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영화와 세상, 세상과 영화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8-24 22:09
조회
964
영화와_세상(한종호).hwp

영화와 세상, 세상과 영화

한종호/<기독교사상> 편집장

문학이 지성의 중심이 되었던 시대는 이제 소멸해가고 있다. 문학이 문화의 주도권을 다시 쥐게 되는 것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영상 시대의 언어는 단연 영화로 압축된다. 영화는 이 시대의 영혼과 감정, 그리고 역사를 담고 있다. 문학의 자리에 은막이 서 있다.
당대의 현실을 문학이 감당해냈던 시대가 지나가면서 사람들은 영화에서 그 대안을 찾는다. 영화는 그래서 오늘의 문학이고 종교이며 또한 기록이다. 그건 당대의 사기(史記)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영화인들은 누군가 그랬듯이 이 시대의 사제(司祭)이며 기록자이다. 울고 웃고 슬퍼하며 기뻐하는 인간의 그 모든 삶을 담아내어 영상에서 카타르시스의 제단을 꾸민다. 그건 시대의 영혼을 위한 예식이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 속에서 이 시대의 심정과 만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과 대면하며 상상의 공간에서 현실이 허용해주지 않았던 현실을 체험한다. 그에 더하여 영화는 과거의 역사가 지워버렸거나 망각을 요구했던 삶들을 재현해낸다. 영화는 그 점에서 고발이며 함성이고 시대의 증거이다.

영화, 세상을 보는 창
7월이 되면서 한국 영화는 스크린 쿼터 축소의 장벽에 부딪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FTA는 한국 영화의 무대를 앗아갈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6월의 한국 영화가는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로 맥을 추지 못했다. 스크린 쿼터 축소가 정식으로 가동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런 상황에 들어간 것은 한국 영화의 장래가 얼마나 불투명하게 될 것인지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는 쉽게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다빈치 코드>가 세계적 명성을 엎고 한국 영화시장을 습격했지만 기대만큼은 재미를 보진 못했다. <미션 임파서블 3>의 경우에는 한국 영화가 가장 약한 스릴러물이라는 점에서 예상했던 바이지만 아무튼 미국 영화가 한국 영화의 정서를 대신 채워주기는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영화란 그 영화가 만나는 관객과 소통의 개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성공한다. 그 개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관객들의 삶, 그들의 정황, 그들의 감정, 그들의 사회의식과 직결되는 영상 이야기가 아니면 그것은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한국 영화가 한국 관객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것은 한국 영화가 가진 힘이다. 그 힘은 한국의 역사적 과제, 사회적 고뇌, 문화적 정서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 영화가 직면한 문제는 다만 스크린 쿼터만이 아니다. 인문학적 기초가 부족한 한국 교육의 현실에서 한국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문학적 메시지는 한계가 있다. 문학이 문화의 주도적 위치를 영화에 넘겨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영화의 기반에 문학이 존재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문학의 소멸은 영화의 미래를 위협한다. 일본 영화가 오늘날에도 꾸준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것은 그저 흘려볼 일이 아니다. 일본 문학이라는 단단한 기초가 일본 영화의 세계적 메시지를 유지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화는 그런 각도에서 재고의 여지가 너무 많다. 한국 영화 사상 최대의 관객을 모은 <왕의 남자>가 연극에 기초한 영화라는 사실은 영상산업의 인문학적 기초의 가치에 대해서 눈길을 돌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이 견고하지 않으면 영화는 시대적 유행정도에서 머물고 만다. 수명이 짧아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날 영화는 세상을 보는 창이다. 또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문화의 저력이다. <예술의 사회사>를 쓴 아놀드 하우저는 영화는 대중 민주주의 시대의 산물 내지는 반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서구에서 문학이 근대사회의 진입과정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보편화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영화는 문자 계급이 아니라도 누구든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대중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대중의 관심과 언어가 문화의 축이 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영화는 대중들의 삶과 하나로 엉켜서 시대적 발언을 하게 된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역사와 영화는 서로에 대한 자화상
영화가 그런 점에서 대중을 장악하려는 권력에게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활용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진다. 권력은 영화를 자신의 손발로 쓰고 싶은 유혹에 언제나 빠지게 마련이다. 그와 동시에, 영화는 권력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권력의 정체를 드러낼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된다. <왕의 남자>는 권력이 굴복시키려 했던 문화가 결국 저항하는 현실을 보였다. <왕의 남자>는 권력과 긴장관계를 유지한 영화이다.
역사와 영화도 긴장의 관계 속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다룬 <그때 그 사람>은 표현의 자유 시비에 휘말렸다. <박하사탕>은 광주 항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 <꽃잎>은 광주항쟁을 측면에서만 조명할 수 있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국군의 잔혹한 살육에도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전 같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분단의 그림자를 보여주었고,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역사의 벽을 우리 앞에 세웠다. <웰컴 투 동막골>은 우리의 분단과 전쟁을 최대한 밀고 나간 작품이었다. 국군과 인민군이 하나가 되는 것은, 냉전의 역사에 대한 도발이자 저항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웰컴 투 동막골>은 슬픈 희극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과거 60년대 한국 영화는 당대의 현실을 다룰 수 없었다. 그것은 영화의 대부분이 사극과 멜로물로 집중하게 하는 사회적 요인이 되었다. 사극은 그러나 다루기에 따라 현실에 대한 미화나 비판이 될 수 있다. 묘한 대목이다. 결국 역사와 영화는 서로에 대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 자화상이 왜곡 굴절될 것인가 아니면 정직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한편, 상업영화만 대중의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은 우려되는 대목이다. 우리의 언론과 대중매체들은 대박영화에만 관심을 쏟는다. 중간이 없다. 저예산 영화는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고액 개런티의 스타만을 찾는다. 그러면서 한국 현실을 담아낼 영화는 왜곡되어간다. 사각지대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춥다. 추운 곳은 관객이 몰리지 않고 외롭게 사장되어 간다. 영화는 무대를 얻지 못하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다섯 개의 시선
국가인권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만든 영화 <다섯 개의 시선>은 매우 의미 있는 작품들이지만 대중들은 이러한 영화가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들도 상업영화의 전략에 입맛이 하나로 고정되어 버린 탓일까? 이러한 경향이 강화되면 될수록 영화는 자신의 주체적인 발언권을 잃어간다. 그리고 자본과 대중의 흥미에 자신을 꿰어 맞추게 된다. 영화 속에서 그 사회는 자신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들려주는 기회를 상실해버리는 것이다.
안쓰럽지만 기피대상인 다운 증후군 소녀, 온갖 차별의식으로 똘똘 뭉친 대학원 출신의 한 남자, 고통스러운 적응과정을 겪으면서 오토바이 질주 외에는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탈북 소년, 운동권 학생을 고문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된 현실을 살아가는 수사관, 그리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버려지고 있는 조선족 노동자들의 모습.
영화 <다섯 개의 시선>은 우리 사회가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우리로 하여금 아프게, 그러나 때로는 매우 놀라운 풍자로 마주 대하도록 한다. 그 다섯 개의 시선은 그래서 우리가 사실은 얼마나 시력이 나쁜 존재들인가, 우리의 시선은 얼마나 엉뚱한 곳에만 집중해 있는가를 일깨우고 있다.
가령, 술 먹고 횡설수설하는 한 청년은 친구들 가운데 가장 높은 교육과 가장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자기보다 조금 못하다고 여겨지면 모두 눈 아래로 깔아뭉개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런 그 자신이 사실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으며, 결국 그는 외톨이가 되어버리는 현실에 처한다.
다운 증후군의 소녀는 그래도 남보다 낫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며 발음이 잘 되지 않은 한계를 극복하면서, 최선을 다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남한 사회에서 별종으로 취급받으면서 홀로 하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탈북 소년은 언제든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배낭에 잔뜩 선물을 집어 놓고 살아가고 있었다.
늘상 가해자로만 존재하던 한 고문 수사관은 가족도 있고, 하루하루의 힘겨움이 있으며 언제 직장에서 밀려나게 될지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이 그를 짓누르고 있음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는 운동권 학생에게, 나중에 잘 되면 민주주의니 뭐니 서민들이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 하지 말고 비정규직 문제나 열심히 해결할 생각이나 하라고 말한다. 학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수사관과 학생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오목까지 두게 되는데, 이 오목 놀이가 또 얼마나 포복졸도 할 이야기로 이어지는지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다. 그토록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우리 사회의 외면으로 거리에서 죽어간 한 조선족 동포의 비극은 우리가 얼마나 잔인해져가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입증해주고 있다.
다섯 개의 시선 가운데 단 하나만 있어도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인데 말이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제를 조명하는 문제는 물론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만큼 강한 인상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매체는 없다. 그런 영화는 교과서가 되고 교훈이 되며 또한 사회적 화두가 된다. 이 화두를 나누는 과정에서 사회는 변모하게 된다. 어떤 영화가 이 화두에 끼이지 못하면 그 영화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들, 또는 사회적 의미를 갖춘 영화들이 외면당하는 만큼 그 사회는 자신을 비판적으로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사회적 발전의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영화를 떠올릴 때, 대중 매체들이 화제로 삼는 것만 관심을 돌릴 일이 아니다. 당연히 화제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문제를 삼아야 한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영화는 일종의 전선이다. 사회적 발전을 가늠할 수 있는 문화전선이다. 사회적 가치 논쟁을 펼칠 수 있는 쟁투의 현장이다.
이 현장에서 대중들의 언어로 관심을 새로운 각도로 집중시킬 수 있는 문화지식인의 등장은 영상시대에 요구되는 유기적 지식인의 모습이다. 대중과 역사, 그리고 문화적 영향력 이 모두를 하나로 결합시켜 이 시대에 필요한 화두를 형성해나가는 일은 우리 시대의 영혼과 만나는 일이다. 그것이 곧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읽는 일이자, 세상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된다.

기독교는 영화를 어떻게 보아왔을까? 종교영화가 아니면, 별로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그것의 사회적 맥락을 읽어내는 일도 게을리 해온 것이 아닐까? <다빈치 코드>가 반기독교적이라느니 하면서 비로소 영화논쟁에 뛰어들은 것은 이 시대의 문화담론으로서는 매우 낙후한 모습이 아닌가 싶기조차 하다.
일상의 언어, 영화 속에 나타난 대중의 갈망과 관심, 그리고 반응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은 종교는 대중과 괴리될 수밖에 없다. 무수히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대중의 세계와 진솔하게 만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종교는 자기들끼리의 종교로 그치고 만다. 영화는 이 시대의 영혼을 담고 있다. 그 영혼과 만나 새로운 대화를 시도하는 종교는 그 담론이 풍요해진다. 기독교는 그간 너무 문화적으로 가난한 현실에 대해 스스로 무지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