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주님의 기도 (채수일 목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5-02 21:45
조회
1390
2007년 5월 둘째 주일

주님의 기도
(본문 : 마태 6,5-15/ 누가 11,1-4)

채수일(한신대교수, 기사연기획위원장)


1. ‘주님의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예배할 때마다 함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교에 처음 입교한 사람들이, 또는 견신례 교육이나 세례교육을 받을 때 배우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치신 내용이 알려져 있는 유일한 기도라는 점에서 더욱 소중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곳에 전승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그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누가 11,1). 세례 요한은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스스로 기도를 열심히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열심히 가르쳤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기도했으며 어떤 내용의 기도를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마태 6,5). 마태복음에 따르면 ‘주님의 기도’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에 반대되는 기도의 방식, 곧 ‘골방에 들어가’, ‘중언부언하지 않는 기도’를 말씀하시는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2. 그렇다면 ‘주님의 기도’는 무슨 기도일까요?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이것이 ‘나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갈릴리 출신의 청년 예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함께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불교도도 무슬림도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다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만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기도’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기도하는 사람들과 구별됩니다. 아니 ‘주님의 기도’를 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라는 것은 이 기도가 한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예배 가운데서 함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우리의 뜻을 전향시키기 위한 기도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주님의 기도, 한 문장씩 드려가면서 그 뜻을 생각해보겠습니다.

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호칭합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호칭되는 전통은 유다교에는 낯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로,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삼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행위나 믿음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고 느끼더라도, 비록 우리가 늘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지 못하더라도, 심지어 우리가 그리스도인처럼 믿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인 아버지에게서 겪은 어떤 긍정적인 경험들을 하느님께 투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아버지와의 경험이 나쁜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기 곤란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은 모든 인간 아버지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마 23,9).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좁은 가족 그 너머를 보라고, 세례를 통해 인종과 민족과 나라를 초월하여 새로 이루어진 참 가족, 곧 교회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주님의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계시는 곳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는 주소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늘’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범신론적인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특정한 곳에 계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의 계약, 이스라엘 땅, 예언자, 성전, 나사렛 예수, 사도들, 세례와 성만찬 등 특정한 곳에 계십니다. 하늘이란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통치 영역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하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느님이 계신 곳이며, 그 분의 오른 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 곳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하느님을 우리 맘대로, 우리 취향에 맞게 길들일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느님을 가두어 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은 높아서 넓은 시야를 줍니다. 우리를 더 잘 살펴보시기 위하여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것입니다. 시편 33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들을 낱낱이 살펴보신다. 계는 그 곳에서 땅위에 사는 사람을 지켜보신다’(시 33,13-14).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은 지금 주님의 기도를 함께 하고 있는 공동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역사에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았던 모든 신앙의 조상들과 함께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마틴 루터, 본회퍼,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님 등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우리’에는 모든 성도들, 신앙 안에서 죽었고 이제 하늘에서 영원히 하느님을 즐거워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말주변이 없다고, 기도를 잘 못한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의 조상들이 우리의 기도에 이미 합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느님은 이름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형이상학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격적이고,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며, 이름을 가진 분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즉 하느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은 인간의 관념이나 변덕이나 요구에 좌지우지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주권자, 자유로우신 분,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이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요청인 동시에,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오용하지 않겠다는 서약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5. 나라가 임하옵시며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정치적인 기도라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에 사탄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주면서’, 예수께서 그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세계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고 사탄은 말합니다(눅 4,5-8). 세계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사탄의 것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고 말씀하셨고, 세상 나라를 지배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새로운 나라,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하느님의 나라라고 불렀던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함께 기도할 때, 깜짝 놀랄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과연 놀라겠습니까? 세상 나라의 권세자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면 없어질 나라의 권세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가치가 모두 역전되는 나라,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화평하게 하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 있는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의 통치가 확실하며, 장차 하느님의 통치가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6.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앞에 충만하게 드러나기를 갈망하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통치가 분명하고 힘 있게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간절한 염원입니다. 루터는 이 구절을 ‘Dein Wille geschehe, wie im Himmel so auf Erd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당신의 뜻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빈번하게 기도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우리의 뜻은 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곳은 그 어디도 아닌 바로 이 땅입니다. 세상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 다른 곳이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한 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게 합니다.

7.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느님께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양식처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매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만나를 선물로 주시지 않았다면 굶어죽고 말았을 이스라엘 백성처럼(출 16,1-36),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매일의 평범하고 필수적인 선물들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밥을 먹고 사는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삶이 선물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루하루 밥에 의존하고 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구원은 물질적입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구합니다. 양식은 공동체적 산물입니다. 양식은 혼자 힘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와 배달 운전기사, 가게 일꾼 등 모두의 공동노력이 양식을 만들어 냅니다. 양식은 나누어야 합니다. ‘밥이 하늘’에서 시인 김지하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먹는 것’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의 은혜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밥은 나눠 먹어야 한다고 결단합니다.

8.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제 우리는 ‘주님의 기도’ 가운데 기도하기가 가장 어려운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영어와 독일어 번역은 순서가 다릅니다. ‘Forgive us our sins as we forgive those who sin against us’, ‘Vergib uns unsere Schuld, wie wir vergeben unseren Schuldigern’. 다른 간구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태가 ‘죄’라는 단어를 ‘빚’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없애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없애주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원수를 용서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원수는 미워해야 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는 보복해야 하는 것이 인간적인 정서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 일어난 불의는 원상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이미 죽었고, 우리는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맞은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고, 마음에 남겨진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겠지만 흔적은 남아있고, 우리는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처받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한 불의와 다른 이들이 저지른 죄를 복수하는 것이 정당한 일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 신학자 몰트만도 ‘복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화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화해는 굴종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불의는 보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와 질서가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제와 구조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불의를 당하면 자존심은 상처를 받고, 상처받은 자존심은 복수를 통해 치유받고, 또 굴욕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나 복수를 하지 못할 경우 피해자는 병들게 됩니다.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용기가 없는 자신을 증오하거나,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법체제를 원망하면서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한 불의에 대한 복수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43-48). 이렇게 해야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인간적 가능성이 아닙니다. 용서할 수 있는 용기는 우리가 용서받은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에서 나오는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용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먼저 용서받은 것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의 용서는 우리에게 해를 가한 다른 사람을 향한 관대함의 행위이기 보다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하느님의 용서를 빌고, 또 용서받았음을 감사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용서하려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용서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다른 이들로부터 당한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한사코 용서와 사랑을 베풀기를 거절합니다. 용서는 결코 자연적인 것, 인간적 가능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날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9.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대항해 싸우는 권세에 굴복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엡 6,10-13).
그러므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단순히 우리의 개인적 결점이나 흠이나 사소한 유혹이나 허물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맞서는 것입니다. 악은 거대하고, 우주적이고, 조직적이고, 교묘하고, 광범위하고, 실재하는 존재입니다. 악의 권세는 결코 악한 모습니다 위압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해 나타난다고 본회퍼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운명의 지배자가 아니며,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중보기도 없이는 시험을 이겨내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악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27).

10.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주님의 기도는 다시 정치적인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기도는 곤혹스러우리만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라고 기도할 때, 세상 모든 나라의 권세자들은 마땅히 긴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밑바닥 사람들이 높아지고,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래로 보내지는 긴장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소유한 권세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세상이 제안하는 헛된 영광에 ‘아니오’를 말할 수 있게 합니다. 순교자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느님의 것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1. 아멘.

‘아멘’은 ‘옳소이다’ 혹은 ‘그렇게 될지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이는 참되다’라는 뜻의 성서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마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칠 때,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 순간 그 기도에 동의를 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기도가 참되다고 최종적으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마지막도 ‘아멘’으로 끝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함께 하느님께 바칠 때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인간적 성향을 거슬러 전적으로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작은 삶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멘’을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