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스승이면 어떻고 제자면 어떠하리…올바른 진리를 얻으면 되는 것이니 (한겨레, 3/24) (2006/06/07)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01:21
조회
1083
**스승이면 어떻고 제자면 어떠하리…올바른 진리를 얻으면 되는 것이니 (한겨레, 3/24)

<자성록> 책속으로

속히 성취하려는 마음 때문에 고전을 읽을 겨를이 없고, 지금 읽는 글 또한 정밀하게 이해할 틈이 없으니, 몸에 무르익도록 할 시간은 더더욱 없는 것이다. 생각은 두서없이 매양 무엇엔가 쫓기는 듯하여, 처음에는 여러 책을 널리 읽고자 한 것이었지만, 점점 황망하여 갈래를 잃어버리고 만다. 결국에 가선 처음부터 아무 것도 읽어보지 않는 사람과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는 꼴이 되어버린다.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건대 누구 하나 이런 병폐에 빠지지 않은 자가 없으니 필경에는 뜻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실제 이뤄내는 공은 보잘 것 없이 될 것이다.(‘김돈서에게’)

가난해서 밭을 사는 것은 본디부터 의를 크게 해치는 것이 아니다. 값의 고하를 따질 적에 지나친 가격을 깎아 시세에 맞추려는 것 역시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다만 자기를 이롭게 하려고 상대를 해롭게 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성인과 악인의 구별이 되는 곳이다. 이런 경계에서 재빨리 정신을 차려 의(義)와 이익(利) 두 글자로써 깊이 헤아려 바르게 판단한다면 곧 소인이 됨을 면하고 군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밭을 사지 않는 것(즉 경제활동을 거부하는 것)이 고상한 일은 아니다.(‘정자중에게’)

대체로 선배를 비난해서 말하는 것은 후학으로서 감히 경솔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치를 분석하고 도를 논함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구차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주자와 여조겸이 호굉의 글을 정정할 적에 장식 역시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터다. 장식은 호굉의 제자였지만, 제자로서도 스승의 글을 비평하기를 흠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탐구를 천하의 공적인 일로 여겨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배면 어떻고 후배면 어떠하며, 스승이면 어떠하고 제자면 어떠하며, 저것이면 어떻고 이것이면 또 어떠하랴. 취하면 또 어떻고 버리면 또 어쩌랴. 오로지 한결같이 올바르고 바꿀 수 없는 진리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황준거에게 답하며’)

정자나 주자와 같은 이들이 세상의 환란에 걸려들지 않은 까닭은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이 있으면 강력히 사퇴하여 자기 뜻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신하가 물러날 수 있는 길이 아주 막혀버렸다. 혹시라도 물러남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무리들의 분노와 시기 그리고 여러 가지 핍박을 받게 된다. 그래서 선비가 한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꼴이 되고 만다.(‘기명언에게 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