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화해

누가 악의 축인가? : 미국의 일방주의와 대량파괴무기개발이 진정한 위협이다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5-01-18 23:17
조회
1684
누가 악의 축인가?
: 미국의 일방주의와 대량파괴무기 개발이 진정한 위협이다

사회화와노동 편집부

1월 29일 미국 부시 대통령은 첫 국정연설에서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부시는 45분에 걸친 연설 시간의 대부분을 1단계 '테러와의 전쟁'이 승전을 거두었다는 자축과 함께, 향후 더욱 강화될 미국의 국가안보 체제의 방향에 할애했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하루 3천만 달러가 넘는 전비(戰費)가 들었다", "고가의 정밀무기가 적군을 무너뜨리고 무고한 생명을 구했다"면서 최근 20년 동안 가장 큰 폭으로 국방비를 증액한 2003 회계연도 예산안 통과에 대한 협조를 당부했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미국 공화당-민주당 소속 상하원 의원들과 청중들은 연설 도중 기립박수 43회를 포함해, 77차례나 박수를 보내 부시의 연설에 화답했다.
1990년대 동안 미국은 이 세 나라들을 '악당국가'(rogue state)라는 불렀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새롭게 고안한 칭호는 더욱 적나라한 어휘였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부를 때 사용했던 '악의 제국'(evil empire)이란 표현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탈리아-일본을 가리켰던 '추축국'(axis of powers)이란 표현을 합쳐 놓은 듯한 말이다. 이제 미국이 이 나라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상, 이제 남은 것은 무한 대결과 철저한 섬멸을 향한 '성전'뿐일 것이다. 마치 미국인의 뇌리에 남아 있는 영화 '스타워즈' 속에서 벌어진 '악의 축'과의 전쟁처럼 말이다.

그러나 '악의 축'은 실존하는가?

부시 대통령의 입 밖으로 뛰쳐나온 '악의 축'이란 말은, 이들 세 나라가 미국 안보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은밀한 정치동맹을 형성하고 있다고 은연중에 암시한다. 그러나 이들 나라가 실제로 추축(axis)을 형성했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미국 정보기관 역시 어떤 증거도 제시한 바 없다. 물론 이들 세 나라가 미국에 대한 적대감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는 점은 사실일 수 있다. (어디 이들 나라뿐이랴!)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으로 연합되어 있다기보다는, 분명히 분할되어 있다. 1980년대 이란과 이라크는 탄도미사일을 이용한 '도시전쟁'을 벌였고, 아직도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이란 또는 이라크와의 동맹국이 아니다. 북한이 탄도미사일 기술의 판매를 위해 이란, 이라크 등과 접촉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만 이것이 곧 정치적 연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북한과 미국의 우방인 파키스탄과의 미사일 관련 상업 거래량이 더욱 크다. (그리고 북한이 미사일 관련 기술을 판매하는 게 불법적이라고 단죄할 국제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미사일 판매 업적 1위는 미국이다.)
그렇다면 이들 각각의 군사력은 미국이 묘사하는 '악의 축'에 걸맞을 만큼 위협적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라크의 경우 페르시아만 전쟁과 이후 UN의 사찰을 통해 무기 생산기반이 붕괴했다. 미국은 이미 이라크의 공중을 완전히 장악했고, 첩보위성과 항공기를 통해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다. 페르시아만 전쟁 이후에도 미국은 의심이 가는 지역에 대한 공중폭격을 지속했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인민들이 죽어야만 했다. 또한 이란은 경제난 속에서 군사비를 지속적으로 삭감해왔으며, 최근에는 해외투자, 무역관계를 고려해 주요한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허용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떠한가? 물론 북한은 1998년 인공위성 시험발사를 통해 군사력 수준을 과시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은 1994년 미국과의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미국과의 전면적인 관계 개선을 전제로 핵무기 개발 중단을 실제로 수용했다. 북한은 제네바합의를 성실히 이행해온 반면, 실제 제네바합의를 고의적으로 방기하고 있는 쪽은 미국이다. 또한 북한은 미사일 문제에 관해서는 1999년 중국 및 러시아와의 협의를 거쳐, 미국이 양국간의 상호관심사에 대한 협상을 지속한다는 전제 하에서 2003년까지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한다는 중대 결정을 발표한 바 있다. (역시 북한이 미사일 또는 인공위성 시험발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국제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은 부시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 약속을 지키고 있으나, 부시정부는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북미관계의 교착상태, 누구의 책임인가: 미국의 제네바합의 위반과 한미일 삼각공조의 본질], 사회화와 노동, 2001.08.22 참조)

'악의 축' 이론의 기원

따라서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은 현실을 매우 왜곡함으로써,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기 위한 전략적 고안물에 불과하다. 이는 미국의 군사적 팽창주의와, 미국의 이해관계에 사활적인 전략 지역(중동, 동아시아)의 군사력 증강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악의 축' 이론은 언제 생겨난 것인가?
이는 1990년대 초반 냉전의 붕괴 이후 미국 국방부가 기존의 군비태세의 급속한 감축을 막기 위한 군사전략 및 모형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이때 미국은 이라크, 북한 등을 이른바 '악당국가'로 규정하고, 1990년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매우 강력한 '주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걸프전쟁과 북한 핵개발 의혹을 지렛대로 삼아서, 미국의 군사력 재조정의 모티브를 발견한 셈이었다. 미국은 이들과의 군사적 대결을 위한 '중강도전쟁' 모형을 고안하고, '윈 앤드 윈' 전략을 수립했다.
기실 1980년대까지 미국의 군사모델은 오직 '고강도전쟁'과 '저강도전쟁'이라는 두가지 모델밖에 없었다. 고강도전쟁은 유럽전역에서 나토 동맹국가들과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가들간의 대규모 전면전을 상정한 것이었으며, 저강도전쟁은 제3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했던 게릴라투쟁이나 '민족해방'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수립된 것이었다. (물론 고강도전쟁 전략에는 핵전쟁에 대비해 핵무기의 선제사용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저강도전쟁의 경우에는 반란 지원 또는 반공폭동의 지원, 군대파견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냉전의 붕괴는 이러한 군사전략 모형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요구하였다. 즉 소련이 붕괴하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된 마당에 '고강도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대규모 전력을 유지할 근거가 사라졌으며, 만약 '저강도전쟁'만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이는 당시 미군의 10분의 1의 규모만 있어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비교적 대규모의 재래식전력과 초보적인 핵·화학·미사일 능력을 갖추었거나 갖추리라 추측되는 '지역 강국'들을 주목하면서 이른바 '중강도전쟁'이라는 군사전략 개념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는 미국의 군사안보를 위협하는 적으로 묘사되기에 시의적절했고, 걸프전쟁을 걸치면서 90년대 이후의 미국의 군사정책은 이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모형과 전략 틀의 근간은 1990년대 클린턴 정부를 거쳐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 누가 악의 축인가?

미국 정부는 '악의 축' 발언을 통해 대량파괴무기(핵-생화학-미사일) 확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미국 정부가 앞장서서 이를 제지함으로써 세계 경찰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한 듯하다. 그러나 대량파괴무기의 개발과 정치적 이용에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게 바로 부시 정부다.
미국은 자신의 공격적인 핵무기 정책을 보완할 MD(미사일방어망) 구축을 위해, 2001년 12월 지난 1972년 소련과 체결한 'ABM조약'(방공망제한협정)을 탈퇴했다. 그리고 핵무기 성능의 지속적인 개량을 위해, 이미 164개국이 서명했고 89개국에서 비준한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의회 비준을 거부한 바 있다(1999년). 또한 2001년 7월 생화학무기 조약의 강화를 위한 런던회의에서 중도에서 거부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생화학무기를 보유한 미국에게 화살이 날라 올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국무부 부장관 존 볼튼은 "그 협약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동시에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이라크, 이란, 북한, 리비아, 수단, 시리아를 그 협약을 위반한 나라로 지목했다. 이 뿐만 아니라, 미국은 2001년 7월 불법소형무기의 국제 거래를 규제하려는 UN 합의를 거부한 유일한 국가이며, 1997년 12월 오타와에서 122개국이 서명한 지뢰조약(Land Mine Treaty)도 거부한 바 있다. 이처럼 미국 자신이 제시한 잣대로 보더라도, 핵미사일을 미롯한 대량파괴무기와 각종 군사무기 개발 및 확산에 가장 열중하고 있는 나라가 누구인가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악의 축'이란 말인가?

* 이글은 2002.02.07 [사회화와 노동]121호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