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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동향(기사모 5월 발제)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06-01 21:18
조회
6952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 천안 살림교회 목사)

아무렇게나 둘러 본 신학 동향

I. '구슬 서 말', 안 꿰어도 그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이 발제에 그런 기대감은 처음부터 갖지 마시라! 꿰어야 할 실도 변변찮고, 사람들 취향도 잘 몰라 어떤 모양의 목걸이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닥치는 대로 구슬 서 말을 주어 모았다. 취향대로 꿰어 멋진 목걸이를 만들든지, 구슬을 있는 그대로 짓이겨 다시 새 구슬을 만들든지 임자 맘대로 하시기 바란다.
그래도 모은다고 모았으니, 모은 그릇이 어떤 것인지만 살짝 알려드리겠다. 나는 신학적 성찰의 가장 중요한 틀이 '시대읽기'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결하고 어떤 대안을 찾으려 하느냐의 문제이다. 이 자리에서 잡다하게 펼쳐 보일 '구슬'들은 바로 그런 '그릇'에 담길 만한 것들이라 생각되는 것들이다.
한 가지 더 양해를 구한다. 나는 주어 담은 구슬들을 깨긋하게 씻거나 광택을 내지 못했다. 그냥 똥이 묻었으면 묻은 대로 흙이 묻었으면 묻은 대로 주어 담았을 뿐이다. 그나마 재고품이 쌓여 있는 창고에서 골고루 적당한 분량 만큼을 안배해 주어 담은 것도 아니고 닥치는 대로 쳐 넣었다. '오리지날'인지 '짜가'인지 구분도 없고,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도 구분 없다. 그저 뒤섞어 놓았을 뿐이다. 그럴싸한 말을 빌려 말하면 이런 식이다. "글은 단 한 사람의 저자의 산물이 아니라 항상 수많은 공동 저자의 산물이라는 사실"(마크 C. 테일러, <포스트모던 신학 서론>, <<세계의 신학>> 1998.봄)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孔子 曰, 述而不作이라 했다.

II. 縱橫無盡, 左衝右突, 아무렇게나 둘러 본 신학 동향

1. 성서해석학
성서해석에 관해 논할 때 '텍스트'- '콘텍스트' 도식은 가장 전형적인 도식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등장한 성서해석은 대개 텍스트(저자)를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고 독자는 이에 대한 수동적 해석자로 간주되어 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비평학 범주의 성서해석, 사회학적 성서해석, 그리고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은 대개 그런 이해 안에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제3세계의 신학과 여성신학의 등장, 그리고 포스트모던 신학, 탈식민주의 신학의 등장은 이러한 성서해석에서 벗어난 새로운 성서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상호텍스트적 성서해석'(Intertextual Interpretation)은 새로운 성서읽기의 대표적 경우이다. 이 해석방법은 기본적으로 다종교적, 다경전적 상황을 기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토착화 신학에서 제기하는 성서읽기와 확연하게 구별된 특징으로 해석의 주체와 중심을 달리 이해하고, 오늘의 정치 사회적 실재에 관심을 집중하며, 단일 경전적 세계의 성서 이해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 결과 성서 자체에 대한 이해에서, 성서를 고정적인 텍스트로서보다는 유동적 텍스트로 보며, 하나의 경전에 대해 궁극적 권위를 부여하는 입장을 벗어나고, 나아가 다경전적 사회 속에서 경전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본다. 서남동이 말한 '두 이야기의 합류' 개념은 이와 같은 성서해석의 구체적 실례이다.(* 참조. 양권석, <한국적 성서읽기의 한 방법으로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해석의 가능성>, <<시대와 민중신학 5>> 1998)

2. 역사의 예수 탐구
역사적 예수와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예수의 차이에 대한 의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학문적 차원에서 그 물음은 계몽주의 시대 합리주의적 사고로부터 비롯된다. 방법론적으로 주로 문헌비평에 의존하였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18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예수전을 쏟아 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재건된 예수상은 실제 역사의 예수라기보다는 저자들의 당대적 이상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의 주장으로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구는 사실상 파산선고를 당한다.
이후 문헌비평의 한계를 넘어 문헌형성 이전의 구술전승의 양식을 규명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러한 시도는 예수의 생애를 전하는 복음서의 구술양식이 헬레니즘화된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산물이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복원 과제는 결정적 난관에 봉착한다. 이러한 난관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사회적 위기와 맞물려 신학의 중대한 위기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법론상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 불가가 곧 신앙과 신학의 위기일 수 없다는 인식의 전환 계기가 불트만(Rudolf Bultmann)을 통해 나타난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영향으로 실존주의적 신학을 전개한 불트만은 실존적 깊이의 차원에서 신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문헌상에 나타난 신화적 외피를 걷어냄으로써 오늘 우리와 예수는 실존적 차원에서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불트만의 이러한 시도는 어찌 보면 단순히 과거의 예수를 복원하는 데 그치고 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과는 달리 예수를 '오늘 여기'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오늘의 실천에 개입하는 신학적 인식의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실존주의 신학은 역사 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문제를 유예시킴과 아울러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사실상 폐기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전후 세계 재건과정의 활기와 더불어 역사적 물음이 부활하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도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대개 이전에 비해 방법론상 별다른 진전은 없었고, 다만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자료로 예수의 '말'을 검증하기 위한 보다 엄밀한 기준이 제시되는 정도였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예수 르네상스'로 불리우는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의 본격화이다. 이와 같은 '예수 르네상스'의 배경에는 1970년대 이후 활발해진 학제적 연구의 성과가 자리잡고 있다. 신학 특히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는 역사학은 사회과학과 그리고 유대교와의 만남, 그리고 문화인류학과 고고학, 비교종교학 등과의 만남을 통해 방법론적 진전을 이룩한다. 이 방법론상의 진전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의 초점 또한 변화시킨다. 이전에는 역사의 예수를 복원하는 데 가장 신빙성 있는 근거로 예수의 '말'을 규명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이제 사회역사적 세계를 통해 예수를 조명하게 된 것이다. 사회역사적 세계를 통해 예수를 조명한다는 것은, 예수를 단순한 개체적 인격으로서보다는 주변의 맥락과 결합되어 있는 사회역사적 존재로 보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운동'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인식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성과는 학문이론적 차원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에서 이와 같은 성취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바로 제3세계의 민중운동 그리고 이와 더불어 전개된 새로운 신학운동 및 서구의 급진적 신학운동의 영향이다. 이러한 운동은 '오늘 여기'의 '갈등'의 문제를 '신학하기'의 전면에 내세우며 그것을 역사의 예수에 적용하도록 고무한다. 이렇게 해서 '오늘 여기'와 '그때 거기'를 통합하는 문제설정이 가능해졌다. 불트만이 실존적 차원에서 강조했던 이 양자의 만남이 오늘 새로운 신학적 인식에서는 역사의 차원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보면, 지금까지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 과정은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현대의 역사학은, 카아(E. H. Carr)의 말처럼 역사를 '과거와 현대의 대화'로 이해하여, 역사학의 과제가 단순히 '객관적인' 과거의 복원에 있지 않고 현재의 실천으로부터 촉발된 문제의식과의 상관관계에서 '역사적 사실'을 이끌어내려는 데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역사의 예수 탐구는 예수의 생애를 전하고 있는 복음서를 대하면서 '예수'(사실)와 '복음서'(해석)의 단절을 전제하고, 거기서 해석의 껍질을 벗겨낼 때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과연 어떤 것이 예수가 진짜로 한 '말'이냐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이 그 예이다. 지금까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연구 경향은 한결같이 복음서 텍스트가 예수와 저자와의 대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아울러 텍스트를 통해서만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려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시도는 역사가가 자기 시대의 문제의식을 배제한 채 객관적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믿음에 기초해 있다.
그런데, 현대 역사학의 성과를 염두에 둘 때,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식의 단초를 민중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안병무는 복음서 텍스트를 예수와 전승자/저자 사이의 대화의 산물로 이해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성 논의를 해명하려고 한다. 그것은 특별히 '사건'의 해석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 사건은 예수와 민중이 일으킨 '원사건'에서 시작되어 이후의 전승자들과 전승의 기록자와 그 주변의 공동체로 계속 이어지는 계열화를 이루며, 오늘의 해석자 역시 그 사건의 전승 과정에 참여한다. 이처럼 '사건'은 시공간적 대화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재연된다. 민중신학이 '전태일 사건'을 또 하나의 '예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최근의 역사의 예수 경향의 문제는 바로 이와 같이 현대의 역사학적 인식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민중신학의 사건론의 전망에서 극복될 수 있다. 한편 최근의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와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의 결합은 민중신학이 지닌 한편의 약점 때문에도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예수 르네상스'로 불리우는 최근의 역사의 예수 연구경향이, 해석자의 역사학적 상상력에 지나치게 의존할 뿐 예수 시대를 다루는 역사 방법론의 빈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민중신학의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조. 김진호, <<예수 역사학-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 다산글방 / 이에 대한 나의 서평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재구성과 역사의 예수>,<<진보평론>> 2000.여름)

3. 포스트모던 신학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참 어렵다. 거기에 '신학'까지 붙여 말하면 더더욱 어려워진다. 우리 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대개 후기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등과 혼용되어 사용되는, 본래 그 의미는 다르다고 한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입장, 즉 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사고하고자 하고 장(場) 개념에 입각한 이론으로 공간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어느 정도 유지하되 '행위자'의 요소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거나(부르디외) 구조를 말하되 단절을 강조하는 입장(푸코)을 말하며(구조와 사건의 동시 고려), '탈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합리주의를 완전히 부정하고 때로는 극단적으로 반구조적인 것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 데리다의 해체주의, 보드리야르의 사회학 등이 여기에 해당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본래 영미계통의 문예사조를 말한다고 한다.(* 참조. 이정우, <<시뮬라르크의 시대>> 거름)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어 이를 동일시하여 혼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포스트모던' 이라는 말이 신학에 붙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신앙의 언어를 갱신하려는 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면 그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동시에 시작된다. 한스 큉을 따르면, 포스트모던 신학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 착취와 지성적인 미몽을 반대하는 계몽주의의 '비판적 힘의 보존', 근대성이 지니고 있는 '환원주의'의 부정, 그리고 근대성의 '초월'을 함축한다고 한다. // 꼭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테오 순더마이어는 민중신학이 탈중심적 지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신학의 한 형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재 포스트모던 신학은 대체로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해체주의적 경향이다. 데리다와 푸코 등과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입장과 상당히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마크 테일러와 같은 이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하나님, 나, 역사, 의미, 선과 악의 구별 등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겨 왔던 개념들을 철저히 해체해 버린다. 그런 것들은 지배자, 권력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지배의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그것들이 해체된 곳에 다른 축조물을 대신 세우려 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존 캅과 같은 이는 화이트 헤드의 과정철학으로부터 배워 다른 방식으로 근대와 결별하려고 한다. 이른바 '건설적' 포스트모던 신학으로 불리우는 이 경향은, 존재론의 재구성에 관심을 기울여 근대의 기계론적 사물 이해에서 벗어나 유기체적 사물 이해를 시도한다.(* 참조. 홍정수, <포스트모더니즘 신학>, <<최근 신학 개관>> 현대신학연구소)

4. 탈식민주의 신학
탈근대와 탈식민주의는 동시에 오늘날 신학의 상황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두 말 가운데 사용되는 '탈'(post)의 의미는 같은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던'에서 post는 흔히 '후기'라고 번역되는 말이 함축하듯, 근대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함축하면서도 근대적 해방의 요인을 전제하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나 '포스트콜로니알'에서 에서의 post는 이와 전혀 다르다. 식민주의를 전제하고 그 조건을 일정부분 계승하면서 넘어선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탈근대를 논할 때와 달리, 탈식민주의를 논할 때에는 그 말이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어떤 조건을 말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때 우리는 탈식민성의 의미를, "식민적 상황과 그것의 지배 이데올로기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과 경쟁하고 저항하는 조건"(Francoise Lionnet)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성서해석은 서구와 식민주의와 깊이 관련되어 왔다. 그것은 타계적 복음주의와 문자주의적 근본주의를 기둥으로 한 것이며 개인주의적 신학을 강조해 왔다. 이에 대한 비판적 신학은 과학적 합리성과 객관성을 강조한 까닭에 외견상 서구의 식민주의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 볼 것 같으면, 그러한 신학 역시 대개 서구의 교육받은 남성 성직자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해방을 추구하는 탈식민주의적 신학은 타계지향적 근본주의 신학을 비판할 뿐 아니라, 서구 중심의 신학에 대해서도 근본적 비판을 시도하며, 새로운 성서해석학을 시도한다. 앞에서 말한 상호텍스트적 성서해석이 그 예이며, 성서에 대한 수사학적 접근을 강조하는 입장(피오렌자) 또한 또 하나의 예이다.(* 참조. E.S. 피오렌자, <해석의 에토스: 탈근대적.탈식민적 상황> / R.S. 수기르타야, <탈식민주의적 성서 비평의 구도>, <<신학사상>> 1996.겨울)

5. 종교신학
이상과 같은 일련의 신학적 인식은 흔히 '토착화 신학'이라 불리워 왔던 신학적 시도에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가장 전형적인 토착화 이론의 틀이었던 '씨앗-토양'의 도식은 이제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순수한 복음의 씨앗이 서로 다른 토양에 떨어져 다양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전통의 만남은 그 자체로 '지평융합'(가다머)이며 '두 이야기의 합류'(서남동)이다.
무리(無理), 진리(眞理)를 넘어선 '일리(一理)의 해석학'(김영민)은 이러한 관점에서 확실히 일리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주의와 성취론적 관점이 내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배타주의를 뛰어 넘어서게 하며 서로 다른 주체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사무엘 헌팅톤의 <문명의 충돌>이 독주하며 좌충우돌하는가 싶었는데, 하랄트 뮐러의 <문명의 공존>이 등장하여 '충돌론'과 '공존론'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논리의 진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역사를 반영하는 문제이다. 충돌론이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 중심적 가치관의 위기의식을 반영한다면, 공존론은 보다 폭넓은 세계상에 근거해 역사의 실상에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앞으로 지향해야 할 선택의 방향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 참조. 이찬수, <타종교의 신학 -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다시 본다>, <<신학사상>> 1996.여름 / 한인철, <21세기 한국 신학의 전망과 과제 - 근대와 근대이후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세계의 신학>> 1998.여름)

6. 여성신학
남성들의 신학적 세계에서는 주변부로 간주되고 있지만, 아마도 이상에서 둘러 본 신학적 경향들이 함축하고 있는 문제들이 맞부딪치는 최대의 격전지는 여성신학/성해방주의 신학일 것이다.
처음에 제2격의 신학으로서 특수담론적 특성을 강하게 띠었던 데서 벗어나, 차별구조 극복을 지향하는 '평등주의적 신학'으로서의 보편담론을 지향하고 있는 여성신학은 흔히 교육받은 백인 남성중심의 신학적 세계에서 당연히 여겨온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 의심을 제기한다. 한 가지 극명한 예를 들어 보자. 전통적으로 '자만'으로 여겨져 온 죄의 개념은 자아실현을 충분히 경험해 온 남성들에게는 적절한 개념이지만, 자신에 대한 올바른 정체성조차 가져 보지 못하고 열등한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 온 여성들에게는 적용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오히려 여성에게 적합한 죄의 개념은 '자아의 부정'이라고 해야 한다(Saving).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고 있는 여성신학자들은 대개, 지금까지의 전통적 신학이 가부장주의라는 점, 전통적 신학은 여성의 경험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 그 가부장주의적 특성은 여성의 삶을 황폐화시켰다는 점, 그러므로 여성은 신학의 주체로서 신학을 구성해야 하고, 여성의 경험이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거와 규범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래서 여성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머물면서 개혁을 할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전통의 재구성에 목표를 둔 신학자들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 전통의 남성중심주의와 그 상징을 타파하고, 나아가 그리스도교 전통 안의 평등주의적/해방적 전통의 고양을 위해 노력한다.
여성신학이 제기하는 문제를 균형있게 검토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남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은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만약 지금 남성-여성의 상황이 완전히 반대로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남성들이 다루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주제를 여성이 다루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Nell Morton) / '남성들이 교회 구성원의 70%를 이루는데, 교단의 감독, 총회장 등 모든 지도자들이 여성들이라면; 신학대학에서 교육이나 상담분야 등 특수한 분야만 제외하고서 대부분의 교수들이 여성들이라면; 당신이 목회를 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목회지에서의 초빙이 거절된다면: 교회에서의 여성과의 평등성을 주장한다고 해서 당신을 비성서적이거나 비신앙적이라고 여성인 담임목회자에 의해 평가된다면...' (* 참조. 강남순, <<페미니즘과 기독교>> 기독교서회)

7. 생명의 신학
생명의 신학이란 어찌 보면, 신학의 한 분야이거나 한 경향이라기보다는 마땅히 올바른 신학이라면 모든 신학이 담고 있는 기본 성격이어야 한다. 그러나 굳이 생명의 신학이라 할 때에는 특별한 역사적 함의를 갖는다. 그것은 20세기 산업주의 혹은 더 폭넓게 근대 문명의 위기와 직접 관련을 갖고 전개되는 신학을 말한다. 생명 신학의 경향은, 그 말 자체가 함의하는 포괄성과 다양성으로 인해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생태학적 영성 중심의 생명신학, 사회정의 중심의 생명신학, 기독교전통 보전 중심의 생명신학의 경향 등이 그 예이다.
진정한 의미의 생명신학은, 오늘날 문명과 생활양식이 빚어내고 있는 생명파괴 현상에 대한 근본적 인식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흔히 볼 수 있듯이 환경의 문제, 공해의 문제, 대량학살 등의 문제를 언급하고 그것을 신학적 성찰의 영역으로 삼는다고 저절로 생명신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예컨대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하고 친환경적 상품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생명에 대한 근본적 이해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심각한 죽음의 현실을 양산하는 근대적 산업문명과 그와 직결되는 삶의 양식 자체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근본적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할 때 진정한 생명신학에 이를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장회익의 주장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멸종위기에 처한 지리산의 반달곰을 밀렵하는 행위는 당연히 살인의 행위보다 더 무거운 형벌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으나...". "엄청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러한 입법의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실정"이라고 장회익은 지적한다. 이 주장은 지금까지의 생명관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 지금까지의 생명관은 개체 생명만을 문제시하였다. 그리고 당연히 인간의 생명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는 다른 생명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 결과 인간은 마치 암세포처럼 자신의 몸덩어리를 불리기에만 급급했고 마침내 병든 몸이 생명을 잃을 때 더불어 생명을 마치게 될 운명에 처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지구, 나아가 이 온 우주 유기체를 하나의 전체 생명, 곧 '온 생명'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인식을 극복한다. 그러나 정신적 능력을 지닌 인간의 역할의 중요성은 여기에서 간과되지 않는다. 전체 생명에 대한 '의식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점은 이미, 인간의 탄생으로 자연계가 '자기를 의식한' 유기체로 생성되었다고 보는 테이야르 드 샤르뎅의 신학에서도 중요하게 제기되었다.
여기에 한 마디만 더 덧붙이면, 장회익은 "정말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표준"을 설정해야 하고, "지금까지는 무제한의 개발 가능성을 열어놓고 오직 이를 해내는 기술의 한계만을 문제삼아 왔으나 이제부터는 생태계적 온생명적 허용치를 분명히 산정하고 개발의 총량을 이 범위 안에서 엄격히 제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의식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 참조. 선순화, <생명파괴 현상에 직면한 생명신학의 방향 모색>, <<신학사상>>, 1996. 봄 / 장회익, <<삶과 온생명>> 솔출판사, 1998 / 앤드루 돕슨, <<녹색정치사상>> 민음사 / 테이야르 드 샤르뎅, <<인간현상>> 한길사)

8. 사이버 공간의 출현과 신학
사이버 공간의 출현은 회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신학적 성찰거리이다. (모르면 말을 말아야 하는데, 되지 않는 소리 계속하려니 힘들어 죽겠구만! 허나 어쩌랴, 회피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해 놨으니, 되지 않는 소리라도 계속 하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히 2년 전에 그 주제와 관련된 글에 대한 논평문이 하나 있어서 뜯어 부친다.)
사이버 공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한 시도는, 기술과 영성 두 세계를 융합하고자 한 제니퍼 콥(Janiffer J. Cobb)에 의해 선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테야르 드 샤르뎅(Teilhard de Chardin)의 진화론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사이버 공간의 신학적 전개 가능성을 주장한 콥은, 물질과 정신을 하나의 두 측면으로 보고 물질은 결국 정신으로 발전한다는 샤르뎅의 입장과 같이, 사이버 공간을 과학과 정신, 자연과 인공의 현실간 화해가 이루어지는 장으로 본다. 콥에게서 사이버 공간은 영과 육, 인간과 기계가 통전적으로 수렴되어 마침내 모든 이원적 대립자들이 하나로 진화된 정신계로 진입케 하는 미디어로서의 장이다. 여기에서 사이버 공간은 샤르뎅이 말했던 '오메가 포인트'로 유도하는 안내자가 된다.
그러나 한편 마이클 하임(M. Heim)은, 인간의 예측불가능성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동기에서 시작된 과학기술의 발전, 그 일환인 사이버네틱스와 그 구체적 현실인 사이버 공간은 거꾸로 의미론적 차원을 배제함으로써 인간 정체성의 해체를 가져 왔다고 본다. 그래서 정보의 탈의미 현상에 대항하여 의미의 재창조를 위해서는 정보의 '계산적 사유'를 뛰어넘는 '명상적 사유'가 회복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의미의 근거'인 하나님을 분열된 자아와 세계 안의 '중심'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콥의 견해를 따르면 자연스러운 목적 지점로서의 하나님(오메가 포인트)이 여기에서는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된다.
이미 회피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된 사이버 공간에 대한 신학적 성찰, 그것은 단순한 예찬론 혹은 비판론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사이버 공간의 실제, 그 양면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버 공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시도하는 데, 콥을 통해 소개된 샤르뎅의 신학적 입장은 신선한 자극제가 되고 있다. 흔히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해명하는 범례로 여겨지는 샤르뎅의 신학은 생성(genesis)의 문제를 주제로 한다. 진화론을 수용한 그 입장에서 이 우주는 하나의 귀착점(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정향적 진화를 한다. 여기에서 샤르뎅의 신학 전모를 논할 겨를은 없지만 오늘 우리가 사이버 공간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성찰하고자 할 때, 인간의 탄생으로 이 자연계가 '자기를 의식한' 유기체로 생성되었다는 샤르뎅의 통찰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인류의 의식 아래 통할되는 유기체로서의 우주, 그것을 현실화시켜가는 하나의 조건으로 우리는 사이버 공간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사이버 공간의 한 특성으로 지적되는 다중심성, 쌍방성의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중심성은 각기 독립된 개체의 다양성을 말하기보다 전체 유기체의 복잡함의 구성요건으로, 쌍방성은 유기체로서의 상호관련성을 높여주는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이버 공간에서의 탈신체성의 문제도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탈신체성의 문제는 개별 생명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유기체로서의 전체 생명을 전제하면 오히려 개인의 탈신체성의 문제는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샤르뎅의 신학을 논할 때 늘 지적되는 문제이지만, 그러한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가는 생성의 과정이 그처럼 순탄하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점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심사에 비추어 말하면 악의 문제,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문제는 간과되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샤르뎅 자신도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주저 <<인간현상>>에 "진화하는 세계에서 악의 자리와 크기"라는 간략한 후기를 붙여 이에 대해 해명한다. "내가 세운 체계 마디마디 구석구석에 악의 문제가 여러 모습으로 들어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사실 오늘 우리는 사이버 공간이 야기시키고 있는 '악의 문제'에 더 주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이버 공간이 갖는 많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선 부정적인 모습이 더 먼저 눈에 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이버 공간을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으로 보며, 이 사이버 공간이 진정한 정신문명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될 수 조건을 생각해 본다. 먼저 사이버 공간을 제어할 수 있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한다. 사이버 공간을 고립된 별개의 영역으로 보기보다는 인류의 삶, 나아가 전체 유기체의 구성 요건의 한 부분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그 공간이 지니는 무한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공간을 탄생시키고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권력을 해체시키는 근본적 방법이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이버 공간을 실현하는 기술 자체의 발전 문제가 있다. 그것이 그야말로 '라이브 공동체'와 대립되는 공간이 아니라, 이를 보완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직접적인 육체의 접촉으로 인한 한계를 뛰어넘는 '사이버 공간' 실현을 위한 기술적 성취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참조. 최인식, <사이버 공간과 문화에 대한 신학적 접근> 1998년 기사협 심포지엄 논문 / 이에 대한 나의 논평 / 테이야르 드 샤르뎅, <<인간현상>> 한길사 / Janiffer J. Cobb, Cyberspace: The Search for God in the Digital World)

9. 경제신학
경제적 차원이 근대적 삶 가운데 가장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명시적이고 본격적인 논의의 역사는 그다지 오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경제적 삶에 대한 신앙적 가르침은 성서에서는 말할 것 없거니와 교부들의 가르침, 그리고 종교개혁가들과 근대 이후 여러 신학자들의 사상에서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문제가 신앙의 중심 문제로서 독립적인 성찰의 영역으로 다뤄진 것은 20세기 초반 들어 자본주의의 병폐가 확연하기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오늘날에는 세계교회협의회 차원에서, 그리고 남미의 해방신학과 우리 민중신학에서 중요한 신학적 논제로 활발하게 다뤄지고 있다. 오늘날 경제신학은 대개 종말론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물신성을 비판하는 것을 기본 기저로 하고 있다. 특히 해방신학자 힌켈라메르트의 자본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이러한 관점은 신학적 관점에서 경제 문제에 대해 성찰하는 기본틀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특히 시장의 법칙에 모든 것을 내맡기며 오직 자본의 효율성 강화로만 치닫고 있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서 이러한 비판은 신학적 입장에서 경제 문제에 개입하는 하나의 전형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자본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현실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실천을 곧바로 이끌어주지는 못한다. 이 점에서 경제윤리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제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아루투어 리히가 제기한 것처럼 '인간적부합적' 규준과 동시에 '현실부합적' 규준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경제윤리의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현실의 시장경제 체제의 구체적 작동원리에 대한 탐구가 중요시된다. 최근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 핵으로 경제민주주의, 그리고 더 구체화한 형태로 작업장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관심의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금융자본에 대한 이해와 회사법에 대한 이해, 그리고 노사정 합의에 관한 현실적 방안 모색 등도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현실의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성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법칙은 타파될 수 있으며, 따라서 대안적 경제 체제를 향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경제관계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노동의 문제, 휴식과 삶의 질의 문제 등 등에 대해서도 꾸준히 재검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검토는 장기적 대안과도 관련이 있음과 동시에 현재의 체제 안에서의 구체적 방안과도 관련이 있다. 예컨대 노동과 휴식에 대한 문제로, 노동시간 단축과 충분한 여가는 당장 더 많은 일자리의 창출과 직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 참조. 채수일 편, <<기독교신앙과 경제 문제>> 한구신학연구소 / 강원돈, <시장경제의 민주주의적 규율과 복지의 증진>, <<시대와 민중신학5>> 1998 / 김항섭, <경제신학: 개괄적 이해를 위한 시론>, <<민중의 사회전기와 기독교의 미래>>김용복박사회갑기념논문집, 1998 / 최형묵, <<보이지 않은 손이 보이지 읺는 것은 그 손이 없기 때문이다>> 다산글방)

10. 민중신학
(내가 그나마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본론에 이제야 도달했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이 제대로 엮이지는 않았지만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바라본 신학의 기상도'라 인정할 수 있다면 민중신학 자체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간접적이나마 민중신학의 경향을 이미 웬만큼 이야기한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설적인 내 글의 일부를 역시 뜯어 부치는 것으로 이 부분 논의를 보완하고, 민중신학의 동향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1990년대 민중신학 논의의 몇 가지 문제>, [최형묵, 앞의 책]로 대신하고 싶다.)
70년대에 형성된 민중신학이 하나의 '전통'의 출발점이라 한다면, 현재의 민중신학 논의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 전통과 관련되어 있다. 한편에서는 '민중신학 전통'을 강조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그 전통'의 재해석을 강조한다. '전통'을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 8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그 나름의 성과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현재의 '전통의 재해석 시도'는 80년대의 시도의 성과들에 대한 평가와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다 할 수 있다. 80년대에는 사회과학적 인식,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을 통해 민중신학의 근본 동기들을 철저화하려는 시도가 아무래도 가장 두드러진 시도였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에 대한 비판이 8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제기되기 시작하다가 9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민중신학 내부에 한정해 말한다면, 크게 두 가지 갈래에서 제기되었다. 한편에서는 '신학'이 '사회과학'을 수용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신학은 신학으로서의 고유한 자기 논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보면서 민중신학에 대한 '재신학화'를 시도한다. 여기에서 '사회과학'은 현실의 교회 대중을 설득하는 언어로서는 부적절한 것이 된다. 현실의 교회 대중은 여전히 전통적 신학 언어에 의해 지배받고 있으므로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통적 신학'을 재해석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결국 민중신학이 그야말로 '전통적 신학'과 화해할 때 '신학'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뿐 아니라, 현실적 기반을 얻게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또 다른 한 갈래는, 신학이 사회과학을 수용하는 데 따르는 '한계' 자체보다는 그 신학이 수용한 사회과학 이론의 틀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문제시한다. 즉 80년대에 사회과학 이론을 수용한 민중신학 내의 흐름은 지나치게 거시이론에 경사되어 대중들의/기독교인 대중들의 일상 생활상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했고 따라서 구체적 실천이론으로서 소임을 다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신학이 실천이론으로서 몫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적 인식/틀/언어를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따라서 80년대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뛰어넘어서고자 한다. 이른바 '거시이론'/ '큰 이야기'와 '미시이론'/'작은 이야기'의 결합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성급한 '전통으로의 회귀'나 '교회로의 복귀'를 경계하는 이 입장은,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성립이라는 관심축을 놓치지 않으면서 실천주체 및 그 주체를 둘러싼 상황의 변화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민중신학 전통의 재해석'과 관련하여 그야말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현재의 민중신학 경향이 대체적으로 어떻게 분류될 수 있을 것인지 가늠해 본 셈이다. 우선 현재의 민중신학은, 크게 보아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전통의 원형으로서의 이른바 1세대 '민중신학'과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하려는 '민중신학들'로 구성되어 있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해석된 '민중신학들'은 다시 '민중신학 전통' 자체를 고수하며 가급적 애당초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입장과 재해석을 시도하는 입장으로 나뉘어지는데, 여기에서 재해석을 시도하는 입장은 그 재해석의 준거들의 차이로 또 다시 분화될 수 있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갈래이다.
이러한 분화구도로 현재 민중신학의 경향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 민중신학 내에서는 이상과 같은 단순구도로는 설명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내친 김에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다면, 좀 더 세분화된 각자의 관심사들, 각기 상이한 주체들, 그리고 이 모두를 가로지르고 있는 시대적 간극이 현재 민중신학의 다양한 갈래들을 결정짓는 복합적 요인이다. 이러한 요인들을 하나 하나 따지면서 민중신학의 갈래들을 분류해 낸다면, 무수히 많은 민중신학들이 있다는 것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일일히 분류해내는 것은 호사가적 관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하는 것은 '전통'(민중신학의, 경우에 따라서는 서구적 신학의 전통)과 그에 대한 '재해석'의 문제이다. 전통이란 필수적으로 재해석의 과정을 동반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전통은 그 자체의 속성에 의해 스스로 재해석을 요청한다기보다는 그 전통은 '필요로 하는' 주체들의 실천적 요구에 의해 재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전통 그 자체는 오히려 현재의 상태로 머물고자 하는 속성이 강하다 할 수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전통의 고수든 전통의 재해석/개혁이든, 그것은 사회적 세력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기계적으로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그러한 연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민중신학 내의 논의구도를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재점검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즉 다양하게 분화되는 민중신학 내의 논의들은,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일대일의 대응관계는 아니라 하더라도, 경향적으로 일정한 실천 유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한편으로 각각의 논의들을 전개하는 당사자들이 만일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지 못하다면, 바로 이 점부터 다시 확인하고 논의를 재개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학의 자리를 분명히 할 것을 요청한다. 민중신학은 애초에 그 자리가 '민중사건의 현장'임을 분명히 했다. 바로 그 '자리의 이전'으로부터 새로운 성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전통적 신학과 혁명적 단절을 가져오게 하였다.
민중신학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그 사건의 주체인 민중이 박제화된 실체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실체라고 하는 점을 끝끝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중은 자신의 존재양식과 활동양식을 변화시켜 나간다. 이는, 민중신학이 민중을 그 기점으로 하는 한, 이 변화해 가는 민중의 요구와 실천을 제대로 포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줄여 말하면, 민중신학이란 변화해가는 민중사건을 좇아다니며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빛에서 성찰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사건에 대한 사후 평가 뿐만 아니라 그에 기초된 미래의 전망까지도 포함한다.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해 보이는 바로 이와 같은 상식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민중신학에 관한 논의가 진전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참조. 최형묵, <민중신학 논의의 진전을 위한 단상>, 앞의 책, 가운데 일부)

III. 떨고 있는 나침반의 바늘
엮이지 않는 논리로 종회무진, 좌충우돌 신학의 경향을 돌아 보았다. 비록 엮이지 않은 구슬을 손질도 안한 채 그냥 주어 담은 꼴이지만, 한 가지 관심사만은 분명하다고 앞서 밝혔다. 시대읽기로서의 신학적 성찰, 그것이 중요 관심사이다. 교회적 관심사, 혹은 목회적 관심사라는 좁은 틀(그리고 대개 현실 교회의 정당성을 전제로 할 경우 크게 잘못될 수도 있는)이 아니라, 얼마나 이 시대의 문제를 진지하게 읽어내면서 해방의 관점을 견지하는가 하는 틀 말이다.
신용복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을 감히 결론으로 대신한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약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신영복, <강물과 시간>, <<진보평론>> 2000.봄)


* 아무렇게나 쓴 이 글은 어떤 경우에도 인용을 금합니다. 그러나 인용해도 어쩔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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