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새로운 농촌공동체를 향하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2-01 23:20
조회
1737
새로운 농촌공동체를 향하여
전북 율곡교회의 사례- 여태권 목사

1.이야기를 열면서
1984년 1월 1일 주일 날부터 시작하여 2007년 1월까지 만 23년 동안 농촌의 한 교회를 섬겨온 부족한 사람이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줄 알지만, 훌륭하신 목사님과 신학교수님들에게 진솔하게 말씀드림으로 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음으로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 알고 싶으며, 앞으로 목회를 할 때에 지적이 된 점을 명심하여 보다 알찬 목회에 디딤돌로 삼으려는 마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2.율곡교회에서 목회 시작
1984년 1월 그 때 나는 36세의 젊은 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60세의 나이가 되어서, 중년을 지나 노년을 바라보는 늙은 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도시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크게 없었고, 오직 시골과 농촌이 좋아서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농업에 대한 작은 애정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크게 힘들다는 생각없이 지내왔습니다.

3. 시대적 배경
율곡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던 1980년에서 2000년까지는 농촌에 사는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떠나는 시기였습니다.
전국 농가수, 농촌인구의 변화를 1970년~2000년까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1970년 농가수;2,483,318, 농가인구수;14,421,730명
②1980년 농가수;2,155,073, 농가인구수;10,826,748명
③1990년 농가수;1,767,033, 농가인구수; 6,068,262명
④2000년 농가수;1,383,468, 농가인구수; 4,031,065명

전라북도 농가수, 농촌인구의 변화를 1970년~2000년 까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1970년 농가수; 281,515, 농가인구수; 1,658,324명
②1980년 농가수; 235,441, 농가인구수; 1,214,493명
③1990년 농가수; 188,160, 농가인구수; 708,079명
④2000년 농가수; 137,417, 농가인구수; 388,907명
농가수 및 농가 인구수의 감소 보다더 심각한 문제는 농업을 경영할 경제인구인 젊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게 됨으로 농촌은 초 고령화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한 농촌 인구는 사망에 의한 자연 감소로 인하여 지금과 같은 추세로 인구감소 현상이 계속될 것이며, 어느 시점에서는 우리의 농업이 사라질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농촌의 현상이 된 것은 국가 농업정책방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①70년대; 모든 농업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정책은 다수확입니다. 이는 미국에서 6,25전쟁이후 우리나라에 무상으로 식량원조를 하던 것을 점점 줄이고 식량을 판매하는 정책으로 바꾸어 감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농업의 가장 기본목표는 다수확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벼에는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가 등장하게 되었고, 화학비료 생산을 확대하며 각종 농약을 보급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공업화 및 산업화 정책을 국가 기본정책으로 정함으로 농업인구가 산업인구로 대체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농촌의 젋은 일꾼들이 도시의 공장으로 몰려들게 됨으로 농촌은 점점 젊은 인구 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도시 산업인구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저곡가 정책을 세울 수 밖에 없음으로 농업은 공업을 위한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②80년대; 농촌의 이농현상이 급물살을 타게되자 이농으로 인하여 농업 노동력이 빈곤해지자 국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농업정책으로 농업의 기계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사람의 노동력이나 가축력으로 농사를 짓던 것을 기계 장비로 이를 대체함으로 더욱 농촌의 노동력은 도시의 공장 노동력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986년부터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는 농민들에게 불안심리를 가중시킴으로서 이농현상은 막을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되었습니다.
③90년대; 황폐하여진 농촌의 현상을 대변이나 하듯이 농(農)자가든 학교는 문을 닫거나 이름을 변경해야만 하는 사회 현상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이런한 농업을 지키기 위하여 기업화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농업을 다양한 국가산업 가운데 한 산업품목으로 정하고 이를 잘 운영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기업화가 되어야 한다는 견해에서 영농회사, 영농법인 등을 법제화하고 개인 농가별 농지면적 확대, 가축사육은 규모확대를 하면서 모든 영농자제도 대형화하여 농업인구의 감소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영농조합은 정부자금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영농회사는 노령화된 농민들을 대신하여 농사를 지어주는 사업체로 등장하게 되었고, 축산은 자본가들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농민은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농촌은 피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 마지막 회의에서 W.T.O 라는 괴물을 만들어서 국가도 농업을 보호할 수 없게 되는 국제 규범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농민들에게 불안심리를 넘어서 농업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아들과 딸을 농사꾼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농촌총각은 아에 결혼을 포기해야만 하는 사회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④2000년대; 새천년인 2000년대를 맞이하는 농촌의 현실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10%선 아래로 감소한 농민들, 그 농민들 중에 농업을 천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늙고, 병들은 노인들입니다. 농촌에 가면 아이들 울음소리가 멈춘지 오래이며, 교회에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회가 사라진지 오래이며,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의 대부분이 60대를 넘어선 노인들입니다. 마을 회관에 가면 60대는 젊은이측에 들며, 70~80세가 넘은 고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마을회관을 지키고 있습니다. 논과 밭은 휴경지가 되거나, 문전옥답이 꽃나무 재배지가 되어도 어느 누구하나 무어라 하는 사람이 없는 현실입니다. 사람에게 꼭 필요한 식량에 대한 귀중함도 사라진지 오래이며, 농업도 이제 국민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업이 아니고, 무엇을 하든지 수익성만 놓으면 된다고 하는 경제논리에 빠져버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농업에 대한 정부의 정책도 이제 일관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귀찮은 것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민원도 대모도 없을 것이니 오히려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농업을 영원히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가느다란 소리가 있으며, 그 대안으로 내 놓은 농사 짓는 방법이 유기농업, 자연농업, 친환경 농업 등입니다. 이는 외국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외국농산물과 국산 농산물의 차별화를 통해서 농업을 보전하고 국민의 건강과 식량안보를 지켜보자는 몸부림입니다. F.T.A.에서 농산물의 안정성과 환경보호를 담보로 국내 생산 농산물을 지켜보려는 노력이 새천년이 되면서 일어나는 농업에 대한 한 새로운 정책으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4.교회의 역할
(농촌을 지키기 위하여 몸부림을 하는 율곡교회의 20년 이야기)
1)소 울음소리에서 길거리로 나서기 시작함
①1985년 수입소로 인하여 한우 가격이 폭락하여 소대모가 시작되었을 때, 주민들과 함께 율곡교회의 교인들이 대모대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소의 울음소리가 도로에서 울려퍼질 때 율곡교회는 주민과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 외국에서 산소를 수입함으로 국내 소값이 곤두박질하여 소값이 개값이 되 었을 때 전국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싸움을 한 곳이 바로 고산입니다. 이 지역에서 소대모의 중심은 가톨릭 농민회 였고, 율곡교회는 이들과 함께하여 소대모에 참여함으로 농민들의 정치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정책이 잘못되면 농민들은 큰 손해를 당하게 되어 잘 살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②U.R 반대, W.T.O.반대를 위한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집회에 참여함으로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정치의식도 함께 함양되어 율곡교회 교우들은 자발적으로 농민회에 가입하여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1986년 이후 격렬하게 일어나는 각종 반정부 시위와 집회에 교회 교우들이 참여하여 교우들의 민주의식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지역사회의 일부 주민들로부터 정치하는 교회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2)농촌을 떠나지 않고 지키겠다는 결의
아스팔트 농사가 최고라고는 하지만 농사꾼은 역시 땅을 파고 씨앗을 뿌려서 잘 가꾸어 거두어 들이는 농업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농업을 지키기 위하여 율곡교회는 떠나는 농촌 젊은이들을 설득하여 농사를 지으면서도 잘 살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①뿌리회를 만들어 지역에 알맞은 농업을 찾아 보기 시작함(1987년).
율곡교회가 위치한 지역은 중 산간지역으로 축산이 가장 적합한 농업임을 인식하고 한우 사육을 본격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 파동 중에 소 값이 하락하여 다른 지역은 소를 다 팔아치우는데 율곡교회는 마을 주민과 함께 소를 사들여서 소의 사육 두수를 오히려 늘여갔습니다.
②공동체의 정신으로 생산과 유통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영농조합법인을 결성하여 한우 사육과 판매를 공동으로 하는 공동체 운동을 시작함(1992년).
소 값이 많이 내려가도 쇠고기 값은 내리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보면서 소사육으로만은 농민이 살아 갈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육한 소를 우리가 판매하자는 생각에서 한양회관(식당)과 완주한우 영농조합 직판장을 개설하여 한우 유통을 시작하였습니다. 상당한 성과를 내어서 젊은 농민들이 차츰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생활기반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농가 수입은 경종에서 축산으로 전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③지역 여건을 잘 활용하여 유기농업이 지역에 적절함을 인식하고 이를 보급하기 위하여 율곡공동체 영농조합법인 설립하고, 이어서 땅기운 작목반 구성하여 지역에 농가 70여명이 유기농업을 시작함(2000년).
유기농업, 즉 친환경농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먼저 신앙인으로 가장 올바른 농업이라는데 있고, 두 번째로 앞으로 외국 농산물이 많이 수입될 때에 농산물 가격의 하락으로 인하여 농업을 포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기 위하여 친환경농업으로 농사를 지음으로 차별화하여 가격 폭락을 막을 수 있고, 세 번째는 이 지역 여건이 중산간지이기 때문에 모든 농산물을 청정하게 재배할 수 있는 지역 여건이 뒷받침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친환경농업은 단지 경종부분에서만 아니라 축산에도 유기축산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친환경으로 농사를 짓는 곳으로 주변에 알려져서 귀농하는 친환경 농업인들이 차츰 이 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지금 교회에 다니는 가정만 30~40대 젊은 가정으로 5가정이 정착단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3) 고령화 사회가 된 농촌지역에서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복지사업을 시작하였음(2001년).
농촌사회는 가난과 농업노동으로 골병이 든 나이 많은 농민들이 대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위하여 국가와 사회가 감당해야할 복지적인 측면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는 이제 이들과 함께 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곡교회는 교회 창립 백주년을 맞이하여 백주년 기념사업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온 교회가 기도하는 중에 사회복지 사업을 하기로 공동의회에서 결정하여 이를 추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친환경사업과 복지사업을 위하여 논 2,200평을 구입하여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을 복지사업에 사용하기로 결의 하였으며, 남신도는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한우 사육에서 발생하는 수익금 중 1,000만원을 복지사업에 매년 후원하기로 하였으며, 교회에서는 사회복지사업을 위한 특별헌금을 해서 후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매년 3,000만원 이상 교회는 복지사업을 위하여 후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율곡교회에서 운영하는 복지 사업은 아래와 같습니다.

①가정봉사원파견사업(2001.4월 시작)
90가정 이상의 독거노인 및 장애 노인을 위하여 봉사원을 파견하여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사 및 직원 4명, 유급봉사원 4명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②지역아동센터 사업(2002,12월 시작)
50여명의 결손가정 및 학습 부적응 아동들을 교회에서 돌봄과 학습 등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회복지사 및 교사 3명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③무료경로식당 (2005년 4월시작)
120~150명의 저소득 층의 노인들에게 매주 목요일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④이동복지관 (2006년 1월 시작)
25인승 버쓰에 각종 서비스 장비를 갖추어서 경로당을 찾아다니면서 노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사와 기사 2명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⑤노인일자리 사업(2006년 4월 시작)
15명의 노인들이 매주 2~3일 친환경 농업 및 환경정리를 위하여 일을 하고 매월20만원의 수당을 받습니다. 현재 1명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군에서 일자리 작업장을 연건평90평인 일자리 작업장을 2월 말에 시작하여 5월까지 신축할 예정입니다. 건축예산은 3억.

4) 기타 지역사회와 함께한 율곡교회
①지역에 위치한 초등학교 지키기 운동(농촌학교 통폐합 반대 운동)
율곡교회를 중심한 마을에 초등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가 정부의 경제논리에 의한 교육정책으로 인하여 폐교 대상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가 지역에서 폐교가 되는 것은 이제 지역에 젊은이들이 살지 못하도록 내어 쫒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율곡교회 학부모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 지키기에 앞장섰습니다. 그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적으로 지금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은학교 건물이 지어졌고, 농어촌 작은 학교의 시범학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학교 건물과 알찬 내부 구조, 열성적인 선생님들, 그리고 학교에 관심이 많은 지역사회 인사들이 함께 교육하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②지역의 환경을 지키기 위한 운동
친화경지역인 이 지역에 산업폐기물 소각장을 건축하려는 기업과 대항하여 그들이 물러가도록 하는데 교회가 앞장서고 지역주민들이 함께하여 그들의 계획이 무산되게 하였습니다.
그 싸움은 약6개월 동안에 걸친 힘겨운 싸움이었는데 결국 주민과 함께 승리하였습니다. 그 과정은 생략하겠습니다.

5)현재의 율곡교회
①교인수
90가정에 세례교인 150명, 장년부 원입교인 10명, 중고등부 25명, 유· 초등부 40명, 유치부 15명 이다.
②제직 현항
목사 2명, 장로 5명, 권사27명, 안수집사 4명, 서리집사 (남)21명,(여)31명
③재정
년간 수입과 지출은 약1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