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연리포트14호)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한국교회에 대한 제언(提言)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한국교회에 대한 제언(提言)

박 종 운 / 변호사, (전)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법제정위원장



1. 차이와 차별, 그리고 금지되는 차별



1) 차이 vs. 차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자본가와 노동자, 내국인과 외국인, 각종 인종,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 이들은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서로 다른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처럼 사람이란 각자 개성, 특성, 독특함이라는 이름의 ‘다름’ 혹은 ‘차이’를 가지고 태어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람들 간에 ‘차이’, ‘다름’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때로는 존중받고 때로는 고려되어야 하며 때로는 고쳐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개인이나 집단들 간의 무수한 ‘차이’들 중 어떤 특정한 차이들은 수직적인 위계를 가지고 구별되면서 ‘차별’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비정상적/소수라고 여겨지는 ‘차이’를 가진 개인이나 집단은, 수직적으로 ‘서열화’되어 열등한 존재 심지어는 부인되어야 할 존재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직적인 서열’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회에서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 혹은 다수에 의해 결정된다.

예컨대, 장애인의 경우, 인적 구성과 권력관계로 보면 우리 사회는 다수의 비장애인 남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비장애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이자 부분적으로나마 육체적·사회적·경제적 약자인 장애인은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고,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는 자신들이 소외시킨 장애인을 열등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낙인찍는다. 이러한 낙인에 의해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가중되고, 그 편견/고정관념은 다시 장애인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는, ‘차별의 악순환 고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차별’이란 ‘무수한 차이/다름들’이 어떤 형태로든 힘/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좋고 나쁨, 선과 악, 우등과 열등 등으로 수직적으로 서열화 되거나 계층화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권의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좋고 나쁨, 선과 악, 우등과 열등으로 서열화 되거나 계층화되어서는 아니 되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본질적이고 인격적인 ‘차이/다름’들이, 인위적으로 ‘구별’당하고 ‘차별’로 전환되는 경우이다.



2) 차별 vs. 금지되는 차별

그런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차별’이란 단어를 위법/부당한 경우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기업에서 ‘차별화 전략’이라고 말할 때, 그 ‘차별’은 가치중립적일 수 있고 합법적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은 금지되는 차별이 아니다. 가정 내에서 부모들은 흔히 자녀들로부터 “(00와 나를) 차별하지 말아 달라”는 투정 섞인 말을 듣기도 한다. 이 경우에 연령, 성별에 따른 차별이 문제될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법률에서 ‘가정’이라는 영역을 차별금지영역으로 규율하지 않는 이상, 법적으로는 문제되지 않는다. 이처럼 ‘차별’이라는 단어는 위법/부당한 경우뿐만 아니라 위법/부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은 일반 사회인으로 하여금, 차별금지법상의 ‘차별’이라는 용어에 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차별금지법에서 다루는 차별’은 ‘평등권’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위반하는 행위 중에 관련 법령에 규정된 것만을 말한다. 법률상 금지되는 ‘차별’이란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인종, 종교 등을 이유로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말한다(직접차별의 개념). 또한 인권의 관점에서 말하는 ‘금지되는 차별’의 속성은 해당 개인이나 집단의 인격, 정체성, 본질과 깊이 관련되어 있고, 대개 그것으로부터 발현되는 개성, 특성, 조건, 행동양식은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거나, 선택 혹은 포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차별적인 행위는 상대방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침해하면서 모욕/모멸감, 인격 모독, 혐오, 증오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평등한 지위나 자격을 훼손하고 박탈할 뿐만 아니라, 형식적, 실질적 기회마저 빼앗는다. 혐오(hate)가 특정 소수자 개인/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이나 감정, 또는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라면, 차별(discrimination)은 편견과 혐오가 자라나서 실제로 불리한 대우를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혐오가 혐오를 재생산하듯이, 차별은 차별을 낳게 되어, 혐오와 차별은 더욱 더 확산, 재확산되고 만다. 그 과정에서 피해는 주로 소수자 개인이나 집단에 집중된다. 그만큼 사회적인 갈등과 분쟁은 만연해지고, 사회적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2020. 6. 30.에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 평등법 시안은,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① 직접차별, ② 간접차별, ③ 괴롭힘, ④ 성희롱, ⑤ 차별 표시·조장 광고 행위를 ‘금지되는 차별’로 규정하면서, 적용되는 차별금지영역은 고용, 재화·용역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의 교육·직업훈련, 행정·사법 절차 및 서비스의 제공·이용에 한정하고 있다.

3) 소결

필자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접하는 성경인 ‘창세기’를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26). 지금 우리 헌법이 평등권을 규정한 것은, 연원(淵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여기에 맞닿아 있다. 서구의 법사상에서 헤브라이즘을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분의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은 모두 다 ‘평등’하다. 양반과 상놈이 존재하던 조선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왜 그렇게 많은 백성들이 생명을 잃었을까?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에 하나인 ‘(하나님 앞에) 평등’ 사상 때문이다. 이 신앙을 지키려다가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 깨어진 세상에서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고,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시었다. 이 진리를 믿는다면,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2.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필요성



1) 개별적 차별금지법 vs. 포괄적 차별금지법



‘평등’ 혹은 ‘차별금지’와 관련하여 ‘차별금지 대상’ 혹은 ‘차별금지 사유’가 특정한 1개에 한정되어 있으면 ‘개별적 차별금지법’이라 할 수 있고, 여러 개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 말할 수 있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은 대상이나 사유가 특정한 1개에 머물다보니, 그 대상이나 사유와 관련하여 보다 꼼꼼하게, 차별해서는 아니 되는 영역을 비교적 광범위하게 설정할 수 있는 반면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대상이나 사유가 많다보니, 그 대상이나 사유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영역에 한정하여 비교적 제한적으로 차별을 금지하게 된다.



법제처 홈페이지(https://www.moleg.go.kr)에 들어가서 ‘현행법령’을 대상으로 ‘차별’로 찾아보면,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약칭: 고령자고용법)’과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약칭: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평등’으로 찾아보면,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남녀고용평등법)’과 ‘양성평등기본법’이 검색된다. 이외에도 개별 법령에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들이 존재한다.



2)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필요성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차별이 사라지고 평등권이 실현되고 있는가? 최근에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차별은 여전히 다양한 영역에서 행해지고 있다.



우리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법제도상 최상위에 있는 헌법이 직접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을 차별금지사유로, ‘모든 국민’에 대해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평등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국민들의 차별에 대한 민감도와 평등에 대한 요구 수준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실시한 2020년 차별인식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9명이 “나의 권리만큼 타인의 권리도 존중돼야 한다.”, “누구도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와 나의 가족도 언제든 차별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차별을 해소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헌법의 정신을 구현하려면, 다양한 대상/사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권을 실현할 수 있는 법률, 즉,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사회가 발전하고 선진화되어 갈수록 사회적 갈등과 분쟁 해소를 위해서라도, 평등과 차별금지를 위한 법제도 정비 차원에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곧바로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건설과도 직결된다.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을 통해 해당 대상, 사유, 영역에서 차별을 매우 구체적으로 금지하는 일부 법률을 제정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현실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차별문제를 다루기 위해 각각의 사유마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 비용이 소요되고, 그 동안에 평등권을 침해당하는 국민, 차별을 당하면서 반인권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나아가 개별법들을 모두 제정했다고 하더라도, 개별적 차별금지법들은 구제수단의 종류나 수준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문제가 되는 차별 사유에 따라 어떤 법을 적용해야 하는지, 어디에 차별시정 및 피해구제를 호소해야 하는지,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기대해 볼만한 구제조치 또한 편차가 발생한다. 결국 개별적 차별금지법은 장애와 같은 특정 사유에 따른 차별을 심도 있게 다루거나 그분들이 겪는 특정 영역에서의 차별 문제를 시정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개별법만으로는 다양한 차별의 현실을 개선하는데,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사람의 정체성은 성별, 장애, 나이, 학력 등 다양한 속성이 중첩되고 일상에서 이러한 사유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복합/중복차별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종합적으로 해석, 적용, 해결하기 위해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여러 차별을 망라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차별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차별 요소 간의 수직화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일관되고 통일된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국제사회의 경향을 보더라도, 대개 선진국으로 발전되어 갈수록, 처음 몇 개의 개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 및 시행에 뒤이어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혹은 평등법 제정 및 시행으로 나아가고 있다. 차별금지 사유의 경우, 2000년대까지만 해도 6~7개 정도 규정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2010년 이후에는 헌법에만 10개 이상 나열하는 국가들도 있고, 차별금지법에는 20개 내외를 규정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평등법으로는, 영국의 평등법, 독일의 일반평등대우법 등이 있다. 소극적인 ‘차별금지’로부터 적극적인 ‘평등권 실현’으로 나아가는 경향, 국민의 권리에서 인류 보편의 권리로 나아가는 경향, 개별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규범으로 발전해 나가는 경향이 있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은 인정하면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분들은, 아마도 개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에 별다른 역할을 하시지 않거나 못한 분들이 아닐까, 차별과 관련된 인권 활동을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한 활동을 경험해 보았다면, 차별금지 및 평등권 실현은 몇 개의 개별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성격상, ‘합리적 이유’가 있다면 차별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성격상 차별금지영역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법률(안)이 나오면 구체적으로 쟁론하면서 보완하면 되는 것이지, 포괄적 차별금지법 중 일부 사유가 포함되는 것이 싫다고 해서, 그 특정사유(예컨대 성적지향)에 대한 개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할 것도 아니면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3) 소결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헌법과 국제인권규범에서 명시한 평등 이념 실현의 법률적인 근거이자,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우리사회에 제기하면서 시정권고 등을 통해 우리사회의 인식변화를 추구하는 한편, 차별피해에 대한 실효성 있는 구제를 통해 사회구성원 모두의 인권을 보장하는 장치가 될 것이다. 법률로 규정하는 만큼, 차별의 개념과 유형, 차별 판단의 기준을 정립하게 될 것이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시행을 통해 우리사회의 차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차별을 예방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조용하지만 은근하고 지속적으로, 우리사회의 차별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의 변화가 총체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3. 한국교회에 대한 제언 – 포괄적 차별금지법 전면 반대만이 정답인가?



1) 필자의 경험과 개신교의 대응

필자는 2002년경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시작하였다. 2003년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장추련) 법제정위원장을 맡아 제정 법률안 작성에 참여했고, 5년여 동안 법제정 운동을 통해 2007년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국내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4년경이다. 필자도 그 당시 가칭 ‘사회적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이후 약 1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민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인권위원회, 국회의원 등이 수차례 여러 건의 입법 권고, 입법 발의 등을 하였지만, 현재까지 법 제정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2020년 제21대 국회에 들어와서는, 지난 6월 29일에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차별금지법’(안)을 대표 발의하였고, 바로 그 다음날인 6월 30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에 대하여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시안)을 참조하여 조속히 입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표명한 상태다.



그런데, 지난 16년 동안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가장 큰 걸림돌 혹은 장애물 중에 하나는 바로 개신교 보수진영의 강력한 법제정 반대 운동이었다. 2020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아니, 이번에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개신교 법률가들도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분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친숙한 분도 있고 존경하는 분도 있다. 그런데, 왜 개신교 보수진영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일까? 반대운동만이 정답이고 유일한 대안일까? 반면에 에큐메니칼과 사회선교 진영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찬성의 목소리가 높다. 참고로, 필자는 개신교인이고, 모태신앙인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경은 동성애를 ‘죄’로 기록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그 자체에 찬성하면서도, 수정 보완을 요구하는 대안입법 운동을 하고 있다. 굳이 규정하자면, ‘무조건 찬성론자’도 ‘무조건 반대론자’도 아닌, ‘대안입법론자’인 셈이다.



2)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대안입법론

필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대우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느냐 하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논의할 수 있고, 지혜를 모아가야 간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분들의 주장 중에는, 가짜뉴스 프레임에 걸릴 만한 내용도 상당부분 존재하고, 절반의 진실 혹은 의도된 왜곡과 과장된 걱정도 존재하지만, 일부는 설득력이 있고 경청해야 할 내용도 있다. 필자는 바로 그 부분을 법 제정 과정에서 적정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정 차별금지 사유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규정되면 신앙/종교의 자유가 억압될 것이라고 염려하는 분들도 많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정도로 걱정할 만큼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신앙/종교의 자유 또한 헌법상 보장되는 자유이니만큼 함부로 금지하거나 억압할 수도 없다. 외국의 입법례를 살펴보면, 그러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도록 ‘종교적 예외사유’ 등을 아예 법에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과 차별금지 및 평등권이 갈등 혹은 충돌할 경우에는 서로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규범 조화적으로 해석 및 적용될 수 있도록 원칙과 예외를 구체적으로 정밀하게 규정해야 한다. 이점이 대안입법론의 핵심이다.



필자가 정말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깨어진 세상, 그로 인해 필자를 포함하여 전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된 세상,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 길 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그분들은 왜? 유독! <동성애>만 (가장 큰? 핵심? 유일한?) 죄악인 것처럼 선전 선동할까, 하는 점이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중요도나 인용 및 발언 횟수를 보더라도 <동성애>는 <이성애자들의 음란함>보다 더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다. 동성애 및 동성애자에 대한 세계 개신교회들의 태도를 살펴보면, 참으로 다양하지만, 동성애자를 성도로 인정하고 심지어 목회자 안수까지 허용하는 교회가 다수 존재한다. 이런 상황을 돌아보면, 혹시 동성애 반대(=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을 하는 분들의 마음속에 동성애 및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배제, 증오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 된다. 필자는 이성애자 개신교인으로서, 동성애를 하나님 앞에 죄라고 고백하지만, (함부로 경중을 다투기는 어려우나) 그것이 이성애자들의 성적 타락보다 몇 백배 큰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사회적 부조리(不條理)와 부정의(不正義)와 타락(墮落)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죄악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사회적 불의와 타락 중에 동성애만 ‘유독 엄청난 죄’도 아니거니와 동성애자도 인간으로서 인권은 보장받아야 한다.



3)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동성애자 인권보장의 필요성

“‘죄’를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도 있듯이, 예컨대, 동성애의 경우, 동성애를 성경에서 ‘죄(罪)’로 규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 즉, 그 사람의 인격은 존중되고 그 사람의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동성애 자체는 사회법상으론 범죄가 아니다. 심지어 사회법상 범죄자(犯罪者)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인권(人權)은 보장해 준다. 교회와 신앙법상 죄인(罪人)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그 죄인(罪人)에 대해서는 인권(人權)을 보장해야 한다. 인권보장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한다. 우리 기독교는 공의와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률이 아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유뿐만 아니라, 장애, 연령, 종교, 인종, 학력 등 우리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차별 사유를 포괄하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장한다고 해서, 동성애가 신앙적으로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차별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받고 차별받지 않으면서 평등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것이다. 주류적 경향(남성과 여성, 이성애)과는 다른 성별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을 가진 사람이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고, 그들도 우리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평등권의 동등한 주체이다.



성(性)이란 무엇인가? 간단하지 않다. 성별 구분의 기준을 ‘신체적인 생식기’로 보면, 남성, 여성, 양성, 무성이 존재하고, ‘염색체’로 보면, XX, XY, 그리고 변형된 경우가 존재하고, 사회심리학적(Gender)로 보면 보다 다양하게 존재한다. 육체적인 징표와 사회심리학적 성(性)이 다른 경우가 존재한다.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보기 어려운 간성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도 성전환 수술을 한 경우에는 주민등록번호 정정이 법적으로 가능하다. 성적 지향은 주로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를 말한다. 아무리 교육을 통해 신앙으로 상담으로 변화시키려 해도 태생적으로 동성애적 지향을 갖고 일평생 유지하는 경우(좁은 의미의 동성애)가 있고, 환경적인 요인으로 그런 지향을 지녔다가 변화된 경우(넓은 의미의 동성애)도 일부 존재한다. 따라서 탈동성애가 100% 가능하다거나, 100% 선천적이라는 주장은 둘 다 정확하지 않아 보인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제3의 성(간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시민들이 사회법을 위반하지 않는 이상 그 존재 자체는 범죄가 아니다. 모든 시민은 각자 타고난 형상과 모습을 존중받으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불구자(不具者)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예전에는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불리며 차별을 받았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12년이 지난 지금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변화되고 있듯이, 동성애가 신앙적으로는 죄라고 해도, 법적으로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모두 다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니냐고 우려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커밍아웃 바람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동성애자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초기 현상일 뿐이고, 현실은 이성애자가 절대 다수이다. 그래서 동성애자를 ‘성 소수자’라고 말한다. 동성애자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고 동성애자도 전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개신교회는 동성애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고 앞장서서 주장해야한다. 사랑한다면서 전도한다면서 혐오하고 정죄하고 배제하고 차별하면, 그 어떤 성소수자가 진심으로 회심하고 변화되겠는가? 신약시대 예수님의 가르침, 종교개혁 이후 개혁된 교회를 따라야한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누구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고 칭찬하실까? 공의와 사랑으로 진실하게 대해야지, 압박하고 정죄하는 것으로는 아니 된다.



미국 보수 개신교인들의 이혼 반대, 낙태 반대, 동성애 (차별금지) 반대 운동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러한 운동들이 일정 기간 동안은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면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고,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도 받았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결국은 실패의 길로 들어섰다. 오히려, 쌍방 간에 혐오와 증오를 확산시켰으며, 동성애 및 차별금지 반대운동에 대한 반작용(反作用) 등에 의해 양심/종교/사상/표현의 자유가 예전보다 위축된 것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개신교는 일반 시민사회와 격리되고 다음 세대를 비롯하여 예배 참석 성도들의 숫자를 떨어뜨리면서 그 사회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크게 저하시켰다. 우리나라의 경우, 동성애 문제는 세대 간의 문제로 여겨질 정도로 세대 간에 인식 및 입장의 차이가 크다. 젊은 세대는 동성애를 개인의 문제, 자유의 영역으로 본다. 노년 세대는 동성애 자체가 익숙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성적인 타락 혹은 범죄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는 물론이고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 개신교를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코로나-19 비대면예배 논란에 못지않은, 한국교회에 위기 상황이 오고 있다.



4) 소결 – 선택의 기로에 서서

필자는, 지금 기독교인, 아니 보수 개신교인들이 전략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본다. ① 지금 현재와 같이 동성애 반대 =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② 포괄적 차별금지법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양심/종교/사상/표현의 자유 등과의 관계에서 규범 조화적으로 세밀하게 규정될 수 있도록, 특히, 종교기관/단체의 경우 예외적인 사유를 인정받는 지혜를 발휘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지금과 같이, 무조건적인 반대만 외치고 대안이 없다면, 결국은 ‘passing’을 당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필자는, 개신교가 혐오와 증오를 양산시키는 종교로 전락할 것이 아니라, 동성애가 신앙적으로는 ‘죄’라고 선포하면서도, 그분들을 껴안고 사랑으로 녹여내게 되기를 소망한다.



신실하신 성도님들께 당부 드린다. 가짜 뉴스 프레임에 갇히지 말자! 남의 말만 듣지/믿지 말고 꼼꼼하게 직접 살펴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판단하자!! 그리스도인답게, 사랑과 공의의 마음으로, 황금률을 실천하자!!!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으로 힘들어야 하는 아이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 나는, ‘동성애’가 사회법으로는 ‘죄’가 아닐지라도 신앙적으로는 ‘죄’라고 믿는단다. 그러니, 네가 동성애에 빠져들지 않기를 바란다. 설사, 어떠한 이유로 네가 동성애자가 되었다면, 지금이라도 돌이키기를 바란다. 네 안에 동성애적 지향이 있다면 신앙으로 이겨내고, 동성애자의 길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난의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앙적으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야, 네가 어떤 길을 가든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곁에 있을게,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거든, 내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동성애보다도 더 흉악한 죄를 범한, 더 엄청난 죄악들을 방치하고 있는 나를,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단다. 네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기를 바란다. 사랑한다. 아이야”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어왔다.”(마가복음 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