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

주님의 마음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42
조회
883
(2006년 3월 12일 사순절 둘째 주일)

설교제목 : 주님의 마음
성경본문: 욥기 35장 1절-8절
찬송: 141, 335,
교독: 교독문 30, 시편 139편

<본문주해>
흔히 사람들은 욥을 모범적이고 순종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그리지만, 사실 그는 매우 끈질기고 때로는 저항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욥의 세 친구들은 그가 겪는 고통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한다. 고난이 닥쳐오기 전까지만 해도 욥의 생각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난은 그를 전혀 다른 세계 앞에 세웠다. 이전까지 질서정연하던 세상은 갑자기 무질서한 곳이 되었고, 아름답던 세상은 갑자기 추한 곳이 되고 말았다.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그가 의지해왔던 삶의 터전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살려고 애썼고,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유한한 인생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다가온 고난은 그의 삶의 모든 것을 휩쓸어가 버리고 말았다.

욥의 친구들은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쳤지만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할 수 없었고, 자기에게 닥쳐온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욥의 교만을 질타한다. 고난의 현실이야말로 그의 죄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데도 욥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리를 우리 현실에 적용한다면 어떻겠는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 세계 도처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럴가?


욥이 세 친구들의 말을 수긍하지 않자, 엘리후라는 젊은이가 나서서 욥을 질타한다. 그는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징벌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계의 수단일 때도 있다고 말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사람의 희노애락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가 하시는 일은 다 의롭다고 믿는다. 대단한 믿음이고 확신이지만 연약한 우리에게는 너무 팍팍한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인간의 아픔에 대한 공감의 여백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솜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6절-7절)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시다. 인간의 죄와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신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이 아니시다. 반대로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희로애락에 깊이 연루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결된 존재로서 아무의 영향도 받지 않는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의 기쁨과 슬픔에 주체적으로 동참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물론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인간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거듭되는 인간의 죄 때문에 넌더리를 내기도 하시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죄인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은혜의 하나님은 호의를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고, 그 때문에 우리 가슴 깊은 곳에 기쁨을 심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고 계신 분이시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느라 애태우는 아버지이시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온 광야를 헤매다가 찾으면 어깨에 메고 즐거이 돌아오는 목자이시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만일 우리의 드러난 죄와 내밀한 죄를 다 헤아리시고,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신다면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율법 조문에 매여 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좀 엉뚱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율법 조문을 들여다보면서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르는 일에 온통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먹고사는 일이 제일 시급한 사람들에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시고, 들에 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에 눈길을 주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눈길은 성경이나 탈무드, 미드라쉬를 살피기보다는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거두어들이는 농부, 고기 잡는 어부, 빵을 만드는 여인,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찾으려고 온 집안을 비질하는 여인들에게 머물고 있다. 사소한 것 같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이 삶으로 드러내신 하나님은 손에 돋보기를 들고 누군가의 죄를 꼼꼼히 헤아리는 눈길 가파른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도덕적인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면, 세상은 참 각박해지지 않을까? 누가 와서 거짓말을 하면 더러는 알면서도 넘어가 주고, 연속극을 보다가 그 뻔한 이야기에 눈물도 찔끔 흘려보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간 이들을 보면서 감동을 느낀다. 나환자들을 위해 살다가 나환자가 되어 세상을 떠난 몰로카이 섬의 성자 다미앤의 삶이 그렇고,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동료 죄수들을 대신해 아사(餓死)감옥에 들어가 생을 마친 맥시밀리언 콜베 신부의 생이 그렇다.
그런 이들의 생은 거울이 되어 우리를 비추어보게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삶이 드러내는 빛에 정신이 팔리다보면, 오늘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잊기 쉽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순백의 영혼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 마음속에는 어둠과 빛이 혼재해 있고, 추한 욕망과 거룩한 욕망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가 어느 쪽에 더 공을 들이는가가 우리의 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가장 진부해 보이는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이나 낯선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나 표정 속에 우리 영혼의 지향이 드러나는 것 아닐까? 시장에서 만나는 상인들, 음식점의 종업원들, 더 가까이는 우리 가족들이나 직장 동료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 혹은 우리가 몸 붙여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한 우리의 태도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란 말이다.

엘리후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참 단순한 곳이다. 선과 악이 분명하고, 미와 추가 분명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선한 사람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큰소리를 치기도 한다. 또 선과 악이 두부 모 가르듯 분명하게 갈라지지 않을 때도 많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마태복음 13장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가라지를 보면서 일꾼들이 주인에게 묻는다.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그러자 주인은 대답한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조심스러움, 그리고 누구든지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이 사랑이다.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한다는 미명하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더 큰 악을 막기 위해서는 그런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말일 수 없다.

<결론>
하나님은 인간의 말문을 막지 않는 분이시다. 오히려 억울한 자가 다가가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 있는 비빌 큰 언덕이시다. 세상살이에 지친 자가 찾아가 맘껏 울 수 있는 골방이시다. 인간의 악담을 들으면서도 그의 아픔까지도 헤아리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풍파가 가 닿을 수 없는 저 너머, 절대의 세계에 머물고 계신 분이 아니라 끝없이 우리의 삶 가운데로 개입해 들어오시는 분이신 것이다. 죄의 파도에 떠밀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욕망에 따라 춤을 추는 우리들 때문에 끙끙 앓고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앓을 병을 대신 앓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픔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기의 삶을 단정하게 바로 잡아가는 과정이다.
이 사순절 순례의 기간 동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 예 그리스도의 마음과 만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