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교회 일치를 위한 리마예식서에 따른 성만찬 연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11-30 00:48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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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일치를 위한 리마예식서에 따른 성만찬 연구


Ⅰ. 서 론

제1절 문제제기 와 목적

다양화, 다원화로 대변되는 제3의 천년기를 눈앞에 두고있는 세계교회는 연대와 일치의 과제를 안고 있다. 이제 세계교회는 분열과 대립을 끝내고 일치와 연대로 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교회와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공동체로 나아가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떠 안고 있다. 교회는 한 주님에게 연결되어 있는 한 지체임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이 성만찬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교회는 말씀선포와 함께 자신을 세상을 위하여 내어주는 희생과 봉사의 실천력에서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근거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세상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중대한 가를 새삼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상에서 예수님의 대행자로서 중요한 사명을 위임받았지만 현실적으로 보이는 교회는 여러 문제와 연약한 모습을 내부에 안고 있다. 현실적으로 교회는 항상 변질과 타락에 직면해 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의 분열의 모습이다.

요한복음17장의 예수 기도의 중심은 제자들의 일치 즉, "하나됨"을 향하여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이 하나가 될 것을 간구하신다. 이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한 기도를 드린 것의 의미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갈등과 대립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하는데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신앙을 갖고 싶지만 수많은 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에 가야 하는지 망설이거나 또한 교회간의 분열에 식상하여 교회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오늘날 갈등과 대립 그리고 분열의 모습은 예수의 제자들처럼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느냐? 하는 문제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혜를 베풀어 축복해 주셨지만 교회 분열의 모습은 교회 성장을 무색하게 만들만큼 해악으로 지적되고 있다.

교단과 교파의 분열은 교회가 그 관심을 밖으로 세상을 향하고 있기보다는 내부적 일에 힘을 소모하는 자기 중심적인 성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갈수록 분열을 거듭하는 교회의 모습이 넘어가야 할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엄청난 잠재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이 분산되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한 상태이다. 교회는 편협한 교회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민족과 사회를 위한 교회의 선교와 봉사를 통하여 교회에 허락하신 은사와 자원을 발휘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되게 하시려는 역사를 이루셨다. 우리에게 주신 비전과 능력으로 특별히 교회는 먼저 고질병인 분열과 개교회 중심성을 극복하고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태동기라고 말하는 20세기 초에 각 교파 교회들은 분열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더 이상 자연스러운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각 교파 교회들은 전 교회에서 분열의 악을 제거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후 몇십년 동안 교회일치를 향한 노력이 끊임없이 성장되었고 독특한 방법으로 다변화 되어왔다. 현재 우리는 교회 일치에 대한 관심의 재생 그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W.C.C가 그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

W.C.C역사를 보면 여러 면에서 교회의 일치를 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시적인 일치의 측면에서 성례전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 왔다. 그리하여 신앙과 직제위원회 (the Commision on Faith and Order)가 탄생되었고 이 위원회에서는 수십 년간 신앙과 직제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해 왔다.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1927년의 제1차 대회 이후 50년간의 연구과정의 소산으로 1982년 리마문서(BEM)을 채택하였다.2

리마문서 곧 리마예전은 그리스도교 예배예전에 있어서 세계교회가 일치를 이룬 일치운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서로 중대하다고 하겠다.

본 논문은 리마문서 가운데 성만찬 (eucharist)을 중심으로 오늘날 교회들의 일치를 위한 노력으로서 성만찬을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제2절 연구의 방법과 전개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자 한다.

제Ⅰ장에서는 본 논문의 서론으로 문제제기와 목적을 밝히고 연구 방법과 전개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제Ⅱ장에서는 리마예식서의 구조를 분석해 보고 신학적 관점을 찾아봄으로 예배 신학적 이해를 시도하며 리마문서(BEM)와 리마예식서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고 그 신학적 특징과 예배예전으로서의 가치를 고찰함으로써 리마예식서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제Ⅲ장에서는 리마문서에서의 성만찬(eucharist)의 특성을 막스 튀리앙(Max Thurian)과 틸라드 (J. M. R. Tillard)의 두 신학자의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제Ⅳ장에서는 리마문서의 신학적 특징을 찾아보고 예배 예전으로서의 가치성을 고찰함으로서 리마문서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되며

제Ⅴ장에서는 성만찬예식의 한국적 적용을 위하여 성만찬 예식의 모범인 리마예식서를 참고하였고 리마예식서를 따른 한국교회에서의 성만찬 모범예식을 찾아 소개하였다.

결론에서는 논문의 결론으로 이제까지의 연구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성만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예배에서 성만찬의 결핍되어 있는 한국 교회에서의 성만찬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논문을 맺고자 한다.



Ⅱ. 리마문서의 형성배경



동, 서양교회가 정치적, 종교적인 복합적인 이유로 분립되어진 이후 기독교의 역사를 주도해 간 서양교회는 타락하고 부패되어 개혁의 필연성이 대두되게 되었다. 예배의 타락과 예배와 관련된 여러 교리들의 타락으로 종교개혁은 시대적 요청이었음에 틀림없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진정한 의미와 형식을 찾고 예배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예배 복고운동' 이요 '예배 개혁'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는 역기능적인 것이 조성되게 되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걸고 개혁을 부르짖었을 때 그것이 수없이 많은 교회 분열의 시발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 '말씀만으로'라는 개혁자들의 주장은 그들 본래의 뜻과는 달리 그것으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된 것도 사실이었다. 교회분열의 역사는 금세기 초까지도 계속되어 왔으며, 그 분열의 틈은 너무커서 연합의 가능성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모든 기독교 교회들이 자기 중심주의에 의해 고립되고 자기 교회의 전통과 예배의식 및 교파의 이권만을 생각하는 개교회 중심주의 및 교파 중심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다.3



제1절. W. C. C와 에큐메니칼 운동

1)에큐메니칼 운동의 발단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 교회연합운동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교 교파들을 하나로 종합한다는 뜻으로서 세계 교회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동안 오랫동안 갈라지고 흩어져서 따로따로 지내던 수많은 교회들이, 같이 모여 들어서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친교를 나누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연구하고 힘을 합해서 선교하고 봉사하는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4

이러한 움직임은 근래에 있었던 일은 아니며, A.D49년의 예루살렘 회의에서부터 시작해 계속되어진 것으로, A.D 325년 제 1차 니케아 에큐메니칼 회의로부터 그 효시를 찾을수 있다.5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 초 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이 운동은 처음부터 선교와 교회의 통일을 위한 운동으로 전개되어진 것이다.6 18세기에 들어와 세계 각지에 선교 사업을 벌려서 자기교파 교회를 확장시켜 갔던 교회들이 선교지역에서 자연히 가까워지고 협력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선교사업을 위한 논의와 협력을 위하여 함께 모이고 같이 연구하고 협력하게 되었다. 이것이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바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근본정신은 선교를 위한 일치였으며, '일치를 통한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것' 이었다.

이종성은 교회는 20세기에 드러서면서 교회확산운동(선교운동)을 계속하였고, 하나의 복음, 하나의 예수, 하나의 천국을 가르쳐야 되겠다는 판단과 함께 하나의 교회를 만드는 작업을 선교사들의 모임과 여러 가지 범교단적인 모임을 통하여 계속해왔는데, 이것이 에큐메니칼운동의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7

이러한 선교기관들과 교회 대표들이 1910년 에딘버러에 모여 선교대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nference)의 준비대회가 되어진다.

함께 모인 교회들은 신학과 교리와 신조문제까지도 같이 토론하고 연구할수 있을만큼 가까워지고 서로 믿게 되었는데, 1927년에 로잔에서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처음으로 신앙과 교회의 제도를 솔직하게 토론하고 서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것은 1925년에 스톡홀름에서, 37개 국가에 흩어진 교회들의 대표 600명이 모여서, 현대사회를 위한 교회의 봉사와 활동문제를 같이 토론하는 계기를 주었다. 나눠진 교회들은 단독으로 오늘의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교리는 우리를 나누지만 사업은 우리를 연합시킨다.는 표어를 걸고 시작된 조직이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세기 이후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적 시각에서 해답을 주려고 하는 운동이었으며 W.C.C의 골격을 결정적으로 형성하여 준 운동이었다.8 이 회의의 주요 지도자는 스웨덴의 신학자 죄더블롬 (Natham Soderblom)이었다.

'신앙과 직제운동' 과 '생활과 사업운동' 이 행해지는 가운데 각각의 관심사들이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운동은 하나의 회의로 뭉쳐질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대두되었다.9 이어 1935년 윌리엄 탬플이 미국을 방문한 기회에 두 운동의 실행위원회가 각각 차기 회의의 회기를 위하여 교섭위원회를 만들도록 제안하여 결정되었고, 1937년 7월에는 두 운동의 위원들이 런던에서 모여 '신앙과 직제', '생활과 사업'의 두 단체를 완전 통합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체를 만들자는 계획안이 채택되었고, 그 이름을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즉 세계 교회협의회로 할것이 제안되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같은 해 7월 옥스퍼드 회의와 에딘버러 회의는 두 운동을 하나의 세계교회협의회로 통합할 것을 권장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38년 5월에는 네델란드 위트레히트 회의(Utrecht conference)준비에 착수하였으며, W.C.C의 성격과 헌장을 비롯한 구체적인 것들을 토론하여 결정을 보게 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또 구주로 믿는 모든 교회들은 회원이 될 수 있으며, W.C.C의 대표수는 450명, 회기는 5년마다 모이며, W.C.C의 기능은 신앙과 직제, 생활과 사업 운동의 활동을 계속 추진하며 회원교회들의 공동 활동의 편의 도모, 연구의 협력, 에큐메니칼 의식의 성장도모, 교파 연맹들과의 관계수립 등이 사업내용으로 채택되었다.10 준비위원회는 1941년 8월로 창립 총회 날짜를 잡았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순조롭게 진행되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일시적으로 답보상태에 빠졌으나 준비위원들이 계속된 노력에 의해 1948년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 W.C.C 제1차 대회가 소집되었다. 44국의 147개 교파 351명의 대표들이 모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옵져버를 파송하였다.

W.C.C의 헌장은 위트레히트 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채택하였으며, 8개 부서를 조직하였는데 교회간의 원조, 피난민 구제사업, 연구 사업, 청년 사업, 에큐메니칼 보도, 신앙과 직제, 바젤의 에큐메니칼 기관 및 국제문제 부서였다. 이때의 주제는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 이었다. 암스테르담 1차 대회 이후, 1954년에 에반스톤회의, 1961년 뉴델리대회, 1968년 웁사라대회, 1975년 나이로비대회, 1983년 뱅쿠버대회 등으로 이어져왔다. 제3차 총회인 1961년 뉴델리 대회 때에는 횡적으로만 관계해 오던 국제선교협의회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약칭 IMC)가 W.C.C와 통합되었으며, 러시아 정교회가 회원교회로 가입을 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식 옵서버를 파송했으며, 이때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세계 속에서의 교회의 선교를 위해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11

W.C.C의 기본적인 확신은 곧 "그리스도는 몸된 교회의 머리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다. 각 교회는 이 하나됨에서 교회를 최대한으로 현시해야 한다"는 것이다.12 그래서 W.C.C의 헌장의 전문에는 "세계교회 협의회는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친교단체이며, 성부, 성자, 성신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의 사명을 함께 다하기에 힘쓰는 친교"라고 밝히고있다13 그래서 W.C.C는 회의 성격을 이렇게 밝히고 있는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로 유대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서로를 필요에 따라 도와주며 형제로

"W.C.C는 일종의 초교회(super-church)가 되어서는 안된다. 즉, 세계 교회(world church)가 아니며, 사도신경의 하나의 거룩한 교회(Una Sancta)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W.C.C는 어느 특정한 교회만을 토대로 삼을 수 없고 또 삼아서도 안된다. W.C.C 회원 교회들은 다른 회원 교회들도 참된 교회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여 서 하여서는 안될 일들을 회피한다.14

세계 교회도, 단일교파도 아닌 W.C.C는 그 기능을 밝히고 있는데 위트레히트 회의에서 규정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신앙과 직제' '생활과 사업'의 두가지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업을 실천하는 일을 한다. 2)회원 교회들이 공동으로 행동 할 수 있는 편리를 도모하는 일을 한다. 3)봉사하기 위한 준비 활동으로서의 연구하는 일에 협력하도록 해주는 일을 한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문제, 국제 문제라든가 평화 운동이라든가 사회 변천에 따라 생기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또, 교회안의 문제들 즉, 교리, 제도, 의식 등에 관한 문제를 연구한다. 4)회원 교파들이 에큐메니칼 의식을 성장시켜 가도록 조장하는 일 등을 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15

W.C.C는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라는 선교의 일치를 두 핵으로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세우려는 공동체이나 그 중심적인 사상은 메시야의 샬롬이다. W.C.C의 이념은 이 점에서 샬롬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16 오늘날 W.C.C는 전 세계 110개국의 310개 이상의 교파들이 가입하여 세계적 에큐메니칼 기구로 발전하였다.17



제2절 신앙과 직제 위원회



신앙과 직제 운동은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했던 미국 성공회의 주교 브렌트(C. H.Brent)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교회의 일치는 다만 기술적 전도적인면의 협력 뿐만 아니라, 신학, 특히 성례전과 직제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교회 일치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신앙과 직제 문제를 주의제로 하는 세계대회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하여 먼저 미국에서 여러 차례의 준비 회의를 가진 뒤 드디어 1차 회의가 1927년 로잔느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윌리암 탬플(William Timple)의 주도로 1937년에 다시 모여서 주로 교파들 사이의 교리적 차이와 일치를 연구하는 신학적 토론을 해 오다가 W.C.C를 탄생 시키는 주요한 산파역을 하였고 후에는 W.C.C에 흡수되어 현재는 제 1사업부 내의 하나의 조직으로 위치한다.

이 위원회는 웁살라 대회 때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대표를 포함하여 위원의 수를 150으로 늘리고 보다 활발한 연구를 하고있다.18 이때의 의장은 브렌트 주교 자신이었으며 세 분과로 나누어 열띤 토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세계교회 일치 운동으로의 대로가 전개된 것이다.19

이 위원회의 주요한 역할은

1)W.C.C회원들과 가톨릭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다양한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하나의 교회에 속하여 어떤 일치점 또는 통일성(Unity)을 가지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2)교파 상호간의 교류를 실현시키려고 노력한다. 즉 타교파들 사이에 혹은 동일계의 교파들 사이에 교류를 다방면으로 확장시켜가야 함을 말한다.

3) 교회들과 교파들 연맹 사이의 친교와 대화와 협력을 위한 신학적 토론을 일삼는다.

4)교파 연합을 위한 포섭과 연구를 일삼는다.20


제 2차 대회인 1937년 에딘버러 대회에서 23개 교회의 대표들이 토의하던 중 "성직과 성례"에 대한 부분은 예상했던 대로 각 나라 대표들은 커다란 의견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그때 스코틀랜드의 도날드 베일리(Domald M. Baillie)는 다음과 같이 예언적인 말을 했다.

"우리는 서로가 접근하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의견의 일치도 타협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친선에 의해서 이루어질것이다. . . 만약, 그것이 이와 같은 성직과 성례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질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만약 이와같은 회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교회들 자체 내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21

정말로 "성직과 성례", "신앙과 직제"에 대한 일치는 몇 십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일리의 예언적인 발언처럼 신앙과 직제에서 일치를 이룬다면 교회의 일치를 이룬것이며, 회의에서 일치를 이룬다면 세계모든 교회들 속에서도 이룰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신앙과 직제 위원회와 위원회는 부단히 뛰어, 이러한 리마문서를 형성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리마문서가 있기까지 위원회가 가진 회의와 그 과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암스텔담 총회 이후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W.C.C 안의 한 부서로 있으면서 회원교회 사이에서 교회의 동일성을 모색하기 위해 비교 교회학적인 연구들을 주로 하였다. 즉 여러 교회의 통일성 이론과 주요 신학과 예배의식 등을 비교하면서 공통점을 찾아 강조한 차이점에 대한 의견을 좁히는 방법을 취하였다.22

그러나 1952년 룬드회의 때에 와서는 이제 이 방법을 지양하고 새로운 연구 방법과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그 방법은 장래 신학토론 문제를 네가지 방면으로 나누어서 다루는데, 교회, 전통, 예배 와 교회 지도상의 비신학적 요인 등이 그 주제였다. 이러한 주제를 갖고 4개의 소위원회가 모였는데 그리스도와 교회 연구위원회, 전통의 연구위원회, 예배문제 연구위원회, 제도 연구위원회가 각기 주제를 갖고 일치의 가능성을 연구했다.23

1957년 뉴 헤븐에서, 그리고 1960년 센 안드류에서, 위원회는 계속해서 모임을 가지면서 "그리스도 교회는 본질상 하나" 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일치와 연합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임을 다짐했다. 교회에 선물로 주시는 통일성은 신앙고백과 예배, 세례 그리고 친교와 봉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관념적이거나 교회와 신학의 이론에 머물 수 없음을 센 안드류 회의에서는 강조했다. 이 일치성은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것도 아니며 처음 발견해낸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것이며 교회와 예배 의식이나 어느 특수한 한 가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24

그리하여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고, 신앙을 고백하고, 성례전에 참여하고,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고, 선교와 봉사를 할때, 그 통일성은 살아있는 것이고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25 이것을 교회의 가시적 통일이라고 한다. 1967년 브리스톨(Bristol)에서 모인 신앙직제 위원회는 "성례전과 교회의 목회" 라는 주제를 다루었는데 이것은 세례, 견신례, 안수식 및 교회간의 교류문제를 포함하여 다루어졌다. 브리스톨 회의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 대표를 정식회원으로 가입시키기로 결의하여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개신교 등 주요 교파들이 모두 참여하는 일치 가능성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1971년에는 벨지움의 루벵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 회의 주제는 "교회의 통일-인류의 통일" 이었다. 여기에서 통일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데, "통일성은 단일이나 획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복수적인 통일성, 즉 여러가지 차이를 가진 것들 사이의 일치를 말한다."26 다시말해 모든 다양한 교파들의 그리스도인들이 같이 주의 성찬에 참여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교회의 다양한 통일을 실현시키는 길이며, 교회 상호간의 교류(Intercommunion)가 이루어질 때 다양성 속의 일치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성례전적 친교와 한 믿음 안에서의 가시적인 교회의 일치" 이것은 W.C.C의 초석이며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세칙(By-Law)이기도 하다27 이러한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교회들을 돕고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규정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됨을 선포하는 것이며 세상이 믿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와 공동생활 가운데 표현된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만찬적 형제애 안에서의 가시적인 일치라는 목표에로 교회들을 부르는 것이다".28 나뉘어진 교회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시적인 일치를 성취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행해야 할 필연적인 선행조건들 가운데 하나는, 그 교회들이 세례와 성만찬과 사역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일치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연히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이러한 세 주제들에 있어서의 교회적 차이를 극복하는데에 대단히 큰 관심을 쏟아왔다. 지난 15년 동안 이 위원회의 대부분의 대회들은 이 주제들을 중심으로 논의하여 왔다.29

결국 리마문서는 1927년 로잔느에서 열린 1차 신앙과 직제 대회 이후 50년간의 연구 과정의 소산이다. 그 자료는 아크라(1974), 방갈로(1978), 리마(1982)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 논의되고 개정되어 형성되어진 것이다.



제3절 리마 문서



1982년 남미에 있는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모였던 세계교회 협의회의 신앙과 직제위원회 총회에서 채택한 "세례, 성만찬, 사역"(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 영어의 첫 자를 따서 BEM이라고 약칭)이라는 문서를 소위 '리마문서'(Lima Documents)라고 한다. 이 문서에 대해, 최근에 나온 그리스도교 문서로서는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논조" 에 버금가는 것이 라고 평가한다.30

16세기의 문서는 교회의 갱신을 의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초래한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닌게 되지만, 그러나 리마문서 역시 교회의 갱신을 의도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교회의 일치가 구현될 사건으로서의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1927년 창립 되면서부터 시작해 50여년간을 교회일치를 위한 긴 탐색과 협의의 결과를 세계교회 앞에 제시한 이 작은 문서는 에큐메니칼 역사에 하나의 분명한 획을 긋고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의 중요성 못지 않게 최초의 세계교회의 "신학적 수렴" (Thelolgical Convergence)이라는 차원에서 하나의 "사건" 으로서의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 리마문서와 리마예식서

"리마예식서"는 "리마문서"의 부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31 그러나 긴 역사 동안 대작업을 걸쳐 각 교회를 통해 실시된 후자의 신학적인 수렴 작업을 교리적인 공통분모의 발견에 의미를 두었다거나 새로운 하나의 신학체계를 수립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체적인 세계교회 공통 성찬식의 가능성 추구에 있었다."32 여기서 리마문서의 특성과 그 의미를 밝히지 않고서는 그것에 기초를 둔 예식서의 성격을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앞에서 이미 '신앙과 직제 위원회'를 고찰하면서 리마문서를 낳은 모태로서의 위원회의 활동과 역할을 살펴본 바 있지만, 그래서 여기서는 리마문서의 형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신학적 수렴의 발전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리마예식서"의 성격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1910년 에딘버러의 "국제 선교협의회" (IMC)에서 상징적으로 탄생한 이래 적어도 세가지 관심사와 함께 씨름해 왔는데, "신앙과 직제 위원회"를 통한 교회의 일치 운동과 "생활과 사업위원회"를 통해서 평화, 정의, 구호활동 등의 사업을, 또한 선교와 전도의 협력을 위한 일치운동이 그것이었다. 특히 1927년 '신앙과 직제운동(Faith and Order Movement)'의 맨처음 국제대회에서 공동 신앙고백, 교역의 상호인정, 세례의 일치, 성만찬의 일치 등이 중요한 관심사로 부각되었다.33

신앙과 직제의 일치를 위한 운동에서도 일찍부터 "세례, 성만찬, 교역"이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다.34 왜냐하면 이 주제의 불일치 때문에 협력이 불가능하고 대화가 단절되었으며 분열의 틈이 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관론도 대두되었으나 수십년 동안의 줄기찬 신학적 토의와 성서연구를 통하여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된 셈이다.

신앙과 직제위원회가 초창기에는 방법론적인 면에 있어서 "비교 교회론"(Comparative Ecclesiology)적인 접근을 시도했으나 교리적인 합의를 통한 일치 추구의 가능성이 없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러던 것이 1952년 룬드 대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일어났는데, 지금까지는 다른 교회가 각기 자기네 교회의 신학적 진리를 중심으로 하는 위성처럼 사고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새로운 방법이 제시되었는데 그리스도를 태양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도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방법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방법론이 결정되자 모든 것은 급진전 되어갔다. 60년대 들어 일치를 향한 수렴현상이 생겨나고 70년대에 들어와 벨지움대회(1971)이후 그 속도가 빨라져 다음 모임인 아크라(Accra)대회에서는 W.C.C중앙위원회에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보고하고 회원 교회의 반응을 촉구하도록 결의하였다.35 1975년 나이로비 대회의 결의를 거치는데 이것이 리마문서의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36

140여 교파의 응답이 수렴되고, 40여명의 전문가 그룹이 형성되어 이런 응답과 질의 그리고 의견교환 절차가 취해지게 되었다. 1977년에서 1982년 사이에 이런 수렴과정을 거쳐서 이 문서가 12회 이상이나 수정 보완되었다. 1982년 리마대회에서도 이런 수정 보완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만하면 세계교회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판단되어, 평가의 절차로서 교회들의 공식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문서로 채택된 것이 "리마문서"이다. 리마예식서는 이런 "리마문서"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리마문서의 수렴과정에 촉매제도 될 수 있고 촉진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리마예식서는 리마문서 전체의 정신적 부산물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세 주제 중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공감대를 설명하려는데 주요 목적이 있었다. 37 거기서 리마문서의 역사적인 채택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제적 의미로서 맨 처음 베풀어졌으나, 그 이후 이 예식서는 예상을 초월하여 세계교회에 확산, 수용되고 있다.


나. 리마문서의 성격

이렇게 긴 시간을 걸친 노력과 연구의 산물로 주어진 리마문서는, 신앙고백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수백년의 역사 속에서 분열과 냉대의 아픔과 적대감을 떨쳐 버리게 될 "희망적인 일치점"을 세계교회에 제시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BEM문서 서문에서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성령은 우리를 이 시점으로, 즉 슬프게도 나뉘어 졌던 교회들이 본질적인 신학적 일치점들에 도달할 수 있게 된 바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의 한 '카이로스(Kailos)'로 인도하셨다고 믿는다.38


"가시적인 일치"를 위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주었고 또한 세계교회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일치를 이루어 갈 "리마문서"는 어떤 특징과 성격을 가지는가? 이 문서는 세계교회를 대표하는 위원들이 세례와 성만찬과 교역의 신학적 주제에 대하여 공인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례나 성만찬, 사역에 대한 완벽한 신학적 논술을 찾아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인정하고 안하고는 개 교회가 할 일이다. 이 문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수렴의 과정'(Process of Reception)이다. 문제는 리마 문서가 얼마나 완전하고 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문서냐 하는데 있지 않고 그 문서가 표현하고 있는 합의 현상이 우리 교회들로 하여금 보다 깊은 친교를 나누고 타교단의 교인과 교역자들을 서로 인정할 뿐 만 아니라, 대화할 수 있고, 나아가 보다 정기적으로 주님의 만찬에 함께 참여할 수 있기에 충분한 내용의 것이냐는데에 있다.

그렇게 때문에 리마문서는 다양성을 부인하는 일치의 추구가 아닌, 그 다양성을 초월한 일치의 추구를 전제로 하고 있다. 다시말해 오늘날 우리가 교회마다의 전통과 구조의 제한된 일치를 추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리마문서는 이런 목표를 향해서 함께 전진하고 있는 신학적 수렴(Theological Convergency)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지 연합교회의 공동 관심사를 진술한 합의서(statment of concensus)같은 것은 아니다.39



다. 리마문서의 내용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배와 공동생활 가운데 표현된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상만찬적 형제애 안에서의 가시적 일치라는 목표에로 교회를 부르는 것"이라는 규정된 목적을 가진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나뉘어진 교회들이 가시적인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 그들이 청해야 할 필연적인 선행조건들 가운데 하나는 세례와 성만찬, 사역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리마문서는 그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40 그 때문에 리마문서는 여러 주제들 가운데서 세례와 성만찬, 사역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는 각 항목들의 주요 주장을 약술하고 문서의 전반적인 내용만을 제시하려고 한다.

a. 세례

기독교의 세례는 예수의 사역과 죽음, 부활에 뿌리를 두고있으며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결합 (incorporation)이며 새 계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41 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의 표징으로 이해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동참이며 회개, 용서, 깨끗게 함이며, 성령의 은사이고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의 결합이며 그 나라의 표징으로서의 세례의 의미를 제시하고있다.42

b.성만찬

성만찬은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생애 동안에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행하셨던 식사들을 항상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계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 (Anamnesis)로서, 어린양의 잔치(계19:9)에 대한 예상(Anticipation)으로서 베푸신 것이며, 교회 예배의 중심적인 행위로서 계속해서 거행되고 있다.43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사의 성례전이다. 성만찬 의식에 대해서는 "성령초대의 기도"(epiklesis) 순서가 들어간 의식의 요소들을 제시하고 성만찬에 있어 일치를 지향하는 최선의 방법은 가르침과 전례에 관련하여 견해를 달리하는 다른 교회들 안에서 성만찬 자체를 갱신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주의 만찬에 의해 심화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성만찬은 자주 거행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축하하는 것일 경우 적어도 매주일 마다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c. 사역

그리스도의 승리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전 백성들은 소명을 가지는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예시하기 위하여 부름받고 세상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서 이 사명을 완수해 가고 있다.44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계속해서 사람들을 택하시고 부르시는데 그들은 사자요 대사들로서 공동체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자들이며 그의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자들이다. 성직에 임명된 사역자의 주요한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성례전을 집례함으로써 그리고 예배와 선교와 목회 가운데서 공동체의 삶을 인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모으고 갱신시키는 것이다.45 다양한 의견들 속에서도 직제화된 성직의 형태로 감독, 장로, 집사를 제시하며 이러한 세가지 양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쳐준다.



Ⅲ. 리마문서에서의 성만찬의 특징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은사로서 성만찬을 받는다."46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지배적인 경향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은사는 엄격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정점에 이른 하나님의 사역의 근본적인 은사로 계속 이어진다.47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에 대한 유일한 성례전이다. 즉, 그것은 찬양의 제사와 교회의 기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부께 받아들일 만한 제사를 믿는 자들이 드리게 만든다.48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에 대한 성례전이다. 그 성례전은 십자가의 희생의 현존의 성례전이다. 성만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기억하고 그 유일한 희생에 의해 축복들을 얻을 것을 허락할 목적으로 주신 예식적 표상이다.49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동안 같이 나누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식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을 선포하고 규정한다. 그의 마지막 식사에서 하나님 나라의 형제애는 예수의 고난의 긴박함과 관련되어있다.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떡을 떼실 때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임재해 있음을 알게 하셨다. 때문에 성만찬은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생애동안에 그리고 부활하신 후 행하셨던 식사들을 항상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계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만찬이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의 땅으로부터 해방됨을 회상하는 유월절 기념에서 그리고 시내산 계약의 식사에서(출애굽기: 24장) 미리 나타났다고 본다. 성만찬은 교회의 새로운 유월절 식사, 즉 계약의 식사이다. 예수께서 거행하신 최후의 만찬은 상징적인 언어와 행동을 사용하는 하나의 전례적인 식사였다. 결국 성만찬은 눈에 보이는 표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성례전적 식사이며, 이 사랑은 예수께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인 것이다(요13:1).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사의 성례전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이 구원의 은사를 받는다. 성만찬에서, 즉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과의 영적 교류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행위하시사 그리스도의 몸에 생명을 주시고 각 신도들을 새롭게 하신다.50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완전한 행위이지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관점들에서 고찰될 것이다. 성부께 대한 감사,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 성령을 초대하는 것, 성도의 교제, 하나님 나라의 식사이다.


제1절. 성부께 대한 감사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은 교회에 의한 성부께 대한 성자의 희생의 예식적 표식이다. 이러한 예식적 표시는 영원한 행위로 그의 아들의 유일한 희생을 아버지 하나님께 상기시키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에게 은총과 축복을 수여하도록 이 희생에 의해 그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성만찬의 거행에 의해 교회는 이스라엘이 주앞에 하나의 기념으로서 금상위에 "진설병" (bread of the presence) (출25:30, 레 2장)을 둔대로 그의 몸과 피의 성례전, 곧 그리스도의 희생의 상징을 거룩한 상에 둔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은총을 승낙하도록 그에게 탄원하면서 교회는 성부 앞에서 성자의 희생의 표시를 제단에 완성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표상에 대한 이러한 표현에 의해 교회는 하늘의 제단 위에 바치는 것으로 어린 양을 드리는 것 안에, 그리고 성부의 면전에 현존하는 성자의 중재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51

성만찬은 찬양의 제사이며 감사의 표현이다.52 항상 말씀과 성찬(떡과 포도주)을 포함하는 성만찬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찬양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창조와 구원과 성화에서 완성된 모든 것에 대하여, 인간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제 교회와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킴으로써 이룩하실 모든 것에 대하여 성부께 드리는 큰 감사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축복(berakah), 즉 이 축복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은덕에 감사를 표현하게 되는 그러한 축복인 것이다.53

성서를 보면 시편은 찬양의 제사와 감사로 가득차 있다. 시편99편은 찬양의 제사의 내용이다. 시편 115편은 유월절 식사 예식의 부분이 있다. 예수는 성만찬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것을 노래했다. 사도 베드로에 따르면 우리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게 하신"(벧전2 : 9)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저자는 이 길 안에서 크리스찬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 13:15-16, ; 시 50:14,2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이며 같은 것으로서의 예식과 실제적 봉사인만큼 기독교인이 삶은 찬양의 제사이며 관용이 제사로서 여기에 묘사된다. 결국 예수가 유월절 식사의 과정으로 첫 번째 성만찬을 거행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위한 감사 기도요, 찬양의 제사인 것이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방법 안에서 그것을 이해했었다. 왜냐하면 가장 오래된 예식문들이 성만찬 기도의 처음에 창조와 구속의 놀라운 업적을 위한 엄숙한 감사 기도나 축복으로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카리스트'가 찬양의 제사이며 감사하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교회들은 그들의 성만찬 기도를 감사기도와 찬양의 제사의 모형 안에서 시작한다.54 교부들의 저서와 고대 교회의 예식문들을 읽어보면 일반적으로 성만찬 안에서 그리고 예식안에서 창조의 실제에 의해 부딪쳐 온다. 리용의 이레니우스(Irenaeus)는 하나님 자신의 피조물들의 첫 번째 열매들의 헌납을 모든 것 가운데 첫째라는 것을 보여준다. 빵과 포도주는 창조로부터 온다. 그리고 그의 말씀에 의해 그것들을 그가 봉헌하도록 그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감사기도 안에서 창조자에게 드리게 된다. 봉헌(offertory)은 성찬예식에서 하나의 중요한 순간이다. 즉 그것은 교회가 땅의 첫 번째 열매들의 헌납을 보존했던 것을 보여주며, 이 헌납은 희생의 기념에서 명백하게 될 것이다.

봉헌을 최소화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희생적 기념에 모든 강조점을 두는 그들 신학자들과 예배자들은 창조와 구속을 분리한다.55 그리고 단순히 영적 은총이 하나의 수단으로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피조물과 인류의 세계로부터 성만찬을 분리한다. 성찬적 신비의 가득함에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는 하나의 위험이 있다. 가톨릭 예식에 있어서 기도의 새로운 봉헌은 의미에서 매우 풍부하다. 빵은 땅의 열매이고 포도주는 포도나무의 열매이다. 즉 둘다 인간의 손의 일이다. 곧 우리는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생명의 빵과 영원한 왕국의 포도주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께 그것들을 드린다. 여기에 그 예식은 두 가지 운동에 대한 요점이 있다.

밀과 포도나무는 빵과 포도주가 되게 하기 위해 사람들에 의해 작업되어져 왔다. 즉 우리는 그의 성령에 의해 그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그것들을 만들도록 그들이 행동하게 하기 위해서 창조자에게 그것들을 드린다. 이러한 창조물의 두 가지 변천은 봉헌과 헌납에 의해 나타내진다. 그 예식은 창조의 놀라운 업적과 구속의 놀라운 업적 둘 다 선포한다. 그 예식이 인류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본성을 포함한다는 아주 명백한 그것을 만드는 것과 같이 우리는 성만찬 안에서 창조물의 헌납의 이러한 감정을 전적으로 도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창조물의 선물들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최고의 선물을 둘 다 드릴 수 있다. 충실한 신도들의 물질적, 영적 소유물들을 제단으로 가져오는 것 안에서 교회의 봉헌은 그것이 비판을 포함한 봉헌을 만들려는 충동과 같은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려고 함께 모든 것을 모았을 때 그것은 오로지 빈곤한 것임을 인정한다.56

성만찬은 교회가 전 피조물을 대신하여 드리는 거대한 찬양의 제사이다. 하나님께서 화해시킨 세계는 모든 성만찬에, 즉 떡과 포도주 가운데, 성도 개인들 가운데,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들과 모든 백성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 가운데 참예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과 연합시키시며, 성도들이 변화되고 그들의 기도가 받아들여 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기도를 자신의 중재기도 가운데 포함시키신다. 이러한 찬양의 제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땅의 소산이자 인간의 수고의 결실인 떡과 포도주는 신앙과 감사 속에서 하나님께 봉헌된다. 성만찬은 그렇게 장차올 세계를 의미한다. 즉 창조주에 대한 봉헌과 찬양의 찬송,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보편적 교제, 정의의 나라, 성령 안에서의 사랑과 평화를 의미한다.57


제2절 그리스도에 대한 아남네시스(amamesis-기념)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 즉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완성되었으며 아직도 온 인류를 위하여 작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생활과 그 희생에 대한 실제적 표상이다. 성만찬에 적용한 바 성서에서 말하는 기념이라는 관념은 그것이 전례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의식으로 거행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현재적으로 효험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58 신앙과 직제위원회 기록의 지배적인 경향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은사는 엄격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정점에 이른 하나님의 사역의 근본적인 은사로 계속이어진다. 더욱이 성만찬의 중심은 '아남네시스'인데 그 기념은 "하나님의 행위와 약속을 교회가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 59 이다. 이러한 기념은 결코 공허한 표징이 아니며 객관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그의 화육, 종되심, 사역, 가르침, 고난, 희생, 부활, 승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루신 모든 것과 더불어 이 아남세시스 가운데 임재하셔서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신다. 성만찬은 또한 그의 재림과 그 마지막 왕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60


게다가 이러한 임재는 비록 유일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것이다.


예수는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하여 :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것은 참된 것이며 그래서 이 진리는 성만찬이 거행되는 매 시간마다 완성된다. 교회는 성만찬에 그리스도께서 참되게 살아서 능동적으로 임재하신다고 고백한다. 61


이것은 성만찬이 은사이기 때문이며 혹은 더욱 정확히는 성만찬이 임재를 호소하고 내포하는 기념의 은사에로의 접근을 제공하기 때문이다.62

기념(memorial)이라는 말은 유카리스트의 깊은 의미의 중심이다. 기념은 단순한 주관적인 기억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건을 행위화한 예식적 행위이며 교회가 감사와 중재의 헌납으로서 이 유일한 희생제사를 아버지께 드리는 것에 의한 예식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기념으로서 이것을 행하라"의 진정한 의미는 "나의 희생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아버지가 너의 편에서 나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행하라'"이다. 이말 "기념"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의 행위화로서 그것의 전체가 의미가 있는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와 연결되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행위화로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성부 앞에서 기독교인의 성만찬으로서의 그것의 전체에 의미를 준다.63

성만찬은 또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기한데서 발견되는 하나의 기원이며 중재기도이다.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의 희생에서 아버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 자신을 준 이유이다.64 교회가 성만찬을 거행할 때 그것은 주와의 깊은 관계 안에 다시 그 자체를 둔다. 그리고 유일하고 영원한 그의 중재로 영원히 재생된 형태를 준다.65 성만찬은 교회 안에서 제사장과 중재자로서 그리스도의 삶의 본질적인 형태들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영원한 중재를 그 예식으로 행하는 것을 허락해야만 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십자가에서 한번만의 중재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영광 안에서 영원히 살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교회인 그의 몸 안에서 성례전적으로 살기를 계속한다. 교회는 앞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고통과 부활을 보이게 하고 행동화한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적 중재를 적용한다.

십자가의 희생에서 발견된 그 자체로서 그리스도의 중재가 있는 친교 안에서 기념에 대한 이러한 표시는 더욱 감사의 희생 제사와 친교와 친밀하게 연결된 중재로서 후에 이러한 기념이 나타내지는 한은 성찬적 희생제사에 대한 매우 정확한 표현이다.66 성찬적 희생제사는 모든 남녀에게 구원의 적용을 간청한다. 그 구원이란 충실한 신도들의 성화의 완성과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해방의 은사를 말한다 왜냐하면 비록 객관적인 구속과 화해가 십자가에서 실제로 완성되었을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구원의 은총을 어느 것이나 다 적용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중재의 희생제사로서의 성만찬에 의해 교회는 십자가의 그의 희생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중재와 연합한다. 그리고 그들의 죄의 용서를 위해, 그들의 해방과 행복을 위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성부와 중재한다. 그리고 왕국의 영광스러운 현시를 간청한다. 그리스도의 중재와 십자가에서의 그의 희생과의 친교 안에서 교회는 예배와 헌신의 행위 안에서 그 자체를 드린다.67

그리스도에 대한 '아남네시스'는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의 기초이자 근원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부활하신 주님의 계속적인 중재기도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기도와 연합되고 있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와 함께 살고, 그와 함께 고난받으며, 그를 통하여 기도하도록, 그리고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죄인들로서 기쁨으로 자유롭게 그의 뜻을 완성하도록 힘을 주신다.68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 자신을 살아있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롬12:1, 벧전2:5.).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이러한 신령한 예배는 성만찬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의 화해의 종들이 되기 위하여 모든 성인들과 순교자들과 교통 가운데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쳐진 계약 안에서 새로워진다. 그리스도에 대한 '아남네시스'가 성만찬에서 선포된 말씀 그 자체의 내용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각기 서로를 보강해준다. 성만찬의 거행은 당연히 말씀의 선포를 포함한다.69



제3절 성령의 임재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본질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은사를 나눠주는 것이고 이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인도하는 것이므로 성만찬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이다. 그것이 기념이라는 바로 그 사실이 다른 보혜사(Paraclete)의 일과 분리할 수 없게 연결해 준다. 그것은 요한복음에서 본질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니라."(요14:26). "그가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그리고 오순절(Pentecost)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데 그것은 부활의 이면이며 성만찬은 성령의 사건 이 외의 다른 것이 될 수없다.70

성만찬은 교회 안에 현존하는 십자가이며 그리스도의 유일하며 완전한 일을 죽음 안에 공간과 시간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성만찬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희생과 구원자의 현재의 중재의 열매들을 믿는 각자에게 나른다. 십자가의 희생의 이러한 성례전적 실재는 성령과 말씀의 능력에 의해 완성된다. 교회의 어떠한 행위도 성령의 역사를 별문제로 하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떠한 성례전적 예식도 그것을 언급하는 것을 잊어버릴 수 없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참 존재와 그의 희생은 약속으로 가득찬 그의 말씀의 열매이다. "이것은 나의 잔이니-- 이 잔은 나의 피 안에서 새로운 언약이다." 그러나 이 말들은 그것의 단순한 발언에 의해 효과를 나타내는 주술적인 말이 아니다. 성령은 이 말들에 생명을 주고 교회에 의해 거행된 성례전 안에 행위적 결과로 그것들을 만든다. 성만찬 안에서 성령이 활동하는 것 없이는 이 말들은 죽은 문구로 남아 있게 된다. 성만찬 희생제사의 참된 예식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갖는 성령 안에서의 예식이다. 그러한 말들에는 성만찬 예식이 그리스도에 의한 성찬의 제정의 말들과 성령의 초대를 포함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그리고 그의 희생의 살아있는 실재의 신비를 완성한다.71

성령은 성만찬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참으로 임재하게 하심으로 성찬 제정의 말씀 가운데 포함된 약속을 성취시킨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분명히 성만찬의 중심이며, 그러므로 성찬제정의 말씀 가운데 포함한 약속은 성만찬 의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만찬 사건의 최초의 근원이시며 마지막 완성이 되시는 분은 성부이시다. 성만찬 사건을 화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완성되며, 하나님의 아들은 성만찬 사건의 살아있는 중심이 된다. 성령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고, 그것이 계속해서 효험을 갖도록 해주는 엄청난 삶의 힘이시다. 성만찬 의식과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신비가 결합되어, 성령의 역할을 예수님의 역사적 말씀들을 현존하며 살아있는 말씀들로 만들어 주는 존재의 역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께서 성찬제정의 말씀 가운데서 하신 약속에 의해서, 응답되어질 것이라고 보증을 받은 교회는 성만찬 사건이 하나의 실재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즉 모든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참된 임재를 위하여, 성부께 기도하여 성령의 은사를 구한다.72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전적 표징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씀 덕택이며,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교제의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계속 사용된다.73

이처럼 성만찬이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의미있게 된다고 하는 부분은 BEM문서의 성만찬론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로서의 성만찬에 대한 강조는 동방교회의 예배유산에 감추어졌던 것이 반영된 것으로 이를 통하여 동,서방 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균형이 회복하게 된 것이다.74 이같은 성령의 임재의 기원 (epiklesis)에 대한 강조는 서방교회의 전통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75

많은 서구의 교회들은 지금 성령의 '에피클레시스'를 그들의 성만찬 예식에서 받아들였다. 성만찬이 성례전이나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한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이며 아버지의 면전에서 중재자인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제사의 현존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씀의 효력에 의해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76 그러므로 성만찬과 성령의 관련성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나 개입보다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기원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77


제4절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성만찬 의식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교회를 모으시고 가르치시고 양육하신다. 그러나 두 개의 매우 중요한 단락에서 신앙과 직제위원회 문서는 독특하게 이 면을 관통한다. 즉 하나는 성만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에 대한 특별한 중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교회의 선교의 심원한 본질에 대해서이다. 동시대적 교회론의 중요한 재발견의 하나는 교회의 자기 동일성과 주의 만찬에서 공동체의 참여 사이의 철저한 연결이다.

교회의 생명을 양육시키는 그리스도와의 성만찬 때의 교제는 곧 교회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이다. 한 주어진 장소에서 하나의 빵과 공동의 잔을 나눈다는 것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들의 동참자들과 하나가 됨을 말해주며, 그러한 효험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바로 이 성만찬 가운데서 완전히 표현된다. 성만찬 의식은 항상 전 교회와 관련되며 전 교회는 한 표상임을 자처하는 한, 그 교회는 다른 교회들의 흥미와 관심사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방식으로 그 교회 자체의 생명을 지켜 나가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78

유카리스트가 교회의 성례전이라면 이것은 단순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성례전적 몸에 의해 동일하고 독특하며 나뉘어질 수 없는 주의 몸에 참여함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아주 농축된 양태로 서술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몸의 구성원이다. 이것이 주의 식탁 거기에 놓여있는 당신 자신의 신비이다. 그것이 당신이 받아들이는 당신 자신의 신비이다.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은 아멘 이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당신이 본 것을 존재케 하고 소유케 된 것을 수용하라--- 주께서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일체에 관한 성례전을 세워주신 주의 식탁에서 79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고 있다. "이 성례전의 궁극적 실제는 아무런 구원도 존재함이 없는 것이 아닌 신비적인 몸의 일치이다."80

종교개혁시대에 있었던, 1560년의 스코틀란드 신앙고백(the Scotland Confession)은 그것이 분명히 잘못된 표현에 있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의 식탁에 대한 올바른 사용에 있어서 믿음이 충실한 자들이 그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것과 주께서 그 행위 속에 계시고 , 그 행위들이 주님 안에 게실 것, 더욱이 그 행위가 주의 살중의 살, 그의 뼈중의 뼈를 만들어 왔다는 것을 우리가 고백하고 또 의심없이 믿는다.81


이것은 바울서신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교회가 매 세대 기독교 남자와 여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세례에 의해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구성원들이 된 사람이다. 그리고 주님의 식탁에서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의 성례적 몸인 같은 빵을 먹고, 같은 잔을 나누며, 그들이 수용하는 것 속에서 변화되어진 사람들이다. 그런 다음 그것이 정말로 무엇인가라는 교회 경험은 하나님 교회의 집회 속에 있다. 그 이상의 것은 개체 교회가 다른 기독교 모임의 유카리스트에 있어서 그 자체의 생명의 실제를 인식할 수 있는 정도에 달려 있다. 그것은 실재로 다른 교회와의 교제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의식들과 전통들 그리고 공통적 신앙의 표현들이 가능할 수도 있다.82

하나님의 화해와 사랑의 신비에 참여에 근거한 이러한 친교는 물론 무엇보다도 먼저 기독교 공동체 자체 내에서 관계성의 질 속에서의 표현을 찾는다. 그곳에서 무엇보다 먼저 " 성만찬 의식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제들과 자매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간의 화해와 참여를 요청하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에 있어서 적절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계속적인 도전이다."83 그것은 초대교회의 실례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모든 불의와 인종차별과 분리와 자유의 결핍 등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할 때 철저하게 도전받게 된다." 84 왜냐하면 "성만찬을 통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인격과 존엄성에 스며들며, 그것들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85 그 문서는 다음의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성만찬 교제 안에서의 연대감 그리고 서로와 세상을 위한 기독교인의 책임있는 관심은 전례들 안에서, 죄를 서로 용서함 가운데서, 평화의 표징, 모든 사람들을 위한 중재기도, 함께 먹고 마심, 병든 자들과 감옥에 갇힌자 들에게 성찬을 베품, 즉 그들과 함께 성만찬 의식을 행하는 가운데서 특별히 표현된다. 성만찬에 있어서의 이러한 모든 사랑의 표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종되심으로서 증거하신 것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 기독교인 자신들은 그의 종되심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찬식탁과 가난한자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그러한 사역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계 속에 임재하심을 적절하게 증거해준다.86

그러나 친교의 유카리스트적 은총은 단한번 전 세계의 구원을 위해 주어졌던 수난의 기념으로부터 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열려진 새 시대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찬양적 공동체의 개척자들과 교회의 개척자들에게 넘쳐흐르고 있다. 이러한 은총에 있어서의 묵시성은 세계에 대한 관심이고, 이 세계를 하나님이 의도하는 세계로 변화시키려는 의지의 위임이다. 따라서 불의와 전쟁과 증오와 착취의 소멸과 이 모든 악의 구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87 리마문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성만찬은 신자를 세계사의 중심적 사건과 연관시켜 준다. 그러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우리는, 만일 우리가 세계의 상황과 인간의 상태를 계속적으로 회복시키는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모순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만찬은 인간 역사 가운데서 회해시키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직면하여 우리의 행위가 모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사회안에 있는 모든 불의한 관계들을 지속시키고, 인간적 오만함, 물질적인 이익, 무력정치 때문에 여러 갈래로 분열을 일으키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정당화 될 수 없는 신앙고백상의 대립을 고집함으로써 계속적인 심판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88


그리스도께서 모든 규칙과 모든 권위와 권력을 파괴한 후 그 나라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그날까지 주님의 거룩한 식탁에서 빵과 포도주로 양육된 그리스도의 교회적 몸의 구성원들은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있어서 적절한 관계성의 도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태도를 표명해야만 한다.89



제5절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은 창조의 종국적인 갱신으로서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갱신의 표현은 하나님의 은총이 표현되며 인간들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 세상 안에 존재한다. 성만찬은 교회가 이러한 표징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축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함을 축하하고 예상하는 축제이다.90

만약 꼭 유카리스트가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다고 한다면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책임은 확실히 세계구조 내에서 완성되어진다. 왜냐하면 이 책임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시작된 새 피조물의 첫 열매를 소유함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는 복의 목적이기 때문이며, 인간 역사의 질곡 속으로 천천히 유입된 것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복음적 목적이기 때문이다.91 커다란 종말적 연회를 예시하는 식사인 유카리스트는 기독교인들을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혁시키며, 그리함으로서 그의 힘있는 증거자들로 만드는 새로운 한 실재를 가져다준다.

성만찬은 선교하는 자들에게는 귀중한 음식이며, 사도의 역할을 지니고 여행하는 순레자들에게는 떡과 포도주가 된다. 이 공동체가 하나이신 주님의 식사에 동참하는 한 백성이 되면, 성만찬 회중은 그 눈에 보이는 한계를 넘어서 현존하는 자들을 모으는데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 즉, 자신이 목숨을 버려서 구원하시고자 했던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잔치에 초대하셨기 때문이다.9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계 변화에 대한 갈망은 그리스도의 주권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세계 갱신에 있어서 크리스챤의 책임은 세례에 의해 그들 안에 깊이 새겨지고 성찬에 의해 갱신된 근본적 목적의 또 다른 양태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 " (롬6 : 10-11),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수 있도록 행하는 것,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그것의 모든 광채가 밝게 비칠 수 있도록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기념비적인 것이 찬양되어졌을 때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세계를 향하여 개방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리마문서는 성만찬 찬양이 하나님의 세계 선교에 대한 교회의 참여의 한 예라는 것을 확신하는데 까지 발전되어 갔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참여에는 두 개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어떤 의미에선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존재한다는 기쁘고도 찬미적인 인식의 요소이다.

이러한 갱신의 표징은 하나님의 은총이 표현되며 인간들이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 세상 안에 존재한다. 성만찬은 교회가 이러한 표징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축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함을 축하하고 예상하는 축제이다 (고전 : 11 : 26, 마 26 : 29). 갱신이 약속된 이 세계는 전체적인 성만찬 의식 가운데 있게된다. 세계는 성부께 감사를 드린다. 이 감사에서 교회는 전 피조물을 대신한다. 93


반대로 다른 요소는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이고, 아직 있지 않은 것을 곧 오게 해달라고 격렬하게 그분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기념함에 있어서 대 제사장이며 중재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교회는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기도에서 교회는 성화와 새 창조를 기원한다."94 세상은 하나님께서 관심하는 가난한자, 소외당한 자, 죄인들이 공존하고 있는 곳으로써 화해자들을 필요로하고 있다. "성만찬 안에서 화해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되는 자들은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서 화해의 종이 되도록 그리고 부활의 기쁨을 증거하는 종이 되도록 부름 받는다."95 그러므로 소외된 자와 어떤식으로든 인간적 곤궁에 의해 짓밟힌 모든 자들과 그리스도 몸의 구성이된 자들과의 연대 결속은 성만찬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의 만찬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방외자들과 거부되어진 자들하고 나누신 식사를 생각나게 하지 않는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 장이다. 특별히 그들이 신앙과 직제의 작업의 장에서 비춰질 경우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줄곧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가난의 원인에 대한 투쟁의 관계를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불안은 방갈로 선언, 즉 '희망의 보편적 기술'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성만찬을 베푸는 바로 그 일이야말로 교회가 하나님의 세계선교에 참여하는 본보기이다".96 또한 "성만찬은 선교하는 이들에게는 귀중한 음식이요, 성만찬에 참여하는 공동체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과 행동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길러지고 강화된다."97 즉 성만찬을 통해서 힘과 자양분을 공급받아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만찬은 창조의 종국적인 갱신으로써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도록 해 주면 그것을 맛보는 것이다.

BEM문서의 성만찬은 종말론적 이해가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오늘날 모든 신학적인 강조점이 그렇지만 성만찬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98



Ⅳ. 리마문서의 신학적 특징



제1절 성만찬 신학

진정한 교회 과업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성만찬을 의미있게 시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 성례전의 의미와 그 비중은 교리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측면에서도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 이유는 성례전이 이론적인 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만남", "주님과의 연접(連接)"이라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표현과 경험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99 그래서 오스카 쿨만은 성만찬을 "새 계약의 재다짐" 또는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는 예전"이라고 했다. 100 그러므로 이 예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며 새롭게 확인해 주시는 계약과 은총 앞에서 신앙의 생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초대교회의 연구에서 결과 된 성만찬 예식의 공통요소를 집약해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두 제자에게 자기 자신에 관한 성서의 말씀을 설명해 주고 떡을 떼시는 행동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셨다. 신약성경 안에 있는 다른 하나의 성만찬 전승은 1)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성찬봉헌), 2) 축사하시고 (성찬기도), 3) 떼어(분병례), 4) 주셨다(성찬배수)고 기록되어 있다(고전11:23-24).

2세기 초반에 유스티누스 (Justinus)는 이런 사도들의 전승을 집약해서 거의 완전한 '말씀과 성례전' 예식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다.101

그리스도인들의 정규적인 주일예배 때에 이런 내용의 의식이 베풀어진 것이다. 1) 성서의 통독, 2) 봉독한 성서의 해석, 3) 중보의 기도, 4) 떡과 포도주 증정, 5) 집례자의 성만찬 기도, 6) 떡을 쪼갬, 7)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줌, 이것이 오늘 날까지 여러 가지 이름으로 교회에 전해 내려온 예배의식의 골자이다. 처음 세 항목은 '말씀의 예배' 로서 회당의 영향을 받았으며 4개 항목으로 구성된 '식탁의 예배'는 유대교의 식사관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뒤 어떤 것들은 달라지기도 했고 추가되기도 했으나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교 '예배의식의 틀'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7가지 행위는 다시 4가지 행동 양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102

1) 떡과 잔을 취하심

2) 그 위에 축사하심

3) 빵을 쪼개심

4) 그것들을 나누어주심

그레고리 딕스는 바로 이것이 성만찬 의식의 발전 과정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틀이 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요소들은 확대되고 퇴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틀 속에서 종교개혁 예전이 발전되었고, 리마성찬예식도 이러한 틀 속에서 모든 요소들을 적소에 배열하여 완전한 예배예전을 형성해 가고 있다.

리마 예식서는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되어지곤 했던 기념(Memorial), 임재 (Real presence), 그리고 희생 (Sacrifice)에 대한 개념을 포괄적이고 함축적으로 포함하면서 성부께 감사로서의 성만찬,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기념, Anamnesis)으로서의 성만찬, 성령의 초대와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론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가톨릭의 견해도, 개신교의 견해도, 루터 교회의 견해도 신학적으로 수렴하면서 독특한 성만찬 신학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은 기념하고 회상하는 성만찬이요, 감사의 성만찬이요, 그리스도의 산 임재를 경험하는 임재의 성만찬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놓으시는 희생의 성만찬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리마문서에 나타나는 성찬에 대한 내용 중 교회가 고려해야 할 내용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103

첫째는 성만찬과 설교의 관계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기념은 설교와 성만찬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의 필요 불가결한 두 부분은 서로를 강화해 준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설교를 경시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성만찬을 경시해 온 경향이 있는데 이 점은 근본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만찬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있어서 밝히는 데 하나님의 은총은 교회 밖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성만찬은 피조물의 종국적인 갱신으로서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갱신의 조짐은 하나님의 은총이 표현되며 인간들이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 세상 안에 존재한다."104

세 번째는 성만찬과 성령과의 관련성이다. 리마문서의 '성령임재의 기원'에 대한 강조는 서방교회의 전통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로써 서방교회 신학의 중요한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

넷째로 성만찬을 선교와 관련하여서 강조한 것도 눈에 띄는 주제이다. 성만찬은 신자를 세상의 중심적 사건과 연관시켜 준다. 그러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로서 세계의 상황과 인간의 상태를 계속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모순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리마문서에 나타나는 성만찬 신학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포사이드(P. T. Forsyth)는 그의 책 [교회와 성례전](The Church and Sacrament)에서 "성례전은 복종의 행위"라고 역설하고 있다.105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이나 어떤 제도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며, 이상적이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구원하는 직임을 전부 담당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마 예식서에 나오는 성만찬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패턴은 복종이며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완전한 일치와 화해요 만남인 것이다.


제2절 교회 일치의 신학


"세계교회의 가시적인 일치"와 하나됨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모체인 W.C.C의 주요 활동 중에서 리마 예전이 출생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추구하는 예배, 그것이 리마 성찬예전이다. 그러므로 이 예전 속에는 '교회 일치의 신학' 의 물줄기를 쉽게 찾아 낼수 있다.

"한 주어진 장소에서 하나의 빵과 공동의 잔을 나눈다는 것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거기에 동참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들의 동참자들과 하나됨을 말해주며 그러한 효험을 가지는 것이다."

리마문서와 예식서에 나오는 일치는 먼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적 일치를 가져와야 한다."106 그 후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성만찬 신학에 있어 그리스도의 몸을 (떡을 떼어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내 몸이니) 함께 받은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일치'가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진 지역 교회들 속에도 이러한 일치가 이루어야 하는데 리마문서가 추구하는 일치는 '획일적인 통일'로서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말한다.

'신앙과 직제위원회'의 전 사무국장이었던 루가스 비셔(Lukas Vischer)는 "교회의 일치는 성만찬 예배와 사도적인 신앙고백에서 가능해 진다"고 말하며, BEM 문서가 세 자료 (Baptism, Eucharist, Ministry)를 통해 관심하는 것은 "한 성만찬의 친교 안에서의 가시적인 일치"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107 그러므로 리마문서가 추구하는 일치는 사도적인 전승을 따라 집례되는 한 성찬식 안에서 갖는 친교를 통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 일치되지 않은 교회와 신학과 전통과 예배의식들에 대한 점들에 대해 루카스 비셔는 다시 이렇게 밝힌다.


"사도적인 신앙 안에서의 일치가 계속해서 새롭게 새롭게 주장되어지고 그 당위성이 고백되어지다 보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견해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동의하고 일치해 가야 할지를 알 수 있게 되어질 것이다."108



Ⅴ. 성만찬 예식의 한국적 적용



리마예전은 세계 교회의 신학적 수렴과 의견이 반영되어 형성되었다. 한국교회 예배현장에서 우리는 우리의 전통과 영성 그리고 문화를 담은 성만찬 예식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예배의 효과는 특히 문화와 그 백성의 심성에 깊이 파고 들어가서 의미를 산출할 때 극대화 되어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제임스 화이트는 "교회가 문화적 변화를 예배속에 수용할 때 교회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변화하는 문화자체에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라고 하였다.109

다시말해 들여지는 예배자의 심성과 그 문화적인 표현이 가미되어질 때 그 의미는 더해 간다는 말이다. 리마문서를 형성하는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Max Thurian 은 "리마예전이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다, 리마문서(BEM)에 집약된 수렴요소들은 다른 전통과 영성 혹은 문화에 따라 다른 예배형태로도 표현되어질 수 있을것이다"라고 했다.110 이 말은 리마예전이 온 세계교회가 답습해야하는 완전한 예전은 아니며, 예배자들의 삶의 자리에 맞게 토착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예배의 토착화란,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심성에 참되고 적합한 표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문화와 전통을 반영한 예배모델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예배는 한국적 사황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가락이 찬양속에 도입되어지고 우리의 악기와 리듬 그리고 동작까지도 예배에 우리의 토착적인 표현이 가미되어야 한다고 본다.


제1절 리마 성만찬 예식서


앞 장들에서 정리된바 있지만 '리마예식서' (Lima Liturgy)는 1982년 남미 페루의 리마에서 모였던 세계교회 협의회의 '신앙과 직제위원회' 총회를 위해 마련되었던 것으로 1982년 1월 15일 그 곳에서 맨 처음 사용되었다. 또한 이 예식은 1982년 7월 28일 제네바에 있는 에큐메니칼 센터에서 베풀어 졌으며, 그 뒤 뱅쿠버의 제 6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때에도 베풀어졌던 예식이다. 박근원은 리마 예식은 모든 것을 갖춘 완전한 예배의식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정식 예배의 경우에나 리마예식은 적절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111



개회의 예전

1. 개회찬송(혹은 시편 응답송과 송영)

2. 인사

목사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회중 : 목사님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3. 죄의 고백

회중 :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죄의 사슬에 묶여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고백하나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행동으로 옮겼거나 미처 그러하지 못했던 우리의 생각과 말로 주님께 죄를 지었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지도 못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용서해 주옵시고, 새 사람이 되게 하옵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셔서 주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의 길을 걸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아멘.

4. 용서의 선언

목사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시고, 이 그리스도를 보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는 교회의 부름을 받고 안수를 받은 목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힘입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모든 죄가 용서받은 것을 선언합니다.
회중 : 아멘

5. 자비의 연도

목사 :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며,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라는 것을 함께 고백할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합시다.(에베4,3--5)
회중 :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주여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