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2007 대선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1-11 23:19
조회
1175
대선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hwp


2007 대선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이영재 박사

생각을 펼치면서
2007년은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는 해다. 11월에 국민투표가 있다.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향후 4년 동안에 대한민국의 전개 양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대통령선거(이하, 대선)의 결과에 따라 국민들의 삶도 각 부문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교회도 국가의 전개양상에 따라서 큰 변화를 겪는다.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농촌의 인구가 줄어 들자 농촌교회도 덩달아 약해졌다. 사회에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자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와 같이 사회의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는 2006년 12월 23일 설교에서 예레미야 23장의 본문을 선포하였다. 그는 ‘2007년에 뽑을 대통령이 누가 되든지 교인은 그리 기대할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는 지도자가 진정한 지도자’라고 마지막에 정리하였다. 올바른 대통령을 뽑는 일에 교회가 세상일이라고 간주하면서 소홀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이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식으로 세상일에 무관심한 것은 성서의 뜻이 아니다. 국가권력을 위임받아 실행하는 지도자가 대통령인만큼 대통령선거를 위해 교회는 더 많이 연구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사람들은 저마다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 제이의 경제도약을 이루어 선진국 대열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독인들도 국가의 경제가 성장해야 한다는 데 의의가 없다. 대부분의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차기 대통령이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독인이나 비기독인이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경제발전이란 목표를 중심으로 여타의 정강정책의 방향이 결정된다.
2007 대선을 앞두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선거에 임해야 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은 긴요하다. 모두가 의심없이 확실하다고 말하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경제성장의 계획, 부국강병의 논리, 민족번영의 꿈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질문해야 한다. 경제성장의 부푼 계획 속에 혹여 우상숭배의 유혹이 깃들지 않았는지, 부국강병의 논리 속에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작용했는지, 민족번영의 꿈 속에 타민족 보다 자신을 앞세우려는 교만이 들어 있지 않는지, 성서를 명상하는 가운데 일일이 짚어 보아야 할 일이다.

대통령선거과 시장경제의 담론
대선을 앞두고 동아일보는 2007년 신년특집에서 현재 한국 지식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 기사는 “‘좌파이념’ 저물고 탈정치-세계화 담론 전면에”라는 큰 제목을 뽑고 있다. 민족주의 대 탈민족주의, 국가주의 대 탈국가주의, 국가경제간섭 대 신자유경제, 통일우선론 대 평화번영-선진화우선론, 등의 대립각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사회운동계에서는 2006년 말 기사연 제6차 세미나를 열고, 거기서 장윤재 교수는 세계화 시장경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지역화’ 담론을 소개하였다. 그는 이것이 한국기독교가 택해야 할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담론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이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논의들을 보면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속에서 무슨 공헌을 해야 하는지, 또한 한국사회는 세계 속에서 어떤 공헌을 할 것인지를 다시 한번 되짚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민족과 국가와 경제에 대한 명백한 입장이 없이 교회는 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자기를 세력화하거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되는 단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는 것을 본질로 하며 욕망의 실현과 이기주의를 초극하는 데 존재이유가 있다. 국가나 세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고 이기주의를 관철하는 종교는 그 존립 근거를 상실한다. 교회의 사회참여에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명상과 올바른 선교신학이 요청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위한 근거는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서의 지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지침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가 된다. 성서는 하늘뜻을 알려주는 책이다. 사람은 하늘뜻을 헤아려야 순리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그리스도인은 믿는다. 더구나 국가경영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놓고 하늘뜻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하늘뜻은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 기초한 모든 행위를 배격한다. 이 작은 글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제시된 지식인의 국가-민족-경제의 담론을 염두에 두면서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보려고 한다. 2007년 대선을 맞아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후보에게 표를 실어주어야 좋을지도 함께 생각해 보자.

성서로 본 대통령과 국가 담론
왕을 보는 성서의 눈은 곱지 않다. 구약성서에는 엄청나게 많은 왕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인물들로 드러난다. 창세기에는 파라오와 아비멜렉과 가나안왕들(참조.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이 등장한다. 파라오는 출애굽기 전체에 걸쳐 야훼 하나님의 적대자로 나온다. 민수기에는 아랏왕, 아모리왕 시혼, 바산왕 옥,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과 대적하다가 멸망당한다. 이러한 왕들은 하나같이 야훼 하나님의 사역을 거스르다가 벌을 받거나 멸망당한다. 미츠라임의 총리 요셉조차도 만년에 토지전매행위를 통해 파라오의 전제권력을 더 강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는 것인데 이 때 열방의 왕들은 하나님의 훼방꾼이 된다. 마침내 왕들은 진멸당한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여호수아서에서 더욱 또렷하게 묘사된다. 여리고왕, 아이왕을 비롯한 가나안의 제왕이 멸망당한다. 사사기의 사사들이 이방인들의 억압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려고 투쟁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아비멜렉과 같은 사사가 스스로 왕으로 등극하려고 시도한다(참. 요담우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가운데서 왕이 옹립되는 꼴을 차마 지켜 보지 못하신다.
신명기17장의 왕법을 보면 약속의 땅에서 부득불 왕을 세우는 일을 당하게 되거든 이방인을 왕으로 세워서는 안된다. 왕은 율법책을 늘 공부하고 준수하여야 하며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야 하고 강병정책을 실시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신17:14-20). 왕이 준수해야 할 율법의 요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축으로 요약된다. 우상숭배 금지가 그 한 축이며 레위인과 가난한 사람과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이 그 두 축이다.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틀어 이 왕법을 준수한 왕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사무엘서는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보도하고 열왕기서는 솔로몬을 비롯하여 르호보암, 여로보암, 아합, 예후, 아하스, 히스기야, 요시아, 여호야긴, 시드기야, 등 수많은 왕들을 다룬다. 다윗과 솔로몬마저도 야훼께 범죄한다. 이스라엘 왕국사를 볼 때 왕이 하나님의 법을 준수한다는 것이 숫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무엘-열왕기는 이 점을 우리에게 증언하려고 기록된 책이다. 왕과 마찬가지로 백성 모두가 왕국체제 아래에서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 야훼를 배신하였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왕국이 멸망한 후 포로기와 포로이후기에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자신의 과거사를 반성하는 가운데 왕국체제를 비판하는 신학을 정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계약신학이다. 야훼 하나님만이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참되시며 영원하신 통치자이다. 인간은 이 통치권을 위임받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왕국과 같은 사회체제를 원하지 않으셨다(사무엘상8장). 왕들은 자국의 백성 위에 군림하며 서로 전쟁을 벌이는 폭력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잔인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야훼께서 고레스를 시켜서 바빌로니아의 폭압을 종식시키고 그들을 심판하셨다. 고레스는 포로민의 귀환을 허락한다. 에즈라-느헤미야의 개혁조치를 보면 야훼신앙을 정립하려는 몸부림을 볼 수 있다. 어떠한 왕국체제나 정치권력을 복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이 이들의 개혁의 최종목표였다.
이와 같이 왕국이 구약성서의 중심주제이다. 구원사라든가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이라든가 그 약속의 성취에 구약성서의 중심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왕정국가 대 하나님의 나라’라는 대립각이 구약성서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이것은 국가담론이다. 이 대주제는 신약성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로마 카이사르와 헤롯과 빌라도, 그리고 안티파스, 등의 정치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억압하고 가야바와 안나스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였다. 베드로와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박해를 받은 모습은 신구약성서의 전체 주제를 압축한 압권이다. 이처럼 성서는 국가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하신 말씀이나 바울 사도께서 ‘위에 있는 권세를 존중’하라 하신 권면은 하나님의 나라는 왕정국가와 불가피한 긴장관계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란 한 마디로 귀결되는데 모든 비유가 이 주제를 향해 있다. 산상설교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을 위해 베풀어진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세상나라의 사람들과는 달리 형제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을 섬겨야 한다. 이것은 당시의 어떤 국가체제와도 일치될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이념이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담론은 구약성서, 특히 토라(오경)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신학을 더욱 심화시킨 것이다(출19:3-8). 따라서 기독교는 국가체제를 정당화하지 않고 더욱 아름다운 나라를 향해 현상의 국가체제가 지양되기를 원한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상
오경이 제시하고 있는 모쉐의 지도자상은 왕의 풍모와 대립된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모쉐의 모습은 지상에서 가장 낮게 자신을 낮추는 지도자다(민12:3). 모쉐는 이스라엘-유다의 왕국시대를 통틀어 명멸하였던 제왕들 중에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하지만 모쉐가 약속의 땅에서 왕으로 등극할 수 밖에 없는 높은 위치로 격상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쉐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셨다(민20:1-13). 모쉐는 아직 정력이 펄펄함에도 불구하고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죽음을 맞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상에 매장하도록 두시지 않고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셨다(신34:7). 이러한 종말론적 지도자상은 예수님에게 절정에 이른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사망하신 후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참된 지도자상은 더 철저하게 증언된다. 모쉐의 경우 보다 더 명확하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행1:9-11). 하나님의 백성을 영도하는 참된 지도자는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지 않는다. 이 점이 세상의 지도자인 왕과 반대되는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국가라는 거대한 체제를 지양하고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같은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에스겔은 이 작은 공동체를 가리켜 ‘열국광야’에서 유랑하는 백성으로 표현하였다(에스겔20:35). 왕국들이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는 광야를 떠도는 작은 무리의 공동체가 이스라엘이었다. 왕국들의 권력이 거센 파도처럼 몰아치는 바다 위를 표류하는 표주박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는 환상을 에스겔은 보았다. 따라서 야훼의 임재함이 없이 이 공동체는 한시라도 지탱할 수 없다(출17:1-7; 출33:1-16). 성서는 이 공동체를 인도할 지도자로서 모쉐와 아하론을 위시한 레위인들을 세운다. 레위인들은 성막지기로 봉사하는 제사장이 된다. 성막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으며 그 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 있다. 곧 레위인 제사장들은 말씀을 전담맡은 지도자들이며 말씀을 평생 섬기는 하나님의 종들로 부름받았다. 이들에게 세상의 분깃은 없고 야훼 자신이 그들의 몫이 되신다(민수기 17장).
하나님께서 법궤의 뚜껑에 임재하셔서 모쉐와 만나시고 백성을 위한 말씀을 베푸신다(출25장).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현존하심은 이 말씀의 현존에서 확인된다.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이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고 만날 수 있는 길은 바로 언약궤의 뚜껑에서 다시 열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드림으로써 이 ‘법궤뚜껑’의 역할을 담당하셨다(롬3:25, 개역, ‘화목제물’). 말씀을 늘 연구하는 레위인 지도자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한다. 이러한 전통은 초기교회에 그대로 전승되어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교회의 지도자들로 세우셨다. 사도들은 지팡이 하나만 들고 전대도 지니지 않고 온 세상을 떠돌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지도자들이었다(마태10장). 이들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세상 권력자의 풍모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작은 믿음의 공동체들이 연합체를 구성하여 일정한 권력을 창출해 내라는 지침은 성서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교단이 저마다 총회를 구성하여 사회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폐기되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단결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어떠한 집단행동도 성서는 용인하지 않는다. 믿음의 공동체들은 어떠한 권력에도 접근하지 않고 오직 야훼 하나님의 주권에만 의지하고 인간의 폭력에 결단코 호소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에큐메니즘은 교회의 일치를 통해 세상을 섬기는 선교를 목표로 한다. 바티칸과 같이 교회를 통해 일정한 권력체를 창출하려는 것이 아니다. 콘스탄틴 기독교가 세상의 권력을 취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본래의 모습과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하여 자신의 이득을 관철하려고 하거나 세상의 불의한 권력에 대항하려고 하거나, 또는 기독교 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도 성서에서 금하는 일이다. 정치세력화란 그 근본에 폭력적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목사를 세우셨다. 목사는 말씀을 전담하였다는 점에서 레위인과 사도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목사는 말씀을 전적으로 연구하고 익혀서 설교로 선포하고 성서공부로 성도들을 섬긴다. 목사의 권위는 어떠한 정치적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의 권위에서만 나온다. 이 말씀은 ‘너희 가운데 가난한 자가 없게 하여라’는 지상명령을 지도자에게 베푼다. 목사로 하여금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공동체는 십일조와 각종 예물을 목사에게 준다(민수기17장). 목사는 십일조와 헌금을 모아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와 이주노동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이것이 말씀의 지도자가 해야 할 가장 일차적인 임무가 된다. 이 일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고 재물을 착복하는 자는 엘리 가문의 제사장들과 같이 타락한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삼상2-3장).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 지도자들과 사두개인 지도자들이 종교재벌이 된 것은 하나님의 재물을 착복하여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큰 심판을 받았다. 목사는 재산을 모으거나 세상사람과 같이 경제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말씀연구와 설교와 말씀의 실천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목사들이 있다면 그가 참된 목자로서 지역 교회들에서 참된 지도자로 봉사할 수 있다. 수많은 지역 교회 공동체들이 저마다 하나님의 나라의 절대 단위이며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 총회나 연합체는 어떠한 권력체를 형성하거나 교회의 권력을 세상에 대해 행사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 기초단위에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말씀의 교사인 목사가 있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에게 목사 이외의 또 다른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섬기는 방식으로 세상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대선에 참여하는 각종 정파들의 이해관계에서 초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경제발전 및 부국강병을 위해서 대통령을 선택할 수 있는 아무런 신앙의 근거도 기독교는 지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인생목표는 많이 가지고 배불리 먹고 좋은 집에 사는 데 있지 않고 자기를 낮추고 가난한 형제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의 삶에 있다(신명기8장).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대선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을 섬길 수 있을까?

대통령선거는 기독사회선교의 장이다
근대국가는 국민국가이다. 왕정국가를 벗어난 근대국가의 입장에서 성서의 국가관이 재해석되어야 한다. 전제군주의 권력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지양되었기 때문이다. 집중된 권력은 삼권으로 분산되었고 왕에게 위임되었던 국가의 폭력은 이제 정부에게 위임되었다. 왕이 행사하던 권력을 이제 시민 내지는 국민들이 행사하게 되었다. 왕과 귀족들이 향유하던 물질의 혜택을 이제는 시민 내지는 국민들이 골고루 나누어 누리는 사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역사의 진보라고 부른다.
한국사회도 서구사회와 비슷한 궤도를 달려 왔다. 그 힘이 다한 이씨왕조는 우후죽순처럼 터져 나오는 백성의 저항을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 왕조는 외세에 의해 강점되고 말았다. 일제의 강점기를 거쳐 우리는 근대국가의 성립시기를 맞았다. 과거에 존재하던 양반의 지배계급은 철폐되었고 누구나 기회를 균등하게 갖는 민주주의 체제가 한국사회에 구축되었다. 아직 왕가와 의회라는 형태를 유지하고 지역에 왕당파들이 건재하고 있는 영국사회보다 한국사회가 훨씬 더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구사하고 있다. 영국의 모델을 많이 본받은 일본의 국가체제는 일반인의 정치참여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덜 활발하다. 미국의 국가체제가 로마의 공화정을 토대로 영국과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본받았다고 하나 이 역시 그 활력에 있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따라 오지 못한다.
서구의 국민국가가 번창할 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인민들은 식민지침탈을 경험하였다. 이것을 문명의 융합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 융합과정에서 일어나는 약탈과 살륙과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영국의 경우 빅토리아조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국의 인민들은 비참한 생활고에 시달렸고 귀족층의 타락은 그 유례를 볼 수 없이 추악하였다. 식민지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경제발전이 한 국가단위에서 정당화되던 과거의 관행은 오늘도 여전하다. 국가의 이익은 국가가 준비한 무력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이러한 모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해지는 국가의 관행이다. 성서는 이러한 국가의 본질에 대해 경고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무력에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만 의지하도록 권면받는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운 말씀의 전쟁으로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전투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폭력세력은 멸망을 당한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모든 정치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이다. 대선에서 국민대중이 저마다 제각기 잘살아보려는 열망으로 뭉쳐서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대통령을 뽑으려고 야단법석일 때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국강병이라는 물질과 욕망충족의 차원에서 벗어나 평화와 화해와 상생과 사랑과 섬김과 나눔과 돌봄의 가치들을 대선의 표준으로 내세워야 할 것이다. 통일도 부국강병, 민족번영이라는 모토 위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통일의 과정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를 약속하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동북아의 강력한 무장국가인 중국과 일본과 더불어 한국이 무장을 해제하고 평화의 대열을 이루자는 캠페인을 교회가 모든 종교인들과 연대하여 펼쳐야 한다. 작전권환수반대 서명에 수많은 목회자들이 서명했다는 사실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안보를 야훼께 의존하고 있지 않고 군대에 의존하고 있다는 불신앙의 사실을 보여 주었다. 대선에 참여하는 이유를 다시 토론하면서 교회는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는 기회를 맞아야 할 것이며, 성서의 말씀에 입각하여 현실의 선교활동을 올바로 세워가는 환골탈퇴의 자세가 요청된다.
서구의 국민국가가 보여주었던 한계를 목도하면서, 한국사회는 서구의 어떠한 정치체제도 본받을 필요가 없다. 저들의 역사와 사상을 참고로 하되 한국인의 민중문화와 민중전통을 더욱 고려하고 한국사회가 서 있는 객관적인 물질토대와 물질운동을 파악함으로써 참된 홍익인간의 사회체제를 꿈꾸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세계화 시장질서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장윤재 박사가 제시한 대로 세계화 대신 지역화를 기독교사회운동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현장의 교회 공동체들이 이 생명운동에 앞장서 나갈 수 있도록 생명운동의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할 것이다. 2007 대선을 이러한 노력을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때 기독사회운동의 전망이 선다.
한국 기독교가 선택하여야 할 대선의 후보는 경제발전 보다는 평화와 생명운동과 반전과 무장해제를 약속하는 정치가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선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와 무장해제의 공약을 내세웠다가는 표를 얻기는커녕 돌팔매를 맞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로마클럽이 ‘성장을 멈추자’라고 외쳤어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 야마오 센세이가 ‘과거를 향하여 성장해 나가자’라고 해도 아무런 사회적 파장이 일어나지 않았다. 생산제일주의와 과다소비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못을 박고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교역하는’ 사회체제를 꿈꾸는 대통령을 뽑는 일에 기독교가 앞장 서야 할 것이다. 이런 목표에 반대할 종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의 일부 지도자들이 기독교당을 세우려거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종파이기주의적 세력화를 버리고, 모든 종교들이 다 참여할 수 있는 범국민적 평화와 생명의 슬로건을 내걸고 캠페인에 나서야 할 것이다. 종교의 정치세력화는 오직 생명운동이라는 목적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한국기독교는 여타의 종교들과 연대하여 한국사회를 어떤 사회로 만들어갈 것인지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야 한다. 모든 종교인들이 한 목소리를 내어 국민을 향도할 수 있는 이론을 제공하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국가와 세계라는 거대담론을 위한 신학과 인문학의 청사진을 그려가면서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대선의 계절에 올바른 대안을 가지고 임하는 자세가 요청된다. 장윤재 박사가 제시한 ‘지방화’의 방향이 구체적으로 연구되고 생명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프랑스인 삐에르 라비, 일본인 (고)야마오 센세이, 한국인 최성현, 황대권, 임낙경, 천규석, 허병섭, 유성일, 이태영, (고)김영원, 김성순, 김지하, 법정, 등 수많은 실천하는 지식인들이 현장에 있다. 시장의 ‘지역화’를 위해서 교회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앞장 설 수 있는 동력은 성서읽기의 힘에서 나와야 한다. 장윤재 박사는 종교적 힘만이 지역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간파하였다. 경제동물로서의 인간이 욕망충족의 길을 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인들과 더불어 자기비움의 완성도를 드높여 가야 할 것이다.
농촌교회의 목회자들이 생명사상을 저마다 전개해 나가는 동시에, 도시교회의 목회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사회복지단체’나 ‘사회적 기업’과 같은 생명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면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공동체로서 성장해 나갈 가능성이 있다. 이 생명운동의 캠페인을 펼치는 수단으로서 대선을 잘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프랑스의 2002년 대선에서 환경운동가들이 삐에르 라비를 대선후보로 나서게 하여 캠페인을 벌인 것과 마찬가지로(장 피에르 카르티에, 길잡이 늑대 옮김,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 조화로운삶, 2007년, 227쪽), 우리도 위에 언급한 생명평화운동가들 중에서 한 사람을 대선후보로 내세울 수 있다. 예컨대 김지하나 천규석과 같은 운동가를 대선후보로 내세울 수 있다면 낙선할 것이 뻔한 줄 알면서도 기쁘게 한판 벌이는 선거운동이 될 것이며 세상에서 펼치는 멋진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될 것이다. 어쩌면 여성후보를 한 사람 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정치운동에 너무나 깊숙이 들어가 있는 기독인 활동가들이 나서서 기독교인들에게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여 진보적 후보에게 가는 표의 분산을 막자고 설득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대선후보들 가운데, 현재로서는, 진정한 개혁론자나 생명평화운동을 공약으로 내 건 후보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생명운동의 진영에서 이제 홀로 후보를 내야 할 시점이 이르렀다.
이 운동에서 ‘전국토를 비무장지대로, 동북아 전체를 비무장지대로’라는 평화운동의 슬로건을 내세운다면 어떨까? 군비를 거두어 유엔을 위시한 평화운동 및 빈곤퇴치운동 등에 헌금하자는 십일조 헌금운동을 전개하면 어떨까? 한국기독교가 나서서 대선후보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파견하여 무기를 남북이 동시에 놓아버리자는 제안을 하면 어떨까? 유엔에 특사를 보내어 한국기독교의 뜻을 전달하고 한반도를 비무장평화지대로 선포하도록 협조를 구하면 어떨까? 미국의 기독교와 연합하여 미국이 무기를 생산하지 않도록 결단하도록 캠페인을 벌이면 어떨까? 이런 방향으로 한국기독교의 사회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면 좋겠다.
이런 캠페인을 기회로 운동자금을 조성하고 일꾼을 개발하며 전선을 조직하고 또 다른 대선이 오기까지 향후 4년 동안 평화운동을 힘차게 펼칠 수 있는 기반을 2007년 대선에서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후보를 따로 내세우자.

생각을 모으면서
대선을 앞두고 성서에 물어 보았더니 이같이 황당한 결론이 나왔다. 위에서 제시한 방향을 따라 과연 행동할 수 있을지 너무나 의심스럽다. 사람들이 비웃을까 두렵기도 하다. 군대를 해산하자고 주장하다가 돌 맞을까 겁도 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경제성장, 시장경제의 논리를 따르다가는 인류가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소돔과 고모라에게 내린 심판이 현대 사회에 덮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 세대가 다 누리고 지나간 그 곳에서 다음의 세대가 다 멸망을 당할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 살았다는 그 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그 자녀들이 멸망을 당하는 어려운 시대를 맞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미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족이기주의로서 성서가 철저히 금하는 사항이다.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 가족보편주의로 나아가자. ‘하나님의 뜻을 듣고 힘써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다.’ 멸망이 뻔하게 내다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담대히 떨치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선포해야 한다. 박해와 멸시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거리에 나아가서 사도들처럼 외쳐야 할 것이다. ‘너희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하고 탄식했던 예수님의 마음에 잇닿아야 생명평화운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구약성서는 ‘거룩한 전쟁’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평화의 복음을 외칠 때 세상의 견고하고 높은 죄악의 여리고성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사련 6차 세미나에서 최철호 목사가 발표한 글을 일부 인용하면서 펼쳐놓은 생각들을 모아 들인다.

“나도 다 해봤는데, 다 부질없는 이상이야!”, “생각은 좋은데 현실에 맞지 않아!”, “이 정도면 돼!” 이런 생각은 그 자체가 불신앙, 체념적 삶의 표현일 뿐 아니라 하나님나라 운동의 창의성을 위협하는 위험한 속삭임입니다. 먼저 산 자들의 경험이 하나님나라 도상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모두 다음 세대의 새로운 도전을 추동하는 지혜로 작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또한 어떠한 성공에 대해서도 자랑할 것 없이, 그저 하나님나라를 현실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의 기준을 우리가 제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서의 가르침을 겸허히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현실은 늘 애통함과 가난함에 처해있습니다. 가난하고 애통한 심령에 주시는 은총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을 우직하게 따르는 연약한 자들의 순종과 연대를 통해 하나님나라는 전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