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

평화의 집에 머물라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2 21:43
조회
727
평화의 집에 머물라 (2006/5/28)

설교자 :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담임)


본문 : 시120:1-7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나에게 응답하여 주셨다. 주님, 사기꾼들과 기만자들에게서 내 생명을 구하여 주십시오. 너희, 사기꾼들아, 하나님이 너희에게 어떻게 하시겠느냐? 주님이 너희를 어떻게 벌하시겠느냐? 용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싸리나무 숯불로 벌하실 것이다! 괴롭구나! 너희와 함께 사는 것이 메섹 사람의 손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구나. 게달 사람의 천막에서 더부살이하는 것이나 다름없구나.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

? 난폭한 세상
세상이 참 시끄럽습니다. 사람살이의 마당에서 고요함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신문을 보고, 방송을 보면 내적인 에너지가 슬그머니 사그라드는 것을 느낍니다. 세상이 온통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일들은 보이지 않고, 추하고 험한 일들만 도드라집니다. 9시 종합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징조 종합판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딤후3:2-5)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권합니다. 요즘 제 마음에 방점을 친 것처럼 다가오는 것은 ‘난폭하며’라는 단어입니다. 참 세상이 난폭해졌습니다. 하루하루 무고하게 살아가는 게 기적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선물이 되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상처를 덧내고, 인간적인 모멸감을 안겨주는 일이 많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타락이 바로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도덕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도 타락이지만,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야말로 더 근본적인 타락일 겁니다.

전도자는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도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고 말했습니다. 이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삶이 선물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삶을 전쟁으로 인식합니다. 이러니 마음은 늘 바쁘고, 숨은 가빠지고, 얼굴은 점점 굳어집니다. 삶이 전쟁이 되는 순간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의식을 억누르기 시작합니다. ‘두려움’, 이것은 사탄이 제일 좋아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내남없이 소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삶은 이런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겁니다. 안절부절, 까다로움, 불안과 공포, 조급함, 시기…이렇게 되면 인생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밤낮으로 바빠서 쉴 틈조차 없지만, 마음은 절대로 ‘이제 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의 시인도 우리가 사는 것과 비슷한 생의 조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거짓말과 속임수가 넘치는 세상에서 그는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이들 틈에서 사는 것이 마치 ‘메섹 사람의 손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고’, ‘게달 사람의 천막에서 더부살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탄식합니다. ‘메섹 사람’과 ‘게달 사람’은 전쟁을 상징하는 민족들의 이름입니다. 시인은 내가 너무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형편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제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몇 가지 희망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평화 운동의 기초: 기도
첫째, 기도할 수 있음이 희망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평화 만들기의 시작이자 핵심입니다.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평화를 싫어하는 이들의 집에서 빠져나와 평화를 사랑하는 분의 집으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삶을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의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영혼이 길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공급받지 않고는 사랑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무릎꿇음이 없이는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선한 뜻을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모욕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원망이 생기고, 그 원망은 내적인 에너지를 고갈시킵니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엎드릴 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되고, 세상이 뭐라 해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작은 선행에 도취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시간을 내고,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돈을 내고, 이웃을 돕기 위해 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정과 칭찬을 기대합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아니, 이렇게 객관적으로 말할 게 아닙니다. 그게 바로 우리이고, 나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중심이 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의 아름다운 실천에 동참하고 연대하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기어코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갈등과 미움이 끊이지 않는 세상의 문제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우리는 평화를 위한 투신이 나의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싸움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고 하여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지쳐 쓰러져도 하나님의 희망은 사라질 수 없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2b-33)

?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의 저항
둘째, 평화의 일꾼들은 그릇된 세상에 저항해야 합니다. 모세는 두려웠지만 바로 앞에 서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했습니다. 초기의 복음 전파자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행17:6)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존 질서에 대해서 침묵의 동조자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변혁하는 변혁의 누룩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인류를 멸절시킬 수 있는 핵무기의 확산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전쟁과 공포를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이들의 음모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발전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지키려는 이들, 편안함을 구하는 이들은 이 소명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16:24)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부드러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이의 마음이 굳어 있고, 말이 거칠고, 표정이 험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 영국에 맞서 싸우면서도 저녁이면 물레를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고요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이런 부드러움과 고요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80년대에 필리핀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군인들의 총구에다가 장미꽃을 꽂아주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대결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끼리 사회 법정에 세우는 현실을 보면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고전6:7).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은 다소 격앙되어 있습니다.

“너희, 사기꾼들아, 하나님이 너희에게 어떻게 하시겠느냐? 주님이 너희를 어떻게 벌하시겠느냐? 용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싸리나무 숯불로 벌하실 것이다!”(3-4)

저주처럼 들리는 이 말은 사납고 거친 현실에 대한 시인의 절절한 아픔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23:34) 미워하고 탄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하고, 일으켜 세우는 것은 영적으로 해방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일꾼들은 ‘아니오’라고만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대해 ‘예’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는 않아도 세상에는 참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지지하고, 북돋고, 벗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아름다운 생명의 축제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 평화 공동체 만들기
셋째, 평화의 일꾼은 평화 공동체를 만들고 그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꿈을 공유하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공동체 속에 머물 때 우리는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인은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너무 오랫동안 더불어 살아왔다고 탄식합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 마음은 거칠대로 거칠어졌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영혼을 고쳐주실 이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면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이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홀로는 할 수 없는 일도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함께 만나면 폭포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느냐가 우리 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돈만 따라 다니는 이와 자주 만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가난하다는 생각이 들어 비참해집니다. 아이들 과외 공부에 열을 올리는 엄마를 자주 만나다보면 내 아이만 뒤떨어지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평화의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과 함께 지내십시오. 히브리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시16:2-3)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분명히 알아둘 것은 평화를 위해 일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넘실대는 평화의 새 세상을 열기 위해 헌신할 때 우리는 살아있음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굉음으로 우리 영혼이 소란스럽지만, 우리는 그 너머로 들려오는 하늘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