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연리포트14호) 존엄한 삶을 위한 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존엄한 삶을 위한 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송 진 순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객원연구원

 

 

 



인간 삶을 구성하는 조건들은 복잡다단하다. 나는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정체성의 문제와 사회 구성원으로 부여되는 당위적 사고는 수없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구성적 세계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존엄하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헌법의 기본 명제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지닌 존엄한 인간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서로 공존하기보다는 늘 긴장과 갈등 가운데 해석되어왔다. 지고의 존재인 인간은 공동체의 선과 질서를 명목으로 정교하게 짜인 사회 정치적 권력관계 속에서 억압받아왔고, 그것은 우리가 지나온 역사이자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과 연하, 그리고 하층 계급이 그러했고, 민족과 지역의 경계에서는 난민, 이주노동자, 유색인종이 그러했다. 계급, 인종, 성별, 장애여부, 출신국가, 성적취향과 고용형태 등 내면화된 정치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사회에서 억압의 구조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인간 존엄과 해방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갈등과 협력 속에서 지난한 고투를 이어왔음도 간과할 수 없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모든 존엄한 이들의 삶을 위한 또 하나의 시도로 우리 앞에 당도해 있다. 그것은 수많은 씨줄과 날줄이 상호 교차하는 권력구조 속에서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지대인 것이다. 문제는 이미 공고히 구축된 서로 다른 신념과 경계를 넘어 어떻게 차별금지법에 대한 공공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3년간 차별금지법의 발의 과정은 말 그대로 좌초의 역사였다. 그간 차별금지법 논의는 동성애 찬반 갈등으로 왜곡/축소되어 왔고, 지금도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극단적인 견해차를 좁히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차별금지를 말해야 하고 평등한 삶을 위해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한다. 차별금지법을 언급할 때는 최소한 두 가지 관점, 즉 그것은 입법절차에 따른 법안이라는 관점과 법률 제정 이전에 평등의 실현이 삶의 전 영역에 걸친 사회 구조와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지금의 대척 구도를 조망하고 유의미한 실마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차별금지법안의 발의 과정과 법안이 담아내려는 사회 전반의 인식을 짚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1. 차별금지법안 발의, 그 좌절의 역사

 

2020년 6월 29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2013년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이 폐기되고 7년 만의 재발의다. 사실 차별금지법은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이 공약은 2003년 참여정부의 12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책정되었고, 정부 출범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차별관련 전문가들과 인권단체와 함께 차별금지법 초안을 작성했다. 수차례 진행된 전문가 및 관계부처와의 간담회, 국민의 의견수렴과 공청회를 통해 수정, 보완된 초안은 2006년 7월에서야 차별금지법 권고법안으로 확정되었다. 이듬해 10월 법무부는 20개의 차별금지대상을 선정했고 이에 따라 고용, 교육기관, 법 집행 등에서 차별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할 경우 구제조치나 손해배상을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의 차별금지법안을 입법 예고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상정된 차별금지법안이었다.

 

그러나 일부 보수 기독교 세력과 재계는 동성애를 이유로 법안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12월 국회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에서는 7개의 차별금지대상(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병력(病歷), 성적지향, 언어, 출신국가, 학력)이 삭제됐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대신 입증책임을 피해자가 밝히는 것으로 변경됐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시민사회와 인권운동가들은 법안 실효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했으나 현실 장벽을 넘기는 어려웠다. 차별금지법안 작성을 위한 5년여 간의 준비가 단 2개월의 난항에 부딪히면서 난파된 채로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에 “올바른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위한 반차별공동행동”이 결성되었고, 여기서 논의된 안을 담아 2008년 1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은 차별금지대상을 22개 대상으로 확대 보완하면서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정부와 노회찬 의원이 발의한 각각의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 상정되어 제안 설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의원들은 이 건에 대해 토론하지 않았고, 결국 17대 국회 임기만료와 함께 법안은 폐기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18대 국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2011년 박은수, 권영길 의원 등 진보정당 의원들이 각각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역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계류하다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19대 국회에서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이 2013년 2월 법사위에 상정됐으나 제안 설명도 없이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당시 최원식 의원과 김한길 의원은 각각 11명의 의원과 50명의 의원의 동의를 얻어 차별금지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발의 직후 보수 기독교 단체의 법안 철회요구에 못 이겨 자진해서 발의를 철회해야 했다. 시사저널 인터뷰에 따르면 최원식 의원은 “법안 발의 이후 보수 기독교단체들이 교회에 다니는 당 의원들을 접촉하면서 법안 철회를 강하게 요구하는 등 항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회상했다. “기독교 단체들을 숱하게 만나 대화도 했으나 설득이 불가능”했고, 결국 재·보궐 선거가 다가오던 상황 등을 고려하여 비슷한 시기에 같은 법안을 발의한 김한길 의원과 얘기해 철회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20대 국회에서는 법안 발의 요건인 의원 10명을 채우지 못해 차별금지법안을 발의조차 못 했다. 2007년 발의 이후 법 제정은 유예되었고, 정부와 국회는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를 위한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는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

 

물론 차별금지법과 관련하여 진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03년 인권위가 진행한 차별금지법제정추진위원회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연령차별금지법, 남녀평등고용법, 남녀차별금지법 폐지 등의 성과를 이뤄냈다. 인권위는 개별적 차별금지법안 제정과 함께 사회 전반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층위의 차별과 배제를 예방하고 금지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보다 포괄적 차원에서 인권 의식 향상과 법안들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7차례에 걸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이 폐지 혹은 철회됨에 따라 인권 관련 법안과 조례 정책은 크게 후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사이 유엔은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아홉 차례나 권고했지만, 각 지역의 인권 조례와 인권 헌장, 즉 학생인권조례, 노동인권 조례, 성평등/양성평등 기본조례에서부터 아동복지법에 이르기까지 각 조례들은 개악되거나 폐지되었다.

 

국회

발의자 발의 일자 의결 결과

17대

정부 

 

(13개 항목의 차별금지법 발의)

2007.12.12 임기만료 폐기
노회찬의원 등 10인 2008.1.28 임기만료 폐기

18대

박은수의원 등 11명 2011.9.15 임기만료 폐기
권영길의원 등 10인 2011.12.2 임기만료 폐기

19대

김재연의원 등 10인

2012.11.6 임기만료 폐기
김한길의원 등 51인 2013.2.12 철회
최원식의원 등 12인 2013.2.20

철회

21대 장혜원의원 등 10인 2020.6.29

법사위 상정 중

(10.2현재)

21대 국회에 발의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지난 6월 장혜영 의원은 법안 발의 요건인 정족수 10인을 채우고자 300명의 의원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응답한 의원은 같은 당의 6명을 제외하고 단 4명뿐이었다. 게다가 동참한 10명의 의원은 심상정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선의원이었다. 그간 많은 정치인들이 보수 기독교계의 압력에 못 이겨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거나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반대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번에도 법안 발의에 동의한 의원들은 거센 항의 메시지에 시달렸고, 지난 7월 미래통합당 기독인회 소속 의원들은 대놓고 차별금지법안이 동성애자 보호법이라고 비난하면서 발의를 저지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성적취향과 성별정체성에 대한 반대 담론들은 차별금지법을 동성애 옹호법으로, 인간 존엄과 평등의 가치를 동성애 독재로, 기독교 탄압과 표현의 자유를 막는 악법으로 변질시켰다. 보수 기독교 단체와 재계의 반대가 진영싸움으로 번지면서 인간의 가치와 평등의 실현은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국민을 대표하여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고 법률을 제/개정해야 하는 국회의원들은 비존재로 살아가는 이들, 그래서 사회에서 차별받고 혐오의 대상이 된 이들을 위한 법률 제정에는 너무나 안일하고 무력한 태도로 일관했다. 촛불혁명으로 세워진 정부에서조차 법안 발의 과정부터 난항을 겪었다는 점은 인권과 민주의 가치에 대한 고민보다는 정치적 이권이 우선시되고, 언제든 정쟁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국회의원들의 실상을 보여준다. 상정된 법안을 토론조차 부치지 못했던 일이나 기성 정치인들이 기피하는 의제를 초선의원들이 나서서 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 역시 우리의 현실이다. 법안 통과 여부를 넘어 오로지 국회에서만 수행할 수 있는 일, 국회의원들에게 요청되는 자세는, 수동적 거부나 방관의 태도가 아니라 비존재가 된 이들에게 존재됨과 인간의 권리를 되찾게 하는 법안 마련을 위해 끝까지 고민하고 열린 자세로 토론에 임하려는 태도, 그것이 정치인이 해야 하는 일이고, 이렇게 할 때 다음 단계로의 진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 차별과 혐오의 일상화

 

법제적 차원에서의 차별금지법을 살피는 것 이상으로 차별이 작동하는 사회 구조와 인식을 살피는 것이 요청된다. 흔히 차별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겪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차별은 내가 아닌 그들의 문제이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 말이다. 최근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혐오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차별이다. 혐오는 여성, 난민, 이주민, 성소수자 등의 사회 내 약자와 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배제하는 일련의 사유와 행위를 포함한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에 따르면, 혐오는 오염물이 체내화 될 가능성에 대한 불쾌감에서 작동된다고 한다. 그것은 신체의 안전과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 관습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정동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원시적 두려움으로 정신적 차원에서 인간의 동물적인 측면을 오염된 상태로 간주한다. 따라서 혐오는 우리 몸의 안과 밖, 즉 경계와 관련된 인지적 내용을 포함하게 되고, 이것이 확대될 때 우리와 다른 특정 집단을 배척하고 낙인찍는 논리로 이용되어왔다. 그 결과 혐오는 나와 다른 존재를 객체화하고 타자화 하게 되는데, 이는 감정의 차원만이 아니라 상대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불평등한 위계 구조와 사회 정치적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차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혐오와 차별은 구별되지만 작동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즉 너와 나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 상대를 분리하고 배제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사유와 행위를 일컫는다. 이준일 교수(고려대 법전원)는 행위의 차원에서 차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차별은 기본적으로 특정인(또는 특정 집단)을 다른 사람(또는 다른 집단)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특정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대우하는 것도 차별에 해당한다. 결국 차별은 평등과 배치되는 개념이고 평등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상대적 평등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동일한 대상인데도 차등적 대우를 하거나 본질적으로 상이한 대상인데도 동등한 대우를 하면 차별에 해당한다.

 

그는 차별을 평등과 배치된 개념으로 보고 직접적인 차별과 간접적인 차별을 구분한다. 차별 행위에 대해 인권위법과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다루고 있으나 차별의 중층적이고 복합적 양상들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평등권의 실현을 위해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다른 한편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에서는 혐오표현은 현존하는 차별을 반영하는 현상이면서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 위계를 만드는 일종의 차별행위로 규정한다. 주목할 점은 혐오가 일상이 된 시대, 특정 집단만이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혐오의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타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를 반영하는 표현들―한남충(수구적인 한국 남성), 된장녀(브랜드 카페를 이용하는 여성), 맘충(아기를 양육하는 여성), 뜰딱충(노인세대), 똥꼬충(성소수자), 지잡대(지방대학) 애자(장애인), 외노(외국인노동자), 똥남아(동남아시아인), 좌빨/수구꼴똥(서로 다른 정치이념의 지지자), 개독(소통이 어려운 기독교인) 등-은 성별, 인종, 출신지역과 같은 ‘선천적 요인’이나 학력, 정치이념, 혼인(육아) 등의 ‘후천적 요인’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혐오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고 광범위하며, 누구도 혐오나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혐오가 일상이 되면서 특정 대상에 대한 사회적 인식마저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차별이 의도적일 뿐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역으로 차별의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차별이 일어나는 것은 취업, 고용, 교육 등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상황만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비가시적이고 비의도적인 삶의 전 영역에서 일어나는 차별, 사회에 편만한 인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지속적인 차별이 인간을 더욱 비존재로 만들어 간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규정되고 고착된 정상성, 혹은 편향된 인식들이 상대를 재단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위계적 권력구조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쓴 김지혜 교수는 차별의 구도에서 권력을 가진 지위와 그렇지 않은 지위가 복합적이고 교차적으로 얽히고 입장이 뒤바뀌는 점에 주목한다. 여성이면서 이주민 비정규직의 경우 혹은 보수 성향의 정치 이념을 가진 노인의 경우, 중첩된 차별 피해를 받게 된다. 물론 언제든 차별받는 사람은 다른 상황에서는 차별을 가하는 주체로 역전되기도 한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차별은 자신의 다면적 정체성과 연결되는 다면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차별을 하나의 쟁점을 중심으로 특정 집단 대 집단의 구도로 바라보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차별이 한정된 자원의 분배를 둘러싸고 대립되는 집단 간 이해관계로 해석될 때 차별의 본질적인 성격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는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하나의 규칙으로서 개인의 어떤 부분의 정체성이 문제가 되든 상관없이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사람을 구분하여 다르게 보는 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어떤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제정될 이유는 명백하다. 헌법에 근거한 인간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사회가 빚어낸 정상성의 신화 그리고 이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과 인정 투쟁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분명한 한 가지를 우선으로 삼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다. 너로 인해 나의 일자리가 박탈당한다는 생각, 다른 학력과 다른 출신 지역을 가진 네가 나와 동등한 자리에 있다는 불쾌감, 인종과 종교가 다른 너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편견, 경제적으로 열악한 너는 게으르고 비굴하다는 오해, 신체적으로 불편한 너는 지적 사고나 의지가 약하다는 오만함, 성적지향이 다른 너는 생활이 방만할 거라는 그릇된 재단, 나이 많은 너는 잉여적 존재라는 비하감이 이 사회에서 타인을 어떻게 지우고 예속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쟁점이 되는 부분은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들은 “헌법이 존재하고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있는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한가? 법 제정이 된다면 동성애를 삭제하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상희 교수(건국대 법학전문대학)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헌법은 자신을 구체화하는 법률을 매개로 그 기본 가치를 실현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인신의 자유는 이를 구체화하는 형사소송법을 필요로 하듯이, 마찬가지로 차별금지법은 헌법이 추구하는 평등원칙을 구체화하여 현실에 집행하는 법”이다. 이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법적 규율이 가장 절실한 필요 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만 차별을 금지하는 법으로 결코 잉여의 법이나 옥상옥의 법이 아니다. 이것은 헌법과 개별법의 매개로서 차별이 일어나는 곳에서 우리 삶을 침탈하는 편견을 정면으로 다뤄 치유하는 기본법”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성적지향과 성정체성을 삭제한다면, 그것으로 가해지는 차별을 묵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차별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차별금지법이 다루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 차별에 대한 최소한의 예방과 금지를 내버리는 것이다.

 

 

  1. 경계와 차별을 넘어선 곳에서

 

기독교의 처음 자리, 이천 년 전 예수는 무엇을 선포했는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절박한 선포는 유대의 식민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1세기 로마제국이 지중해 전 지역을 정복하면서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가 되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부패하고 사제 계층은 타락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인 야웨 하나님과 유대민족의 계약관계는 유대인들에게 사랑과 공의에 기반한 거룩과 정결의 삶이 아니라 율법적 형식주의와 관행만이 남은 예속된 삶을 강요했다. 로마제국, 유대 당국 그리고 성전에서 필요한 재정과 노역은 전적으로 유대 백성의 몫이었고, 지속되는 전쟁 상황은 피지배 계층에 대한 폭력, 약탈 그리고 착취로 나타났다.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팍스 로마나는 폭력과 무질서의 얼굴을 한 야만의 시대였다.

 

이스라엘 역사 한가운데서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먼 미래의 급작스럽게 찾아올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곳, 아비규환의 민중의 삶에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는 유대인을 거미줄처럼 옭아매는 수백 개의 율법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간명한 진리를 전했다. 자기 딸을 귀신으로부터 구원해보고자 예수를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을 주인 상을 탐하는 개라고 꾸짖으면서도 예수 하나만 보고 달려온 여인의 청을 두말하지 않고 들어주었다(막 7:25-30).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통 받는 여인이 예수의 옷깃을 잡아 치유된 것을 보고 믿음이 너를 구원한 것이라 선포했고(5:25-34),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면서 그녀를 복음의 메신저로 삼았다(요 4:7-42).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적으로는 이방인 혹은 낙인찍힌 자였으며, 종교적으로는 죄인이었고, 육체적, 심리적으로는 고통 받는 자들로서 경계 밖으로 밀려나 사회에 편입되지 못 했다는 점이다. 사회, 정치, 역사 그리고 종교라는 중층으로 교차되는 구조 속에서 내부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비존재가 된 자들, 그래서 항상 차별이 당연시 된 자들이었다. 예수는 이들에게 율법의 기준이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운운하며 조건부 구원을 선언하지 않았다. 혈과 육을 넘어 믿음과 은혜 가운데 거하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라고 명했고, 이를 고백하는 이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선포했다. 예수는 가르침을 통해 세상의 합리성과 효용의 가치를 뒤엎고, 치유기적과 축귀를 통해 제국의 폭압적 정치와 종교의 엄혹한 관행을 드러냈고, 인간을 비존재로 만드는 상황에 분개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임한다는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예수가 경계 밖에 있는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이야기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수많은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사회 속에서 일상이 된 차별은 교육으로 혹은 법률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인간 존엄과 가치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사회가 이러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의 문제이고, 논쟁과 대화 속에서도 이러한 가치가 삶으로 이행될 수 있는가 라는 실천과 삶의 문제이다. 예수가 목숨을 내어 줄만큼 과감하게 그를 하나님의 구원과 진리로 이끈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만큼이나 세상에서 고통당하고 폭력 앞에 스러지는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함께 했기 때문이다. 율법적 판단과 세속적 가치가 우선이 되지 않고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고,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귀한 피조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명목상의 지고의 가치는 예수가 경계 밖에 있는 자들에게 한발 가까이 나아갈 때, 그에게 신성모독과 혹세무민이라는 죄를 덧씌웠고 종국에서 세상 밖으로 그를 밀어내 버렸다. 정상성이 아니라 경계와 차별이 넘어선 곳에 구원과 은혜가 임한다는 것이다.

 

상황이 복잡할수록 생각은 단순해야 한다. 상대를 차별하고, 인간 존재를 무화시키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과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차별금지법은 인권, 법제화, 사회적 합의 등 모든 거대 담론이 지나는 곳에서 힘겨운 발걸음을 떼는 중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존엄하다. 그리고 평등하고 자유롭다. 헌법에서 세계인권선언문이 말하기 전에 우리는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러니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어야 하겠는가? 수없이 정교하게 엮어진 정상성의 신화라는 거미줄을 걷어내고 내 옆에 있는 인간을 마주하며 친구로 이웃으로 그리고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요청하겠는가? 인간다운 삶은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상대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 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존엄하듯, 너도 존엄하다. 내가 너와 다르듯이 너도 나와 다르다. 차별금지법은 존엄한 삶을 위한 도약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