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토모혼에서 치앙마이까지(2)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01:42
조회
1655
토모혼에서 치앙마이까지(2)

본 연구원은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의 신학과 선교방향에 발맞추어 가는 것을 돕기 위해
2005년 4월부터 WCC, CCA 등 세계교회 기구의 신학선언, 성경연구, 성명서, 보고서, 교계소식 등을 게재하고자 한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우선 2000년 인도네시아 토모혼에서 개최된 11차 총회에서부터 2005년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개최된 12차 총회까지 5년 동안 <아시아교회협의회(CCA)>의 문서들을 발표연대의 역순으로 번역하여 게재하려 한다. 이번 문서는 CCA가 5년동안 발표한 18개의 성명서 가운데 두 번째로 최근의 것이다.-운영자

각국 NCC 총무단 치앙마이 성명

아시아 18개국 NCC 총무인 우리들은 “만인의 평화 공동체 건설을 위하여”라는 CCA 2005년 총회 주제에 이끌림을 받아 친교와 성찰을 위해 태국의 치앙마이에 모였다. 우리를 이렇게 모아 준 CCA의 후원과 실무일, 그리고 CCA와 WCC의 실무진들이 제공한 여러 가지 정보들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의 이 모임의 중요한 안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열릴 CCA 12차 총회에 대한 우리의 지원을 맹세한다.

이 모임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에 영향을 주는 변화하는 세계의 역학관계들을 알게 되었으며, 다른 대륙, 다른 문화들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런 변화들은 남과 북, 지구화, 개발도상국가, 테러리즘, 소비주의, 개인주의, 세계경제질서, 제국(帝國), 등등의 용어로 묘사되고 있다. 총체적으로 이 용어들은 우리들의 공동체들을 위협하고, 우리가 그렇게 소망스럽게 여겨왔던 인류환경의 진보를 밯해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서로 다른 사회와 사회 간에 그리고 사회 내부에서 점점 멀어지는 갭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개인들과 공동체들은 점점 주변화(周邊化)되고 있으며, 성공이라는 것은 지속 불가능한 방식으로 자원을 얼마나 많이 낭비할 수 있느냐 하는 능력의 여부로 측정되는 것 같다. 군국주의가 다시 일어나고 있으며, 분쟁집단들 간의 균형을 맞추는 견제와 균형의 장치가 없이 해묵은 분쟁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폭력세계에서 살고 있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평화라는 것이 그것이 있을 때보다는 없을 때 더 많이 회자(膾炙)되는 삶이나 존재의 한 특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정의를 동반한평화에의 갈망은 인간의 마음을 심히 상처를 줌으로써만이 생겨난다. . 평화에 대한 인류의 희망은 세계의 종교, 그 중 많은 것들이 아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세계의 종교들이 주창하고 있는 귀중한 주제이다.

모든 인류 그리고 모든 종교들은 우리가 갈망하는 바, 정의를 동반한 평화의 부재를 염려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우리는,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이 폭력적인 세계의 흐름 속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분열과 분리를 야기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우리의 드높은 이상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점점 심해가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건망증과 무기력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 시대의 요청과 도전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우리는 에큐메니즘의 힘은, 우리가 마땅히 봉사해야 할 민중들의 고난에 동참하는데 있음을 인정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에 불안, 폭력, 불평등이 끈임업이 존재하더라도 정의를 동반한 평화가 가능하다고 아직은 믿고 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과 그분의 하신 일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분에게 주어진 주요 호칭의 하나는 바로 선지자 이사야에서 인용된, 평화의 왕이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회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 공동번역 요한 복음 14장 27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의 사명이기도 하고, 우리의 갈망 속에서 울려 퍼지기도 하는, 이 평화라는 선물을 새롭게 강조하라고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평화는 우리에게 에큐메니칼 정신을 새롭게 할 기회를 주고 있다. 평화는 이상주의 그 이상이다. 폭력의 비논리성은 분명히 피조물과 인류 모두를 파괴한다. 폭력은 인간들을 파괴하여 외롭게 하고 불만에 가득 차게 한다. 반면 사려 깊고 신중한 평화의 길은 인간들을 함께 살도록 하며, 지속 가능한 희망의 공동체들을 창조해 낸다. 20세기에 재앙을 가져 온 많은 전쟁을 겪고 나서, 인류는 실제적인 방식에서 폭력의 자기 패배적인 본질과 그 파과적인 결과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국제적으로 사람들은 평화적인 대안들을 찾으려고 열심히 일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인류가 파괴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평화적 활동을 위한 그 노력은 또한 결과적으로 피조물의 보전(保全)을 위한 노력으로 발전하게끔 되었다. 많은 곳에서 기독교인들은 이 노력들의 전위에 섰으며 이제는 진전된 것들을 더 이상 잃지 않게 하는 일이 이 선구자들을 따르는 후세대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정의를 동반한 평화를 믿으며, 정신적으로, 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이 평화가 이룩될 수 있음을 믿고 있음을 단언한다. 우리는 정의를 동반한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완성을 위해 노력할 것을 맹세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 안에서, 우리는 우리 지역의 공동체들에게 다음의 것들을 주장한다.

1. 폭력과 가난, 그리고 소외를 영구화하고, 부추기는 악마들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이것들에 저항하면서, 우리 시대에 제기되는 쟁점들에 대응하는 , 우리의 예언자적 유산과 소명을 되찾자.

2. 각국의 기독교인 공동체들이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들임을 확인하고, 기독교인들이 자기 사회의 평화건설자(peacemaker)로 무장되어 있음을 확인하자. 평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평화 극복 10주년>(DOV) 계획과 32005년에 수행될 이 계획의 아시아지역 핵심사업에 관한 자료들을 이용하도록 격려하자.

3. 나이, 계급, 장애, 인종, 성별, 그리고 경제적 불이익에 근거한 차별이나, 권력분배상의 불평등에 기초한 악습과 같은, 우리 교회들 내에서 폭력과 불의를 합법화하고 영구화하는 구조를 찾아내며, 우리는 우리들 안의 이러한 모든 구조들을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4.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무종교자들과의 활발한 협력을 통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공동체들이 평화 만들기를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