 설교자는 백성에게 주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고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의 뜻을 깨닫게 하는 책임을 진 자이다. 또한 늘 중보기도를 통해서 백성의 깨달음과 결단을 주님께 아뢰어서 자신의 영성과 백성의 영성을 하나님께 점검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께서 보고를 받지 않는다고 모르실 분이 아니다. 하지만 보고를 하게 함은 설교자가 백성의 뜻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하고 있는 지를 점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섬기는 종이다. 종은 가장 낮은 자이다. 그래서 민수기 12:3에 모쉐를 일컬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모름지기 설교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지극히 겸손해야 할 것이다.

4. 하나님의 산은 거룩한 성전의 표상이다.
지금까지 신파본의 신학이 디아스포라 역사의 초기에 발흥한 신학임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현재 주어진 본문 전체가 보여주는 바를 신파본의 신학에 비추어 명상해 보기로 한다. 최종저자 P는 출19장에서 우선 성전신학을 구축한다. 야훼 하나님이 지상에 거주하시도록 마련한 곳이 성전 또는 성소이다. 이 성전에 하나님께서 거처를 정하시는 과정을 제사장학자들은 궁구하고 있다. 그들은 제사장신학의 첫단추를 출19장에서 끼우고 있는 것이다.
23절에는 산을 중심으로 경계를 치라고 명한다. 13절에 주어진 내용은 ‘산에 접촉하지 말라’는 것으로 산이 중심이 되고 있다. 13절 끝에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때 백성이 산에 오르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18절에는 나팔소리가 울릴 때 백성은 산기슭에 선다. 19절에 의하면 나팔소리가 더 크게 울릴 때 모쉐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20절에는 모쉐만 산으로 올라간다.
이후로 출애굽기 25~31장에서 펼쳐지는 성전신학은 솔로몬성전에 대한 뼈저린 반성의 결과물이다. 광야에서 이동하면서 들고 다녀야 하는 성막/회막은 조상들에게 주신 성전의 모형이다: ‘우리 조상이 지은 야훼의 제단 모형을 보라’(수22:28). ‘모형’이라함은 실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일정한 신학에 따라 관상용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훈을 주는가?
모형의 중심인 지성소에는 계약궤/증거궤/법궤가 안치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증거궤의 뚜껑에 임재하여 모쉐를 만나시고 백성에게 일러 줄 말씀을 일러 주신다(출25:22). 증거궤의 뚜껑에는 날개를 편 두 그룹이 조형되어 있다. 이것은 우상이 아니다. 이 뚜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원어는 ‘카포렛’인데 이것을 번역본들은 ‘시은좌’ 내지는 ‘속죄소’라고 번역하였다. 히브리어 동사 ‘카파르’에서 ‘카포렛’이란 명사가 파생되었다. 동사 ‘카파르’의 기본 의미는 ‘덮는다’인데 여기서 죄를 덮는다는 뜻으로 ‘속죄하다’라는 파생 의미가 나왔다. ‘속죄하다’에서 더 뜻이 펼쳐져서 ‘은혜를 베푸다’(시은 施恩)란 뜻도 나왔다. 그러나 ‘카포렛’은 일차로는 ‘어떤 용기나 물체를 덮는 뚜껑 내지는 덮개’를 가리킨다. 출25:22의 의미는 법궤의 뚜껑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뜻이다.
두 그룹의 표상은 이사야 6장이 보여 주는 대로 예루살렘의 성전을 표상한다. 솔로몬 성전에는 두 그룹이 있었고 거기에 계약궤가 안치되어 있었다. 이전에 계약궤가 실로에 있을 때는 사무엘이 섬기는 성전의 지성소(헤이칼) 안에 그것이 안치되어 있었다(삼상3:3).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에 ‘야훼의 계약궤’ 안에 ‘두 돌판’이 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계약궤’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대표하는 성물이다. 신명기사가에게 있어서 계약궤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도구이다. 계약궤를 앞세우고 가면 모든 강한 나라의 왕들이 망하고 높은 성곽이 무너져 내린다.
토라에 있어서 제사장학파는 예루살렘의 학개성전/제이성전의 신학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적용하고 있다. 성전의 지성소에는 증거궤/법궤가 안치되어 있고 그 법궤 안에는 시나이산에서 주신 말씀을 새긴 두 돌판이 안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모든 성전제의의 실재들은 두 돌판의 권위 아래 종속되게 되었고 모든 종래의 성전제사들은 말씀에 따라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학파는 제이성전의 중심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회당에서 읽는 토라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중심에 내세우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제사장학파의 신학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서 말씀의 신학을 정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차후에 두고두고 상론하기로 한다. 편의상 여기서는 다만 시나이산 현현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논의를 펼치기 위해서 P는 출19장에서 시나이산을 성전의 원형으로 제시한다. P는 신파본의 호렙산 신현현 기사를 자료로 사용하여 거기에 하나님의 산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 강조하고 있다. 그 신성함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나이산에 거하시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며, 이어서 백성 가운데 거주하시려고 시나이산에 잠시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백성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출17:1~7, 8~16). 이제 곧 성막이 완성되면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된 법궤의 뚜껑 위에 임재하실 것이며 법궤 속에 안치되어 있는 두 돌판의 말씀으로 현존하실 것이다.
무소부재하시고 자유로우신 하나님께서 성막에 갇혀 계시는 것은 아니다.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법궤 뚜껑에 임재해 오시며 두 돌판에 새겨 있는 말씀은 하나님의 현존을 확고히 보장하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또 읽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체득하는 자, 그가 바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 모쉐가 그러한 설교자의 원형이며 모쉐의 뒤를 이어 아하론계의 제사장과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봉직하면서 말씀을 전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다. 설교자는 이러한 레위인 제사장들의 전통을 계대하는 사람들이다. 설교자가 펼치는 성경의 말씀 위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설교자를 만나 주신다. 이러한 사상은 요한복음의 서두에 로고스론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5. 하나님을 만나려면 정결하여야 한다.
또한 최종저자는 하나님의 만나려면 백성이 정결해야 함을 강조한다. 정결은 옷을 빠는 행위로 표현된다. 성전에 합당한 존재는 정결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불결한 자를 접견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제사장학파의 사상은 디아스포라 공동체 성원에게 새로운 차원의 신앙생활을 열어 주었다. 레위기 11~15장은 백성의 정결함을 강조한다. 레위기 16장은 대속죄일에 매년 백성이 속죄를 받아야 깨끗함을 입을 수 있음을 규정한다. 이로써 레위기 17~26장은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가능성과 전망을 백성에게 제시해 준다. 이러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 그 원형이 되는 모범을 제사장학파는 출19장에서 제시한다.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백성은 사흘간 일상의 성생활을 중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옷까지도 빨아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정결은 죄로부터의 정결, 곧 죄씻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자 요한이 죄씻음 받기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예수께서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죄씻음 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다. 시나이산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옷을 빨았던 백성과 같이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는 예식을 위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에게도 죄씻음을 받는 세례가 있은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로 확인받은 성령의 세례가 다시 있었다. 세상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또 한 차례 형제의 죄를 짊어지는 고난의 세례를 더 받아야 한다. 이러한 정결예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되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특별히 경건한 날에는 의관을 정제하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옷을 빨았다는 행위는 이러한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경건한 가짐은 일상의 관행을 끊고 특별한 만남의 시간을 준비하는 데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성서를 펼쳐 들 때 우리는 특별히 경건한 마음 자세를 다듬어야 할 것이다. 거룩한 주일을 맞이할 때도 여느 때와는 다르게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님을 대할 때에도 특별히 경건한 자세를 갖출 것이며, 목회자가 성도를 대할 때에도 그리해야 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삶에서 취하는 자기중심의 자세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에는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도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의 강림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