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

나를 두고 한 말씀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42
조회
1181
나를 두고 한 말씀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
이근복 목사(본회 기획위원, 새민족교회)

성경본문 : 행 3:12-19, 요일 3:1-7, 눅 24:36-48

2006년 새해를 맞이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의 1/3이 지났습니다.
이 때에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머물러 서서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야, 알찬 인생을 살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는 베드로가 바르게 처신하며, 예수부활을 증거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 앉은뱅이가 그들에게 구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하며, 지체장애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베드로 일행에게 몰려왔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여러분은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여러분이 죽인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전 같았으면 자기가 잘 났다고, 시체 말로 방방 떴을 것입니다. 내 능력이 대단하고 내게 영적 파워가 있어서 그 사람을 걷게 했다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베드로는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첫 수난예고를 하였을 때,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님을 질책하며 대들던 그가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심문받을 때, 구차하게 세 번이나 부인하던 나약하고 치사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하여 바뀌었습니까?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좌표를 잘 파악하고, 겸손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자신의 능력은 오로지 예수의 이름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자신은 가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에서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한 예수를 그들이 죽였다고 고발하면서도, 그들이 무지해서 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지 그들에 의해서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미리 선포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 예언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라고 설교합니다. 이 설교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찌르는 동시에 그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인 점을 설파함으로, 이 설교를 듣고 남자 어른만도 5천명이나 회심하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언선포의 주인공인 예수님도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깨닫고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를 선물로 주시며, 몸으로 부활하신 자신을 구체적으로 증명하여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당신이 이전에, ‘성서에서 자신을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들에게 했던 말이, 이제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이야 예수께서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성서의 예언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이 예언을 받아들이는데, 얼마나 고민스럽고 힘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살려고 오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참 하나님 나라운동을 전개하던 때가 아닙니까? 또 예수님은 서른세 살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지 않습니까?
사실 예수님에게는 자신에게 예고된 십자가를 피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
여기는 이스라엘의 맨 북단입니다. 조금만 더 북으로 가면, 시리아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거기로 넘어가면 예루살렘에 가서 기득권자들과 더 이상 갈등하고 대결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통스런 떠돌이 생활을 면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꿈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3년간의 자신의 활동이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 관심이 있었던 것은, 그만큼 주님에게 갈등도 깊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 도구라는 인식이 투철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의 예고된 죽음을 이미 받아들이신 예수님이었기에, 곧 배신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어, 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기기 위해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갔다는 요한복음 18장 1절의 말씀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길로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수 있었는데도, 굳이 이 골짜기를 건너신 귀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훈련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기드론 시내는 주로 이방 우상을 파괴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예레미야서에는 이곳을 ‘시체와 잿더미로 가득 찬 골짜기’(31:40)로 언급하고 있고, 예수님 당시엔 공동묘지로 사용되었습니다. 기드론 골짜기는 한마디로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골짜기, 기드론을 건너시면서, 예고된 죽음을 마음속에 받아들이셨고, 십자가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다 수용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젊은 날에, 하나님나라운동을 접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다른 길을 택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보낸 무리들이 무기를 들고 자기를 붙잡았을 때, 예수님의 일행 중에 칼을 들고 맞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셨기에 “내가 하나님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보내달라고 청할 수 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라고 하시며, 순순히 체포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체포당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뻔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힘은 자신의 위치를 알고, 하나님이 정하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셨다는 점입니다.

어제 고 유구영 선생 10주기 추모식이 모란공원에서 있었습니다.
유 선생은 우리 교회 신윤복 집사님 남편으로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젊은 날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추모식에서 가족들과 유 선생님과 함께 활동했던 분들은, 빈자리를 아쉬워하였습니다. 열정적으로 노동운동을 했던 고인이 지금도 살아 있었으면, 노동운동이 이렇지는 않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만큼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잘 알고 그 자리를 바르게 지키는 것은 참 소중한 일입니다.
추모식 후에 시간이 있어서 모란공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옛날에 만났던 분들이 많아서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의 선구자 겨레의 벗, 늦봄 문익환 목사”라고 된 문익환 목사님의 묘비 앞에 서니, 목사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습니다. 어느 작은 모임에서 죽음에는 자연사와 역사적 죽음,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년 만에 가본 전태일 열사 묘에는 빼곡히 글자가 새겨진 새 비석이 서 있었지만, “기독청년 전태일의 묘, 삼백만 근로자 대표”라는 옛 비석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전태일 열사도 근로기준법 책자를 가슴에 품고 분신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전태일 평전에 보면, 분신하기 전 3개월 전인 1970년 8월 9일,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들을 위한 자신의 삶의 자리를 깨닫고, 죽음을 받아들이며, 분신으로 그 길을 의연하게 간 것이며, 이 죽음이 노동운동의 새날을 열었습니다.

독일의 본회퍼 목사도 자신에 대하여 늘 성찰하며 살았던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삶, 신앙, 그리고 신학이 우리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유명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나는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 나는 누구인가? 전자일까, 후자일까?/ 양자가 동시에 나일까? ...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오 하나님,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옥중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움은 두 가지 존재 방식으로만 성립할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 기도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항상 올바른 존재방식을 회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너무 뻔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란 점이 우리의 흔들림 없는 좌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언제나 하나님의 돌봄과 인도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의 요한1서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까닭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의 19절에는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으면, 우리에게 새롭게 되는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이 ‘새롭게 된다’는 단어는 원래, “호흡이 회복된다.” “정신이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쟁만능과 물질주의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습니까?
집착하고 욕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사랑조차도 계산하며 행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으면, 우리 호흡이 고르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고른 호흡으로 살려면 성서에 자신을 비추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서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납니다.”라는 히브리서의 증언(4:12,13)은 성서의 위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우리가 성서를 통하여, 우리 인생의 좌표를 바로 잡아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인도 “주님의 종이 말씀의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시 19:11)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4월부터 마가복음으로 ‘말씀으로 기도하기’를 하는데 매일 짧은 말씀이라도 읽지 않으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하여 귀한 인생을 헛되이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증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물론, 전태일 열사, 문익환 목사, 본회퍼 목사도 자신의 자리를 잘 인식하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증언자로서 힘차게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에는 ‘우리가 증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진리와 평화, 정의와 사랑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막의 수도자 샤를 드 푸코 신부는 “나는 생활로 복음을 외치고 싶다.”라고 하였는데, 단순하지만 이 말에 많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삶으로 예수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방식을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이 사회가 어디에 서 있는가?” “가난한 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노동주일을 지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땅의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지 않고서는, 결코 나라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노동운동과 연대하여, 시대의 바른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늘 자신을 성서에 비추어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대의 증인이 되는 귀한 삶이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