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교회성장과 선교,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이형기 교수)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11-30 00:47
조회
3627
선교와 신학 제3집
교회성장과 선교,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
이 형 기
서론 :문제제기
l. 18세기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 그리고 선교활동
ll. 19세기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 선교활동 그리고 교파별 및 교파 대 교파의 일치 운동들
ll.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과 WCC, 그리고 1968년 웁살라 WCC이후의 복음주의 세계 대회들
결 론:
서론 :문제제기
공산 동구권과 구소비땛 연방이 붕괴되고, 1990년에 접어들면서 에큐메니칼 논의에서 점점 더 빈번히 들리는 단어는 "지구화"(globalization)이다. 이것은 초국가적이고 점점 더 세계적이 되는 경제구조, 금융구조 및 통신구조에 의해서 조성되는 "한 세계"(one world)에 대한 비전이다. 1998년 12월 하라레에서 모인 WCC 초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C.U.V.문서는 이와 같은 "지구화"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지향하는 교회들의 일치 및 인류의 일치와는 대립되는 것으로서 이 "지구화"는 직접적으로 교회들에게 엄습해오는 도전이라고 한다.
지난 여러 10년의 세월동안 커뮤니케이션과 금융과 경제가 다국적 구조 및 점차 세계적 구조를 갖게됨에 따라 특이한 지구적 차원의 일치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구조적 변혁의 결과로 사회는 점점 분열 (fragmentation)되었고 인류가족의 더 많은 부분들이 소외되고 제외되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제관계를 맺게되는 교회들은 스스로를 변화된 제도에 적응하고 변화된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인간 생활의 영적 차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과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온전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운동의 조직적인 형태들은 연대성과 나눔, 상호 책임성과 상호 힘실어주기(empowerment) 근거한 대단히 색다른 형태의 관계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모든 현존하는 에큐메니칼 기구들은 포용성과 화해의 정신에 의해서 특징지워지는 지구적 공동체의 한 형태와 가치를 명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전의 빛에 조명하여 스스로를 재평가해야만 한다.
이번 WCC 총회는 "지구화"를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무엇 보다도 시장경제에 의한 지구촌개편에 있고, 둘째 이유는 과학과 기술의 지구촌화에 있다하겠다. 오늘 날 인류는 지역화와 세계화의 긴장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어느정도 이 "지구화"의 적극적인 측면들도 생각해야 한다.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통일했던 로마제국(Pax Romana)의 에큐메니즘(?)이 당시 지중해 세계의 보편교회가 지향했던 에큐메니즘과 그 질(質)에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로마제국이 복음의 세계화에 기여한 측면과 복음의 문화화에 기여한 측면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19세기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특히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와 지리적 확장 등이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과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를 보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도구들을 통해서도 이 19세기를 라투렛(Kenneth S. Latourette)과 더불어 "위대한 세기"라 해야 할 것이다. 복음과 기독교가 역사상 이 땅위에 지리적으로 가장 널리 전파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우리는 인류역사가 아무리 죄와 허물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그속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형상들이 있으며, 아무리 파괴되어가는 창조세계이지만 그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정체, 경제, 사회, 문화가 아무리 죄악으로 물들어 있어도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대행하는 교회와 기독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와 창조세계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긍정"(Yes)을 안경으로 하여 흑암의 권세가 드리워저 있고, 애매성과 혼돈의 모습을 가진 이 세상을 적그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징표들을 역사와 창조세계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볼 때, 세계 제2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서양(유럽 과 미국)이 정치·군사적, 경제·문화적 지배권을 누렸으나, 1950년대 이후 우리는 힘의 다변화의 시대 혹은 다중심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에이르면, 구 소비땛 공산연방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로, 탈이데올로기 와 탈냉전 시대가 등장하고, 다원화된 힘들의 균형속에서 화해와 협력을 추구히는 시대가 열린다. 동시에 소련과 동구권에선 다민족 국가들이 자신들의 핏줄 과 문화의 고유성을 쁹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의 불록화 현상과 상호 협력의 필요, 그리고 WTO등 국제무역 기구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국제무역 활동은 오늘의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 시장으로 만드는 동시에 각 나라와 지역들은 하나의 지구촌을 지향한다. 즉, 오늘 날 인류는 지역화와 세계화의 긴장속에서 살고 있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엔 과학기술과 산업화가 문화의 기본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고, 교통과 통신기술의 발달, 컴퓨터 기술에 의한 정보화 지식의 증가 및 과학 기술의 교류와 협력, 특히 인공위성 과 멀티미디어는 오늘의 세계를 국경없는 하나의 지구촌 가족으로 마들어 가고 있는 동시에 각 나라 와 민족, 그리고 유럽권, 북미권, 태평양권, 아시아권등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서 재편된 초국가적, 초민족적 불록들은 다원화의 세계 혹은 지역화를 지향하고 있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 우리들은 이와 같은 세계사적 현상들이 진정한 "지구화" 혹은 진정한 에큐메니즘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지역화와 세계화의 긴장속에서 교회성장과 에큐메니카 운동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 18세기의 경건주의는 개인의 회심과 성화를 강조하고, 교회갱신의 원리인 "교회안에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를 내세우면서, 개교회주의 혹은 소그룹 운동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 경건주의 운동은 프랑케로 비롯되는 선교의 역사를 가져오고, 영국의 웨슬리와 휘트필드 그리고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를 중심한 복음주의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나아가서 복음전도의 역사를 일구워 나갔다. 그리고 복음 과 기독교가 역사상 유래없이 확장 되었다는 의미에서, "위대한 세기"(Latourette)로 일컬어지는 19세기는 위에서 언급한 18세기의 흐름을 이어받아 복음주의 부흥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선교활동에 교회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적어도 18-19세기 서양교회사의 이와 같은 흐름은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매우 강조하는 경향이다. 우리 한국 개신교는 18-19세기의 이와 같은 흐름을 미국을 통해서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에,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에 역점을 둔다. 게다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를 이어받은 미국 개신교의 19세기 말 및 20세기 초의 근본주의의 흐름 역시 우리 한국 개신교의 역사속에 흐르고 있어,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 색깔을 더 짙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개신교는 18-19세기 전통이 교회의 세계화를 가져온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으켰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18-19세기의 기독교는 교회의 지역화에, 20세기 에큐메니즘은 교회의 세계화에 역점을 두었는데, 우리 한국 개신교는 과연 어느 정도로 교회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는가 ?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의 근본 성격을 결정 짓는 "신앙 과 직제"(Faith and Oder), "삶 과 봉사"(Life and Work) 그리고 "세계선교"(W.M.C.)가 각각 교회의 연합과 일치 차원에서, 교회의 사회참여 차원에서, 그리고 교회의 선교 차원에서 교회의 세계화를 역사상 유래없이 이룩하였다면, 우리 한국 개신교는 아직도 18-19세기적 지역화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 지역화와 세계화가 맞물려 있는 오늘의 세계속에서, 우리 한국 개신교의 지역화 와 세계화는 어떠해야 하는가 ?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은 교회의 세계화로 이어져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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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18세기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 그리고 선교활동
서양 교회사의 18세기에는 이성을 계시로부터, 자연을 초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철학을 교회 와 신학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계몽주의 운동(1648-1789)에 맞서,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영미계통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과 선교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독일의 경건주의의 아버지인 슈페너는 아른트(Johann Arndt) 의 <진정한 기독교>(1606년)에 크게 감명받아 그의 설교집에 서론을 썼는데,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다음의 6가지 내용은 개인의 회심과 성화를 역설하고 있다. 첫째로 성경연구에 더욱 힘써 개인의 종교를 더욱 심화시킬 것, 둘째로 평신도를 교회일에 더욱 깊이 참여시킬 것, 셋째로 기독교인들은 무미건조한 신학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일에 몰두해야 할 것, 넷째로 신학 논쟁에 있어서 사랑의 전신을 보여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할 것, 다섯째로 목사들의 도덕 생활과 영성 생활에 초점을 두고 신학 교육을 시킬 것, 여섯째로 확신있고 열정적인 설교로 사람들을 회심시킬 것. 슈페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2주에 한 번 모이는 "경건한 무리"(collegia pietatis)라고 하는 작은 기도모임을 가지면서, 1675년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를 저술했으니, 여기에서도 개인의 회심과 성화가 매우 강조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의 "collegia pietatis"는 기성교회의 교인들 보다도 회심 과 성화에 있어서 특출난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교회의 개혁적 요소인 "교회안에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를 낳았고, 그의 <경건한 열망>이 제시하는 6가지 개혁 방안들은 개인의 회심 과 성화는 물론, 말씀 과 성례전 과 요리문답 중심의 개교회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아래에서 이 6가지 중 3가지만을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내용은 설교와 성경공부가 강조되고, 이신칭의와 영적 생활이 부각되는 개교회주의를 암시하고 있다.
우리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사용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본성안에는 그 어떤 선한 것도 없다. 이 선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주어저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있는 수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앙은 복음에 의해서 불붙여저야 하고, 율법은 선앵의 규범과 이 선행들에 도달하는 많은 자극들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중들은 마땅히 얻어야 할 유익을 위해서 예외없이 모든 성서를 알아야 한다. ... 교인들은 정규적인 예배에서 설교되고 해석된 특정 구절들에 대한 지식 이외에 성서전체의 뜻을 알 수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 바울의 골3:16의 충고를 실천하면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
...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안에 떨러저야 할 씨앗으로서 이 씨앗으로 인하여 선한 것이 우리안에서 싹이 트고 성장한다. 우리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이 생명의 책에서 그들의 기쁨을 열심히 추구하는데 성공한다면, 이들의 영적 생활이 놀랍게 강화될 것이다.
둘째 내용은 개인의 성화를 힘주어 말한다.
... 기독교적 신앙 내용에 대한 지식 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독교는 경건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은 반복해서 사랑을 그의 제자됨의 표지로 명하셨다(요13:34-35, 15:12; 요일3:10,18, 4:7-8, 11-13, 21).
진실로 사랑이란 믿은으로 구원얻은 사람이 전생애를 통해서 행해야 할 과제이다. 이 구원얻은 사람의 율법수행은 사랑에 있다.
셋째 내용은 경건주의적인 내면성을 염두에 두면서 요리문답과 성례(세례 와 성만찬)를 중심에 두는 개교회를 중요시한다.
요리문답은 기독교 신학의 제1차적 근본 원리들을 내포하고 있으니,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여기에 근거시켜야 한다. 특히, 어린이 기독교 교육을 위해서 이 요리문답서의 말들의 보다 깊은 뜻을 풀어서 가르쳐야 한다. 설교자들은 이것을 싫증내어서는 않된다. 우리는 말씀설교와 성례전이 내적 인간에 관계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말씀을 외적인 귀로 듣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와 닿아야 한다. 성령의 인치심과 말씀의 능력을 떨리는 정서로 느껴야 한다. 우리는 외적인 세례로 만족하지 말고, 세례에서 그리스도로 옷입어 우리의 내적인 인간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로 덧입고 우리의 외적인 삶에서 그를 증거해야 한다. 성만찬도 ...
위와같은 슈페너의 겨건주의를 물려받은 프랑케는 한걸음 더 나아가 회심의 체험을 강조한바, 그는 할례대학에서 강의하던중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였다.
갑자기 하나님은 나의 말을 들어주셨다. 나의 의심은 살아졌다. 나의 마음속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다. 그후 나는 하나님을 단순하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라 불렀다. 슬픔과 불안이 나의 마음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기쁨에 벅찼다. 그래서 나는 그와 같은 은혜를 베플어주신 하나님을 소리내어 찬양하고 높였다.
이러한 아른트, 슈페너, 프랑케의 활력에 넘치는 경건주의는 프랑케를 비롯하여 친젠돌프 중심의 모라비안 공동체에서 놀라운 선교의 꽃을 피웠고, 요한 웨슬리와 조나단 에드워즈등 18세기 복음주의 각성운동 과 윌리엄 케리로 시작되는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경건주의 선교활동을 주도한 인물은 프랑케였다. 덴마크는 프랑케와 접촉하여 두명의 선교사(Ziegenbalg 와 Plutschau)를 인도의 트랑크바르에 파송했다. 그리고 훗날 '덴마크-할례 선교회'가 탄생했다. 이들의 선교활동은 개신교 선교의 모델이 되었다. 특히, 슈바르츠(Christian Friedrich Schwartz)는 할례에 의해서 파송된 60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로서 48년간이나 인도에서 일했다. 프랑케는 선교사들의 헌신에 인상을 받아 할례에 선교사 훈련원을 세우기 까지하였다. 1733년엔 모라비안들의 후원으로 그린랜드에서 새로운 선교가 시작되었고, 1742년 경건주의의 영향하에 뮬렌베르크(Heinrich Melchior Muehlenberg)는 펜실바니아의 루터교를 위해서 파송받았다.
요한 웨슬리는 사바나에서 목회를 하기위하여 모라비안 선교단과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1735-1736 초)질풍노도를 만났는데, 모라비안 교도들의 침착함으로부터 크게 감명을 받은바 있고, 조지아 선교에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 온 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런던에 설립된 모라비안 선교단체와 접촉하여 1738년 그의 생애를 바꾸어놓는 회심 체험을 하였으니, 이는 경건주의 전통의 회신체험, 그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엘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임'으로 갔다. 거기에서 나는 어떤이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설을 읽는 것을 들었다. 9시 15분 경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에 역사하시는 변화를 묘사하고 동안 나는 나의 마음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나의 마음을 전적으로 맡겨야함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도말하셨고 나를 죄 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고 하는 확신이 나를 사로잡았다(Journal May 24, 1738)
요한 웨슬리는 그의 생애 후반부터 40,000번의 설교를 했고, 250,000마일을 말을 타고 여행했다. 그는 네덜란드, 독일, 영국의 섬들,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여행하면서 전도하였다.
1735년 옥스포드의 "거룩한 모임"에 들어 왔고, 그후 중병을 통하여 역시 경건주의적 회심 체험을 한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1736년에 안수를 받고, 매우 훌륭한 설교가가 되었다. 그는 그의 메시지에서 하나님의 사죄은총의 복음,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누리는 평화, 기쁨에 찬 봉사를 강조하였다.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웨슬리의 동료(a Calvinistic methodist)로서 그는 영국에서 보다 미국에서 더 많은 설교를 했다. 그는 1737-1741년까지 조지아주에서, 1746년엔 뉴잉글랜드에서 큰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켰다. 휫트필드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각성운동에 동참한바도 있다.
경건주의, 웨슬리와 휫트필드, 그리고 에드워즈는 모두 같은 흐름속에 동일귀속하는바, 이들 모두는 개인의 회심과 성화 ,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한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은 퓨리턴 제3세들이 조상들의 신앙과 순종의 열정을 상실해가는 상황에서 뉴저지의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Theodore J. Frelinghuysen에 의해서 일어났고, 이것이 1734-1735년 사이에 뉴잉글랜드의 에드워즈에로 불붙여룶다. 그리하여 이 미국의 대각성 운동은 1740-1741년 사이에 지리적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18세기의 경건주의 와 복음주의 각성 운동은 18세기의 선교운동을 낳았다. '해외복음 전도
협회"가 1701년에, "할례-덴마크 선교"가 1701년에 각각 탄생하였다. 1732년에는 모라비안들이 눈에 띌만한 선교활동을 하였고, 이즈음 퀘이커교도들도 선교적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영국의 쿡(James Cook)선장의 태평양 탐험에 힘입어, 케리(William Carey)가 선교적 열정으로 불붙었고
1792년엔 "이교도들을 위한 복음전도 침례교 협의회"가 생겼다. 이어서 1795년 초교파적 기구로서 "런던 선교 협회"가 형성되었느데, 주로 회중 교회의 목사인 보그(David Bogue) 와 하웨이스(Thomas Haweis) 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끝으로 1799년 벤(John Venn) 과 스코트(Thomas Scott)의 노력으로 영국 구교의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 선교 협의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영국 웨슬리 감리교 선교 협의회"(1817-1818) 와 "스코트랜드의 교회 선교국"(1825)은 19세기의 서교단체였거니와, 이상의 선교적 관심은 점차 다른 나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상에서 서술한 18세기의 기독교는 모두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매우 강조하는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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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 19세기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 선교활동 그리고 교파별 및 교파 대 교파의 일치 운동들
19세기는 18세기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과 선교활동을 이어 받아 그것을 더욱 더 활성화시켰고, 교회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새로운 파라다임의 교회의 지역화 와 어느 정도 교회의 세계화를 경험하였다.
19세기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잉글랜드 와 스코트랜드, 유럽 대륙의 경우, 독일,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프랑스 및 네덜란드에서 일어 났고, 미국에서는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처럼 복음주의 각성 운동이 일어난 모든 나라들에서는 선교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논한 18세기 복음주의 각성운동이 19세기로 이어 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19세기의 그 부분을 반복하지 않고, 영국(Great Britain), 유럽 대륙 및 미국의 선교활동 상황 만을 언급하려고 한다.
영국 복음주의(British Evangelicalism)는 19세기 개신교 선교의 선봉에 섰다. 19세기의 개신교 해외선교는 급속히 확장되어서 지구촌 구석 구석에 개신교를 심었는데, 이 엄청난 선교 운동의 중심은 대영제국이었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특히, 19세기 영국에서는 복음주의 운동 과 비국교도 운동에 힘입어 영국 국가교회와 관계없는 자발적 선교 단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계선교 운동은 여러 유명한 개척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근대 선교의 서구자인 영국의 윌리엄 케리의 모범을 따랐다. 영국의 선교사들은 주로 세계에 널려있는 대영 제국의 식민지들을 선교하였다. 마틴(Henry Martyn :1781-1812) 과 더프(Alexander Duff: 1806-1878)는 인도에, 마스든(Samuel Marsden :1764-1838)은 호주, 뉴질랜드, 태평양 군도에 복음을 심었고,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는 "런던 선교 협의회"에 의해서 1807년에 최초의 개신교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았다. 19세기 말로 오면서 일본, 한국, 필리핀도 개신교 선교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는 1865년 중국 국내선교회인 초교파적 "믿음 선교회"(Faith Mission)을 창립하기도 했다. 이같은 선교적 노력은 세계 지도상의 종교적 분포도를 다시 그리게 했다. 특히, 영어권 복음주의가 지구촌 곳곳에 확산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도 복음주의 각성운동에 의하여 솟아난 에너지를 선교활동으로 표출시키는 많은 선교단체들이 생겼다. 이들 가운데 두들어진 것만 해도 1815년에 생긴 "바젤 복음주의 선교회", 1821년의 "덴마크 선교회"와 "파리 선교회", 1828년의 "라인강 지역 선교회", 1836년의 "라잎치히 복음주의 루터 선교회" 와 "붑부 독일 선교회"등이 있다. 이들은 무엇 보다도 많은 선교사들을 외국으로 파송했다. 이들 대륙에서 파송받은 선교사들은 특히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활발히 선교하였다. 극동 지역 과 남아프리카에 개신교 선교사가 집중적으로 파송된 것은 바로 이 동인도의 선교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의 경우, 19세기 초부터 제2차 대각성 운동(1787-1825)이 뿜어낸 에너지는 자발적 선교 단체들을 표출시켰다. 처음에는 지역별로 자발적 단체들이 생겼고, 그 다음 주 단위의 단체들의 연합이 생기고, 나아가서 전국 연합이 생겼다. 이들은 국내, 국외 선교에 힘썼는데 종종 교파적 노선을 배경으로 하기도하였다. 예컨대, 1810년에 회중교회 소속의 "외국 선교를 위한 미국 선교국"이, 그리고 1812년에 "외국 선교를 위한 미국 침례교 선교 총회"가 생겼다. 그리고 1817년에는 장로교회가, 1818년에는 감리교가, 1820년에는 성공회(Episcopalians)가 각각 선교 단체들을 조직했다. 나아가서 "연합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 국내 선교회"(the 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었다.
교회사가인 라투렛(Kenneth S.Latourette)은 기독교 역사상 19세기를 "위대한 세기"
(the Great Century)라하였다. 그는 7권으로 된 그의 방대한 <기독교 확장사>(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7vols. , 1937-1945)중 3권을 19세기에 할애하였다. 그 이유는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 동안에 기독교가 남북미, 호주, 아프리카, 태평양군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한세기 동안 세상을 향한 선교활동에의한 광범위한 영향은 1800년 동안의 - 기독교가 미쳐 온 - 영향을 능가할 정도였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에 장로교를 옮겨 심은 것도 이 "위대한 세기" - 1885년 4월 5일 인천에 상륙 - 였다.
그러나 19세기의 선교활동은 교파주의적 색채를 띈 기독교 확장의 역사였다. 19세기에는 어느 나라 어느 교파의 선교사나 선교단체가 어느 나라에 어떤 교파의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키느냐가 중요 했다. 종교개혁 이래로 17세기의 교파절대주의(confessional absolutism)를 거쳤고,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친 19세기의 개신교는 아직도 교파주의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이같은 기독교는 교파주의와 개교회의 성장주의 이상을 볼수 없었다.
하지만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선교활동으로 불타올랐던 19세기는 특히 피선교 지역의 선교 현장에서 교파들간의 친교와 연합, 나아가서 선교단체들 사이의 친교와 연합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라우즈(Ruth Rouse)는 "선교와 에큐메니즘은 불가분리하다.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 선교, 기독교적 일치 추구는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했고, 브렌드레트(Henry Renauld Brandreth)는 19세기가 기독교의 놀라운 확장을 경험했다는 라투렛의 주장을 인정하면서 19세기야말로 기독교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각 교파의 세계적 연합 기구의 확산과 교파 대 교파의 연합운동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교회의 지역화 와 어느정도 세계화라고 하는 새로운 파라다임의 교회 일치 운동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브렌드레트가 제시하는 19세기의 교파단위의 세계적 연합운동 과 교파간의 세계적 연합 운동을 소개하므로써, 19세기가 단순한 기독교 확장의 "위대한 세기"일 뿐만 아니라 교회들의 일치추구에 있어서도 그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위대한 세기"였음을 지적하려고 한다. 1. 람베드 주교대회(1867), 2. 세계 개혁 교회 연맹(1875), 3. 미국 감리교 감독 교회 총회(1876), 4. 세계의 구(舊) 가톨릭 교회들의 위트레히트 연합(1889), 5. 제1차 국제 회중 교회 협의회(1891), 6. 제1차 침례교 세계대회(1905). 18세기의 경건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18세기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 과 선교활동, 그리고 18세기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 과 선교활동을 물려 받은 19세기의 복음주의 각성운동과 선교활동은 개인의 회심 과 성화, 그리고 교파별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한결 같이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느데, 방금 언급한 19세기의 교파별 세계 연합 기구들 과 교파 대 교파의 연합 노력은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내다보는 새로운 파라다임의 교회의 세계화에로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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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l.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과 WCC, 그리고 1968년 웁살라 WCC이후의 복음주의 세계 대회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추구하면서도 개교회와 지역별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보편교회(the Church Universal) 과 개교회 혹은 지역별 교회(the Church Local)는 항상 맞물려 있다. 20세기 에큐메니즘은 지역화 와 세계화를 함께 추구한다. 그리고 WCC의 "신앙 과 직제" 전통은 1968년 이후의 복음주의 세계대회들이 강조하는 개인의 구원 과 성화, 개교회의 개척 과 성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분수령은 1910년 에딘버러의 "세계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 W.M.C.)였다. " 1910년 이전 까지만 해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같았는데, 에딘버러 이후는 그것이 활짝열린 문으로 마구 쏟아저 들어오는 햇빛과도 같았다." 이 세계 선교대회가 제8차 국제적 차원의 선교대회였고, 바로 10년전엔 뉴욕에서 " the 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가 열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회의 세계화가 선교운동 과 위에서 언급한 교파별 그리고 교파 대 교파의 연합운동 - 이것도 사실은 선교운동의 소산이지만 - 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20세기의 교회의 세계화는 19세기의 교파들의 확장과 성장을 전제한다. 이처럼 18-19세기 기독교와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개교회화와 지역화가 교회의 세계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10년 에딘버러가 폐막할 즈음, 미국 성공회의 주교로서 필리핀의 선교사인 브렌트가 "신앙 과 직제"(Faith and Oder)운동을 제안한 이래, 1927년 로잔에서 제1차 세계 대회가 열렸고,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 직전에 죄더불롬이 제안한 "삶 과 봉사"(Life and Work)운동은 1925년에 스톡크홀름에서 제1차 세계대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 두 운동의 대표들은 1937년 WCC를 형성하고, 1938년 위트레히트에서 교회들의 세계화의 헌장인 WCC 교리 헌장(WCC Basis)을 만들고, 세계 제2차 대전으로 10년을 기다린 다음 1948년에 암스텔담에서 제1차 WCC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국제 선교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1921년에 W.M.C.로 바뀜)가 1961년 뉴델리 WCC때에 WCC에 정식으로 합류하였고 - 물론 처음부터 WCC와 계속해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지내 왔지만 - "기독교 교육 세계 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ristian Education)는 1971년에 WCC의 지체가 되었다. 이상과 같은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 과 WCC는 교회의 세계화를 가져옴에 있어서 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쁹아보기 힘든 새로운 파라다임이다.
그러면 WCC교리 헌장, "신앙 과 직제", "삶 과 봉사" 및 "세계선교 과 복음 전도"( IMC가 1960녀대에는 C.W.M.E. = Conference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가 각각 교회의 세계화에 어떻게 기여했나에 관하여 알아보자. 물론 이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지역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WCC교리헌장은 모든 교파들의 다양성을 열어 놓는 적극적인 통일성으로서, 1996년 현제 330여 교파들이 이 교리헌장밑에 WCC의 구성원이 되어있다. 이같은 교회의 세계화는 역사상 그 유래를 쁹아볼수 없다.
세계 교회 협의회란 성서를 쫓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한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을 위한 교회들의 공동의 소명을 함께 성취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
"신앙 과 직제"는 교회들의 신앙 과 신학, 그리고 직제의 통일성 과 다양성을 쁹아내기 위해서 50년 이상의 협의회적 과정을 통한 결과물을 가져왔다. 즉, 1.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 : 복음"(Lausanne 1927, 제2분과), 2. "교회의 본성"(Lausanne 1927, 제3분과),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Edinburgh 1937, 제1 분과)에서 정의된 "은혜의 의미", "칭의 와 성화", "하나님의 주권 과 인간의 반응", "교회 와 은혜", "은혜: 말씀 설교 와 성례전", "오직 은혜로", 4. "그리스도 와 그의 교회"(Lund 1952, 제1분과), 5. "성서, 전승, 전통들"(Montreal 1963, 제2분과)은 교리싸움으로 얼룩진 교회사를 청산하고 교회들의 통일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다야성을 허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 가운데서 1963년 몬트리올의 에 관하여만 잠시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위 몬트리올 문서는 교회의 세계화 와 지역화를 함께 추구한다. 상론하면, 큰 글자 Tradition은 성서의 원천이기도한 the Gospel Tradition으로서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성공회 및 모든 개신교회들이 공유하고 있는 통일성의 원리요, 작은 글자 traditions는 문화적 배경을 지닌 모든 교파들의 신학 전통들이다. 우리는 여러 지역 과 여러 종족의 여러 문화권속에서 꽃피어난 신학 전통들의 독특성 과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의 복음 전승(The Gospel Tradition)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발전한 다양한 신학 전통들을 통해서 표현 된다. 전자는 후자를 통해서 표현되지만 후자를 초월한다. 하나의 복음 전승의 씨앗이 로마 문화권에 떨어져, 로마 가톨릭 신학으로, 희랍 문화권에 떨어져, 동방 정통 교회의 신학으로, 독일 문화권에서는 독일 신학으로, 영미계통에서는 영미계통의 신학으로, 아시아 와 아프리카 와 중남미에서는 제3세계 유형의 신학으로 꽃피어 났다. 이처럼 에큐메니칼 운동 과 WCC는 교회 와 신학의 지역화 와 세계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지역화 차원에서 개인의 회심과 성화,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인정해야 한다.
"신앙과 직제가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확정지은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 세례·성만찬·직제)Text는 개교회의 생명인 세례, 성만찬 그리고 직제에 대한 신학과 실천의 일치를 추구한 것으로 개교회와 지역 교회들의 다양성을 열어 놓고 있고, 1990년의 신앙과 직제 문서인 <하나의 신앙교백 : 세계교회가 고백해야 할>(Confessing the One Faith : An Ecumneical Explication of the Apostolic Faith as it is Confessed in the Nicene - Constantinopolitan Creed, 381)는 에큐메니칼적으로 해석된 하나의, 거룩한, 보편 교회의 사도적 신앙으로서 각 개교회와 지역 교회 역시 이같은 사도적 신앙을 이미 공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1990년 로마 가톨릭과 WCC대표들로 구성된 Joint Working Group의 <하나의 교회 : 개교회들과 보편 교회>(The Church Local and Universal)는 개신교의 개교회주의와 가톨릭(로마와 동방)교회의 보편교회주의를 넘어서서 교회의 지역화와 세계화를 함께 묶고 있다. 그리고 1993년 스페인의 산티아고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제5차 세계대회는 "코이노니아"개념속에 개교회와 지역 교회들의 다양성과 연속성을 강조하고, 이 "코이노니아"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13 : 8)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할 수 없고, 성경이 선포하였고, 사도적 고동체가 설교한 구원과 인간의 궁국적 운명에 대해서 함께 고백 할 수 없는 다양성은 부당하다(S.ll.17).
경전으로서의 성경은 복음진리(갈2 : 5,14)와 훗날 네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안에 제시되 있고 부연된 가르침들위에 교회의 통일성(the God-given Unity)을 기초시키고 있다. 이 통일성과 이 가르침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고, 교회가아니다. 성경은 또한 다양성의 기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다양한 메시지들과 가르침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성경이 기록된 상황들이 다양하고, 이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과 해석 방법이 다양하며, ...
이 같은 다양성의 한계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를 위한 최소한도의 요청인데,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개교회의 개척과 목양과 성장은 "복음"과 "성경",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 하나님", "세례, 성만찬, 직제"를 사도적 전승으로 공유하고, 그 어떤 교파적 특성과 지역적 혹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닐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신앙과 직제"는 교회의 지역화와 세계화를 지향하면서, "삶과 봉사"(1960년대에는 "교회와 사회", 1990년 이후는 JPIC = Unit lll) 그리고 "선교"(1910년의 W.M.C.가 1921년에 I.M.C.로, 1963년 이후로 C.W.M.E.)의 세계화에 동참할 것을 모든 개교회들과 지역 교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끝으로 우리는 Missio Dei가 절정에 달했던 1968년 웁살라 WCC와 1973년 방콕 CWME의 선교개념에 거부반응을 일으킨 복음주의 세계대회들이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WCC가 지향해 온 Missio Dei전통을 매우 존중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특히, 방콕에 대응해서 열린 1974년 로잔 복음주의자들의 국제대회와 1989년 산 안토니오 CWME에 대응하여 열린 1989년의 마닐라 제2로잔 세계대회야 말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에 관한 그 이전까지의 복음주의 세계대회들의 이원론적 태도와는 달리,하나의 선교 개념에 복음전도와 교회의 사회봉사를 모두 포함시키므로써,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이 개인과 개교회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나름대로 교회의 세계화와 지역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視다. 아래의 주장은 마닐라(1989)의 선교개념이다. 적어도 이 복음주의 계열의 세계대회들은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는 18-19세기 기독교를 물려받았다.
복음전도가 우선이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전도의 목적은 모든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비와 능력의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보여 주셨다.
... 우리 역시 겸허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고 가르쳐야 하며, 나아가서 병든자들을 돌보고, 장애자들과 불이익을 당하는 자들을 도와주어야 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구출해내야 한다. 우리는 은사와 소명과 상황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복음과 선행을 분리켜서는 않된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필연적으로 이 하나님 나라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하여 예언자적 심판을 가한다. 악들 중에서 우리는 제도화된 폭력을 포함한 모든 파괴적 폭력을 반대하고, 정치적 부패, 온갖 종류의 인간 착취와 환경 착취, 임신 중절, 마약 및 인권남용 등에 반대한다. 우리는 또한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관심하면서 우리들 자신이 세계의 틀안에서 빚더미에 짓눌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
진정한 선교는 항상 성육신적 이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속으로 파고들어가 이들의 사회적 현실, 이들의 슬픔과 고통, 이들의 억압적 세력에 정의로써 항거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WCC의 "신앙과 직제"전통이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거니와, CWME가 WCC중앙 위원회에 제출한 <에큐메니칼 확언 : 선교와 전도>(Ecumenical Affirmation - Mission and Evangelism, 1982)역시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의 선포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주권을 인식하고 이것을 개인의 결단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초대를 포함 한다. 그것은 성령의 매개에 의해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므로써 주님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제자의 삶과 봉사의 삶으로의 부름을 개인적으로 받아드리라는 선언이다.
... 신약 성경은 이것을 새로태어남(요3 ; 3), 메타노이아, 우리의 태도들과 삶의 스타일들의 변혁이라고도 불리운다.
모든 인간 공동체안에서 개 교회들을 증가시키는 것이 기독교적 선교의 중심에 있다. 복음의 씨앗을 심으면, 말씀과 성례전 주위에 회집하여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한 백성이 생겨난다.
교회들이 실제로 각 나라에 생겼다. 이것은 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제자들의 신실한 증거 덕분이다. 이러한 씨뿌리는 과제는 각 인간 공동체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한 세포, 즉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의 이름으로 그의 백성을 섬기는 교회가 있기 까지 지속될 필요가 있다. 각 장소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 복음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사역은 하나의 대리적 백성의 현존을 요구한다. 개 교회는 교회(the Church)의 선교적 성취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도구이다.
결 론:
한국 교회는 해방되던 해에 30-40만애 불과하던 기독교인의 수가 오늘에 이르러 1,200만 이상을 혜아릴 만큼 엄청난 성장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와 오늘에 이르러 4,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135개국에 파송한 세계 6-7대 선교국으로 발돋음하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 한국 교회는 개인의 회심과 성화, 개 교회의 개척과 성장에 힘쓰고, 해외선교에 있어서도 각개 전투식 혹은 자영업식 선교에 머믈르고 있어, 교회의 세계화에는 아직도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18세기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 그리고 선교활동이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 교회의 개척과 성장에 엄청나게 기여 했고, 19세기의 기독교는 이같은 18세기의 기독교 전통을 이어받아 개 교회의 성장을 포함한, 역사상 유래가 없는 기독교의 확장을 경험한 바, 우리 한국 교회는 이와같은 18-19세기 서양 기독교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사실상 우리 한국위 경우 교회성장에 이어 해외선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의 개신교는 18-19세기의 개인의 회심과 성장,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고 있으며, 게다가 선교 초기에 받아들인 19세기 말과 20세기초 미국의 근본주의적 개신교 전통으로 말미암아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의 색깔을 더 하고 있다. 결국 우리 한국 교회는 18-19세기의 서양 교회사가 필연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랑곳 하고 있지 않다.
우리 한국 개신교는 서양 교회사에 있어던 교파별 연합 추구 와 교파 대 교파의 연합 추구에 있어서는 매우 약하고,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가 추구해 온 교회의 세계화에는 더더욱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즉, 우리는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는 18-19세기 기독교에 머물러 있으므로 교회의 개교회화와 지역화에는 공헌하고 있으나, 교회의 세계화에는 전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본 소고에서 "신앙과 직제" 문서가 개교회들과 지역 교회들의 다양성과 연속성을 매우 귀하게 여기면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세계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CWME의 문서인
끝으로 우리는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이 1990년대에 들어서서 확산되고 있는 "지구화"에 대한 올바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운동은 교회들의 다양성 속의 일치를 지향하고 코이노니아로서 일치를 주장함으써, 3분의 2세계를 소외시키고 못살게 구는 잘못된 "지구화"와 "지역화"에 대하여 바르게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선교CWME)는 개인의 회심과 성장,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에만 급급하지 않고, 교회를 하나님의 선교의 대행자로하여 하나의 복음을 인류와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들로 가지고 갈 수 있다. 끝으로 삶과 봉사(Life and Work)는 교회적 코이노니아에 입각하여 이 세상의 정치, 사회적, 경제적 병폐들 및 이에 따른 창조세계의 파괴를 치유하기 위하여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보전"(JPIC)를 실천하고 있다. 아마도 요 17 : 21절과 엡 1 : 10절은 이상 세 에큐메니칼 흐름 모두를 포함하는, 에큐메니칼 비전으로서, 오늘 날 잘못나가는 "지구화"와 그 병폐들에 대한 치유책이라 할 것이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들은 이와 같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교파분열적 교파주의, 교회성장주의, 개인주의적 구원론 등과 같은 자신의 약점들을 개혁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지구화와 지역화는 한국교회가 자신의 정체성들을 확실히 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할 때 가능할 것이다.
교회성장과 선교,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
이 형 기
서론 :문제제기
l. 18세기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 그리고 선교활동
ll. 19세기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 선교활동 그리고 교파별 및 교파 대 교파의 일치 운동들
ll.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과 WCC, 그리고 1968년 웁살라 WCC이후의 복음주의 세계 대회들
결 론:
서론 :문제제기
공산 동구권과 구소비땛 연방이 붕괴되고, 1990년에 접어들면서 에큐메니칼 논의에서 점점 더 빈번히 들리는 단어는 "지구화"(globalization)이다. 이것은 초국가적이고 점점 더 세계적이 되는 경제구조, 금융구조 및 통신구조에 의해서 조성되는 "한 세계"(one world)에 대한 비전이다. 1998년 12월 하라레에서 모인 WCC 초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C.U.V.문서는 이와 같은 "지구화"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지향하는 교회들의 일치 및 인류의 일치와는 대립되는 것으로서 이 "지구화"는 직접적으로 교회들에게 엄습해오는 도전이라고 한다.
지난 여러 10년의 세월동안 커뮤니케이션과 금융과 경제가 다국적 구조 및 점차 세계적 구조를 갖게됨에 따라 특이한 지구적 차원의 일치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구조적 변혁의 결과로 사회는 점점 분열 (fragmentation)되었고 인류가족의 더 많은 부분들이 소외되고 제외되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제관계를 맺게되는 교회들은 스스로를 변화된 제도에 적응하고 변화된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인간 생활의 영적 차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간과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온전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운동의 조직적인 형태들은 연대성과 나눔, 상호 책임성과 상호 힘실어주기(empowerment) 근거한 대단히 색다른 형태의 관계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모든 현존하는 에큐메니칼 기구들은 포용성과 화해의 정신에 의해서 특징지워지는 지구적 공동체의 한 형태와 가치를 명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전의 빛에 조명하여 스스로를 재평가해야만 한다.
이번 WCC 총회는 "지구화"를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무엇 보다도 시장경제에 의한 지구촌개편에 있고, 둘째 이유는 과학과 기술의 지구촌화에 있다하겠다. 오늘 날 인류는 지역화와 세계화의 긴장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어느정도 이 "지구화"의 적극적인 측면들도 생각해야 한다.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통일했던 로마제국(Pax Romana)의 에큐메니즘(?)이 당시 지중해 세계의 보편교회가 지향했던 에큐메니즘과 그 질(質)에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로마제국이 복음의 세계화에 기여한 측면과 복음의 문화화에 기여한 측면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19세기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특히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와 지리적 확장 등이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과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를 보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도구들을 통해서도 이 19세기를 라투렛(Kenneth S. Latourette)과 더불어 "위대한 세기"라 해야 할 것이다. 복음과 기독교가 역사상 이 땅위에 지리적으로 가장 널리 전파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우리는 인류역사가 아무리 죄와 허물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그속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형상들이 있으며, 아무리 파괴되어가는 창조세계이지만 그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정체, 경제, 사회, 문화가 아무리 죄악으로 물들어 있어도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대행하는 교회와 기독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와 창조세계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긍정"(Yes)을 안경으로 하여 흑암의 권세가 드리워저 있고, 애매성과 혼돈의 모습을 가진 이 세상을 적그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징표들을 역사와 창조세계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볼 때, 세계 제2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서양(유럽 과 미국)이 정치·군사적, 경제·문화적 지배권을 누렸으나, 1950년대 이후 우리는 힘의 다변화의 시대 혹은 다중심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에이르면, 구 소비땛 공산연방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로, 탈이데올로기 와 탈냉전 시대가 등장하고, 다원화된 힘들의 균형속에서 화해와 협력을 추구히는 시대가 열린다. 동시에 소련과 동구권에선 다민족 국가들이 자신들의 핏줄 과 문화의 고유성을 쁹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의 불록화 현상과 상호 협력의 필요, 그리고 WTO등 국제무역 기구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국제무역 활동은 오늘의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 시장으로 만드는 동시에 각 나라와 지역들은 하나의 지구촌을 지향한다. 즉, 오늘 날 인류는 지역화와 세계화의 긴장속에서 살고 있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엔 과학기술과 산업화가 문화의 기본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고, 교통과 통신기술의 발달, 컴퓨터 기술에 의한 정보화 지식의 증가 및 과학 기술의 교류와 협력, 특히 인공위성 과 멀티미디어는 오늘의 세계를 국경없는 하나의 지구촌 가족으로 마들어 가고 있는 동시에 각 나라 와 민족, 그리고 유럽권, 북미권, 태평양권, 아시아권등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서 재편된 초국가적, 초민족적 불록들은 다원화의 세계 혹은 지역화를 지향하고 있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 우리들은 이와 같은 세계사적 현상들이 진정한 "지구화" 혹은 진정한 에큐메니즘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지역화와 세계화의 긴장속에서 교회성장과 에큐메니카 운동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 18세기의 경건주의는 개인의 회심과 성화를 강조하고, 교회갱신의 원리인 "교회안에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를 내세우면서, 개교회주의 혹은 소그룹 운동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 경건주의 운동은 프랑케로 비롯되는 선교의 역사를 가져오고, 영국의 웨슬리와 휘트필드 그리고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를 중심한 복음주의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나아가서 복음전도의 역사를 일구워 나갔다. 그리고 복음 과 기독교가 역사상 유래없이 확장 되었다는 의미에서, "위대한 세기"(Latourette)로 일컬어지는 19세기는 위에서 언급한 18세기의 흐름을 이어받아 복음주의 부흥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선교활동에 교회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적어도 18-19세기 서양교회사의 이와 같은 흐름은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매우 강조하는 경향이다. 우리 한국 개신교는 18-19세기의 이와 같은 흐름을 미국을 통해서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에,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에 역점을 둔다. 게다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를 이어받은 미국 개신교의 19세기 말 및 20세기 초의 근본주의의 흐름 역시 우리 한국 개신교의 역사속에 흐르고 있어,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 색깔을 더 짙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개신교는 18-19세기 전통이 교회의 세계화를 가져온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으켰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18-19세기의 기독교는 교회의 지역화에, 20세기 에큐메니즘은 교회의 세계화에 역점을 두었는데, 우리 한국 개신교는 과연 어느 정도로 교회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는가 ?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의 근본 성격을 결정 짓는 "신앙 과 직제"(Faith and Oder), "삶 과 봉사"(Life and Work) 그리고 "세계선교"(W.M.C.)가 각각 교회의 연합과 일치 차원에서, 교회의 사회참여 차원에서, 그리고 교회의 선교 차원에서 교회의 세계화를 역사상 유래없이 이룩하였다면, 우리 한국 개신교는 아직도 18-19세기적 지역화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 지역화와 세계화가 맞물려 있는 오늘의 세계속에서, 우리 한국 개신교의 지역화 와 세계화는 어떠해야 하는가 ?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은 교회의 세계화로 이어져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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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18세기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 그리고 선교활동
서양 교회사의 18세기에는 이성을 계시로부터, 자연을 초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철학을 교회 와 신학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계몽주의 운동(1648-1789)에 맞서,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영미계통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과 선교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독일의 경건주의의 아버지인 슈페너는 아른트(Johann Arndt) 의 <진정한 기독교>(1606년)에 크게 감명받아 그의 설교집에 서론을 썼는데,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다음의 6가지 내용은 개인의 회심과 성화를 역설하고 있다. 첫째로 성경연구에 더욱 힘써 개인의 종교를 더욱 심화시킬 것, 둘째로 평신도를 교회일에 더욱 깊이 참여시킬 것, 셋째로 기독교인들은 무미건조한 신학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일에 몰두해야 할 것, 넷째로 신학 논쟁에 있어서 사랑의 전신을 보여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할 것, 다섯째로 목사들의 도덕 생활과 영성 생활에 초점을 두고 신학 교육을 시킬 것, 여섯째로 확신있고 열정적인 설교로 사람들을 회심시킬 것. 슈페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2주에 한 번 모이는 "경건한 무리"(collegia pietatis)라고 하는 작은 기도모임을 가지면서, 1675년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를 저술했으니, 여기에서도 개인의 회심과 성화가 매우 강조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의 "collegia pietatis"는 기성교회의 교인들 보다도 회심 과 성화에 있어서 특출난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교회의 개혁적 요소인 "교회안에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를 낳았고, 그의 <경건한 열망>이 제시하는 6가지 개혁 방안들은 개인의 회심 과 성화는 물론, 말씀 과 성례전 과 요리문답 중심의 개교회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아래에서 이 6가지 중 3가지만을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내용은 설교와 성경공부가 강조되고, 이신칭의와 영적 생활이 부각되는 개교회주의를 암시하고 있다.
우리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사용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본성안에는 그 어떤 선한 것도 없다. 이 선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주어저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있는 수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앙은 복음에 의해서 불붙여저야 하고, 율법은 선앵의 규범과 이 선행들에 도달하는 많은 자극들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중들은 마땅히 얻어야 할 유익을 위해서 예외없이 모든 성서를 알아야 한다. ... 교인들은 정규적인 예배에서 설교되고 해석된 특정 구절들에 대한 지식 이외에 성서전체의 뜻을 알 수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 바울의 골3:16의 충고를 실천하면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
...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안에 떨러저야 할 씨앗으로서 이 씨앗으로 인하여 선한 것이 우리안에서 싹이 트고 성장한다. 우리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이 생명의 책에서 그들의 기쁨을 열심히 추구하는데 성공한다면, 이들의 영적 생활이 놀랍게 강화될 것이다.
둘째 내용은 개인의 성화를 힘주어 말한다.
... 기독교적 신앙 내용에 대한 지식 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독교는 경건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은 반복해서 사랑을 그의 제자됨의 표지로 명하셨다(요13:34-35, 15:12; 요일3:10,18, 4:7-8, 11-13, 21).
진실로 사랑이란 믿은으로 구원얻은 사람이 전생애를 통해서 행해야 할 과제이다. 이 구원얻은 사람의 율법수행은 사랑에 있다.
셋째 내용은 경건주의적인 내면성을 염두에 두면서 요리문답과 성례(세례 와 성만찬)를 중심에 두는 개교회를 중요시한다.
요리문답은 기독교 신학의 제1차적 근본 원리들을 내포하고 있으니,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여기에 근거시켜야 한다. 특히, 어린이 기독교 교육을 위해서 이 요리문답서의 말들의 보다 깊은 뜻을 풀어서 가르쳐야 한다. 설교자들은 이것을 싫증내어서는 않된다. 우리는 말씀설교와 성례전이 내적 인간에 관계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말씀을 외적인 귀로 듣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와 닿아야 한다. 성령의 인치심과 말씀의 능력을 떨리는 정서로 느껴야 한다. 우리는 외적인 세례로 만족하지 말고, 세례에서 그리스도로 옷입어 우리의 내적인 인간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로 덧입고 우리의 외적인 삶에서 그를 증거해야 한다. 성만찬도 ...
위와같은 슈페너의 겨건주의를 물려받은 프랑케는 한걸음 더 나아가 회심의 체험을 강조한바, 그는 할례대학에서 강의하던중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였다.
갑자기 하나님은 나의 말을 들어주셨다. 나의 의심은 살아졌다. 나의 마음속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다. 그후 나는 하나님을 단순하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라 불렀다. 슬픔과 불안이 나의 마음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기쁨에 벅찼다. 그래서 나는 그와 같은 은혜를 베플어주신 하나님을 소리내어 찬양하고 높였다.
이러한 아른트, 슈페너, 프랑케의 활력에 넘치는 경건주의는 프랑케를 비롯하여 친젠돌프 중심의 모라비안 공동체에서 놀라운 선교의 꽃을 피웠고, 요한 웨슬리와 조나단 에드워즈등 18세기 복음주의 각성운동 과 윌리엄 케리로 시작되는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경건주의 선교활동을 주도한 인물은 프랑케였다. 덴마크는 프랑케와 접촉하여 두명의 선교사(Ziegenbalg 와 Plutschau)를 인도의 트랑크바르에 파송했다. 그리고 훗날 '덴마크-할례 선교회'가 탄생했다. 이들의 선교활동은 개신교 선교의 모델이 되었다. 특히, 슈바르츠(Christian Friedrich Schwartz)는 할례에 의해서 파송된 60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로서 48년간이나 인도에서 일했다. 프랑케는 선교사들의 헌신에 인상을 받아 할례에 선교사 훈련원을 세우기 까지하였다. 1733년엔 모라비안들의 후원으로 그린랜드에서 새로운 선교가 시작되었고, 1742년 경건주의의 영향하에 뮬렌베르크(Heinrich Melchior Muehlenberg)는 펜실바니아의 루터교를 위해서 파송받았다.
요한 웨슬리는 사바나에서 목회를 하기위하여 모라비안 선교단과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1735-1736 초)질풍노도를 만났는데, 모라비안 교도들의 침착함으로부터 크게 감명을 받은바 있고, 조지아 선교에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 온 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런던에 설립된 모라비안 선교단체와 접촉하여 1738년 그의 생애를 바꾸어놓는 회심 체험을 하였으니, 이는 경건주의 전통의 회신체험, 그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엘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임'으로 갔다. 거기에서 나는 어떤이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설을 읽는 것을 들었다. 9시 15분 경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에 역사하시는 변화를 묘사하고 동안 나는 나의 마음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나의 마음을 전적으로 맡겨야함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도말하셨고 나를 죄 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고 하는 확신이 나를 사로잡았다(Journal May 24, 1738)
요한 웨슬리는 그의 생애 후반부터 40,000번의 설교를 했고, 250,000마일을 말을 타고 여행했다. 그는 네덜란드, 독일, 영국의 섬들,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여행하면서 전도하였다.
1735년 옥스포드의 "거룩한 모임"에 들어 왔고, 그후 중병을 통하여 역시 경건주의적 회심 체험을 한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1736년에 안수를 받고, 매우 훌륭한 설교가가 되었다. 그는 그의 메시지에서 하나님의 사죄은총의 복음,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누리는 평화, 기쁨에 찬 봉사를 강조하였다.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웨슬리의 동료(a Calvinistic methodist)로서 그는 영국에서 보다 미국에서 더 많은 설교를 했다. 그는 1737-1741년까지 조지아주에서, 1746년엔 뉴잉글랜드에서 큰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켰다. 휫트필드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각성운동에 동참한바도 있다.
경건주의, 웨슬리와 휫트필드, 그리고 에드워즈는 모두 같은 흐름속에 동일귀속하는바, 이들 모두는 개인의 회심과 성화 ,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한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은 퓨리턴 제3세들이 조상들의 신앙과 순종의 열정을 상실해가는 상황에서 뉴저지의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Theodore J. Frelinghuysen에 의해서 일어났고, 이것이 1734-1735년 사이에 뉴잉글랜드의 에드워즈에로 불붙여룶다. 그리하여 이 미국의 대각성 운동은 1740-1741년 사이에 지리적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18세기의 경건주의 와 복음주의 각성 운동은 18세기의 선교운동을 낳았다. '해외복음 전도
협회"가 1701년에, "할례-덴마크 선교"가 1701년에 각각 탄생하였다. 1732년에는 모라비안들이 눈에 띌만한 선교활동을 하였고, 이즈음 퀘이커교도들도 선교적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영국의 쿡(James Cook)선장의 태평양 탐험에 힘입어, 케리(William Carey)가 선교적 열정으로 불붙었고
1792년엔 "이교도들을 위한 복음전도 침례교 협의회"가 생겼다. 이어서 1795년 초교파적 기구로서 "런던 선교 협회"가 형성되었느데, 주로 회중 교회의 목사인 보그(David Bogue) 와 하웨이스(Thomas Haweis) 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끝으로 1799년 벤(John Venn) 과 스코트(Thomas Scott)의 노력으로 영국 구교의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 선교 협의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영국 웨슬리 감리교 선교 협의회"(1817-1818) 와 "스코트랜드의 교회 선교국"(1825)은 19세기의 서교단체였거니와, 이상의 선교적 관심은 점차 다른 나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상에서 서술한 18세기의 기독교는 모두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매우 강조하는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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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 19세기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 선교활동 그리고 교파별 및 교파 대 교파의 일치 운동들
19세기는 18세기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과 선교활동을 이어 받아 그것을 더욱 더 활성화시켰고, 교회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새로운 파라다임의 교회의 지역화 와 어느 정도 교회의 세계화를 경험하였다.
19세기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잉글랜드 와 스코트랜드, 유럽 대륙의 경우, 독일,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프랑스 및 네덜란드에서 일어 났고, 미국에서는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처럼 복음주의 각성 운동이 일어난 모든 나라들에서는 선교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논한 18세기 복음주의 각성운동이 19세기로 이어 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19세기의 그 부분을 반복하지 않고, 영국(Great Britain), 유럽 대륙 및 미국의 선교활동 상황 만을 언급하려고 한다.
영국 복음주의(British Evangelicalism)는 19세기 개신교 선교의 선봉에 섰다. 19세기의 개신교 해외선교는 급속히 확장되어서 지구촌 구석 구석에 개신교를 심었는데, 이 엄청난 선교 운동의 중심은 대영제국이었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특히, 19세기 영국에서는 복음주의 운동 과 비국교도 운동에 힘입어 영국 국가교회와 관계없는 자발적 선교 단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계선교 운동은 여러 유명한 개척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근대 선교의 서구자인 영국의 윌리엄 케리의 모범을 따랐다. 영국의 선교사들은 주로 세계에 널려있는 대영 제국의 식민지들을 선교하였다. 마틴(Henry Martyn :1781-1812) 과 더프(Alexander Duff: 1806-1878)는 인도에, 마스든(Samuel Marsden :1764-1838)은 호주, 뉴질랜드, 태평양 군도에 복음을 심었고,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는 "런던 선교 협의회"에 의해서 1807년에 최초의 개신교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았다. 19세기 말로 오면서 일본, 한국, 필리핀도 개신교 선교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는 1865년 중국 국내선교회인 초교파적 "믿음 선교회"(Faith Mission)을 창립하기도 했다. 이같은 선교적 노력은 세계 지도상의 종교적 분포도를 다시 그리게 했다. 특히, 영어권 복음주의가 지구촌 곳곳에 확산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도 복음주의 각성운동에 의하여 솟아난 에너지를 선교활동으로 표출시키는 많은 선교단체들이 생겼다. 이들 가운데 두들어진 것만 해도 1815년에 생긴 "바젤 복음주의 선교회", 1821년의 "덴마크 선교회"와 "파리 선교회", 1828년의 "라인강 지역 선교회", 1836년의 "라잎치히 복음주의 루터 선교회" 와 "붑부 독일 선교회"등이 있다. 이들은 무엇 보다도 많은 선교사들을 외국으로 파송했다. 이들 대륙에서 파송받은 선교사들은 특히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활발히 선교하였다. 극동 지역 과 남아프리카에 개신교 선교사가 집중적으로 파송된 것은 바로 이 동인도의 선교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의 경우, 19세기 초부터 제2차 대각성 운동(1787-1825)이 뿜어낸 에너지는 자발적 선교 단체들을 표출시켰다. 처음에는 지역별로 자발적 단체들이 생겼고, 그 다음 주 단위의 단체들의 연합이 생기고, 나아가서 전국 연합이 생겼다. 이들은 국내, 국외 선교에 힘썼는데 종종 교파적 노선을 배경으로 하기도하였다. 예컨대, 1810년에 회중교회 소속의 "외국 선교를 위한 미국 선교국"이, 그리고 1812년에 "외국 선교를 위한 미국 침례교 선교 총회"가 생겼다. 그리고 1817년에는 장로교회가, 1818년에는 감리교가, 1820년에는 성공회(Episcopalians)가 각각 선교 단체들을 조직했다. 나아가서 "연합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 국내 선교회"(the 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었다.
교회사가인 라투렛(Kenneth S.Latourette)은 기독교 역사상 19세기를 "위대한 세기"
(the Great Century)라하였다. 그는 7권으로 된 그의 방대한 <기독교 확장사>(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7vols. , 1937-1945)중 3권을 19세기에 할애하였다. 그 이유는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 동안에 기독교가 남북미, 호주, 아프리카, 태평양군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한세기 동안 세상을 향한 선교활동에의한 광범위한 영향은 1800년 동안의 - 기독교가 미쳐 온 - 영향을 능가할 정도였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에 장로교를 옮겨 심은 것도 이 "위대한 세기" - 1885년 4월 5일 인천에 상륙 - 였다.
그러나 19세기의 선교활동은 교파주의적 색채를 띈 기독교 확장의 역사였다. 19세기에는 어느 나라 어느 교파의 선교사나 선교단체가 어느 나라에 어떤 교파의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키느냐가 중요 했다. 종교개혁 이래로 17세기의 교파절대주의(confessional absolutism)를 거쳤고,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친 19세기의 개신교는 아직도 교파주의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이같은 기독교는 교파주의와 개교회의 성장주의 이상을 볼수 없었다.
하지만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선교활동으로 불타올랐던 19세기는 특히 피선교 지역의 선교 현장에서 교파들간의 친교와 연합, 나아가서 선교단체들 사이의 친교와 연합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라우즈(Ruth Rouse)는 "선교와 에큐메니즘은 불가분리하다.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 선교, 기독교적 일치 추구는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했고, 브렌드레트(Henry Renauld Brandreth)는 19세기가 기독교의 놀라운 확장을 경험했다는 라투렛의 주장을 인정하면서 19세기야말로 기독교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각 교파의 세계적 연합 기구의 확산과 교파 대 교파의 연합운동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교회의 지역화 와 어느정도 세계화라고 하는 새로운 파라다임의 교회 일치 운동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브렌드레트가 제시하는 19세기의 교파단위의 세계적 연합운동 과 교파간의 세계적 연합 운동을 소개하므로써, 19세기가 단순한 기독교 확장의 "위대한 세기"일 뿐만 아니라 교회들의 일치추구에 있어서도 그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위대한 세기"였음을 지적하려고 한다. 1. 람베드 주교대회(1867), 2. 세계 개혁 교회 연맹(1875), 3. 미국 감리교 감독 교회 총회(1876), 4. 세계의 구(舊) 가톨릭 교회들의 위트레히트 연합(1889), 5. 제1차 국제 회중 교회 협의회(1891), 6. 제1차 침례교 세계대회(1905). 18세기의 경건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18세기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 과 선교활동, 그리고 18세기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 과 선교활동을 물려 받은 19세기의 복음주의 각성운동과 선교활동은 개인의 회심 과 성화, 그리고 교파별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한결 같이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느데, 방금 언급한 19세기의 교파별 세계 연합 기구들 과 교파 대 교파의 연합 노력은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내다보는 새로운 파라다임의 교회의 세계화에로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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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l.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과 WCC, 그리고 1968년 웁살라 WCC이후의 복음주의 세계 대회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추구하면서도 개교회와 지역별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보편교회(the Church Universal) 과 개교회 혹은 지역별 교회(the Church Local)는 항상 맞물려 있다. 20세기 에큐메니즘은 지역화 와 세계화를 함께 추구한다. 그리고 WCC의 "신앙 과 직제" 전통은 1968년 이후의 복음주의 세계대회들이 강조하는 개인의 구원 과 성화, 개교회의 개척 과 성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분수령은 1910년 에딘버러의 "세계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 W.M.C.)였다. " 1910년 이전 까지만 해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같았는데, 에딘버러 이후는 그것이 활짝열린 문으로 마구 쏟아저 들어오는 햇빛과도 같았다." 이 세계 선교대회가 제8차 국제적 차원의 선교대회였고, 바로 10년전엔 뉴욕에서 " the 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가 열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회의 세계화가 선교운동 과 위에서 언급한 교파별 그리고 교파 대 교파의 연합운동 - 이것도 사실은 선교운동의 소산이지만 - 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20세기의 교회의 세계화는 19세기의 교파들의 확장과 성장을 전제한다. 이처럼 18-19세기 기독교와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개교회화와 지역화가 교회의 세계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10년 에딘버러가 폐막할 즈음, 미국 성공회의 주교로서 필리핀의 선교사인 브렌트가 "신앙 과 직제"(Faith and Oder)운동을 제안한 이래, 1927년 로잔에서 제1차 세계 대회가 열렸고,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 직전에 죄더불롬이 제안한 "삶 과 봉사"(Life and Work)운동은 1925년에 스톡크홀름에서 제1차 세계대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 두 운동의 대표들은 1937년 WCC를 형성하고, 1938년 위트레히트에서 교회들의 세계화의 헌장인 WCC 교리 헌장(WCC Basis)을 만들고, 세계 제2차 대전으로 10년을 기다린 다음 1948년에 암스텔담에서 제1차 WCC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국제 선교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1921년에 W.M.C.로 바뀜)가 1961년 뉴델리 WCC때에 WCC에 정식으로 합류하였고 - 물론 처음부터 WCC와 계속해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지내 왔지만 - "기독교 교육 세계 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ristian Education)는 1971년에 WCC의 지체가 되었다. 이상과 같은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 과 WCC는 교회의 세계화를 가져옴에 있어서 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쁹아보기 힘든 새로운 파라다임이다.
그러면 WCC교리 헌장, "신앙 과 직제", "삶 과 봉사" 및 "세계선교 과 복음 전도"( IMC가 1960녀대에는 C.W.M.E. = Conference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가 각각 교회의 세계화에 어떻게 기여했나에 관하여 알아보자. 물론 이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지역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WCC교리헌장은 모든 교파들의 다양성을 열어 놓는 적극적인 통일성으로서, 1996년 현제 330여 교파들이 이 교리헌장밑에 WCC의 구성원이 되어있다. 이같은 교회의 세계화는 역사상 그 유래를 쁹아볼수 없다.
세계 교회 협의회란 성서를 쫓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한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을 위한 교회들의 공동의 소명을 함께 성취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
"신앙 과 직제"는 교회들의 신앙 과 신학, 그리고 직제의 통일성 과 다양성을 쁹아내기 위해서 50년 이상의 협의회적 과정을 통한 결과물을 가져왔다. 즉, 1.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 : 복음"(Lausanne 1927, 제2분과), 2. "교회의 본성"(Lausanne 1927, 제3분과),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Edinburgh 1937, 제1 분과)에서 정의된 "은혜의 의미", "칭의 와 성화", "하나님의 주권 과 인간의 반응", "교회 와 은혜", "은혜: 말씀 설교 와 성례전", "오직 은혜로", 4. "그리스도 와 그의 교회"(Lund 1952, 제1분과), 5. "성서, 전승, 전통들"(Montreal 1963, 제2분과)은 교리싸움으로 얼룩진 교회사를 청산하고 교회들의 통일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다야성을 허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 가운데서 1963년 몬트리올의 에 관하여만 잠시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위 몬트리올 문서는 교회의 세계화 와 지역화를 함께 추구한다. 상론하면, 큰 글자 Tradition은 성서의 원천이기도한 the Gospel Tradition으로서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성공회 및 모든 개신교회들이 공유하고 있는 통일성의 원리요, 작은 글자 traditions는 문화적 배경을 지닌 모든 교파들의 신학 전통들이다. 우리는 여러 지역 과 여러 종족의 여러 문화권속에서 꽃피어난 신학 전통들의 독특성 과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의 복음 전승(The Gospel Tradition)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발전한 다양한 신학 전통들을 통해서 표현 된다. 전자는 후자를 통해서 표현되지만 후자를 초월한다. 하나의 복음 전승의 씨앗이 로마 문화권에 떨어져, 로마 가톨릭 신학으로, 희랍 문화권에 떨어져, 동방 정통 교회의 신학으로, 독일 문화권에서는 독일 신학으로, 영미계통에서는 영미계통의 신학으로, 아시아 와 아프리카 와 중남미에서는 제3세계 유형의 신학으로 꽃피어 났다. 이처럼 에큐메니칼 운동 과 WCC는 교회 와 신학의 지역화 와 세계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지역화 차원에서 개인의 회심과 성화,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인정해야 한다.
"신앙과 직제가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확정지은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 세례·성만찬·직제)Text는 개교회의 생명인 세례, 성만찬 그리고 직제에 대한 신학과 실천의 일치를 추구한 것으로 개교회와 지역 교회들의 다양성을 열어 놓고 있고, 1990년의 신앙과 직제 문서인 <하나의 신앙교백 : 세계교회가 고백해야 할>(Confessing the One Faith : An Ecumneical Explication of the Apostolic Faith as it is Confessed in the Nicene - Constantinopolitan Creed, 381)는 에큐메니칼적으로 해석된 하나의, 거룩한, 보편 교회의 사도적 신앙으로서 각 개교회와 지역 교회 역시 이같은 사도적 신앙을 이미 공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1990년 로마 가톨릭과 WCC대표들로 구성된 Joint Working Group의 <하나의 교회 : 개교회들과 보편 교회>(The Church Local and Universal)는 개신교의 개교회주의와 가톨릭(로마와 동방)교회의 보편교회주의를 넘어서서 교회의 지역화와 세계화를 함께 묶고 있다. 그리고 1993년 스페인의 산티아고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제5차 세계대회는 "코이노니아"개념속에 개교회와 지역 교회들의 다양성과 연속성을 강조하고, 이 "코이노니아"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13 : 8)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할 수 없고, 성경이 선포하였고, 사도적 고동체가 설교한 구원과 인간의 궁국적 운명에 대해서 함께 고백 할 수 없는 다양성은 부당하다(S.ll.17).
경전으로서의 성경은 복음진리(갈2 : 5,14)와 훗날 네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안에 제시되 있고 부연된 가르침들위에 교회의 통일성(the God-given Unity)을 기초시키고 있다. 이 통일성과 이 가르침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고, 교회가아니다. 성경은 또한 다양성의 기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다양한 메시지들과 가르침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성경이 기록된 상황들이 다양하고, 이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과 해석 방법이 다양하며, ...
이 같은 다양성의 한계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를 위한 최소한도의 요청인데,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개교회의 개척과 목양과 성장은 "복음"과 "성경",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 하나님", "세례, 성만찬, 직제"를 사도적 전승으로 공유하고, 그 어떤 교파적 특성과 지역적 혹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닐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신앙과 직제"는 교회의 지역화와 세계화를 지향하면서, "삶과 봉사"(1960년대에는 "교회와 사회", 1990년 이후는 JPIC = Unit lll) 그리고 "선교"(1910년의 W.M.C.가 1921년에 I.M.C.로, 1963년 이후로 C.W.M.E.)의 세계화에 동참할 것을 모든 개교회들과 지역 교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끝으로 우리는 Missio Dei가 절정에 달했던 1968년 웁살라 WCC와 1973년 방콕 CWME의 선교개념에 거부반응을 일으킨 복음주의 세계대회들이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WCC가 지향해 온 Missio Dei전통을 매우 존중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특히, 방콕에 대응해서 열린 1974년 로잔 복음주의자들의 국제대회와 1989년 산 안토니오 CWME에 대응하여 열린 1989년의 마닐라 제2로잔 세계대회야 말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에 관한 그 이전까지의 복음주의 세계대회들의 이원론적 태도와는 달리,하나의 선교 개념에 복음전도와 교회의 사회봉사를 모두 포함시키므로써,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이 개인과 개교회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나름대로 교회의 세계화와 지역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視다. 아래의 주장은 마닐라(1989)의 선교개념이다. 적어도 이 복음주의 계열의 세계대회들은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는 18-19세기 기독교를 물려받았다.
복음전도가 우선이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전도의 목적은 모든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비와 능력의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보여 주셨다.
... 우리 역시 겸허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고 가르쳐야 하며, 나아가서 병든자들을 돌보고, 장애자들과 불이익을 당하는 자들을 도와주어야 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구출해내야 한다. 우리는 은사와 소명과 상황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복음과 선행을 분리켜서는 않된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필연적으로 이 하나님 나라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하여 예언자적 심판을 가한다. 악들 중에서 우리는 제도화된 폭력을 포함한 모든 파괴적 폭력을 반대하고, 정치적 부패, 온갖 종류의 인간 착취와 환경 착취, 임신 중절, 마약 및 인권남용 등에 반대한다. 우리는 또한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관심하면서 우리들 자신이 세계의 틀안에서 빚더미에 짓눌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
진정한 선교는 항상 성육신적 이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속으로 파고들어가 이들의 사회적 현실, 이들의 슬픔과 고통, 이들의 억압적 세력에 정의로써 항거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WCC의 "신앙과 직제"전통이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거니와, CWME가 WCC중앙 위원회에 제출한 <에큐메니칼 확언 : 선교와 전도>(Ecumenical Affirmation - Mission and Evangelism, 1982)역시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의 선포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주권을 인식하고 이것을 개인의 결단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초대를 포함 한다. 그것은 성령의 매개에 의해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므로써 주님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제자의 삶과 봉사의 삶으로의 부름을 개인적으로 받아드리라는 선언이다.
... 신약 성경은 이것을 새로태어남(요3 ; 3), 메타노이아, 우리의 태도들과 삶의 스타일들의 변혁이라고도 불리운다.
모든 인간 공동체안에서 개 교회들을 증가시키는 것이 기독교적 선교의 중심에 있다. 복음의 씨앗을 심으면, 말씀과 성례전 주위에 회집하여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한 백성이 생겨난다.
교회들이 실제로 각 나라에 생겼다. 이것은 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제자들의 신실한 증거 덕분이다. 이러한 씨뿌리는 과제는 각 인간 공동체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한 세포, 즉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의 이름으로 그의 백성을 섬기는 교회가 있기 까지 지속될 필요가 있다. 각 장소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 복음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사역은 하나의 대리적 백성의 현존을 요구한다. 개 교회는 교회(the Church)의 선교적 성취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도구이다.
결 론:
한국 교회는 해방되던 해에 30-40만애 불과하던 기독교인의 수가 오늘에 이르러 1,200만 이상을 혜아릴 만큼 엄청난 성장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와 오늘에 이르러 4,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135개국에 파송한 세계 6-7대 선교국으로 발돋음하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 한국 교회는 개인의 회심과 성화, 개 교회의 개척과 성장에 힘쓰고, 해외선교에 있어서도 각개 전투식 혹은 자영업식 선교에 머믈르고 있어, 교회의 세계화에는 아직도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18세기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각성 운동 그리고 선교활동이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 교회의 개척과 성장에 엄청나게 기여 했고, 19세기의 기독교는 이같은 18세기의 기독교 전통을 이어받아 개 교회의 성장을 포함한, 역사상 유래가 없는 기독교의 확장을 경험한 바, 우리 한국 교회는 이와같은 18-19세기 서양 기독교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사실상 우리 한국위 경우 교회성장에 이어 해외선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의 개신교는 18-19세기의 개인의 회심과 성장,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고 있으며, 게다가 선교 초기에 받아들인 19세기 말과 20세기초 미국의 근본주의적 개신교 전통으로 말미암아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의 색깔을 더 하고 있다. 결국 우리 한국 교회는 18-19세기의 서양 교회사가 필연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랑곳 하고 있지 않다.
우리 한국 개신교는 서양 교회사에 있어던 교파별 연합 추구 와 교파 대 교파의 연합 추구에 있어서는 매우 약하고,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가 추구해 온 교회의 세계화에는 더더욱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즉, 우리는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강조하는 18-19세기 기독교에 머물러 있으므로 교회의 개교회화와 지역화에는 공헌하고 있으나, 교회의 세계화에는 전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본 소고에서 "신앙과 직제" 문서가 개교회들과 지역 교회들의 다양성과 연속성을 매우 귀하게 여기면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세계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CWME의 문서인
끝으로 우리는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이 1990년대에 들어서서 확산되고 있는 "지구화"에 대한 올바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운동은 교회들의 다양성 속의 일치를 지향하고 코이노니아로서 일치를 주장함으써, 3분의 2세계를 소외시키고 못살게 구는 잘못된 "지구화"와 "지역화"에 대하여 바르게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선교CWME)는 개인의 회심과 성장,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에만 급급하지 않고, 교회를 하나님의 선교의 대행자로하여 하나의 복음을 인류와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들로 가지고 갈 수 있다. 끝으로 삶과 봉사(Life and Work)는 교회적 코이노니아에 입각하여 이 세상의 정치, 사회적, 경제적 병폐들 및 이에 따른 창조세계의 파괴를 치유하기 위하여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보전"(JPIC)를 실천하고 있다. 아마도 요 17 : 21절과 엡 1 : 10절은 이상 세 에큐메니칼 흐름 모두를 포함하는, 에큐메니칼 비전으로서, 오늘 날 잘못나가는 "지구화"와 그 병폐들에 대한 치유책이라 할 것이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들은 이와 같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교파분열적 교파주의, 교회성장주의, 개인주의적 구원론 등과 같은 자신의 약점들을 개혁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지구화와 지역화는 한국교회가 자신의 정체성들을 확실히 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할 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