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기부문화의 형성을 위하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9-11 23:09
조회
1229
기부문화형성(채수일).hwp

기부문화의 형성을 위하여

채수일(한신대 신학과 교수, 기사연기획위원장)


1. 얼마 전 미국 버크셔해더웨이 회장 워렌 버핏이 자기 재산의 85%에 해당하는 370억 달러를 빌 게이츠의 자선사업단체에 기부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기부금액도 놀랍지만, 자신이 운영하는 자선사업재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빌 게이츠에게 기부한 것은 더욱 놀랄만한 일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로 알려져 있고 그동안에도 거액을 장학과 자선활동에 기부한 빌 게이츠 역시 은퇴한 후, 그의 부인과 함께 본격적인 자선활동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최근 한국에서는 삼성 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8000억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일부 언론은 세계 기부사에 남을 거액이라고 격찬하면서 사용처까지 삼성에게 맡길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재벌의 이런 거액의 기부에 놀라거나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있었던 대기업이나 재벌들의 기부행위가 대부분 정치적 면죄부를 받을 필요가 있을 때에만 해온 일회성 알리바이형이거나, 정치자금,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상속 등으로 추락한 기업과 재벌의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방편으로 기부행위가 이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재단을 만들어 자선활동을 할 때에도 그것이 부의 재생산과 재벌의 이미지 제고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기업이나 재벌들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콩나물을 팔고 아껴서 모은 거액을 대학에 기부한 할머니, 외국인 노동자 센터에 익명으로 거액을 사과상자에 넣어 보낸 기부자, 재난이나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긴급으로 모금하는 일에 참여하는 수많은 익명의 기부자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 희망을 주고 있다. 간접적인 기부활동 역시 고려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종교단체들이 운영하는 사회적 약자 돕기 활동이 그것이다. 노숙자, 결식아동, 장애우, 독거노인 등을 돕는 봉사활동도 넓은 의미에서 기부문화에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기부문화가 이전 시기보다 훨씬 넓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부가 대부분 자선적이고 시혜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소외층에 대한 관심에 비해 인권과 정의 문제 등 정치적 성격이 있는 과제나, 연구 활동,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지향하는 프로잭트 등에 대한 기부는 상대적으로 훨씬 못 미치는 현실이 그것을 반영한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사람들이 사랑과 정의를 분리시켜 이해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 그것도 가까이 있는 이웃에 대한 자선, 눈에 보이는 자선행위의 결실에 대한 관심이 정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이웃, 자선행위의 익명성에 대한 관심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선이 일방적인 시혜에 그칠 때, 기부자와 수혜자 사이에는 예속적 관계가 형성되고, 사회구조적 변화가 늦어질 뿐만 아니라, 사실 국가나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개인에게 떠맡기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기부는 사랑과 정의를 함께 어우르는 방향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부가 일방통행이 아니라, 주는 자와 받는 자, 양편이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는 과정이 되고, 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인간성의 변화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기부는 가진 것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고 꼭 돈이나 물질만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빵을 나누면 모두가 배부르게 되고, 고난을 나누면 하나가 된다.’는 베르자에프의 말처럼 기부를 통한 나눔은 현재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상생의 지혜이고 신념이다. 더구나 그리스도교에서 기부는 조건이 아니다. 정의를 실현하거나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 때문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선행을 통한 구원기대도 기부의 동기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죄인인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요1서 4,10, 20-21), 그 사랑은 이웃과 원수를 지향하는 구체성을 지닌다(눅 6, 27-28).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 때문에 나눈다. 이런 희망에 근거한 기부는 우리의 현재조건 위에서가 아니라, 즉 우리가 가진 것이 있을 때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비록 가진 것이 없을 때일지라도 나누게 하며, 수혜자의 인종, 종교, 이념, 사회체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기부문화는 가정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기쁨을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부가 수혜자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부하는 사람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기쁨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기부문화교육의 핵심일 것이다.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은 숨을 거두지 일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들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지나친 혈통주의, 가족주의, 기대심리 때문에 자식들에게 집 한 채라도 상속하려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정작 중요한 정신의 상속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기부문화는 교회와 학교 등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학습되어야 한다. 가까운 이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먼 이웃, 재해와 재난을 당한 다른 나라 어린이들, 축구공을 만들면서 하루 1달러도 안되는 임금을 받는 어린이들, 에이즈 환자 등을 위한 프로잭트 교육과 작은 돈 모으기 같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기부의 지평이 보이지 않는 이웃에게까지 넓어져야 한다. 독일 교회의 경우, 저개발국가, 개발도상국가를 돕는 프로잭트 형식으로 기부하는 기관을 만들어 운용한다. 개신교 측에서는 ‘발전지원을 위한 개신교 센터’(Evangelische Zentralstelle fuer Entwicklungshilfe), ‘세계를 위한 빵’(Brot fuer die Welt), 가톨릭 측에서는 ‘Missereo’가 있다. 주로 교회 대 교회 차원에서의 자활 돕기(Hilfe zur Selbsthilfe) 형태의 기부인데, 우리나라 교회들도 개 교회 차원이나 교단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더 큰 형태의 ‘초교파적인 콘소시엄’을 구성하면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이고 전문적인 자활기부문화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파이기주의가 먼저 극복되어야 하지만, 이런 일을 통해서 교파이기주의가 극복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이제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 성장했다. 이제는 그 성장의 동력을 세계에 돌려줄 때이다. 사랑과 정의를 결합한 자활을 위한 기부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선교에 동참할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