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모든 세계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9-26 23:10
조회
1420
장윤재(9월2주).hwp

모든 세계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장윤재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신앙은 ‘영적’ 문제를 다루고 경제는 ‘물질적’ 문제를 다룬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자.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재화를 생산 ? 분배 ? 재생산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여성신학자 맥패그(Sallie McFague)의 말처럼, “경제학 없는 사랑은 공허한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love without economics is an empty rhetoric).”

세계화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담론이다. 세계화에 따른 장단점이 있지만, 모든 세계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특히 ‘신자유주의식 경제의 세계화’는 생명과 평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종교인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우리가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는 세계화는, 한마디로, 사적으로 통제되는 금융자본이 빠른 속도로 (빛의 속도로),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종종 엄청난 양으로 국경의 장벽을 맘대로 넘나들며 기존의 민족국가 단위의 경제 질서를 해체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초국적 금융자본은, 불행히도, 공익성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이문이 나는 곳이면 땅 끝까지도 찾아가지만, 자신의 기대가 거품으로 판명되었을 땐 즉각 그 비용과 손실을 ‘사회화’한다. 또한 금융자본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를 중심으로 한다. 오늘날 세계최대의 시장인 국제 외환시장에서 하루에 거래되는 1.5조 달러 가운데 97.5%가 단기성 투기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투기는 새로운 부의 창출에 기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분명 돈을 벌지만, 일자리가 창출되지도, 공장이 새로 지어지지도, 그리고 작은 부품 하나가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경제 세계화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오해는 그것이 하나의 지구촌 ‘자유’ 경제체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코르텐(David C. Korten)이 밝히다시피, 지금 세계화에 의해 실제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지구촌 ‘자유(free)’ 시장경제가 아니라, 금융자본의 행보에 발맞춰 초국적 기업들에 의해 중앙집권적으로 기획되고 통제되는 지구촌 ‘독점(monopoly)’ 경제체제다. 세계화에 대한 또 다른 대중적 오해는 그것이 순수한 경제 과정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성실히 개방과 교류를 추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류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기대다. 그래서 세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맥도날드 햄버거가 들어간 나라끼리는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맥도날드(햄버거 회사)는 맥도넬 더글라스(전투기 회사) 없이 번창할 수 없다.”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허물어 하나의 지구촌을 만든다는 세계화가 민족주의의 조용한 죽음은커녕 오히려 떠들썩한 부활을 불러오고 있는 이유는 불행히도 그것이 아직도 제1세계 중심적 민족주의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계화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그것이 우리의 미래세대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원을 급속히 탕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부추겼고, 거기에는 당연히 막대한 자원의 소비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1950년에 3.8조 달러에 달했던 세계경제의 총 생산량은 현재 그의 약 5배인 18.9조 달러에 육박했는데, 이것은 지금 우리 세대가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짧은 시기에 가장 많은 지구자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과연 그럴 권리가 있을까? 또한 지금의 세계화에서 우려되는 점은 그것이 기존의 빈부격차를 극도로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유엔 개발국(UNDP)은 세계화 덕분에 1990년대 이후 약 5억에서 6억에 이르는 인류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수치는 지구상 두 인구대국인 중국과 인도 덕분이고, 다른 통계들은 오히려 가난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 ?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화되기 전인 1960년대에 인류의 상층 20%는 하층 20%보다 약 30배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실험 30년이 경과한 1997년에는 전자가 후자보다 약 90배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빈부차가 3배나 더 커진 것이다. 세계화는, 멕시코의 한 시인이 읊었던 것처럼, “고통의 대양(大洋) 위에 부자 섬 몇 개가 떠 있는” 그런 슬픈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라이더(William Greider)는 경제 세계화의 가장 심오한 사회 ? 문화적 의미가 이제 인류는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준비됐든 안 됐든,” 전 인류는 교역과 자본의 힘에 의해 하나의 거대시장으로 통합되고 있다. 따라서 “좋든 싫든,” 이제 과거 식민주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사상적 패러다임을 버리고 세계화라고 하는 ‘지구적 혁명’이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든 긍정적 가능성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나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의 지구촌은 지금과 같은 방식의 세계화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현재의 세계화는 각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다원적 세계화’가 아니라 특정국가의 문화와 가치가 우선되는 ‘획일적 세계화’다. 그것은 특히 ‘자유’ 무역과 유연한 노동시장, 그리고 국제 금융시장의 힘에 대한 존중이라는 미국식 독트린을 의미한다. 지금과 같은 방식의 세계화는 진정한 인류 평화와 세계 시민을 낳는 것이 아니라,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하고 국제 질서에서 불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약소국가들을 더욱 깊은 종속 상태에 빠뜨릴 지도 모른다.

‘진정한 세계화’는 획일적인 지구촌 경제가 아니라, 각 지역 생태환경의 다양성과 건강에 인류의 행복과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의 민주적인 참여와 권리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대안적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경제의 ‘지역화’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의 획일적이고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팽창 지향적 모델을 버리고, 세계경제를 ‘작은 규모’의 지역 경제로 다원화하여 그들 간의 평등하고 호혜적인 상호협력관계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찍이 슈마허(E.F. Schumacher)는 자연환경에 언제나 덜 유해한 작은 규모의 경제로 우리의 경제를 재편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가 걸린 사활적인 과제라고 역설한 바 있다. 지금의 세계화는 제3세계 자급적 지역 공동체의 해체와 희생을 전제로 한 ‘임시적 풍요’요, 따라서 ‘종말이 예정된 풍요’다. 하지만 21세기가 요구하는 세계화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지역 자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세계화다. 인간의 기초적인 필요는 가급적 한 지역경제의 차원에서 충족되어야 하고, 인류는 원래 땅과 함께 숨 쉬며 살았던 아름다운 세계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간디의 말처럼, 우리의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need)’를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욕심(greed)’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경제의 목표는 ‘무한한 빵’이 아니라 ‘충분한 빵’이어야 한다. 경제의 슬로건 역시 ‘더 많은 것이 낫다’가 아니라 ‘충분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여야 한다. 이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기도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물질적 재화는 생명을 유지하는 도구다. 교역과 투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좋은 직업과 깨끗한 환경과 건강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 수단이다. 우리는 돈의 축적이 목적인 경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오이코노미아,’ 즉 인간의 생명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우선이 되는 경제를 회복해야 한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경제(經濟)’, 즉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경영하고 민중을 구하는 것’)의 약자가 아니던가. 필자는 바로 이런 경제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러”(요한복음 10:10)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경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