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성서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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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연
작성일
2007-10-09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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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

- 이영재(목사/구약학박사/기사연연구실장/전주성경학당이끔이) -

<들어가는 말>
신자유주의란 시장에 대한 국가의 보호주의를 벗어나, 온 세계 범위의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누리려는 자본의 운동이다. 1970년 이후 세계에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확산되었다. 자본은 국가 간의 보호관세를 철폐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경쟁의 시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대한민국도 1987년 이후 IMF 체제를 겪으면서 급물살을 탔다.
최근에 한국정부가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은데 이어서 미국과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한국사회에도 신자유주의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한국정부는 EU와 호주와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계획이다. 곧 중국과도 그리할 것이다.
미국의 민주당은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강력한 보호주의의 정강을 내놓는다. 월스트리트저널이나 워싱턴포스트 등 기업가 중심의 언론들은 민주당의 정책을 맹비난한다. 최근에는 민주당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경제학자 천여명이 자유무역협정을 옹호하여 서명하였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추동하는 입장이나 그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나 공통되게 미국이라는 국가 단위에서 국익을 추구한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비슷하다.
자유무역협정은 한국의 농업을 망칠 것이라고 보기에 농민단체들은 결사반대에 나선다. 농촌경제가 피폐하면 농촌교회가 어려워지기에 농촌목회자들도 반대의 깃발을 들고 나선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사회과학자의 논리만으로 FTA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성서의 눈으로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FTA를 가늠해 보자.

1. 신자유주의에 맞선 교회의 대응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아 세계교회는 참다운 제자도의 실천을 모색하며 고뇌하고 있다. 2006년 2월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모인 제9차 WCC 총회는 세계경제를 쟁점으로 제시하였다. 총회준비서는 ‘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s and Earth’(사람들이 사는 지구에 걸맞는 진정한 세계화 AGAPE)라는 주제로 마련되었다. 세계화가 낳는 양극화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가페’운동을 실천하자고 제안하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교회는 실천할 지침을 다음과 같이 마련하였다. ‘순교를 각오한 예수의 제자도를 실행할 것, 불의와 파괴의 권력이 복음을 위협할 때 생명을 창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교에 참여할 것, 피조물과 더불어 탄식하시는 성령과 함께 사람이 사는 지구의 고통을 나누어 질 것, 생명의 정의를 위하여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계약을 체결할 것, 불의와 파괴의 권세에 대항하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앞장 설 것,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서 교회가 전체 지구공동체에 생명을 전달하는 선교에 나설 것.’
FTA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침묵하고 있다. 도시에 집결한 한국교회의 주류는 FTA를 지지한다. 지식인 기독인들은 자유로운 시장의 이론을 신봉한다. 이들은 더욱 부강한 나라를 꿈꾸며 국민소득 삼만불 시대를 선망한다. 하지만 성서는 FTA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보고 있나?

2. 하나님은 제국을 무너뜨리신다
토라는 포로기를 살던 디아스포라 유민들의 눈으로 과거의 왕조사를 뼈아프게 반성한다. 왕국체제가 옳았느냐 그릇되었느냐 시비를 논한다. 왕국체제에 대한 반성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토라는 제국의 체제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한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옹호하였다.
왕조사는 하나님을 거역한 반역자들의 역사다. 열방들이 내세우는 것과 동일한 국가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이스라엘은 왕국을 꾸려왔다. 이 반성이 창세기에 압축되어 있다. 가인의 살인사건 이후 가인의 후예들이 성곽을 쌓고 도시문명을 일구었다. 영웅들이 나타나 왕으로 군림하면서 땅의 백성을 착취하였다(창6:1~4). 네피림과 아나킴이 일으킨 문명은 교만의 문명이다(민13:33; 신1:28; 9:2).
영웅들이 높은 성벽을 쌓고 폭력을 휘두를 때 약자들은 고통을 당하였다. 성곽과 궁전과 신전을 위시한 대규모 건축 사업에 노예노동이 투입하였다. 노예를 얻기 위해 왕들은 전쟁을 일삼고(창14장) 토지를 전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창47장). 농부들마저 노예로 전락하였다. 부가 도시에 편중되자 이주민들이 도시로 대량 유입되었다. 이들도 마침내 강제노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들이 히브리인들이다.
하나님께서 지배자들의 폭력을 물리치고 억압받는 노예를 구출하셨다. 광야에서 인도해주셨다. 그러나 백성은 번번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였다(신9:7-10:11).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은총과 해방의 역사는 백성의 불신앙 앞에서 더 진보할 수가 없었다. 역사는 죄와 구원이 반복되는 순환의 역사로 펼쳐졌다.
악순환이 거듭되는 역사 속에 탈역사로서의 종말관이 유일한 탈출구로 제시된다. 그것은 희망의 미래를 바라보는 종말공동체의 고백이다. 말씀의 공동체는 약속된 새 땅 앞에 서 있다. 욕망과 충족의 법칙이 인간의 역사를 장악하는 역사 안에서는 희망이 없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모세는 노래를 가르치고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한다(신31~34장). 비스가 산정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모세 앞에 희망찬 미래가 동터온다.

3. 신자유주의의 인간관: 타락한 ‘호모 에코노미쿠스’
반복되는 죄는 거듭되는 은총을 소용없이 만든다. 인간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종자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종자, 두 종류로 구분된다. 가인의 후예는 죄의 길을 선택하여 도성의 문명을 구가하여 전쟁과 살육의 길로 나아갔다(창4장). 이들은 대홍수를 만나 멸절하였다(창6~9장). 셋의 후예 가운데 노아만이 온전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재난에서 건져 주셨다. 데라와 아브람으로 이어지는 은총의 핏줄이 이어졌다(창5장; 10장). 그러나 인류는 하나님에게 도전하여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성벽과 신전을 건축하였다(창11장).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죄는 어디서 생겨났을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로 하여금 땅을 다스리고 제압하게 하셨다(창1:27~28, ‘라다’, ‘카바쉬’). 바알의 풍요제와 가나안의 소돔과 고모라는 땅에서 나온 욕망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땅의 욕망을 지긋이 억누르고 제압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창1:28의 히브리어 ‘카바쉬’동사를 ‘[땅을] 정복하라’라고 번역한 한글개역의 번역은 너무 세다. 그렇다고 이것을 ‘섬기다, 관리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TWOT).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땅’을 ‘복속할 것’(subdue)을 명하셨다. 여기에서 ‘그 땅’이란 가나안 땅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인간의 욕망을 한껏 부풀려 땅의 풍요를 마음껏 즐김으로써 도성의 물질문명과 군사문화를 구가하는 인간의 교만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가르치신 주기도문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땅은 사람이 지긋이 눌러주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곳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장소가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먹을거리로 채소를 주셨다. 그러나 아직 비를 주시지 않았기에 땅은 황무하였고 ‘흙을 섬길’ 사람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땅은 아직 채소를 내지 않았다. 한글개역성경은 ‘흙을 갈’ 사람도 없었다고 번역하였다(창2:5). 히브리어 원문은 ‘라아보드 엩-하아다마’라고 되어 있다. ‘라아보드’의 동사 ‘아바드’는 타자을 위해 노동을 제공하여 일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동사의 목적어가 하나님일 경우에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되고, 애굽인이 될 경우에는 ‘애굽인에게 노예살이를 하다’란 뜻이 된다. 목적어가 ‘아다마’(흙)일 경우에영어성경과 한글성경은 일제히 ‘경작하다/농사짓다/땅을 갈다’ 따위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밭을 가는 경작행위는 ‘ㄱ하다쉬’란 동사로 표현된다(왕상19:19). 흙을 ‘아다마’한다는 표현은 오직 창2~4장에서만 나올 뿐이다. 여기서 이 동사는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도록 세심하게 채용되어 있다. 창2:5의 ‘아다마’ 동사는 ‘흙을 위해서 일하다’란 뜻으로 신중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어귀는 ‘아직 흙을 섬길 사람이 없었다’라고 번역해 주어야 마땅하다. 이런 사정은 창2:8~9, 15; 3:7~8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에서 나온 먼지(‘아파르’)를 버무려 사람을 조형하시고(‘와이체르’) 그 코에 생기(‘니쉬마특하임’)를 불어 넣으니 생령(‘네페쉭하야’, ‘산 넋’?)이 되었다(창2:7). 사람의 코에 ‘니쉬마’를 불어 넣으니 ‘네페쉬’가 되었다는 것이다. ‘루악흐’를 불어 넣은 것이 아니다. ‘루악흐’는 태초에 혼돈 위에 운행하던 하나님의 기운이며 바람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기운이다. ‘루악흐’는 또한 신약성서에서 성령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영성’은 사람에게 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운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실 때만 가능하다. 성령에 충만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운인 ‘루악흐’를 구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를 비워야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영성’ 수련이란 바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총을 구하는 기도로써만 가능하다.
‘네페쉬’가 된 사람을 이루는 질료는 흙먼지이다(창3:23). 사람이 살아있는 것은 그를 조형하시고 그의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주신 하나님의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시103:14). 그러므로 ‘네페쉬’가 쇠약해지면 ‘숨’은 떠난다. 민11:6에서 ‘네페쉬’를 한글개역성경은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라고 번역했고 개역개정성경은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라고 번역하였다. ‘네페쉬’(생명력)이 다하면 ‘니쉬마’(숨)이 떠나고 사람의 육신은 흙먼지로 되돌아 간다.
땅이 황무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한 동산을 창설하시고(‘나타’=심다), 거기에 온갖 좋은 식물을 자라게 하셨다(창2:8~9). 이에 따르면, 식물은 사람이 흙을 경작한 노동의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아담이 노동을 하기 이전에 이미 에덴동산에 아담이 먹을 식물을 내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사람을 그 동산에 두어 그것을 섬기고 지키게 하셨다(창2:15, ‘아바드’, ‘샤마르’).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지음받은 것이다. ‘에코노미쿠스’는 ‘집안을 관리하다’란 뜻으로 더 크게는 ‘전 지구를 관리하다’란 뜻이 된다. ‘경제’는 본디 ‘경세제민’의 약어인데 이러한 성경의 뜻과 꼭 닮았다.
아담과 하와는 워낙에 선악을 알지 못했다. 선악은 자기중심이 서야 판별이 가능해지는 가치이다. 이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내세우는 헬레니즘 철학의 가치관이다. 사람이 동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나서야 비로소 세계를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자기중심성이 생기자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창3:7~8). 선악을 판단하는 자기중심성이 생겨 자기 멋대로 동산을 주무르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이로써 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격을 상실한 부적절한 청지기를 동산에서 쫓아내셨다.
하벨(=아벨)은 양을 먹였고 카인은 ‘흙을 섬겼다’(창4:2, ‘아바드 아다마’). 카인은 자신의 질료인 ‘흙을 섬겼다’(‘라아보드 엩-하아다마’, 창3:23). 곧 자기 자신을 섬기게 된 것이다. 창1:28의 ‘카바쉬’(복속하다)와 창3:23; 4:2의 ‘아바드’ 동사를 서로 연결시키면 자연생활신학의 기초가 마련된다. ‘땅’에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땅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의 질료인 ‘흙’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카인과 하벨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두 가지 다른 종자가 출현하였다.
최근에 원시인연구가 리이키(Meake Leakey) 박사가 케냐의 동일한 지역에서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가 함께 살았다는 증거를 ‘Thursday's Journal Nature'지에 제출하였다. 이 두 종의 인간은 150만년 전에 50만년 동안 동일한 지역에서 공존하였다. 전자는 채식을 하였고 후자는 육식을 겸하여 먹었다. 이로써 전자에서 후자로 진화하였다는 기존의 가설이 무너졌다. 이 두 원인간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발달하였는지도 미지수가 되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의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창세기 1장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타자를 먹이고 양육하는 존재인 반면에,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이기적 존재이다. 타자를 키우고 먹인 하벨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셨지만, 자기 자신의 질료인 ‘흙을 섬긴’ 카인의 소산물은 외면당하였다(창4:4~5, ‘샤아’=‘눈여겨보다’). 카인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자신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삼음으로써 하나님마저 자신을 섬기는 도구로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원조이다.
수년전에 녹색평론에 게재된 한 논설은 가인을 농경민의 대표로, 아벨을 유목민의 대표로 상정하였다. 역사에 있어서 유목민이 훨씬 공격성을 띠었고 폭력을 휘둘렀다고 분석하면서 농업으로 정착한 농민들은 평화를 옹호하는 피해자들이었다고 농민을 옹호하는 논설이었다. 그러나 인류학에서는 농경민이 잘 조직된 군사력을 보유하여 훨씬 강한 정착세력을 형성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농민부락공동체는 초원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을 강력하게 저지하였다고 보는 학자가 많다. 그러나 이 두 주장 모두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초점을 벗어나 있다. 성서는 좀 더 깊은 깨달음에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불교가 가르치는 ‘분별지’와 비교해 보면 성서의 가르침도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자신의 선이 좌절된 것을 깨닫는 순간 카인은 분노하였다. 카인은 선과 악을 알게 된 결과 피조물에 가득한 하나님의 선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자의식이 발달함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최초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분노한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말았다(창4:5ㅎ). 하나님은 분노한 인간이 애처로워 달래신다. ‘어찌하여 화를 내느냐? 어찌하여 얼굴을 돌리느냐?’(창4:6).
만약 네가 선한 일을 한다면 얼굴을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아라. 나는 온 피조물을 온통 선한 것으로만 창조하였느니라(창1:4, 10, 12, 18, 21, 25, 31). 창세기 1장에 ‘토브’(좋다/선하다)라는 단어가 일곱 차례 나온다. 이것은 온 피조물이 하나님께 다 선하고 아름답게 지음받았음을 의미한다. 본디 세상은 아름다움의 천지였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카인아! 너에게 유익한 대로만 일을 한다면, 그것은 온 피조물에게 골고루 선한 것이 못되니, 더구나 하나님에게랴! 너를 비우고 참으로 피조물에게 유익한 일을 한다면 너는 얼굴을 들고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창4:6)? 네가 하나님과 타인에게 선한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너를 호시탐탐 노리게 되어 있단다. 카인아!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그 죄가 결국은 너를 삼켜버리고 말 것이다(창4:7).’ 여기에는 카인을 올바로 가르치려는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이 배어 나온다.
비뚤어진 카인은 이윽고 동생 하벨을 죽이고 말았다(창4:8). 하벨이 흘린 피의 소리가 흙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피를 받아 마신 흙 때문에 카인은 저주를 받았다(창4:10~11). 자기 자신의 질료인 흙을 섬기던 카인의 운명은 결국 피를 마신 자신의 질료인 흙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말았다. 카인은 죄의 심한 압박에 시달린다(창4:13). 카인은 더 이상 하나님의 얼굴을 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창4:14). 하지만 주께서는 이처럼 저주받은 카인을 보호해 주시기로 약속하신다(창4:15).
카인은 도성(‘이르’, 都城)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명명하였다(창4:17). 성곽을 쌓는 행위는 타락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첫 행각이었다. 성곽에 사는 자손 중에 라멕도 사람을 죽여서 카인 보다 칠십칠 배의 벌을 받는다. 77은 무한수이다. 죄로 인한 징벌은 이제 무한하게 증폭되고 말았다(창4:23; 6:5).
카인의 죄를 계대한 도성민들의 죄된 운명은 셋에게서 태어난 자손들과 대조를 이룬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점을 눈여겨보아 ‘신국론’에서 두 도성을 논하였다. 카인의 후예인 하녹(=에녹)은 전쟁의 상징인 성곽의 맹주가 되었던 반면에(창4:17), 셋의 후예인 하녹(=에녹)은 하나님과 동거하다가 들리움을 받았다(창5:24). 셋의 후예인 라멕에게서 인류를 대홍수에서 구한 노아가 태어난 반면에, 카인의 후예인 라멕은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 상황에 매몰되고 말았다(창4:23). 카인의 후예인 하녹(에녹)은 창25:4에서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미디안의 아들들 가운데에도 기명되어 있다. 동일한 이름의 연상작용을 통해 두 부류의 인류가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토라의 신학은 표현하고 있다. 원역사에 아홉 차례 언급되는 이 이름은 창25:4까지 합치면 열 차례 언급된 셈이다. ‘라멕’이란 이름은 창4-5장에 딱 열 차례 언급되고 있다.
노아를 통해 셈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만민에게 복의 근원이 된 아브람에게로 나아간다(창12:1~3). 함의 후예는 시날땅에서 바벨탑 문명을 건설하는데 이 제국의 문명은 마침내 애굽의 파라오와 가나안의 성주들에게로 이어진다. 롯은 소돔성을 거주지로 택하여 소돔성민이 되었다가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마침내 탈락하고 말았다(창13:10; 14:12; 19:30-38).

4. 시장을 정의롭게 하시는 야훼: 해방의 하나님
야훼는 만신전을 초월하여 계신다(출20:3; 신6:4). 야훼의 백성은 만신전에 부속한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다. 오로지 히브리인 아브라함에게 현현하신 야훼만을 섬긴다. 주님께서는 미츠라임(애굽) 제국에서 노예살이하던 자기 백성을 탈출시키시고 시내산에서 계약을 체결하셨다. 제국의 왕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 ‘열국광야’(겔20:35, ‘미드바르 하암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하나님의 백성을 창설하신 것이었다(출19:3~6).
고대국가체제의 생산주력은 노예노동자들이었다. 채석장과 광산과 산림벌목장과 농토에서 노예노동이 진행되었다. 열왕들과 지배계층은 노예노동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삼고 부의 편중을 가중하였다. 전쟁포로는 노예가 되었고 가난하여 빚진 자들도 노예로 전락하였다. 먹을 것을 찾아 이주해 온 이주민들도 노예가 되었다. 야훼 하나님은 세상의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서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신다.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제국의 권력을 제압하신다(출20:2).
고대에 보통사람들은 글자를 몰랐다. 글자를 사용한 자들은 궁중관리들로서 문맹률은 99%나 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나중에 문자가 더 널리 보급되었을 때에도 권력을 누리는 귀족계층과 그들에게 봉사하는 엘리트의 부류만이 문자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고대사를 기록한 문서들은 대부분 역사를 왕들과 지배자들을 찬양하고 정당하는 문서로 가득차 있다. 노예노동에 시달렸던 피억압 하층민의 고난상과 그들의 철학을 기록한 문서는 전무하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은 오로지 히브리인의 태동과 전개를 다룬 책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성경은 억압받는 민중의 전통을 전승하는 유일한 기록인 셈이다.
이러한 피억압 민중의 생활철학을 집약한 대강령이 곧 십계명이며 디아스포라 포로민 공동체의 생활규율을 규정한 것이 곧 계약법이다. 십계명이 금하는 ‘페셀’(출20:4, 개역, ‘새긴우상’)과 ‘마세카’(출34:17, 부어만든 주물상)는 노예들이 채석장과 광산에서 만들어내는 제품이다. ‘페셀’이란 명사는 ‘파살’이란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파살’은 돌이나 나무를 깍는 조삭행위를 가리킨다. ‘페셀’은 돌조각품이나 목조각품이다. ‘마세카’란 명사는 동사 ‘나사크’에서 파생되었다. ‘나사크’는 ‘물이나 액체를 붓다’란 뜻이다. 광물을 녹여서 거푸집에 넣어 어떠한 상을 제작하였을 때 그것은 ‘마세카’가 된다.
제국의 지배자들은 저마다 웅장한 성곽을 건설하고 왕궁을 건축하였으며, 거대한 신전을 지었다. 거기에 장엄한 신상들을 세웠다. 곧 ‘페셀’과 ‘마세카’를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이 ‘페셀’과 ‘마세카’의 금지는 고대 근동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주도하는 만신전 체제를 부정하는 선언이다.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슬로건은 신의 이름으로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창출하지 말라는 반제국의 선언이다(출20:7). ‘페셀’과 ‘마세카’로 짓는 만신전의 제단과는 달리, 야훼의 제단은 정으로 쪼갠 돌로 쌓지 말아야 한다(출20:22~26; 참조. 신27:5~6; 수8:31). 야훼께 합당한 으뜸가는 제단은 흙으로 쌓은 제단이다(왕하5:17). 제단에 계단을 놓는 일도 제국의 황제들이 하는 짓이니 금해야 한다.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위하여 벌목장과 채석장에 십팔만 명이나 되는 대규모 노예노동력을 투입하였다(왕상5:13~18). 솔로몬은 성전 뜨락에서 돌깨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려고 채석장에서 다 다듬은 돌을 운반해 왔다(왕상6:7).
우상금지법과 제단법은 안식일법에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휴식없는 노동을 금지하시고 이레째마다 하루를 쉬도록 안식일법을 제정하신다(출20:8~11). 노예들이 해방된 이후에 다시 노예화 과정이 진행되었을 경우 칠년마다 노예를 해방시켜야 한다(출21:2). 노예해방의 목적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 있다. 노예가 원한다면 주인의 집에서 한 식구가 되어 평생을 거주할 수 있다(출21:6).
이상의 핵심사항들을 명령하심으로써 야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욕망이 분출되어 소용돌이 치는 충돌의 현장인 시장에 정의가 넘치기를 바라신다. 시장에서 승리한 강자가 스스로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 변화를 받아서, 약자를 돌보는 자로 거듭나기를 하나님은 촉구한다.

5. 신자유주의체제의 대안: 말씀의 공동체
실낙원에서 복락원으로 가는 관문은 시내산에 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백성에게 말씀을 기록한 돌판을 주셨다. 하나님의 백성 한 가운데 두 돌판을 담은 언약궤(법궤)가 놓였다. 증거궤의 뚜껑에는 두 그룹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뚜껑에 임재하신다(출25:22, ‘카포렛’, ‘시은좌/속죄소’[한글개역]). 법궤 위에 장치된 두 그룹의 형상은 에덴의 생명나무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천사들을 연상시킨다(창3:24). 말씀을 새긴 두 돌판은 생명나무로 은유되어 있다. 에덴에서 추방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다시 에덴동산으로 복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법궤의 뚜껑 위 두 그룹 사이에서 사람을 만나주시기로 작정하신다(출25:22). 하나님을 만나게 된 그 자체로써 에덴은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죄지은 사람 사이에 대화해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화해를 조치를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마련하신 것이다. 그러나 백성은 광야생활에서 자기를 버리지 못하였다. 간단없는 욕망의 유혹에 시달리던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듣기와 말씀준행에 실패하고 말았다(민11:4; 신9:6).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욕망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친히 법궤 뚜껑이 되게 하셨다(롬3:25). 한글개역성경에서 ‘화목제물’로 번역되어 있는 롬3:25의 그리스어 원어는 ‘휠라스테리온’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카포렛’이다. ‘카포렛’은 법궤의 뚜껑을 가리킨다. ‘시은소’, ‘시은좌’, 또는 ‘속죄소’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말씀을 준행하는 공동체가 인류 가운데 출현함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시장의 논리는 극복되었다.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의 대안은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 곧 말씀의 공동체 밖에 없다. 이 공동체는 곧 ‘교회’이다. 말씀의 목적은 자기를 비우고 오로지 그리스도로만 살도록 사람을 초청하는 데 있다(갈2:20). 자기를 버린 사람,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만이 시장의 우상으로부터 인류를 구출할 수 있다. 오늘날 현실의 교회는 이러한 부름받은 사명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나가는 말 > .
참다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애초부터 제국의 박해를 받았다. 다시는 거인과 영웅이 다스리는 나라에 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려는 공동체가 초기교회였다. 초기교회는 로마제국의 폭력에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이래, 로마카톨릭교회는 토라와 예언의 말씀을 버리고 국가와 결탁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길을 걸었다.
베드로의 사도계승권에만 집착하는 라칭거 로마총주교(교황)는 로마가톨릭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는 과거에 초기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지 못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회개하기 보다는 오히려 억지로 은폐하려고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세계의 자본가들에게 둘러싸여 그들과 협력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해 왔다.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려고 요한 바오로 직전 교황은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그러나 라칭거는 로마카톨릭교회의 개혁에 찬 물을 끼얹었다. 성서의 말씀을 떠나 로마교회의 전통을 더 숭상하는 이러한 교황은 폐위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로마카톨릭교회가 참다운 교회로 성장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봉건영주와 절대왕정의 몰락을 위해 투쟁하였다. 서구의 시민혁명은 자본주의의 체제를 낳았다. 소수의 귀족이 누리던 재화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가 계층의 다수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자본가들의 탐닉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체제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인민의 대표들은 성경이 역설하는 참된 인간의 모습에 주목하지 않았다. 서구기독교가 서구자본가체제를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사회주의 소비에트 체제는 지금 해체되어 있다.
현대에 출현한 국민국가는 자본가들의 탐욕을 제어하고 더 많은 국민이 부를 균등하게 분배하여 다함께 재화를 누리는 복지국가로 등장하였다. 이전에 왕들이 뿜어내던 욕망이 이제는 국민국가를 향도하는 국민들 안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엄청난 부를 소유한 소수의 자본가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들은 대다수의 인민을 노동시장 안에 가두고, 시장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로 다수의 인민을 예속하려 한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제국시대의 왕들과 귀족들이 누리던 삶을 더 힘차게 계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시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소수의 지배자들이 누리던 사치를 이제는 더 많은 시민들이 누리려고 한다. 국민국가에서 욕망의 절대량은 불의한 왕정국가 때보다 한층 증가하였다.
한국기독교는 이러한 신자본주의의 태풍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민중과 농민의 부를 지켜내기 위해서 반FTA투쟁에 나서는 목회자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깨어나서 자기를 비우고 가진 것을 몽땅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몸으로 살 것을 요구한다. 깨어난 목회자들이 말씀으로 공동체를 인도할 때 이 무자비한 태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목회자들 중에서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촌교회의 목회자들이 신자유주의경제체제에서 가장 소외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또한 농촌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펼치기에는 가장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다. 스스로 자연생활의 길을 택하고 구도자의 수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어 천대받는 농촌목회자가 물질을 가지지 못한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하여 틈만 나면 도시로 탈출하려고 노리고 있다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목회자가 될 터이다.
가진 것이 없이 텅 빈 자기의 내면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운다면 농촌목회자들은 이 시대를 그리스도께로 향도하는 작은 그리스도인 사도들로써 쓰임을 받는다. 이것이 참다운 베드로의 사도계승권이다. 본회퍼는 ‘윤리’란 명저에서 ‘유일하고 참된 현실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일갈하였다. 자, 양떼를 몰고 신자유주의의 광야를 건너 에덴동산으로 나아가자. 한국교회가 농촌교회를 지켜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