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버마의 최근소식 (2009년 2~3월)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3:47
조회
990
※죄수 석방은 지나버린 소식이다.
파스칼 꾸-뜨웨

2009년 2월 23일 (버마민주의 소리 방송국) 금요일 버마정부에 의해 버마에서 정치범 석방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거기에 있어서는 안된다.

2월 21일 눈보라가 오슬로를 강타했다. 버마의 군사정권은 6,313명의 자비의 석방을 발표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엔 뉴스가 아니다.

둘 사이의 유사성은 과거에 현지인들을 돌보지 않는 각각의 국가들에서도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후자의 사건은 인위적이며, 그 비극은 막을 수 있음에도 동시에 침울하다.

나의 첫 번째 반응은 : 나는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죄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국가평화발전위원회는 9,002명의 죄수들을 2008년 9월 석방했고, 그들 중 정치범의 수는 10명도 채 안되었다. 이번엔 20명가량의 정치범이 석방 되었다. 또다시 새로운 것은 없었다. 전국에 2,000명 이상의 정치범이 아직도 그들의 가족을 떠나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버마 군사정권의 한 가지 변치 않는 특색은 숫자와 이름에 대한 망상이다. 만약 당신들이 주에서 관리하는 신문을 읽고 미얀마 텔레비전을 본다면, 당신들은 나라의 절반이 매일 어둔 밤을 지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전기가 정부에 의해 사용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로 버티는 동안 얼마나 많은 쌀이 수출되고 있으며 또한 어떤 사람들은 주정부의 공장(사실, 그들의 친척이나 동료들에 의해 운영되어지는 회사들이 소유하고 있다.)에 조사받으러가고, 필수 교육들을 받는다. 만약 그들은 할 수 있다면 매일 사람들이 숨을 쉬는 것만큼, 거의 불가능 할 정도로 국가의 한 가지 또는 다른 법을 어기고 있는 현실에 놓여 있다. 만약 외국환을 소유한 것이 발각되어지거나 외국의 친척에게 말하거나 수도승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죽은 자를 매장하거나 한다면 반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그것은 잔인한 사실이다. 찰스 디킨스는 ‘애통하다’라고 했다.

정치범뿐만 아니라 버마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을 찾으러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 또한 불공평하게 수감되고 있다. 예를 들면, 벌목이나 채광을 하는 회사가 그들이 맘대로 나라를 파괴 하는 것을 허락 받고 있는 동안에, 마을 사람들은 장작을 모으기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돈을 내지 못했을 때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아대는 총을 들고 다니는 군인들에게 폭력을 동원한 위협을 당하며 몇 백 또는 몇 천 키앗(화폐단위)을 요구당하고 있다.

버마는 살인자, 도둑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정신을 파괴하는 참견하기나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나라이다. 지금부터 국제적 공동체, 특별히 유엔은 박애와 관대함의 요구에 대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권력을 가지고 있으려고만 하며 아무 일이나 저지르는 무자비한 정권과 협상을 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유엔이 어떠한 압력도 없이 단지 일반적인 만남과 대화만 한다면 평의회의 동기를 조장하는 꼴이 될 것이다.

국제 노동자 단체에 버마의 강제 노동을 보고하려다 감옥에 갇힌 랑군 산차웅 민주국민연대의 회장인 뗏 웨이는 석방 때, 그는 그의 석방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국제단체나 이웃 국가의 압력이 있을 때만 평의회에 의해 몇몇의 정치범들을 석방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적은 수의 정치범의 석방은 작년 국제사회에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선전할 때와 지금 2010년 선거를 추진하는 이러한 때와 같이 그들이 정치적 이익이 있을 때 이루어졌다. 평의회는 가장 적은 양과 가장 저급 질의 것을 사람들에게 주고 그들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취하는 것 같다. 다른 죄수들의 석방 숫자를 확인할 때, 그 숫자가 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작년에 9,002명의 죄수 또는 올해 6,313명이 실제로 석방되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평의회는 한번도 각각의 감옥에서 풀려진 죄수들의 리스트를 밝히거나 독립 그룹에게 석방하는 것을 감시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

버마민주의 소리 방송국이 국회의원선거때 자우 민트 마웅 박사의 독녀인 만달라이 아마라퓨라에게 그녀의 아버지의 석방에 대한 그녀의 느낌을 물었을 때, 그녀는 슬픔과 기쁨의 목소리로 “나는 지금 거의 21살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아본 적이 없어요. 제 아버지는 제 졸업식에 돌아오신다고 종종 말하곤 하셨죠.”라고 말했다. 1990년 그가 수감될 때 그녀는 채 몇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과 자식들이 이 해피엔딩의 뒤에서 오늘밤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들의 슬픔을 끝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백성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정치적 의지이다.

그때에 오슬로와 노르웨이에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고, 강추위 속에도 불평 없이 평상시와는 다르게 늦는 기차를 쇼핑하러 가기 위해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것을 쓰고 있을 때 내가 모르는 사람들은 버마에서 갖가지 이유들로 인해 아직도 감옥에 있을 것이고 맞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나는 단지 노르웨이 정부가 한번에 몇천명의 수감자들을 석방하는 때와 버마에 눈보라가 내리는 때가 바뀌는 것이 버마를 위해 더 좋겠다는 것을 믿는다.


※암네스티는 최소 23명의 정치범을 인정했다.
2009년 2월 23일 (버마민주의 소리 방송국) 정치범을 위한 원조협회와 다른 보고에 의하면 버마 군부의 최근 사면의 6,316명의 석방 중에 최소 23명의 정치범이 확정했다.

어제 석방된 이들 중에는 탄 스웨의 딸의 결혼식 불법 VCD를 소유한 이유로 사가잉의 카라이 감옥에서 2년과 4년 6개월을 복역한 틴 흐타이와 탄 흐툰도 있었다.

88 세대 학생의 리더인 마키의 형제인 자우 나잉 흐트웨이(또는 케네쓰로 알려진)도 또한 타웅-느구에 4마일 강제노역 캠프에서 풀려났다.

다른 정보에 의하면, 비합법 연합을 이유로 감옥에 갖혔던 쉐 키인-캬욱 키로부터 온 4명의 카렌 주민들도 같은 캠프에서 풀려났다.

만약 아웅 산 수지의 개인 비서인 윈 흐테인이 석방된 사람들 중에 있는지 보러 어제 감옥에 갔던 사람들에 따르면 킨 니운트에 있는 군 정보국의 9명의 전직 공무원도 카따르 감옥에서 풀려났다.

만달라이 구역의 아마라퓨라로부터 온 국민 의회 대표자인 자우 미인트 마웅 박사는 카친 주의 미잇키나 감옥에서 토요일에 형기를 4년 남겨놓고 18년의 수감생활 만에 석방되었다.

그의 아내는 민주화 기구 촉진을 위한 모에 니인 국가 연합의 멤버인 페 세인, 푸-타오의 틴트 스웨, 아웅 산 수지의 카친 주 여행 후에 체포된 그녀의 카메라맨 또한 미잇키나에서 석방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거의 19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석방되었다는 것에 너무 기뻐서 그녀와 전화로 이야기를 할 때 말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전화로 그에게 말할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그는 단지 내 질문에는 대답했으나 더 이상은 말하지 못했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의 선고당시 한 살이었던 그의 딸은 그전에 한 번도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어서 그를 보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이번 석방에 포함된 다른 정치범은 산 차웅 민주국민연대 대표 뗏 웨이, 카마리웃 전국 버마 학생연합회 회원인 툰 툰 그리고 아라칸 자유당 회원인 카잉 바 민트이다.

통행금지를 어긴 이유로 2003년 체포된 산 차웅 구층탑 수도원의 승려들 5명도 또한 풀려났다.

민주국민연대 대변인 니안 윈은 많은 정치범들이 풀려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실 암네스티에 인정된 이렇게 많은 정치범들이 정부의 석방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을 보게 될 줄 기대하지 않았다.”

“신문에 실린 죄수 석방에 대한 정부 보고서에 그들은 민간 죄수들을 사용해 왔으나, 2010년 선거에 우리의 이슈는 정치범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암네스티가 수감자들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정부는 말한다. - 그러나 우리는 단지 소수의 정치범만이 포함되었다고 본다.”

버마 군사 정부는 미국의 인권 특별 보고자인 토마스 오제아 퀸타나의 6일간의 방문이 끝나는 날인 금요일에 6,313명의 죄수를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퀸타나는 정부에게 네 개의 인권 목표중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2010년 선거에 앞서 정치범의 진보적인 석방을 위해 불러졌다.

정치범을 위한 도움 연합에 따르면 19명의 정치범은 6,313명의 특사 가운데 포함되었다.

최근 죄수 석방에도 불고하고, 2,000명 이상의 정치적 억류를 받는 사람들이 계속 잡혀있고, 정치적 활동가들은 보통 억류되고, 판결을 받고, 먼 교도소로 이송되어진다.

학생 활동가인 데 니에인 린의 어머니는 인세인 감옥에서 15년간의 수감기간 동안 수발을 들었는데, 그녀가 아들을 보기 위해 토요일에 감옥에 갔을 때, 그는 사가진 구에 있는 칸디 감옥으로 이송되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목요일에 아들을 면회했을 때, 그가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데 니에인 린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아들은 나에게 그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으나 언제 어디로 그들이 보낼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정권은 국제 인권 법정에 회부되어야 한다.
2009년 3월 2일 (버마민주의소리 방송국) - 버마 정부는 재난 상황에 대한 정부 대응에 대한 첫 번째 독립된 보고서에 태풍 나르기스 사건의 인권 문제로 인해 국제 인권 법정에 회부되어져야 한다.

폭풍 후 : 2월 27일 배포되었던 델타로 부터의 소리에서 말하길 주 평화 발전 평의회는 폭풍 피해자들에게 구호를 방해했고, 구호 봉사자들을 체포했으며, 폭풍에 따른 정확한 정보를 엄격하게 자제시켰다.

“버마 군사 정권은 구호 물자를 몰수했고, 재건 운동에 어린이를 포함한 강제노역을 사용했다” 존스 홉킨스 블룸버그 공중위생학교의 공중위생과 인권 센터의 감독인 크리스 베이어 교수가 말했다.

그 보고서는 존스 홉킨스 블룸버그 공중위생학교의 공중위생과 인권 센터와 버마의 응급 구조팀에 의해 공동 발표 되었다.

그 보고서는 이번 사건의 책임은 희생자들이 기본적인 구조를 받지 못하게 만든 것에 대해 인간애에 대한 범죄일 것이다.

정부는 태풍에 의해 가장 피해를 봤던 지역 몇 곳의 구조 활동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다.

라퓨타 마을의 태풍으로 인한 난민이 말하길 정부에 의해 구조물자는 일요일날에 대부분 재분배 된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의 집들을 재건축하는 일을 단지 신문 사진에 찍혀질 정도만 간단하게 하고 쉰다. 지역 주민들은 모든 비용을 자기 돈으로 해야 한다.” 그가 말했다.

사건의 발생은 계속해서 표면화되었다.

올해 1월 지곤 구역의 나친차웅 마을 에서 온 지역주민은 폭풍으로 인한 학교의 피해에 제건축 일을 위해 시멘트를 나르도록 강제노역 당한 걸로 보고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5,000키앗을 내야한다.


※본보기로써의 지도 - 키알신
2009년 3월 2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지금은 2009년 이다. 시간은 흐르고 새해는 우리의 앞에 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2010년은 버마의 모든 국민들의 중요한 결정과 함께 금방 올 것이다.

2010년은 멀지 않다. 이 해에는 나라의 안팎과 민족의 사람들과 버마를 위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우리는 계획된 선거에 대한 생각을 빼어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린 척하고, 몇몇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군사 정권은 국민들의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2010년 선거를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버마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우리중 상당수는 2010년 선거에 반대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에 조용히 그들의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리고 조용히 있다. 어떤 사람들은 2010년 선거는 그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민주 운동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군사 정권에 의해 어쨌든 상황을 발전시킬 것이다.

그래서 망명한 민주운동의 상황은 어떠한가? 어떻게 그들은 다가오는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중요한 시기에 그들의 전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사실, 우리는 서로 싸우고, 서로 음해하고, 서로 더욱 더 약하게 만드는 민주 운동의 지도자에 대해 많은 뉴스를 듣는다. 이것은 그들의 개인적 이득을 위한 버마의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의 목적을 위함이나 그들을 바보스럽거나 위엄 없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을 수 있고 혁명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를 찾고 있지만 찾을 수 없다.

지도자는 젊은이들과 신세대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젊은이들, 신세대들, 지도자들 그리고 국민들- 모두를 위하여 우리의 독재 체제를 바꾸고 버마의 민주화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지도자들은 1988년 전국적인 시위운동에 가담했고, 버마 국민들을 위해 그들의 삶을 희생했으며, 그들의 연대감을 젊은 세대와 서로 간에 함께 나누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운동을 위해 그들이 했던 모든 것에 진정으로 감사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진정으로 존경했던 사람들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여 싸우기보다 서로 싸우고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찾거나 다른 이들을 무너뜨리려 노력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들은 쓸데없는 문제에 힘을 낭비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 믿음과 이해는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 2010년 선거에 대한 어떠한 준비도 볼 수 없으나 우리는 지도자라 불려지는 사람들의 몇몇 활동들은 볼 수 있다. 난민들의 재정착 프로그램에 대한 이슈는 잘 알려져 있다. 지도자들 중에 상당수는 재정착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의 가족과 아이들을 해외로 보내는데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운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몇몇은 사실 그들 자신을 위해 고소득 직업을 찾기 위해 전념하고 있다. 이 지도자들 중에 일부는 정규 정당은 팽개치고, 비싼 술과 맛있는 음식엔 돈을 쓰지만, 기부를 위해 돈이 필요할 때는 그들의 지갑에서 100바트도 쓰지 않는다. 그들의 공약에 대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러한 사람들은 확실하게 고료를 주지 않으면 신문을 위해서나 웹사이트 또는 회보에 논설을 쓰지도 않는다.

버마의 인권, 민주화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체제 안에서 사람들은 실제 민주적 원칙을 실시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체제는 하향식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나 젊은 사람들의 참여를 환영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나 현실에서 그들은 결정을 내리는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우리는 독재 시스템이나 군사 정권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사실 우리는 민주화 운동 속에 우리의 지도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그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규칙적이고 풍족한 급여가 있는 지위를 잃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여기 우리 지도자들에게 질문이 있다. 운동이 단지 당신에게 개인적 이득을 얻는 길 밖에 없는가? 나는 하버드나 옥스퍼드 같은 유명한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많은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학업이 끝난 후에 버마의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변방으로 돌아올 것인가?

2010년은 아주 가까이 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싸우고 서로의 약점을 찾는데 시간을 버리면 안 된다. 게다가 버마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일해야 한다. 우리는 군사 평의회의 약점을 찾아내야만하고 우리 자신을 잘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운동에 많은 지도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운동을 위해 그들의 일과 삶을 정말로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상황이 나를 행복하지 않게 만든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좋은 지도자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생각을 하는 다른 독재로 결말이 날 것인가?

버마의 변화를 위한 우리의 투쟁을 하는 동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들과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우리를 위해 일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들이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들의 삶을 희생하는지 자랑스러워하고 싶다. 그러나 만약 상황이 이렇게 지속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나라의 나은 미래를 위해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군사정권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어딜 가든 부끄러움을 느끼며 우리는 잘 알려진 민주화 운동에 소위 우리의 지도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길 원하지 않는다. 버마의 한 젊은이로써, 나는 버마의 지독한 유산을 새로운 세대에게로 넘겨주지 말도록 우리의 지도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제발 우리세대를 위해 좋은 예를 보여 주시기를... 그런다면 우리는 당신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싶다.


※10년 이상 형을 받은 팝스타
2009년 3월 6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잘 알려진 대중 밴드의 간판 가수가 전자 법으로 인해 다른 두 사람과 같이 10년 형을 언도 받았다.

쉐 탄진(‘골든 멜로디’)의 간판이자 88세대 학생 멤버인 윈 마우는 3월 5일 형을 받았다. 다른 88세대 학생 멤버이며 바웅 바웅으로 알려진 자우 자우 민 또한 아웅 자우 우와 함께 형을 받았다.

가장 최근 선고는 윈 마우는 총 17년을 자우 자우 민은 총 12년을 그리고 아웅 자우 우는 총 22년을 복역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세 법정은 인세인 교도소의 특별 법정에서 열렸다.

그러는 동안 태풍 나르기스 취재로 인해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된 위클리 일레븐 잡지 기자인 키아우 키아우 탄트는 작은 감방 안에 갖혀 일반적인 운동도 거부된 이후 호흡곤란을 이야기 했다고 그의 누이인 탄마 탄트가 말했다.

키아우 키아우 탄트는 에코비젼의 기자인 에인트 카잉 우와 함께 체포되었다.

3월 3일 형을 받은 텟 르윈 박사는 아라칸 주에 있는 시테웨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미오 민 와이는 북 버마의 칸디 교도소로 이감되었고, 미온 민은 아라칸 주에 있는 키아욱퓨 교도소로 보내졌다고 인세인 교도소 측근에서 말했다.

법정 모욕죄로 추정되어 4달간 감옥에 갖혔었던 아웅 테인과 킨 마웅 쉐인, 두 랑군 대법원의 변호사는 오늘 풀려났다.

재판 방해죄로 6개월간 감옥에 수감되었던 니 니 흐트와이라는 젊은 변호사는 4월에 풀려날 예정이다.


※행진하는 사람들은 여성 정치범들의 석방을 외친다.
2009년 3월 9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추방당한 버마 여성 활동가 그룹인 버마 여성 연맹은 버마의 모든 여성 정치범의 석방을 위해 외치는 세계 여성의 날로 정했다.

인도, 방글라데쉬와 태국에 있는 버마 여성 연맹은 갖혀 있는 여성 활동가들을 위해 사회 모임, 토론 포럼과 결속을 보여주는 행진하는 것을 어제 조직하였다.
버마 여성 연맹의 회원인 사우 미아 야자르 린은 방글라데쉬의 다카에서 그룹에서 조직한 여성의 날 토론 포럼에 약 50명이 참석했다고 말했다.

“포럼에서 우리는 버마 사람들을 위해 옳은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조직에 기반을 둔 정부의 다가오는 2010년 선거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했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다우 아웅 산 수지, 마 닐라 떼인, 미미와 수 수 느와이를 포함한 버마의 모든 여성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한다.”

“우리는 또한 아라칸의 부띠타웅 교도소에 억류되고 고문받는 니 니 민트와 아라칸 주에 또한 억류되어 있는 마 판 판 잉의 석방을 요구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어제 인도에 있던 버마 여성 연맹의 공동 간사인 띤 띤 아웅은 수도 뉴델리와 미조람 주의 아이자울의 버마 여성 그룹은 여성의 날 토론 포럼을 위해 모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이자울의 버마 여성 이주자들을 초청했고, 여성의 날에 관하여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 세계에서 여성 인권 운동에 대하여 그리고 어떻게 버마와 세계의 다른 여성들이 차별받았는지에 대해서 강의 했다.”고 그는 말했다.

버마 여성 연맹의 다른 공동 간사인 틴 틴 느웨는 태국의 치앙 마이에서 몇몇 다른 여성과 NGO들과 함께 구류된 버마 여성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진을 조직하였다.

“버마 여성 연맹은 이주 지원 프로그램 협회와 함께 행진하는 것을 조직하기를 협력했다.”틴 틴 느웨가 말했다.

“행진하는 동안 우리는 버마의 모든 여성 정치범의 석방과 모든 정치 세력이 참여한 원탁 회의를 요구했다.”

호주의 시드니에 있는 호주 버마 연합의 민트 초 박사는 거기에 살고 있는 버마 여성들 또한 항의에 함께 참여했다고 말했다.


※서명운동 후에 여덟 명이 체포되었다.
2009년 3월 9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랑군의 트완타이 군에서 여덟 사람이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한 후에 유효한 숙박계가 없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해산물 상인이며 자이띳 보호소의 찻집 사장인 킨 자우는 3월 2일 일곱 명의 그의 직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이틀 후에 석방되었다.

킨 자우에 따르면 자이띳 수용소의 회장인 딴 우를 포함한 70명의 사람들과 지방 경찰력은 그의 집을 급습했다.

그들은 연합 결속과 발전 협회 회원들과 출입국관리소 직원들과 함께였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은 조사 목록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으나 보호소 회장은 내 손님 리스트가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경찰부관과 출입국관리소 직원은 내가 옳다고 말하고 리스트를 돌려주고 내게 말하길 가서 자라고 했다.”

10분 후, 그들은 다시 그의 직원들을 체포했고 보석금으로 풀리기 전까지 그들은 이틀 동안 구금 되었다.

그들은 3월 9일에 재판이 잡혀있다.

“나는 마우 아웅 산 수지와 수도승들을 포함한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위해 서명을 받고 있다.”고 킨 자우가 말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는 것 때문에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고 내가 내 손님을 기록하였더라도 체포했을 것이다.”

관계 당국자들은 어떤 버마민족민주동맹 회원이 그의 집에 머무는지 검사하기 위해 급습과 체포하기 일주일전에 왔었다고 킨 자우는 말했다.

트완타이군 버마민족민주동맹 청년 회원인 예 흐툿은 회원들이 지역당국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계속 서명운동을 실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활동가가 뉴스를 제공하다가 체포되었다.
2009년 3월 9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인권운동가인 떼인 떼인 잉은 2월 11일 당국자들에 의해 외국 뉴스 에이전시에 뉴스를 제공하는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그녀의 친척이 말했다.

27살인 그녀는 아라칸주 시트웨군 밍간보호소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3명의 여경을 포함한 13명의 경찰들이 3대의 오토바이와 경찰차를 타고 왔다.”고 목격자는 말했다.

“그들은 그녀를 체포하고 안이란 곳에 있는 군부대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의 6살짜리 아들인 키아우 미앗 한은 그의 아버지가 집으로부터 멀리 일하러 가는 동안 그의 조부모들에게 맡기어졌다.


※학생들이 전력회사 건물에 돌을 던지다.
2009년 3월 10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지난 금요일 고등학생들이 그들의 시험기간 동안 전력공급을 요구하기 위해 주에서 운영하는 전력회사에 돌을 던진 후 몬 주의 수도인 모울메인의 보안이 강화되었다.

모울메인 지역 거주인이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에 말하길 전기는 정부 공무원의 집이나 전력회사에 뇌물을 줄 여유가 있는 개인들만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마을의 나머지는 끊겼다고 말했다.

3월 11일부터 20일까지 시험을 치루기로 되어 있는 약 50명의 10학년의 고등학생들은 밤에 공부할 수 없게 된 후에 불만이 커졌다.

그들은 3월 6일 자정에 전력회사 앞에 모여서 그곳에 돌을 던졌다.

“그 학생들은 시험기간 동안 마을에 전기를 공급해줄 것을 전력회사에 요구했다.”고 모울메인 주민은 말했다.

그가 말하길 이 항의는 몇몇의 지역 주민들과 합류했고, 약 한 시간 후에 끝났다. 항의 후 다음날 마을엔 하루종일 전기가 공급되었으나 다시 끊겼다.

당국자들은 마을에 보안을 강화했고 거리에 무장한 경찰들이 배치되었다고 지역 주민은 말했다.

“마을 전역에 방패와 폭동 진압용 장비를 갖춘 경찰들이 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은 검문소에서 오토바이들을 검문하고 있다.”

몇몇 다른 모울메인 주민들은 말하길 학생들의 다른 항의의 신호는 없다고 했다.

태국에 있는 전국 버마 자유 학생 연합은 어제 학생들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너무 많은 전기가 들기 때문에 시험을 치르려는 학생들이 그들의 수업에서 배울 수 없는 동안 군사 지역엔 충분한 전력이 공급되고 그것이 군대와 일반 시민의 삶 사이의 커다란 차이의 현저한 특징이다.”라고 말했다.


※민주화 위원회는 유엔에 2010년 투표에 관여하지 말도록 말한다.
2009년 3월 13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1990년 선거를 승리한 단체들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는 위원회는 국제 감찰관들이 2010년 선거에 모든 당들이 경선에 참여하기만을 바라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회대표위원회 비서인 아예 따르 아웅이 랑군에서 3월 12일 회합때 말했다.

국민의회대표위원회 회원은 어떻게 유엔이 1990년 선거에 승리한 당들을 포함되지 않은 선거를 고려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우리는 국가평화발전위원회가 헌법을 수정하는 상황에 대하여 논의했다.”고 아예 따르 아웅이 말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특별히 유엔과 국제사회가 모든 정치 집단들, 민족 국가 그룹들과 민주화 그룹들이 2010년 선거에 포함되도록 강요할 때, 2010년 선거에 어떤 결과가 도출될 것인가?

국민의회대표위원회는 2008년 헌법이 개정되지 않는한 경선에 참여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했다.

이브라힘 감바리 유엔 버마 특사는 어쨌든 내년에 버마에 감찰관들을 보낼 것이라 주장했다.

수상인 떼인 세인 장군은 아세안 정상회담에서 국가평화발전위원회는 유엔이 선거의 합법성을 인정하면 그들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2010년 선거는 자유와 공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아예 따르 아웅이 말했다. “2010년 선거는 2008년 헌법의 개정에 달려있다.”

그런 까닭에, 만약 2008년 헌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선거가 유엔 또는 EU에 의한 감찰되어지던지 간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국가평화발전위원회는 유망한 경영자를 당내에 포진하고 선거 경선을 하고, 몇몇 민족민주동맹 지역 사무실을 감시하는 활동을 실행하고 있다고 아예 따르 아웅이 말했다.


※오늘 888,888 정치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2009년 3월 13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정치범들의 해방이라 불리는 세계 서명 캠페인이 버마 인권의 날인 오늘, 166명의 버마 망명자들과 국제 연대 그룹의 지원과 함께 발족하였다.

이 캠페인은 버마 민주주의를 위한 포럼과 버마정치범지원연합에 의해 조직되었다.

"서명은 온라인과 종이로 모을 것이다"라고 버마정치범지원연합의 비서 타테 나잉이 말했다.

"우리는 888,888명의 서명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정치범 석방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지와 함께 전달할 것이다. "

이 캠페인은 전 세계적인 활동과 행사들로 발족되었는데, 방콕, 치앙마이, 런던, 더블린, 뉴델리, 홍콩, 마닐라, 서울, 자카르타, 시드니 그리고 동경을 포함하고 있다.

5월 24일까지 계속될 것인데, 그날은 아웅 산 수지가 6년간의 가택연금 후에 풀려날 그 날이다.

"그녀를 풀어주던 그렇지 않던 그것은 국가평화발전위원회에 달린 것이지만, 법적으로는 그 날에 풀려나야 한다."라고 타테 나잉은 말했다.

"그 법은 국가평화발전위원회에 의해 발의되었고, 이를 세계가 다시 기억하게 하도록 우리는 이 캠페인을 시작한다."

치앙마이에서, 옛 정치범이었던 렛 렛은 감옥에서의 그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난 1998년 9월 체포되었고, 그들은 내 부모님에게 아무런 통지도 하지 않았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난 2주 동안 취조부서에서 있었고, 인세인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나는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을 승인도 받지 못한 채 노력하였고, 내 가족은 재판에 참여가 허락되지 않았다."

"난 21년형을 선고받았다. 난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었고, 내 가족은 통지받지 못했다. 나는 여덟 달이 지날 때까지 내 가족을 만나는 것이 승인되지 않았다."

버마정치범지원연합에 의하면 최근 버마 전체적으로 옥중에서 괴로워하는 2,128명의 정치범들이 있다고 한다.


※수감된 수도승의 지도자가 연합에 메시지를 보냈다.
2009년 3월 16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수감된 버마 수도사들의 수장인 유 감바리아는 정치제도를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버마의 인권과 민주적 행위를 후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왔다고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2007년 9월 선출되어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 감바리아는 사가잉 주 칸디 교도소에서 69년형을 복역하고 있다.

혼자 구금되어있는 동안 주장하는바에 의해 단식투쟁을 벌임으로써 1월 18일 칸디로 이송되기 전에 그는 만달라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다우 야이는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에 말하길, 지난주에 칸디로 그를 방문하러 갔었는데, 아직도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정부에 의해 권리가 남용된 버마의 사람들을 위해 그의 투쟁을 계속해왔다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그는 그들의 의무를 다하도록 모두에게 깨우쳐줬다."

지난 주, 유 감바리아와 매우 가까운 친인척 2명을 포함한 6명의 사람들은 이민법에 의해 강제 노역과 함께 각각 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 그룹에는 유 감바리아의 형제인 아웅 코 코 르윈, 처남인 모에 흐텟 히란, 키아우 미오 삿, 흐라잉 미오, 소에 르윈과 예 니운트를 포함되어 있다.

가족들은 그들이 작년 랑군에서 버마승려동맹 설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수소 풍선들을 띄우는 계획 때문에 처음으로 체포되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버마 인권의 날에 진압 작전을 전개했다.
2009년 3월 16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해외 버마인 민주 활동가들이 국가의 인권의 날로 기념한지 21번째 날인 지난 금요일 버마의 옛 수도이자 경제적 허브인 랑군의 보안은 강화되었다.

그 사건은 1988년 저항기간동안 정부군의 발포에 죽은 랑군 공대의 폰 마우 기념과 동시에 일어났다.

랑군 주민이 금요일에 말하길 그날은 반대 활동의 신호가 없어 보였다. 당국자들은 랑군 시내에 붐비는 교차로들에 무장한 경찰들을 급파했다.

“우리는 랑군의 모든 교차로에서 무장한 경찰들이 탄 트럭과 그렇지 않은 경찰들의 긴 행렬을 보고 있다.”고 지역주민은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평화적인 목적을 방해하고 있다..”

“그 경찰들은 쉴 새 없었다. 그들은 항상 그들의 트럭에 타고 내리고 있었고, 그들의 큰 총들이 주변으로 파도치는 동안 우리나라가 시민전쟁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는 말했다.

다른 랑군 주민은 중무장한 폭동 진압 경찰 분대가 쉐 다곤 공원과 쉐곤다이와 흐레단 교차로에 배치되었다고 말했다.

인권 수호와 발기인 조직의 마웅 마웅 레이는 금요일 랑군의 상황은 버마의 인권에 대한 상황의 하이라이트라고 말했다.

“정부가 아세안 인권헌장에 서명을 동의하였고 국내에 있는 몇몇의 미국의 인권 외교관을 그대로 두는데 동의했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의 인권 상황이 증진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첫 번째로 정부는 우리에게 인권을 진정 헌신적으로 승인하여야 한다.”


※아웅산 수지의 변호사는 정부로부터 대답을 요구했다.
2009년 3월 18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억류된 재야 지도자 아웅산 수지의 변호사가 첫 번째 요구가 아직 대답이 없이 다섯 달이 지난 후에 정부에 그녀의 석방을 위한 항소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다우 수의 변호사인 키 윈은 75일 전에 그녀의 가택연금은 끝이 났고, 항소를 위한 공판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3월 13일 보냈다고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에 말했다.

“법 19조에 따라 다우 수는 가택연금을 당했고 우리는 항소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에 2008년 10월 9일에 우리는 제소했다.”고 키 윈은 말했다.

“이제, 연금 명령의 만료가 75일이 지났고 우리는 정부로부터 아무런 대답을 아직 받지 못했다. - 우리는 그들이 조용히 우리의 항소를 거절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키 윈은 재판에 가기 전 재판에 정부와의 합의에 대비하기 위해 자유를 재촉하고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다우 수와의 다른 만남을 또한 요구했었다.

그는 떼인 세인 국무총리의 최근 인도네시아와 싱가폴의 방문으로부터 돌아온 이번 주 이후에 그는 정부로부터 대답을 듣기를 기대했다고 덧붙였다.


※죄수들은 가족들로부터 몇 백 마일 떨어져 긴박한 상황에서 살고 있다.
2009년 3월 18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버마 전역의 교도소의 정치범들을 그리워하는 가족들은 형편없는 생활과 외딴 감옥에 갇혀 친척들의 방문에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감옥에 있는 인세인구 민족민주동맹 청년 간사인 흐툰 흐툰 나잉의 부인인 아예 뗏은 그녀의 남편이 그녀가 가져간 음식과 약을 거부당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감옥의 수감자를 위한 음식 위생과 약물중독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감자들에게 주는 음식을 보면 길옆에 있는 무작위의 식물들을 요리하기 전 씻지도 않은 채 수감자들에게 먹인다. 그것은 명백히 위생적이지 않다.”

5명의 잘 알려진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흐툰 흐툰 나잉이 갖혀 있는 만달라이의 메이크틸라 감옥은 초 르윈이라 불려지는 정부 공무원에 의해 운영되어 진다고 아예 뗏이 말했다.

버마 최남단에 있는 카우따웅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88세대 학생 지도자인 피원 초의 아버지인 윈 마웅은 그의 아들에게 가려면 버스로 3일 걸리며 6만 키앗($US60)이 든다고 말했다. 버마의 평균 월급은 3만 키앗($US30)정도이다.

“정부가 아무리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 감옥에 보내어 만나기 힘들게 하여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하여도 우리는 그 장소들에서 그들의 상황을 알기 위해 여전히 그들을 만나러 간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다른 소식에 랑군의 인세인 교도소에 싸이클론 나르기스의 희생자를 도운 이유로 갇혀 있던 다섯 사람이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먼 곳으로 이송되어졌다고 친인척들이 말했다.

그들은 민족민주동맹의 회원인 마 초, 마 떼인기, 민 떼인 툰(띠하 라고 알려진)과 익명의 두사람이다.

마 초는 피아이 감옥으로, 마 떼인기는 마-유핀 감옥으로, 띠하와 다른 두 사람은 따옛 감옥으로 이송되어졌다.

띠하는 3월 11일에 인터넷을 통해 구조 활동을 도운 후에 불법 연합법, 컴퓨터 관련법, 이민법으로 인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정부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이송한다고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소문을 듣고 알아보러 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3월 15일에 따옛 교도소로 보내질 것을 결정했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의류 공장 근로자들은 노동권의 학대에 불만을 제기했다.
2009년 3월 19일 (버마 민주의 소리 방송국) - 랑군의 새로운 다곤 타운십안에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미성년 근로자들은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초과근무를 하도록 강요받은 뒤 그들의 고용주들에게 노동권리남용에 불만을 가져왔다.

모두 18세 미만인 4명의 여성 근로자들은 최근 한국 사업가가 소유하고 있는 헤라클레스 공장에서 그들의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은 공장의 관리자들이 그들에게 야근에 대한 초과수당이나 건강 혹 의학적 치료를 위한 어떠한 것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근로자들을 공평하지 못하게 다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우리가 40에 30개의 의류를 만들도록 요구해요." 라고 그들 가운데 16세의 한 근로여성이 이야기했다. "우리가 실패할 땐 정말 기분이 나쁘도록 저주를 받았어요."

그녀는 공장에 약 700명의 근로자들이 월 ($US20) 2만 키앗 정도의 최저임금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종종 초과수당 없는 야근에 우리를 불렀고, 결코 제때에 우리 월급은 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빚이 있어요. 그리고 제때 갚지 못할 때면 우린 상어같은 채무자로 인해 문제에 봉착하게 돼요."

그녀는 공장관리자들에 의해 호의를 받는 근로자들은 일반적으로 공장을 조사하는 정부 관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 (번역;나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