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다빈치 코드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11 21:57
조회
1958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1)
- 다빈치 코드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맬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예수가 왜 죽었는가 하는 '신학적' 질문보다 예수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사실묘사'에 편중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 의도했든 안 했든 -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제기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런데 맬 깁슨이 심혈을 기울여 복구했다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사실과 확실히 다른 하나가 있었다. 다름 아닌 주인공 예수의 얼굴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그윽하면서도 압도적인 눈빛을 가진” 제임스 캐비즐을 캐스팅되었지만, 그는 이번에도 '잘 생긴 백인 미남'이다.
세계적 명성과 1백 20만 부의 부수를 자랑하는 미국의 과학전문지 파퓰러 미케닉스(Popular Mechanics) 2002년 12월호는 커버스토리로 '예수의 얼굴'을 실었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으로 시도된 이 작품은, 영국과 이스라엘에서 법인류학, 고고학, 컴퓨터 최첨단 기술을 전공하는 학자들을 동원하여 서기 1세기경 갈릴리 지역에 살았던, 전형적인 30대 유대인 남성의 얼굴을 복원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너무도 충격적이다. 그을린 갈색 피부에 매부리 코, 짧게 깍은 곱슬머리... 약 1백 52cm의 키에 50kg의 몸무게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 예수의 얼굴은 아예 흑인의 얼굴에 가까웠다.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 예술가들이 그림과 조각 등으로 표현한 예수의 얼굴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 과학자들이 복구한 얼굴이 실제 역사적 예수의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예수의 얼굴은 사실 서양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시대적 기대감, 나아가 인종적 편견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이다.
'역사적 예수'의 문제가 일반대중의 관심사로까지 확대된 또 하나의 계기는, 최근 미국과 한국 등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된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다빈치 코드의 출판이다. 황당무계한 픽션이라고 무시하기에는, 이 소설의 대중적 파급효과가 너무 크다. 실제로 지금 미국의 대형 서점가에는 '다빈치 코드를 비판하는 기독교 신학자들, 특히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이 펴낸 책이 벌써 5-6권을 넘어섰다. 한낱 픽션에 불과한 이 소설책에 전문적인 기독교 학자들이 이렇듯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기성교회가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학문적 성과'와 매우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주어진 '예수 믿기, 예수 살기'라는 주제는 이렇듯 '역사적 예수'의 문제와 그가 선포하고 산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긴밀히 관련된, 가히 '휘발성'의 주제이다. 앞으로의 기독교 교회와 신학에, 나아가 선교에 많은 것을 시사하고 의미하는 주제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먼저 '역사적 예수' 탐구의 역사와 그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소개한 다음 (이번 쟁점논문은 여기까지만 싣겠습니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성과가 우리에게 새롭게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를 통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의미를 새로이 조명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떻게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가 통전적,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나갈 수 있을지를 살펴볼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역사와 비평
성서를 깊이 읽다보면 왜 성서에 같은 사건에 대한 상충되는 보도가 존재하는지 종종 의문을 갖게 된다. 성서의 첫 책인 창세기의 맨 처음 두 장만 보아도 그렇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네 복음서의 보도를 비교해 보아도 큰 차이가 난다. 혹 복음서에 그리스도로 선포된 예수와 실제의 예수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18세기 후반 이러한 학문적 질문을 가지고 시작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약 230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다음과 같은 네 단계의 과정을 밟아 왔다.
1) '구 탐구'(Old Quest): 첫 단계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1774년 라이마루스(Hermann S. Reimarus)에 의해 제기되어 슈트라우스(David F. Strauss), 바이스(Johannes Weiss), 그리고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구 탐구'(Old Quest) 시대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신학이 바탕이 된 이 첫 단계의 탐구는 예수의 전기(biography)를 써보려는, 즉 예수 안에서 이상적인 인성(人性)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역사적 예수는 결국 학자들 자신의 이미지뿐이라는 좌절로 이 첫 시도는 끝나게 된다.
2) '무 탐구'(No Quest): 신정통주의 신학의 발호와 함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무 탐구'(No Quest)의 침체기를 맞이한다. 새로운 신학이 역사적 예수 문제의 폐기를 요구한 것이다. 쾰러(Martin Kaehler)가 “진짜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선포된 그리스도다”(The real Christ is the Christ who is preached)라고 선언하면서 바르트(Karl Barth), 브루너(Emil Brunner), 니버 형제(Reinhold Niebuhr and H. Richard Niebuhr), 그리고 틸리히(Paul Tillich) 등은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려는 시도에 대해 극도의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무 탐구' 시대의 절정은 독일의 신약성서학자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주도하였는데, 그는 심지어 예수께서 이 땅 위에서 실제로 무엇을 말했고 실제로 무슨 행동을 했는지와 기독교 신앙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까지 선언했다.
3) '신 탐구'(New Quest): 긴 적막을 깨고 역사적 예수의 '신 탐구'(New Quest)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불트만의 애제자 에른스트 케제만(Earnest Kaesemann)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과 달리 역사적 예수 연구가 '방법론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비록 우리가 예수의 일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 신앙을 그 역사적 뿌리로부터 분리하면 그리스도 케리그마는 결국 현대판 가현설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 탐구는 신학적으로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비록 복음서가 예수에 대한 역사적 보도가 아니고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케리그마로 짙게 채색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추론' 혹은 '증류'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후기 불트만 학파로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된 이 '신 탐구'는 역사적 예수를 '추론'하고 '증류'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수 시대의 유대교와 초대교회로부터 차별적인 예수의 독특성(uniqueness)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불가피하게 유대교를 부정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4) '제3의 탐구'(Third Quest): 이제까지 독일 신학계의 전유물이다시피한 역사적 예수 연구는 1980년대 초반부터 북미로 그 자리를 옮겨 '제3의 탐구'(The Third Quest)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제3탐구의 계기가 된 것은 새로운 고고학적 증거와 방대한 문헌정보의 발견이다. 오늘날의 제3탐구는 그 출판의 양과 연구조직, 그리고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학문적 방법론의 채택 등으로 인해 역사적 예수 연구의 일대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의 기본적인 방법론이 문헌적이고 역사적인 비평인 것에 비해, 제3의 탐구는 종교역사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다른 여러 사회과학적 방법을 폭넓게 사용하는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y)를 그 특징으로 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제3탐구의 주체가 전통적인 신학교 교수로부터 일반대학의 학자들로 대거 옮겨갔다는 점인데, 이 점이 역사적 연구의 제3탐구가 조직신학적 성찰과 긴밀히 결합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다. 잘 알려진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에 속한 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제3탐구의 특징은, '신 탐구'와 비교해 예수의 유대적 배경을 강조한다는 점이며, 또한 방법론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본래의 예수 전통, 즉 다양한 양식의 예수전승 가운데 가장 초기의 전승층을 찾아내기 위한 '최소한적 역사비평 접근방식'(minimalist historical- critical approach)을 선호하며, 구체적으로는 '층위학(層位學)적'(stratigraphic) 방법론을 채택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상과 같이 역사적 예수 탐구의 역사를 간략히 짚어보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진다. 첫째, 역사적 예수가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무 탐구'(No Quest) 시대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씨걸(Alan F. Segal)은 학자들이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면서 실제의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미지와 친숙한 이미지의 예수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대적 가치와 편안하게 맞아떨어지는 예수의 그림에 도달했을 때라고 말한다. 이 비판은, 비유컨대, 역사적 예수 연구라고 하는 깊은 우물 속 바닥을 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실제 우물의 밑바닥은 보지 못하고 물위에 비쳐진 자신들의 얼굴만 본다는 비난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들에게도 동일한 비판을 적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어떤 시대가, 예를 들어 중세나 고대시대가, 우리보다 '시기적'으로 역사적 예수와 가깝기 때문에 '실제로' 그에게 더 가까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시대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평등하게 서 있다. 때문에 과거 특정시대와 지역의 가치관 혹은 편견과 편안하게 맞아 떨어졌던 예수의 이미지를 보편화하여 다른 시대와 지역에 강요할 수는 없다.
남미의 신학자 세군도(Juan Luis Segundo)의 주장처럼, 필자는 비록 과거의 역사적 예수 복원이 완벽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복원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크로산(John D. Crossan)의 말처럼 '역사의 예수'(Jesus of history)와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는 분리되거나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각각은 매 세대마다 새롭게 발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예수)과 해석(그리스도)의 결합이며... 그 둘의 변증법적 구조가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서 그것의 의미를 추구한다. 하지만 신앙은 역사적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보그(Marcus J. Borg)의 말처럼, 기독교 신앙은 '부활 이전의 예수'(the pre-Easter Jesus)의 역사적 재건에만 기초해서도 안 되고, 마찬가지로 '부활 이후의 예수'(the post-Easter Jesus)에 대한 케리그마 선언에만 의존해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두 예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매우 부정적인 펑크(Robert W. Funk)는 예수 자신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되며, 신앙이란 예수가 신뢰한 것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유주의 신학에 기초한 '구 탐구'와 신정통주의 신학에 기초한 '무 탐구' 모두가 극복의 대상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목적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예수를 우리에게 낯선 이방인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낯설음이 주는 충격으로 진부해진 역사와 신앙에 새 돌파구를 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수많은 교리와 이념과 편견으로 옷 입혀진 '금관의 예수'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웃고 우셨던 나사렛 예수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특히 배타적이고 근본적인 신앙이 지배하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풍토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현재 북미중심의 역사적 예수 탐구와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들의 학문적 연구의 성과는 수용하되 그 목적과 한계는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기본적으로 근대적 현상이며, 서양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산물이다. 이성(reason)과 계시(revelation)가 갈등하면서 근대 기독교와 서구의 문화적 정체성을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기본적 동력인 것이다. '예수 세미나'의 기본적 공격 목표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라는 점에서 오늘날 북미 중심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한국과 아시아에서 역사적 예수의 의미가 오직 과학과 이성 앞에 기독교 신앙을 변론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문자적인' 성서읽기의 오류에 대항하느라 신학적 관심을 등한히 한 채 객관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피오렌자(Elisabeth S. Fiorenza) 등 많은 여성신학자들이 줄기차게 비판하듯이, 일부 예수 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역사적 실증주의'(historical positivism)와 '과학적 근본주의'(scientific fundamentalism)는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일어난 다양한 제3세계 신학이 우리에게 제기한 바와 같이, 이제 우리의 신학적 관심은 '비신앙인'(non-believers)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비인간'(non-persons)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고난의 역사를 살아낸 우리의 삶과 경험과 문제의식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솟아나는 절실한 호소와 간절한 만남이 없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자칫 냉소적인 지식인들의 자기과시로 전락하기 쉽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택일의 문제로 보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의 성서학자들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견해차이는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를 어떻게 보느냐 이다. 피오렌자, 크로산, 그리고 펑크 등은 복음서에 대해 근본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예수 말씀의 '보존'보다는 '선포'와 '해석적 설득'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본다. 반면, 타이센(Gerd Theissen), 던(James D.G. Dunn), 그리고 위더링톤(Ben Witherington, III) 등과 같은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케리그마' 사이에 연속성을 강조하느냐 단절성을 강조하느냐가 논쟁의 핵심이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그 둘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그 둘 사이의 '본질적 일치'를 증명하고 있지 못하다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 예수와 초대 교회 사이에는 상당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비판적 입장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약성서와 복음서를 폐기할 필요가 없는 것임을 보그에게서 배웠다.
보그는 복음서가 하나 이상의 목소리, 즉 예수의 목소리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목소리 모두를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 탐구의 목적은 이 '다양한 목소리/층'을 분별해 들을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목소리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려 하는 태도는 '기독교 문자주의'와 똑같은 '사실 문자주의' 혹은 '사실 근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때문에 그는 그가 속한 예수 세미나에서 시도하고 있는 예수의 언행에 대한 '색칠하기'(coloring)에 대해서도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빨간색을 '초기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발달된 층'으로, 분홍색과 회색을 '중간층'으로, 그리고 흑색을 '후기 그리고 가장 발달된 층'으로 재규정하면서, 후대의 흑색층을 평가절하 하려는 경향에 경고를 보낸다. 흑색으로 칠해진 예수의 어록과 행적들은 - 그들의 대부분은 이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 그리고 인자의 재림과 같은 묵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것들인데 -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빨간색과 분홍색이 예수의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다. 종종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세미나가 진정성이 없는 예수의 말씀으로 투표한 검은색의 구절들에서 삶의 용기와 희망 그리고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는 점을 볼 때 보그의 말에는 분명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역사비평적 방법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지금까지 역사적 예수 연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마치 '이제 복음서의 예수를 버리고 역사의 예수를 선택하라!'처럼 들렸다. 하지만 '역사의 예수'와 '복음서의 예수'는 둘 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중요하다. '나'의 고백이 소중하다면 '그들'의 고백도 소중하다. 타인의 경험과 고백에 열린 신앙은 복음서의 예수를 폐기할 것을 요청하지 않는다. 때문에 필자는 보그의 주장처럼 우리는 성서에 대해 '후비판적'(post- critical)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 입장은 유아 단계의 '전비판적'(pre- critical) 단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비판적'(critical) 단계도 아니다. 후비판적 입장이란 기독교 전통의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다시금 진정한 이야기로 듣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이것은 전비판적 단계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 둘을 혼동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성서 안의 다양한 목소리를 분별해 들을 줄 아는 능력은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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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논문은 원래 한국대학선교학회가 발행하는 『대학과 선교』제7집 (2005)에 “예수 믿기 예수 살기 :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던 논문인데, 여기에는 전반부 1/3만 발췌해 싣는다.
- 다빈치 코드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맬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예수가 왜 죽었는가 하는 '신학적' 질문보다 예수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사실묘사'에 편중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 의도했든 안 했든 -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제기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런데 맬 깁슨이 심혈을 기울여 복구했다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사실과 확실히 다른 하나가 있었다. 다름 아닌 주인공 예수의 얼굴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그윽하면서도 압도적인 눈빛을 가진” 제임스 캐비즐을 캐스팅되었지만, 그는 이번에도 '잘 생긴 백인 미남'이다.
세계적 명성과 1백 20만 부의 부수를 자랑하는 미국의 과학전문지 파퓰러 미케닉스(Popular Mechanics) 2002년 12월호는 커버스토리로 '예수의 얼굴'을 실었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으로 시도된 이 작품은, 영국과 이스라엘에서 법인류학, 고고학, 컴퓨터 최첨단 기술을 전공하는 학자들을 동원하여 서기 1세기경 갈릴리 지역에 살았던, 전형적인 30대 유대인 남성의 얼굴을 복원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너무도 충격적이다. 그을린 갈색 피부에 매부리 코, 짧게 깍은 곱슬머리... 약 1백 52cm의 키에 50kg의 몸무게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 예수의 얼굴은 아예 흑인의 얼굴에 가까웠다.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 예술가들이 그림과 조각 등으로 표현한 예수의 얼굴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 과학자들이 복구한 얼굴이 실제 역사적 예수의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예수의 얼굴은 사실 서양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시대적 기대감, 나아가 인종적 편견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이다.
'역사적 예수'의 문제가 일반대중의 관심사로까지 확대된 또 하나의 계기는, 최근 미국과 한국 등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된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다빈치 코드의 출판이다. 황당무계한 픽션이라고 무시하기에는, 이 소설의 대중적 파급효과가 너무 크다. 실제로 지금 미국의 대형 서점가에는 '다빈치 코드를 비판하는 기독교 신학자들, 특히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이 펴낸 책이 벌써 5-6권을 넘어섰다. 한낱 픽션에 불과한 이 소설책에 전문적인 기독교 학자들이 이렇듯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기성교회가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학문적 성과'와 매우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주어진 '예수 믿기, 예수 살기'라는 주제는 이렇듯 '역사적 예수'의 문제와 그가 선포하고 산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긴밀히 관련된, 가히 '휘발성'의 주제이다. 앞으로의 기독교 교회와 신학에, 나아가 선교에 많은 것을 시사하고 의미하는 주제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먼저 '역사적 예수' 탐구의 역사와 그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소개한 다음 (이번 쟁점논문은 여기까지만 싣겠습니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성과가 우리에게 새롭게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를 통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의미를 새로이 조명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떻게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가 통전적,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나갈 수 있을지를 살펴볼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역사와 비평
성서를 깊이 읽다보면 왜 성서에 같은 사건에 대한 상충되는 보도가 존재하는지 종종 의문을 갖게 된다. 성서의 첫 책인 창세기의 맨 처음 두 장만 보아도 그렇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네 복음서의 보도를 비교해 보아도 큰 차이가 난다. 혹 복음서에 그리스도로 선포된 예수와 실제의 예수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18세기 후반 이러한 학문적 질문을 가지고 시작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약 230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다음과 같은 네 단계의 과정을 밟아 왔다.
1) '구 탐구'(Old Quest): 첫 단계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1774년 라이마루스(Hermann S. Reimarus)에 의해 제기되어 슈트라우스(David F. Strauss), 바이스(Johannes Weiss), 그리고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구 탐구'(Old Quest) 시대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신학이 바탕이 된 이 첫 단계의 탐구는 예수의 전기(biography)를 써보려는, 즉 예수 안에서 이상적인 인성(人性)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역사적 예수는 결국 학자들 자신의 이미지뿐이라는 좌절로 이 첫 시도는 끝나게 된다.
2) '무 탐구'(No Quest): 신정통주의 신학의 발호와 함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무 탐구'(No Quest)의 침체기를 맞이한다. 새로운 신학이 역사적 예수 문제의 폐기를 요구한 것이다. 쾰러(Martin Kaehler)가 “진짜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선포된 그리스도다”(The real Christ is the Christ who is preached)라고 선언하면서 바르트(Karl Barth), 브루너(Emil Brunner), 니버 형제(Reinhold Niebuhr and H. Richard Niebuhr), 그리고 틸리히(Paul Tillich) 등은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려는 시도에 대해 극도의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무 탐구' 시대의 절정은 독일의 신약성서학자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주도하였는데, 그는 심지어 예수께서 이 땅 위에서 실제로 무엇을 말했고 실제로 무슨 행동을 했는지와 기독교 신앙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까지 선언했다.
3) '신 탐구'(New Quest): 긴 적막을 깨고 역사적 예수의 '신 탐구'(New Quest)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불트만의 애제자 에른스트 케제만(Earnest Kaesemann)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과 달리 역사적 예수 연구가 '방법론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비록 우리가 예수의 일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 신앙을 그 역사적 뿌리로부터 분리하면 그리스도 케리그마는 결국 현대판 가현설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 탐구는 신학적으로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비록 복음서가 예수에 대한 역사적 보도가 아니고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케리그마로 짙게 채색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추론' 혹은 '증류'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후기 불트만 학파로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된 이 '신 탐구'는 역사적 예수를 '추론'하고 '증류'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수 시대의 유대교와 초대교회로부터 차별적인 예수의 독특성(uniqueness)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불가피하게 유대교를 부정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4) '제3의 탐구'(Third Quest): 이제까지 독일 신학계의 전유물이다시피한 역사적 예수 연구는 1980년대 초반부터 북미로 그 자리를 옮겨 '제3의 탐구'(The Third Quest)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제3탐구의 계기가 된 것은 새로운 고고학적 증거와 방대한 문헌정보의 발견이다. 오늘날의 제3탐구는 그 출판의 양과 연구조직, 그리고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학문적 방법론의 채택 등으로 인해 역사적 예수 연구의 일대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의 기본적인 방법론이 문헌적이고 역사적인 비평인 것에 비해, 제3의 탐구는 종교역사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다른 여러 사회과학적 방법을 폭넓게 사용하는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y)를 그 특징으로 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제3탐구의 주체가 전통적인 신학교 교수로부터 일반대학의 학자들로 대거 옮겨갔다는 점인데, 이 점이 역사적 연구의 제3탐구가 조직신학적 성찰과 긴밀히 결합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다. 잘 알려진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에 속한 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제3탐구의 특징은, '신 탐구'와 비교해 예수의 유대적 배경을 강조한다는 점이며, 또한 방법론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본래의 예수 전통, 즉 다양한 양식의 예수전승 가운데 가장 초기의 전승층을 찾아내기 위한 '최소한적 역사비평 접근방식'(minimalist historical- critical approach)을 선호하며, 구체적으로는 '층위학(層位學)적'(stratigraphic) 방법론을 채택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상과 같이 역사적 예수 탐구의 역사를 간략히 짚어보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진다. 첫째, 역사적 예수가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무 탐구'(No Quest) 시대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씨걸(Alan F. Segal)은 학자들이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면서 실제의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미지와 친숙한 이미지의 예수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대적 가치와 편안하게 맞아떨어지는 예수의 그림에 도달했을 때라고 말한다. 이 비판은, 비유컨대, 역사적 예수 연구라고 하는 깊은 우물 속 바닥을 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실제 우물의 밑바닥은 보지 못하고 물위에 비쳐진 자신들의 얼굴만 본다는 비난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들에게도 동일한 비판을 적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어떤 시대가, 예를 들어 중세나 고대시대가, 우리보다 '시기적'으로 역사적 예수와 가깝기 때문에 '실제로' 그에게 더 가까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시대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평등하게 서 있다. 때문에 과거 특정시대와 지역의 가치관 혹은 편견과 편안하게 맞아 떨어졌던 예수의 이미지를 보편화하여 다른 시대와 지역에 강요할 수는 없다.
남미의 신학자 세군도(Juan Luis Segundo)의 주장처럼, 필자는 비록 과거의 역사적 예수 복원이 완벽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복원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크로산(John D. Crossan)의 말처럼 '역사의 예수'(Jesus of history)와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는 분리되거나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각각은 매 세대마다 새롭게 발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예수)과 해석(그리스도)의 결합이며... 그 둘의 변증법적 구조가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서 그것의 의미를 추구한다. 하지만 신앙은 역사적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보그(Marcus J. Borg)의 말처럼, 기독교 신앙은 '부활 이전의 예수'(the pre-Easter Jesus)의 역사적 재건에만 기초해서도 안 되고, 마찬가지로 '부활 이후의 예수'(the post-Easter Jesus)에 대한 케리그마 선언에만 의존해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두 예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매우 부정적인 펑크(Robert W. Funk)는 예수 자신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되며, 신앙이란 예수가 신뢰한 것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유주의 신학에 기초한 '구 탐구'와 신정통주의 신학에 기초한 '무 탐구' 모두가 극복의 대상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목적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예수를 우리에게 낯선 이방인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낯설음이 주는 충격으로 진부해진 역사와 신앙에 새 돌파구를 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수많은 교리와 이념과 편견으로 옷 입혀진 '금관의 예수'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웃고 우셨던 나사렛 예수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특히 배타적이고 근본적인 신앙이 지배하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풍토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현재 북미중심의 역사적 예수 탐구와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들의 학문적 연구의 성과는 수용하되 그 목적과 한계는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기본적으로 근대적 현상이며, 서양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산물이다. 이성(reason)과 계시(revelation)가 갈등하면서 근대 기독교와 서구의 문화적 정체성을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기본적 동력인 것이다. '예수 세미나'의 기본적 공격 목표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라는 점에서 오늘날 북미 중심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한국과 아시아에서 역사적 예수의 의미가 오직 과학과 이성 앞에 기독교 신앙을 변론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문자적인' 성서읽기의 오류에 대항하느라 신학적 관심을 등한히 한 채 객관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피오렌자(Elisabeth S. Fiorenza) 등 많은 여성신학자들이 줄기차게 비판하듯이, 일부 예수 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역사적 실증주의'(historical positivism)와 '과학적 근본주의'(scientific fundamentalism)는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일어난 다양한 제3세계 신학이 우리에게 제기한 바와 같이, 이제 우리의 신학적 관심은 '비신앙인'(non-believers)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비인간'(non-persons)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고난의 역사를 살아낸 우리의 삶과 경험과 문제의식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솟아나는 절실한 호소와 간절한 만남이 없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자칫 냉소적인 지식인들의 자기과시로 전락하기 쉽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택일의 문제로 보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의 성서학자들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견해차이는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를 어떻게 보느냐 이다. 피오렌자, 크로산, 그리고 펑크 등은 복음서에 대해 근본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예수 말씀의 '보존'보다는 '선포'와 '해석적 설득'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본다. 반면, 타이센(Gerd Theissen), 던(James D.G. Dunn), 그리고 위더링톤(Ben Witherington, III) 등과 같은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케리그마' 사이에 연속성을 강조하느냐 단절성을 강조하느냐가 논쟁의 핵심이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그 둘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그 둘 사이의 '본질적 일치'를 증명하고 있지 못하다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 예수와 초대 교회 사이에는 상당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비판적 입장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약성서와 복음서를 폐기할 필요가 없는 것임을 보그에게서 배웠다.
보그는 복음서가 하나 이상의 목소리, 즉 예수의 목소리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목소리 모두를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 탐구의 목적은 이 '다양한 목소리/층'을 분별해 들을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목소리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려 하는 태도는 '기독교 문자주의'와 똑같은 '사실 문자주의' 혹은 '사실 근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때문에 그는 그가 속한 예수 세미나에서 시도하고 있는 예수의 언행에 대한 '색칠하기'(coloring)에 대해서도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빨간색을 '초기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발달된 층'으로, 분홍색과 회색을 '중간층'으로, 그리고 흑색을 '후기 그리고 가장 발달된 층'으로 재규정하면서, 후대의 흑색층을 평가절하 하려는 경향에 경고를 보낸다. 흑색으로 칠해진 예수의 어록과 행적들은 - 그들의 대부분은 이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 그리고 인자의 재림과 같은 묵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것들인데 -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빨간색과 분홍색이 예수의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다. 종종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세미나가 진정성이 없는 예수의 말씀으로 투표한 검은색의 구절들에서 삶의 용기와 희망 그리고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는 점을 볼 때 보그의 말에는 분명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역사비평적 방법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지금까지 역사적 예수 연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마치 '이제 복음서의 예수를 버리고 역사의 예수를 선택하라!'처럼 들렸다. 하지만 '역사의 예수'와 '복음서의 예수'는 둘 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중요하다. '나'의 고백이 소중하다면 '그들'의 고백도 소중하다. 타인의 경험과 고백에 열린 신앙은 복음서의 예수를 폐기할 것을 요청하지 않는다. 때문에 필자는 보그의 주장처럼 우리는 성서에 대해 '후비판적'(post- critical)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 입장은 유아 단계의 '전비판적'(pre- critical) 단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비판적'(critical) 단계도 아니다. 후비판적 입장이란 기독교 전통의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다시금 진정한 이야기로 듣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이것은 전비판적 단계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 둘을 혼동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성서 안의 다양한 목소리를 분별해 들을 줄 아는 능력은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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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논문은 원래 한국대학선교학회가 발행하는 『대학과 선교』제7집 (2005)에 “예수 믿기 예수 살기 :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던 논문인데, 여기에는 전반부 1/3만 발췌해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