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절망의 20년…“희망이란 말 따위 말라” (한겨레, 4/21)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12 23:21
조회
445
**절망의 20년…“희망이란 말 따위 말라” (한겨레, 4/21)


지체장애 5급인 키 142㎝의 권오덕(37)씨는 그리 튼튼하지 않은 다리지만 다부진 걸음걸이가 돋보이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지난 20여년 동안의 사회생활은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던 고통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권씨는 “정부는 장애인 일자리가 늘었다고 하지만 저임금, 계약직으로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10대, 남보다 일찍 경험한 사회=또래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권씨는 서울 을지로의 냉동기계 수리점에 취직했다. 중소기업체 경비일을 하시던 아버지와 시각장애인 어머니(59)는 “몸이 불편해 고등학교를 나와도 취직이 어려울 테니 남들보다 빨리 기술이라도 배우라”고 권했고, 권씨는 부모의 뜻을 따랐다. 열심히 일을 배웠지만 냉장고와 에어컨 같은 큰 기계를 수리하는 일은 다리가 불편한 열여섯 청년에게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권씨는 서울 인사동의 한 공방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서 할 수 있는 목공예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통에 난을 그려넣으며 나중에 자신의 가게를 차리는 꿈을 꿨지만 공방은 몇 개월만에 문을 닫아버렸다.

20대, 작업장을 전전=권씨가 다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은 장애인 전용 공장이었다. 권씨는 일을 마치고 공장 밖으로 나가 비장애인들을 마주칠 때마다 왠지 모를 어색함을 느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바보가 된 느낌’을 받았다던 그는 사회성이 없어질까 두려워 일을 그만둘 결심을 했다. 전자제품 수리업은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어 안정적인 임금도 기대할 수 없었다. 권씨는 다시 장애인직업훈련소에서 인쇄일을 배워 종로의 한 인쇄소에 일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인쇄업의 급속한 전산화가 진행되면서 처음에 15명이던 직원이 2년여만에 3명으로 줄었다. 권씨도 끝까지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30대, 안정된 직장을 찾아=권씨는 다시 중소기업청에서 공공근로 형태로 데이터베이스 작업일을 시작했다. 공공근로는 3개월 단위로 계약기간이 끊어지기 때문에 일을 더하고 싶어도 6개월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위암으로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어려웠던 집안 살림에 입원비와 수술비는 ‘폭탄’과도 같았다. 권씨는 병간호에 매달렸고 그동안 부어왔던 적금도 깼다. 결국 두 달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다시 일자리 찾기에 매달려 어느 기업의 계약직 전화예약업무를 맡아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2년 반 동안 열심히 했지만 이제 마흔을 바라보게 된 권씨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집안을 일으키고 싶어’ 2004년 가을, 일을 그만뒀다.

미래, 희망은 없어=매일 10여군데 직업알선 사이트를 검색하고 직업관련 세미나 등에 참석하는 게 그 뒤 권씨의 하루 일과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도움은 안 된다고 했다. 안정된 직장이 아니면 조그맣게 사업이라도 할까 싶어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장애인 자영업 창업자금을 대출받으려 했지만 담보가 없어 거절당했다. 권씨는 기자에게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말 따윈 쓰지 말아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