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의 최근 소식(2008년 8월)
올해는 ‘버마 8888민주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버마 8888 민주항쟁'은 1988년 8월 8일 군부독재에 저항한 버마 국민의 투쟁을 말하는데, 이 투쟁 과정에서 비공식적으로 3천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이른 바 ‘버마의 5.18광주항쟁’이다.
우리의 민주화 운동사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8888민주항쟁’도 민주화를 염원하고 있는 버마인들에게 큰 의미와 용기와 자부심을 주어왔으며, 그 당시 주역이었던 ‘88세대 학생그룹’은 아직도 먼 민주화를 향하여 지금도 고난을 마다 않고 반독재 투쟁에 매진하고 있다.
여기에 실은 4가지 글들은 8888민주항쟁 20주년을 맞이한 버마의 활동가들의 소회들로서 아직도 계속되는 엄혹한 독재 하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그들의 마음가짐들을 읽을 수 있다.
과거의 권위주의의 부활을 염려하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들에게 격려를 보내며 헤이해진 우리의 마음을 추스르고 싶다. - 운영자 -
1. 88을 생각하며 ; 우리 것 우리가 찾기 위한 투쟁
- 예 투 글 -
2008년 8월 8일(DVB)-20년전 이 주간에 랭군은 격렬함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과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희망의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은 20년 넘게 변화를 갈망하여 왔으며, 이제 그 변화는 어느 때 보다 더 가까이 와 있음을 느꼈다.
모든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수다스러워졌었는데,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거리에서든 건물의 발코니에서든 어느 곳에서도 만면에 웃음 꽃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그 당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다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여섯 살이었던 나는 그 때에 대한 기억이 오직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당시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건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지 못 한 채, 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이 오직 즐거워했을 뿐이었다. 나는 거리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는 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무엇인가 놀랍고도 귀중한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을 길게 가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고 대신 찹찹하고도 편집병적인 표정들로 변하였다. 그 시기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어른들이 감정의 변화를 얼마나 빠르고 극적으로 겪었던지는 아는 것은 내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들은 걱정하며 그들의 자녀들이 집안에 꼭 있으라고 아주 엄하게 명령하였다.
그 후, 나의 바깥과의 연락은 끊겨 버렸고,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 뿐이었다.
다음 날, 즉 8월 8일 다음 날 아침, 우리 집이 위치한 거리의 위쪽에 있는 네거리 방향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바깥 세계와의 연락은 재개되었다. 총소리,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 욕설, 살려달라는 소리 등으로 난리 법석이었다. 그 소리들은 우리 집 쪽으로 다가 오면서 더 커졌다.
나는 초록색의 학생복을 입은 십대의 젊은 학생들이 우리 집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창문을 통해 보았다. 어떤 학생들은 피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뒷 따라 오는 군인들이 쏘는 총을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도망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 광경들을 보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 집을 나가셨다가 일분도 되지 않아 20명가량의 학생들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 와 우리 집에 그들을 숨겨 주셨다.
내가 기억하기는 그들은 아주 어린 학생들이었는데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들 중 어떤 학생들은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책상 아래 기어들어 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것이 오늘 날 까지 8888민주항쟁에 대해 내가 분명히 기억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광경이었다. 나는 평생 그들의 얼굴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위자들은 그들이 했던 것에 대한 신앙과 믿음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일단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에게 남은 단 하나의 소망은 죽지 않는 것뿐이었다.
평균적인 버마 사회에서 자란 평균적인 아이들처럼, 나는 8888 민중 항쟁과 그 후에 일어난 일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버마의 부모들은 그것을 목격 이후로 편집광적이 되어, 자기 자녀들을 정치로부터 떼어 놓음으로써, 자기 아이들이 랭군거리에서 총 맞아 쓰러진 그 젊은 학생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자기들의 의무로 여기고 있다.
나는 8888 민중 항쟁 때 모든 분야와 모든 계층의 버마사람들이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데에 동참하였다는 기본적인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19세 되던 때 태국에서 외국에서 출판된 8888민중항쟁에 관한 책을 구하여 읽기 전까지는 왜 그것이 일어났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나는 새 시대의 버마 젊은이들 모두가 나처럼 정치에 무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과소평가한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2007년 9월, 버마 사람들은 또 다시 자신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들을 쟁취하려는 시도를 했었고 버마 군사정권은 그들이 1988년에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우리 집 창문으로가 아니라 뉴스 채널들과 인터넷들을 통해 보급된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서 이것을 목격하였다
이번에는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자기 국민들에게 행한 버마 정권의 잔학성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2007년 샤프런 혁명으로 말미암아 버마의 신세대에 대한 나의 견해는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의 혁명사를 망각하였던지 배우지 못 하였던지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내가 뉴스에서 시위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군인들이 시위자들을 잔혹하게 짓밟을 때 그들의 표정에서 8888민주항쟁 시 보았던 어린 학생들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1988년에 군대는 승려건, 학생이건, 청년이건 노인이건 상관없이 자기들에게 항거하여 일어난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던 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또 일어났는가?
한 가지 확실한 이유가 있다면, 버마 국민들의 혁명 정신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선배들의 배턴을 이어 받을 새 세대들이 있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 것을 찾으러 할 것이다.
2. 88민중항쟁을 기억하며; 세 세대의 목소리들
- 리즈 마크 글 -
2008년 8월 8일 (DVB) 88세대는 자신들이 1988년 8월 8일의 항쟁에서 성취한 것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또한 마찬가지로 모든 국민이 이것들을 향유할 수 있게 뒷받침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88세대는 그들이 겪은 독특한 경험들을 의식하고 방어하려 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때는 폐쇄적인 그런 자부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자부심은 조금만 고치면 통찰력이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태국에 근거를 둔 버마 여성단체의 회원이자 조직가인 한 여성은 ‘88민중항쟁은 지나간 이야기이다“라고 말한다.
88항쟁 시기에 12살인 어린이 세대의 출신인 그녀는 자신이나 자신의 또래인 다른 사람들은 88년 8월 8일이 지닌 무게를 느끼기에는 그 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일반인 오해에 대해 반발을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렇지만 주요한 문제는 그들이 우리들의 의견이나 우리들의 생각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나이든 세대의 시위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은 이렇다; “음 너희들은 너무 어려. 너희들이 88년 8월 8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그러나 그녀는 88-8-8에 대해 알고 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른 세대들의 경험들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고장에는 많은, 아주 많은 군중들이 몰려 와 시위를 했어요. 우리 가족들은 랭군이나 만달레이 등 다른 고장의 일들에도 귀를 기우렸어요.
우리는 날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그들은 누구인지, 아웅산 수지 여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어요.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통찰력의 문제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이렇지요. 그들은 시위를 많이 하였고, 88그룹을 세웠어요.” 그녀는 말한다. “그들은 우리는 88그룹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그 때에 너무 어렸다고 생각하지요.” 그녀는 방송매체들도 비슷한 생각들을 한다고 말한다. “방송매체들도 우리를 염두에 두지 않아요. 그들은 [자기들 생각에] 진짜 경험을 한 나이든 사람들 하고만 인터뷰를 하려고 하지요.”
이와 같은 젊은 세대에 대한 과소평가는, 여성은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치운동은 자제해야 한다는, 또 다른 일반적인 생각을 연상하게 된다고 그녀 지적한다. 전자는 후자 보다 훨씬 덜 모독적이기는 하지만, 그 둘은 비슷하며, 평가자와 과소평가당한 자들 사이의 상이한 의견을 드러내고 있다. 젊은 여성인 그녀는 양자의 태도 모두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 생각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의견은 1988년 민중항쟁 시에 가장 나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저의 아줌마는 시위현장에 갔었지요. 그 때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시위에 참가했던지 몰랐대요. 그러나 역사책에나 자료에는 여성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요. 식민지 시대에도 말이에요. 여성들은 영국과의 싸움에 참가했지요. 그런데 여성들에 대한 기록은 역사책에 전혀 없어요. 그들은 우리가 정치에 개입할 수 없거나 자기들이 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그들이란 정부인가 남자들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남자들 이지요.”라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그녀는 자기 세대의 여성들의 힘을 성원하며 여자들은 버마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1988년 8월의 시위와 2007년 9월의 시위를 비교하면서, 그녀는 한 가지 눈에 띄는 차이를 지적한다. “지난 9월 [샤프런 혁명] 시위에서는 시위를 이끈 사람들 가운데 남자는 없었고, 모두가 여자들이었습니다. 미에 미에, 닐라르 테인, 나우 온 라 등 모두 여자였어요. 이제 우리는 여자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여자들이 정치에 참가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그 증거에요. 우리는 말할 수 있어요. 보십시오. 이제 알겠지요?”
88년 당시에는 여성운동이 없었어요. 그때는 방송매체들에서나 이 나라에서 여성의 권리들에 관해 아무 말도 못했지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여성단체들을 가지고 있고, 여성운동들이 있으며, 여성들의 권리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요. 버마에서는 남자들이 여성들도 시위에 참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이곳[태국]에서 우리는 말할 수 있어요.“
그녀는 2008년 7월 21일, 태국과 버마에서 여성들이 당면한 정치적 권리들을 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치앙마이 대학에서 개최된 한 포럼을 간단히 소개한다. ”88년에, 여성들이 시위에 참가하였지만, 그들은 여성의 권리들을 알지 못했고, 여성들이 참가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들을 그렇게 말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변했어요. 우리는 남성들을 개의치 않아요. 우리는 말할 수 있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보다 더 많은 자신감이 있음을 느껴요.”
그녀는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는 이유에서 버마 정부 즉 SPDC에게 쫓기어 피신하고 있는 차름 통, 수 수 드웨이 그리고 닐리르 테인 등,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여성 활동가 그룹들을 예를 든다:
그녀는 자기 세대의 여성들의 특징을 재확인하며 자신의 견해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여성들은 옛날과 같지 않아요. 우리는 옛날과 달리 강해졌어요. 우리는 말할 수 있어요. 우리는 더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지요. 그들도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정말로 참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그녀는 눈에 띄게 흥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여성들은 힘을 갖고 있으며 세상도 또한 지금 그것을 알고 있어요. 버 마 여성들은 정말로 용감하거든요.”
그녀는 88세대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또 있다.: “그들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 나는 88민중항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나나 다른 여성들을 생각해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 때에는 우리 들은 어렸어요. 그 때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치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아주 어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러나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어요.“
“그들은 어린 사람들도 정말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고ㅡ 만약 그 때에 기회가 주어졌다면, 우리가 그들과 같은 나이였다면, 우리는 분명히 시위에 참가했을 것이며, 그들처럼 활발하게 참여했을 거예요.”
그녀는 젊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특징적인 통찰을 보여 주면서, 마지막 충고의 말을 한다. “88남자 그룹들이 우리의 정치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젊은 세대의 참여를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들을 민주주의를 위해 일할 수 없을 거예요. 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경험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도 젊은 사람들의 참여와 젊은 사람들의 생각들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3.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8888민주항쟁의 목표에 얼마나 더 가까이 가 있는가?
- 테트 아웅 초 글 -
2008년 8월 5일 (DVB) 온 세계가 베이징 올림픽 준비로 분주하지만, 만은 버마인들은 2008년 8월 8일, 8888 민주항쟁 제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버마 사람들이 이 20년의 여정을 통해 얼마나 가까이 8888의 목표에 가까이 갔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있을까?
민 코 내잉 등과 같은 88세대 학생 그룹의 주요 지도력이 작년 9월 사프론 혁명으로 이끈 연료가격 인상에 반대한 평화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지난 8월 이후 투옥되어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거대한 기념식을 개최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8888민중항쟁의 2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웃 태국에서, 미국 대통령 부시와 영부인 라우라 부시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인 8월 6일에 방콕에서 행한 한 연설을 통하여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버마 민주인사들을 격려하였다. 이것은 이 특별한 시점에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에서 보낸 의미심장한 지원이지만 버마에 변화를 가져 오기에는 충분한 것은 못된다.
미국은 지난 20년 동안 경제와 외교적 제재를 가하도록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바라는 바의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버마 정권의 주된 조력자이자 미국의 사업 파트너인 중국은 끊임없이 미국의 계획에 반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는 말만이 아니라 행동을 보여 주기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세계 지도자들에게 촉구한다.”라고 88세대 학생 그룹의 툰 민 아웅 씨는 랭군의 한 도피처에서 DVB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도피 중인 이 지도자는 짐바베의 선거 결과와 비교하면서 “유엔 안보리와 미국은 긴급히 군사정권의 국민투표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만약 유엔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군사정권의 최고 지도자인 탄 쉐 장군과 구금 중인 반체제 지도자 아 웅 산 수지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88세대 학생 그룹과 1990년 총선에 당선된 국회의원들, 그리고 많은 민주인사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반 88세대 학생 그룹의 지도자인, 예 륀 씨는 툰 민 아웅 씨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외부의 도움을 바라는 그들의 꿈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대화가 없을 것이며 그들은 2010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고 이 친 군사정권 학생 지도자는 말했다.
“그들은 항상 타트마타우만 비난하고, 조직을 하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지난 20년 동안 우리들이 목적하는 바나 정치권력을 손에 넣지 못하는 이유이다.” 라고 반대 인사는 랭군에 있는 정부가 지원하는 한 사무실에서 비난하였다.
많은 민주인사들, 특히 망명 중인 인사들이 이 말에 분노할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왜 그런가? 그가 사실을 잘 못 알아서인가, 아니면 지난 20년 동안 버마 정치가들이 가져 온 전통적인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는 적대 세력의 의견을 인정하지 못해서인가?
그 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이 없이 우리는 우리가 왜 20년 전의 그 목표를 아직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화합의 부족
일부 지도적 민주인사들이나 연구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주된 이유는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 간에 화합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반체제 세력들은 88민중항쟁과 9월 18일 군사 쿠데타 사이의 권력의 공백 시기에 임시 정부를 세울 기회가 있었으며, 또한 아웅산 수지의 NLD 당이 총선거에서 80 %를 득표하며 이겼던 1990년도 선거 이후에도 권력을 장악할 주요한 기회를 가졌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군사정부가 1990년 선거의 결과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을 때, 일부 정치가들과 민주인사들은 88 민중항쟁 시부터 수천 명의 학생들이 자기 스타일의 학생군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는 반란군 지배하의 지역으로 갔다. 이 태국과의 국경지대에서도 여러 집단의 지도자들 사이에 마찬가지로 불화협 상황에 직면하였다.
랭군의 후방에서, 군사정부는 1993년에 민족대회(National Convention)를 열었는데 NLD는 1995년 아웅산 수지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풀린 후 1996년에 탈퇴를 하였다. 그 이후로 2003년 데파인 대량학살 전에, 축출된 국민총리 킨 눈트의 지원 하에 탄쉐와 아웅산 수지 사이에 몇 차례의 좋은 만남이 있었기는 하지만 NLD의 군사정부와의 대화 요구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국제사회에 대해서 보자면, 유엔 총회는 1990년대부터, 군사정부에게 1990년 총선의 결과를 존중하고, 반체제 인사들과 대화를 하라고 요구해 오고 있다. 이달 말 버마에 오기로 되어 있는 감바리를 포함하여 최소한 3명의 유엔 특사가 버마에 왔다. 유엔 안보리가 버마 문제로 토의를 하기까지 했지만 아직도 탄 쉐가 마음을 바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미래에 희망은 있는가?
하지만, 13만 5천 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수백만이 집을 잃은, 사이크론 나르기스 이후, 군사 정권과 협상할 좋은 기회가 열려 있다. 군사정권이 국영 방송매체에서 서구를 비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외부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긴급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기구는 국제적 원조가 아니라 힘이 군사정권에게 제1의 우선순위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과 다른 세계지도자들은 SPDC가 수백만의 난민을 지원하고자 하는 지원작전을 얼마나 잘 못 다루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반 사무총장은 나이퓌이다우에서 탄 쉐를 만났을 때 정치에 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오직 인도주의적 사명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탄 쉐는 이 유엔 사무총장의 경고는 전혀 듣지 않고 대신 자신의 정치적 계획들을 실행해 나갔다. 즉 5월에 헌법에 관한 국민 투표, 6월에 헌법의 채택, 그리고 이제 2010년에 총선 준비 등등 이 그것이다.
이 시나리오 속에는 88세대 학생 그룹들과 1990년 선거 당선자들이 요구한 대화를 위하여, 2010년 총선 전에 SPDC가 이끌어 가는 일곱 단계의 로드 맵을 재고해 볼 그 어떤 기회가 남아 있는가?
그 누구도 100%의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노력해 볼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이것은 세계 지도자들 간에 특히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5 개 상임이사국들 간에 얼마만큼 화합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이제 우리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이 말은2008년 8월 8일 랭군의 거리에서 젊은 활동가들이 소리쳐 외칠 말이다.
*테트 아웅 초 씨는 1988년 민중항쟁에 가담했던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 학생반군의 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 오슬로에 근거를 둔 <버마민주소리>의 선임 언론인의 한 사람이다.
4. 버마의 사담 : 탄 쉐 장군
- 니오 온 뮌트 글 -
2008년 8월 7일 (DVB) 1988년 이후 버마의 철권통치 20년 동안, 전통적인 방법의 민주화 운동은 아무런 결과를 가져 오지 못했다.
버마의 강력한 지원자들이었던 국가들은 어떤 전략을 사용할 것인지를 심사숙고하기에 점차 지쳐 가고 있다.
장군들에게 반체제 인사들과 화해를 촉구하거나 협상을 요구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생각이다. 사실, 그 장군들에게 버마의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선임 장군 탄 쉐를 지지하는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마도 한 해결책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내부 소식통들로부터 새어나온 정보에 따르면, <국가 평화 발전 협의회>(SPDC) 장교들은 미래의 버마 정치 지형: 즉 선임 장군 탄 쉐 이후의 버마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이유에서, 이 정권은 2010년 선거이후 탄 쉐를 배제시키는 정치적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있다.
현재 이 선임 장군이 SPDC의 미래를 결정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근심스러운 일이지만, 탄 쉐의 전제 군주적 버마 통치는 이라크에서의 고 사담 후세인의 절대 군주적 통치와 유사하다. 사담 후세인의 살인과 고문 행위들은 국제 사회에게 보다 분명하고 충격적인 것인데 비해, 탄 쉐의 행위는 국제 사회가 볼 때 아슬아슬하지만 이보다는 문명화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방송매체나 증거들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는 두 사람 다 똑 같이 비난받아 마땅하다.
탄 쉐는 단지 반대자들만을 척결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견해를 표명하는 자는 동지든 부하든 모두 없앤다. SDPC 안에서, 탄 쉐가 다른 선임 장교들에 의해 동의를 얻지 못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낀 때에 두 번의 주요한 숙청이 발생하였다. 첫 번째는 차우 툰 소장이 경제 정책 대안을 추천하자 그는 퇴역되었고 SDPC 의 전면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두 번째는 전 수상 킨 니운트는 자기 방식으로 일했다는 이유로 40년이 넘는 징역형에 처해졌다. 킨 니운트의 투옥 외에도 탄 쉐는 킨 니운트의 많은 부하들을 육체적으로 고문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이러한 엄혹한 처벌로 말미암아 탄 쉐는 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었다.
이와 유사하게, 사담의 통치의 시기에, 사담은 자기의 내각에 솔직한 충고를 해달라고 했다. 보건부 장관 이브라임은 1980년-84년의 이락·이란 전쟁 동안에 평화 협상을 가능케 하기 위해 사담이 일시적으로 하야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자, 다음 날 이브라힘의 절단된 몸 조각들이 그의 아내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비록 탄 쉐가 자신의 고참 장관을 같은 방식으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차우 툰 소장의 경우에는 그는 자우 툰 뿐만 아니라 군 정보국 전원을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한 버마 전문가가 탄 쉐와 사담을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두 사람은 타협을 모르며,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여 권력을 유지했다. 양 독재자들의 기본적인 목적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당근과 채찍 시스템은 두 나라의 행정가들에게 독재자들의 기혹한 처벌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그에 따라 자기의 지도자의 인정을 받으려 경쟁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제공하게 한다.
사담 내각의 장관들과 참모들은 대량학살을 감행하여 사담의 인정을 받으려 경쟁을 하였다; 그들은 누가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누가 가장 지독한 고문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등으로 경쟁한 것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버마에서도, 군사 위원회 위원들이기도 한 지역 사령관들은 탄 쉐의 인정을 받으려 경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령관들은 SPDC 헌법에 찬성하는 찬성표를 누가 가장 많이 획득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하였다. 투표 결과 90%의 찬성표를 얻지 못한 지역 사령관들은 강제 퇴역당하든지, 별 볼일 없는 직책으로 좌천되든지 하였다고 소식통들은 말했다.
최근 국민 투표의 결과는 탄 쉐의 부하들이 얼마나 자기들의 상관 독재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애썼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탄 쉐는 자기 부하들의 거짓으로 제공하고 있는 친 SPDC, 친 탄 쉐적 결과들을 즐기고 있음이 확실하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대변자인 방송매체들이 버마의 새로운 길과 다리와 이 나라의 재산들을 전시적으로 보도하여 탄 쉐를 기쁘게 하고자 하고 있지만, 그는 이런 종류의 잘 못된 정보들과 현실과 반대되는 허상들이 사담 정권의 종말을 결과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두 사람이 자기 나라를 사랑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자기 권력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논의할 건지도 없다. 한 버마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지금 버마 당국자들은 기본적으로는 가혹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이 선임 장군의 인정을 받으려고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선임 장군이 계속하여 사담의 전술을 이용하는 한, SPDC 내의 다른 장군들은 무서워서 그에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