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십자가의 신비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19 21:42
조회
1007
십자가의 신비
- 김기석 신부(성공회대학교)

성서본문: 마르코 15: 22-26

오늘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십자가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꼭 교회뿐만 아니라, 장식용 문양으로도 자주 쓰입니다. 거리에서 보면 아가씨들의 목걸이로도 다양한 모양의 십자가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를 그냥 특별한 느낌 없이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십자가는 아주 끔찍한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고대사회에서 가장 혹독한 형벌이었습니다. 사형수 중에서도 제일 지독한 죄를 지은 죄수에게만 내렸던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길고도 고통스럽게 죽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죽음의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해 일부러 고안된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십자가에 못 박힌 손발의 상처 때문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따릅니다. 그리고 뜨거운 태양빛에 몸은 달구어지고고, 손발에서 흘러나간 피 때문에 엄청난 갈증이 목안에서 타오릅니다. 또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숨을 쉬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위로 들어 올려야 호흡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못 박힌 손과 발에 힘을 주어서 손발이 점점 더 찢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계속해서 자기 몸을 들어 올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숨쉬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몸 안에 있는 에너지가 다 고갈되어서야 멈추게 되고 질식으로 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 때 빨리 질식해서 죽도록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은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행위였다고 합니다. 또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 외에도 구경꾼들의 조롱과 야유가 죄수들에게 퍼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 세상 무엇보다도 심한 고통과 절망을 겪으며 죽어가야 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병사들이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의 강도도 예수님의 양 쪽 옆에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라고 신명기 21장 23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가 메시아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에 달린 강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따졌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라며...? 그러면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지나가던 사람들도 이렇게 모욕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 내려와 보아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도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저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 말고. 저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또 제가 하느님의 아들입네 했으니 하느님이 원하시면 어디 살려 보시라지.”

이와 같이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모욕하고 놀려댔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메시아, 즉 구세주라고 믿던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십자가 형벌이 너무도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의 상징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십자가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형벌이라는 육체적 고통과,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절망이 함께 뒤엉킨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라고 부르짖었는데, 이것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정말로 고통스럽고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야 했을까요?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온다는 말인가?” 여러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먼저 생명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요즘 봄이 되니 여기 저기 경치가 달라집니다. 꽃들이 피어나고 나무에는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모두다 생명이 만들어내는 변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형태의 생명체를 볼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지구상에 생명이 출현한 것은 대략 36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지구 위에 나타난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직까지 정확히 모르지만, 이 지구상에 한번 출현한 생명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기고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번식해 가고 있습니다. 생명은 더불어 살아가면서 지구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습니다. 만일 이 지구에 생명이 하나도 없다면 이곳은 무척 쓸쓸한 장소일 것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특징을 ‘대사’와 ‘생식’과 ‘진화’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명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생명은 모두 더 많이 먹으려 하고, 더 많이 번식하려 하고, 더 우수한 종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생명과학자들은 생명이 가진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고 지적하는데, 그것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모든 생명은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 하고, 고통을 받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 죽음과 고통의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갑부라 하더라도, 아무리 막강한 권세를 가진 권력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높은 명예를 얻은 사람이라 하여도, 결국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생명은 죽음을 피하려 하지만 사실 죽음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지금 나뭇가지마다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데, 지난 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새싹이 돋아날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저 나무들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간다면 새로운 나무는 태어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선조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우리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생명과 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죽음이 있어야 생명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더 많이 차지하려 하고, 더 많은 후손을 남기려 하고, 더 우월한 종이 되어 다른 생명 위에 군림하려고 기를 씁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모두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생명이 원하는 것을 다 얻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모두가 똑 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더 많이 먹으려 하고, 더 많은 새끼를 낳으려 하고, 더 뛰어난 종이 되기를 원하는데, 이 세상은 그런 원하는 것을 다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설령 채워 주었다 하더라도, 채워주고 나면 또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결국은 채워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고기 한 마리가 수천~수만 개의 알을 낳지만, 그중에 어른 물고기로 살아남는 것은 평균적으로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수천개의 알이 모두 다 어미 물고기로 성장해서 알을 낳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성공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그 물고기로 덮여 있는 지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그런 장면을 바라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물고기가 그렇게 번식과 생존에 성공한다면, 인간이나 다른 동물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행운은 수많은 희생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은 모두 다른 생명의 죽음의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와 함께 생명을 누리지 못한 다른 생명체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대단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런 정도의 우리의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명 뒤에 가려진 수많은 죽음과 희생과 고통을 알려 주는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아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모든 버림받은 생명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더 많은 권세를 얻기 위해, 더 높은 명예를 얻기 위해, 기를 쓰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것을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들로 나누어져, 얻은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로서 떠받들어지고, 얻지 못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로서 남들로부터 괄시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에 따라 돈과 명예와 권력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는 결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죽음을 통해 참다운 생명의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 삶에 내려주신 하느님의 축복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와 달리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음의 잠든 이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하다면 장애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가난하여 고생하는 이들의 처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성공한 사람이라면, 실패한 더 많은 사람들의 절망을 보듬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햇볕 아래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전쟁과 폭력의 와중에서 울부짖는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처지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아직도 많은 굶주린 이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생명의 고통과 아픔과 희생과 결핍을 헤아리고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마음,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