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 요청되는 기적(유안 미켈)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6 01:41
조회
1927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 요청되는 기적(2005, 6, 29, 유안 미켈)
유대교-그리스도교 관계의 역사를 살펴 볼 때, 그리스도교인과 유대교인 간에 종교-상호 간 대화는 “기적”같이 보일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화는 복잡하며 과제가 제기된다. 아래의 글은 두 명의 유대인과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이 종교-상호 간 대화에서 진단한 것을 제시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에 따라서 무엇이 대화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인지 제시할 것이다. 이 대화는 종종 정치적인 주제로 인해 가로 막혀 있다. 세 명 모두 6월 초에 제네바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개최한 대 종교-상호 간 대회의 참석자들이었다.
랍비 제임스 루딘(James Rudin)은 미국 유대교 협회에 오랜 회원이자 종교-상호 간 대화에 관한 전문가이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이렇다. 양 쪽 종교의 신자들 간에 뼈저린 관계가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그런 이후에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간에 대화의 경험이 “20세기의 기적”으로 예측되고 있다는 것.
한스 우코(Hans Ucko) 목사/박사는 세계교회협의회에 유대교-그리스도교 관계부서를 담당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의 그늘 아래서 시작한 대화에 대해 질문할 때면, 그는 루딘의 판단을 상기시킨다. 우코에 따르면 지난 50년간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간에 관계에서 한 가지 “변화”(Umkehr)가 있었다고 한다. “유대교의 오욕에 대한 수백 년 된 신학적 교리가 위기에 처해 있다”. 이렇게 말하고 우코는 단정 짓는다. “교회도 반 인종주의에 관련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예로 그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 개최한 세계교회협의회 창립대회의 선언문을 인용한다. 이 대회에서 반 인종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절대적으로 결합될 수 없는 것”이며, “인간과 하느님을 거역하는 범죄”라고 규정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유대인과 특별한 방식으로 연대하여 연합하게 하셨다”. 동시에 그 분은 자신만의 구원계획에 따라서 우리 모두가 서로 함께하도록 규정하셨다“. 선언문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차이 나는 그리스도교 고백들을 가진 대표자들은 위와 같은 그리고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입장들은 “지난 19세기와 비교해서 패러다임의 이동”을 나타낸다. 에후다 스톨로브(Yehuda Stolov)박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현재 예루살렘에 위치한 신앙-상호 간 모임협회에 실행위원이다.
여 랍비인 나아마흐 켈맨((Naamah Kelman)은 예루살렘에 히브리 연합대학 학장이자 “인권을 위한 여 랍비” 심의회 회원이다. 그녀는 이렇게 실토한다. “그리스도인이 우리와 대화 하려는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자매종교로서 인정하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대화의 순수한 실존이 이미 성공을 표현할지라도 장벽이 있기 마련이다.
스톨로프에 따르면 커다란 장벽이 있다. 오로지 작은 소수자만이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 그에게 반가워 할 일도 있다. 대화 참여자가 한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어서 더 커다란 개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시작 무렵에 당연히 이해될 수 있던 것에 대화가 자신의 입장에 따라 너무 조심스럽고 친근하다. “우리가 오늘날 까지 감행하지 않은 주제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신앙의 문턱 넘기이다. 우리는 이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스톨로프는 주장한다.
우코의 생각에 따르면 대화는 평가할 수 없어서 새로운 통찰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다 각도의 관점에서 한 가지 전환점을 갖는다. 그는 실토한다. 결과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대화는 검토되어야 하며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
>정치가 그려지려면
켈맨에게 무엇보다도 정치는 근동의 변동적인 상황에서 대화를 가로 막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된 어려움은 타자들의 다양성에 대한 시각에서 온다. 특히 상대방과의 대화가 그렇다. 이러한 사실의 결과가 있다. 양 쪽에서 극단주의자들이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맞서는 것이다. “시온이즘과 나치주의를 동일하게 비교할 때 우리는 의기소침해 진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동의하는 것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이 심각한 악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치는 아닙니다”.
우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충돌로 대화에 “특별하게 심각한 장애요소”를 시인한다. 우코에 따르면 오랫동안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의 참여자가 충돌을 피해 왔다. 대화에서 충돌해 온 이들이 대화의 경험과 결과를 무시하는 자들에 반대하였고 시선을 돌려 팔레스타인 민중들과 연대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시선 전환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정치는 무엇보다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점령으로 교회와 그리스도교 단체들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비판된다. 그러한 비판이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를 가록 막는가? 켈맨과 스토로프의 이해에 따르면 이러한 비판이 자기 나름대로 작동한다고 한다.
켈맨은 한 가지 예로 지난 2월에 실시된 세계교회협의회 중앙 위원회 결정을 제시한다. 그는 기부금을 내는 회원 교회에 요청했다. 활동을 위한 경제적인 투자를 적절하게 배치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해당 지역에 대한 점령과 결합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민족으로 구성된 사업자들에게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이 사업자들은 여기에서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한 결정의 몇 몇 기초사항을 거절하더라도 무시무시하게도 결정시점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켈맨은 실토한다.
스톨로프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이러한 결정을 “가장 의외의 불행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것”으로 평가한다. 그는 말한다. “한계 없이 양 당의 한 쪽에 은폐되려는 사람은 평화의 촉진자로서는 완전히 무의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측면은 자동적으로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이 그리스도교 교회와 기구가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위해서 이스라엘의 정치에 대한 비판을 회피해야 한다는 것인가?
켈맨과 스톨로프는 이 말을 부인한다. 중요한 것은 비판을 회피하는 것에 있지 않고, 가치를 조심스럽게 택하며, 입장들의 다양성을 깨달으며 그리고 양 측의 충돌로 생기는 민중들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 기구들이 새로와진 반-인종주의를 비난하고 이스라엘의 존립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권한은 팔레스타인 점령권이 아니다.” 켈맨은 언급한다.
“반-인종주의에 대한 비난과 평화와 안정으로 이스라엘의 존립권에 대한 인정이 벌써 많이 공식적인 표명되었긴 하다. 하지만 반-인종주의는 이미 여전히 위험을 가지고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분명한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켈맨은 말한다.
그는 덧붙인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사실이 있다. “사람들이 우리의 언어에서 듣고 있는 것이 우리가 본래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 여기에서 나오는 결과로서 평화와 정의에 대한 우리의 염려는 심리적인 정신적 외상(Trauma)을 이해하는 영역에서 말해져야 한다. 유대 민중은 이러한 외상을 수 세기의 고통 이후에 그리스도인과 타 종교인 가운데서 항상 여전히 짊어지고 있다.
>부한 세계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기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충돌에 직면해서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스톨로프에게 대화 자체는 긴박한 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는 대화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한다. 이러한 방법들로 평범한 시민조차도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 스톨로프는 주장한다. “우리가 직접적이고 개인적으로 대화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능력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차이 나는 공동체들 간에 관계를 호전시키고 공생하게 할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와 교회와 같은 외부의 작동들은 여기에 협력할 수 있다. 동시에 이들 기구들은 충돌하는 양 쪽에게 대화하도록 자극할 것이다.
켈맨에 따르면 대화 속에서 포함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 인간들이 다른 상황에서도 관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슬림도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을 부정함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폭 넓은 토대에서 대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교 밥상공동체(예배)와 그리스도교의 권리가 이스라엘에서 보호되어야 할 책임이 유대공동체에게도 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에서 포교될 권한이 있다.” 켈맨은 주장한다.
우코의 생각에 따르자면 세계교회협의회와 교회는 한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위해 그리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로써 양 쪽의 목표는 대립으로 위험스럽지도, 부정되지도 않게 된다. 오로지 그렇게 할 때에 세계교회협의회와 교회는 양 국민의 평화를 실현하라는 희망을 갖게 할 것이다.
대체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한다. 대화의 결실은 자동적으로 계속 중재되지도 않거나 변화되지도 않는다는 것. 여기에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하지만, 상징적인 행위와 언어도 그렇다. 여기서 언어는 대화로 이끄는 영성을 드러낸다.
어렵고 애써야 하겠지만, 종교-상호 간 대화는 대화 없는 세계자체보다 휠씬 더 세계를 풍족하게 할 것이다. 켈맨은 주장한다. “나의 전통이 가르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등한시 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정 짓는다.
유대교-그리스도교 관계의 역사를 살펴 볼 때, 그리스도교인과 유대교인 간에 종교-상호 간 대화는 “기적”같이 보일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화는 복잡하며 과제가 제기된다. 아래의 글은 두 명의 유대인과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이 종교-상호 간 대화에서 진단한 것을 제시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에 따라서 무엇이 대화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인지 제시할 것이다. 이 대화는 종종 정치적인 주제로 인해 가로 막혀 있다. 세 명 모두 6월 초에 제네바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개최한 대 종교-상호 간 대회의 참석자들이었다.
랍비 제임스 루딘(James Rudin)은 미국 유대교 협회에 오랜 회원이자 종교-상호 간 대화에 관한 전문가이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이렇다. 양 쪽 종교의 신자들 간에 뼈저린 관계가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그런 이후에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간에 대화의 경험이 “20세기의 기적”으로 예측되고 있다는 것.
한스 우코(Hans Ucko) 목사/박사는 세계교회협의회에 유대교-그리스도교 관계부서를 담당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의 그늘 아래서 시작한 대화에 대해 질문할 때면, 그는 루딘의 판단을 상기시킨다. 우코에 따르면 지난 50년간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간에 관계에서 한 가지 “변화”(Umkehr)가 있었다고 한다. “유대교의 오욕에 대한 수백 년 된 신학적 교리가 위기에 처해 있다”. 이렇게 말하고 우코는 단정 짓는다. “교회도 반 인종주의에 관련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예로 그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 개최한 세계교회협의회 창립대회의 선언문을 인용한다. 이 대회에서 반 인종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절대적으로 결합될 수 없는 것”이며, “인간과 하느님을 거역하는 범죄”라고 규정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유대인과 특별한 방식으로 연대하여 연합하게 하셨다”. 동시에 그 분은 자신만의 구원계획에 따라서 우리 모두가 서로 함께하도록 규정하셨다“. 선언문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차이 나는 그리스도교 고백들을 가진 대표자들은 위와 같은 그리고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입장들은 “지난 19세기와 비교해서 패러다임의 이동”을 나타낸다. 에후다 스톨로브(Yehuda Stolov)박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현재 예루살렘에 위치한 신앙-상호 간 모임협회에 실행위원이다.
여 랍비인 나아마흐 켈맨((Naamah Kelman)은 예루살렘에 히브리 연합대학 학장이자 “인권을 위한 여 랍비” 심의회 회원이다. 그녀는 이렇게 실토한다. “그리스도인이 우리와 대화 하려는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자매종교로서 인정하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대화의 순수한 실존이 이미 성공을 표현할지라도 장벽이 있기 마련이다.
스톨로프에 따르면 커다란 장벽이 있다. 오로지 작은 소수자만이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 그에게 반가워 할 일도 있다. 대화 참여자가 한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어서 더 커다란 개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시작 무렵에 당연히 이해될 수 있던 것에 대화가 자신의 입장에 따라 너무 조심스럽고 친근하다. “우리가 오늘날 까지 감행하지 않은 주제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신앙의 문턱 넘기이다. 우리는 이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스톨로프는 주장한다.
우코의 생각에 따르면 대화는 평가할 수 없어서 새로운 통찰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다 각도의 관점에서 한 가지 전환점을 갖는다. 그는 실토한다. 결과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대화는 검토되어야 하며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
>정치가 그려지려면
켈맨에게 무엇보다도 정치는 근동의 변동적인 상황에서 대화를 가로 막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된 어려움은 타자들의 다양성에 대한 시각에서 온다. 특히 상대방과의 대화가 그렇다. 이러한 사실의 결과가 있다. 양 쪽에서 극단주의자들이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맞서는 것이다. “시온이즘과 나치주의를 동일하게 비교할 때 우리는 의기소침해 진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동의하는 것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이 심각한 악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치는 아닙니다”.
우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충돌로 대화에 “특별하게 심각한 장애요소”를 시인한다. 우코에 따르면 오랫동안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의 참여자가 충돌을 피해 왔다. 대화에서 충돌해 온 이들이 대화의 경험과 결과를 무시하는 자들에 반대하였고 시선을 돌려 팔레스타인 민중들과 연대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시선 전환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정치는 무엇보다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점령으로 교회와 그리스도교 단체들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비판된다. 그러한 비판이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를 가록 막는가? 켈맨과 스토로프의 이해에 따르면 이러한 비판이 자기 나름대로 작동한다고 한다.
켈맨은 한 가지 예로 지난 2월에 실시된 세계교회협의회 중앙 위원회 결정을 제시한다. 그는 기부금을 내는 회원 교회에 요청했다. 활동을 위한 경제적인 투자를 적절하게 배치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해당 지역에 대한 점령과 결합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민족으로 구성된 사업자들에게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이 사업자들은 여기에서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한 결정의 몇 몇 기초사항을 거절하더라도 무시무시하게도 결정시점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켈맨은 실토한다.
스톨로프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이러한 결정을 “가장 의외의 불행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것”으로 평가한다. 그는 말한다. “한계 없이 양 당의 한 쪽에 은폐되려는 사람은 평화의 촉진자로서는 완전히 무의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측면은 자동적으로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이 그리스도교 교회와 기구가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위해서 이스라엘의 정치에 대한 비판을 회피해야 한다는 것인가?
켈맨과 스톨로프는 이 말을 부인한다. 중요한 것은 비판을 회피하는 것에 있지 않고, 가치를 조심스럽게 택하며, 입장들의 다양성을 깨달으며 그리고 양 측의 충돌로 생기는 민중들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 기구들이 새로와진 반-인종주의를 비난하고 이스라엘의 존립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권한은 팔레스타인 점령권이 아니다.” 켈맨은 언급한다.
“반-인종주의에 대한 비난과 평화와 안정으로 이스라엘의 존립권에 대한 인정이 벌써 많이 공식적인 표명되었긴 하다. 하지만 반-인종주의는 이미 여전히 위험을 가지고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분명한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켈맨은 말한다.
그는 덧붙인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사실이 있다. “사람들이 우리의 언어에서 듣고 있는 것이 우리가 본래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 여기에서 나오는 결과로서 평화와 정의에 대한 우리의 염려는 심리적인 정신적 외상(Trauma)을 이해하는 영역에서 말해져야 한다. 유대 민중은 이러한 외상을 수 세기의 고통 이후에 그리스도인과 타 종교인 가운데서 항상 여전히 짊어지고 있다.
>부한 세계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기
유대교-그리스도교 대화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충돌에 직면해서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스톨로프에게 대화 자체는 긴박한 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는 대화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한다. 이러한 방법들로 평범한 시민조차도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 스톨로프는 주장한다. “우리가 직접적이고 개인적으로 대화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능력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차이 나는 공동체들 간에 관계를 호전시키고 공생하게 할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와 교회와 같은 외부의 작동들은 여기에 협력할 수 있다. 동시에 이들 기구들은 충돌하는 양 쪽에게 대화하도록 자극할 것이다.
켈맨에 따르면 대화 속에서 포함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 인간들이 다른 상황에서도 관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슬림도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을 부정함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폭 넓은 토대에서 대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교 밥상공동체(예배)와 그리스도교의 권리가 이스라엘에서 보호되어야 할 책임이 유대공동체에게도 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에서 포교될 권한이 있다.” 켈맨은 주장한다.
우코의 생각에 따르자면 세계교회협의회와 교회는 한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위해 그리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로써 양 쪽의 목표는 대립으로 위험스럽지도, 부정되지도 않게 된다. 오로지 그렇게 할 때에 세계교회협의회와 교회는 양 국민의 평화를 실현하라는 희망을 갖게 할 것이다.
대체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한다. 대화의 결실은 자동적으로 계속 중재되지도 않거나 변화되지도 않는다는 것. 여기에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하지만, 상징적인 행위와 언어도 그렇다. 여기서 언어는 대화로 이끄는 영성을 드러낸다.
어렵고 애써야 하겠지만, 종교-상호 간 대화는 대화 없는 세계자체보다 휠씬 더 세계를 풍족하게 할 것이다. 켈맨은 주장한다. “나의 전통이 가르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등한시 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정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