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고공습’ 베를린은 침묵했다 (한겨레, 4/21) (2006/06/07)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01:48
조회
1177
**‘해고공습’ 베를린은 침묵했다 (한겨레, 4/21)


최초고용계약제 (CPE)를 둘러싼 프랑스에서의 지난 두 달여 간의 힘겨루기는 일단 정부, 여당의 입법 철회를 통한 부분적 양보로 종결될 듯하다.

한 가지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각축의 과정을 통하여 각 세력 간의 전통적 대치의 전선이 외견상 뒤바뀐 듯 보인다는 점이다. 보수 여당에서는 개혁에 적극적이며,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하여 열악한 환경의 청소년들에게 일시적이나마 취업의 기회를 열어놓음으로서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 하며, 노동계와 사회주의 야당에서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싸워서 이룩해 놓은 사회적 안전망과 권리에 만족하며 과거 노동운동이 확보한 기득권에 집착하는 듯 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독일도 지난 해 말 기독민주당(CDU)과 사회민주당(SPD) 간의 연정 합의서를 통하여 프랑스처럼 처음 취직하는 이들에게 지금까지 6개월에 불과했던 수습계약기간을 2년으로 연장하면서, 이 기간 동안은 특별한 사유없이도 자유로운 해고가 가능하도록 합의하였다. 더욱이 프랑스와는 달리 자유로운 해고가 가능한 연령을 26살 이하로 묶지 않고, 나이와 경력에 상관없이 처음 입사자 모두에 해당되도록 규정하였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강화하고자 하는 기독민주당에서는 이러한 사회민주당과의 합의를 지속적 개방을 위한 출발점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사회민주당은 이번 합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기업가 단체들은 법적으로 해고를 어렵게 규제함으로서 처음부터 새로운 고용 자체를 재고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반면, 노동조합에서는 해고제한의 완화가 일자리 창출에 보탬이 된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미 현재도 해고의 50%는 고용한지 처음 1-2년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해고방지법까지 없어진다면 적어도 이 24달 동안은 해고의 문을 완전히 열어놓는 격이라고 노동조합은 주장한다. 여기에서도 지키려는 이들과 바꾸려는 이들의 전선이 완전히 뒤바뀐 모습이다.

프랑스와 유사하거나 부분적으로 더 개악된 정책이 예고된 독일에서는 의외로 지난 몇 주간 해고완화에 대한 어떠한 반대운동도 없이 조용하였다. 물론 기본적으로 독일 노동시장의 구조 자체가 프랑스보다 건전하고 젊은이들의 실업률도 절반밖에 안 된다. 대학생들의 경우 부활절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새학기가 시작되는 탓도 있으리라. 그렇다고 지구화의 물결이 이들에게 더디게 도착하는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나이·경력 불문 2년내 해고 가능

국가경제의 불안, 악화된 노동시장, 낮은 출산률과 연금 수혜층의 증가 등의 변화가 갑작스럽게 한 세대에 몰아쳐 왔다. 이들 2000년대 초반 독일의 젊은이들은 80년대, 90년대에 자신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성장이란 당연하고도 늘 익숙한 것이었다. 이들의 부모들도 자신들이 싸워서 이루어놓은 도덕적, 경제적 성취에 자랑스러워하였으며 자식들도 그들처럼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갖는 미래에 대한 상은 스트레스와 불안, 불확실함 등으로 채워져 있다.

똑같이 그 부모 세대들도 이들 만할 때 “미래가 없음”(No future)을 외치고 세계의 침몰을 경고했지만 그것이 자신들 스스로의 침몰에 대한 경고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아버지 세대와 달리 더 빨리 대학을 마치고, 더 많은 연수와 수습과정을 거치지만 부모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미래가 없음”을 외치고 있다.

지금까지는 능력만 있으면 성공이 보장되어 온 사회였다면, 이제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음이 곧 성공적 구직을 보장하지 않는다. 교육없이는 기회도 없지만, 교육이 반듯이 기회를 보장하는 것도 아닌 세상이 되었다.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공장이나 우체국에서 평생직장을 갖고 안정된 삶을 누리던 시대가 이 사회에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공장에서의 미숙련 단순노동이 동유럽으로 이동해가고, 사기업화된 우체국 시스템에서 배달부일이 저임금 비정규 노동의 전형처럼 되어버리기 시작한 것도 불과 얼마 전부터의 일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를 가리켜 “서구의 브라질화”라 표현한 바 있다.

그럼에도 독일의 해고방지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법의 개정이 현재 프랑스처럼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더 이상 독일의 대학생들은 과거와 같이 정치적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물론 학생들을 동원하기위한 기반조직이 갖추어있지 않기도 하지만, 점점 더 강해지는 구직의 압력은 이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빨리 학업을 마치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지, 이에 저항하여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신들 세대만의 연대의식으로 발전하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대학마다, 과마다, 특색있던 교과과정들이 점차 정해진 시간 내에 서둘러 졸업시키는 방향으로 정형화 되면서 학생들은 더 많은 시험과 더욱 강화된 수업과정을 마쳐야 한다. 몇 년 전부터 주마다 시차를 두고 도입된 대학에서의 수업료 징수는 학생들 절반을 스스로 벌어 공부하도록 만들었으며, 이는 학생들의 적극적 정치참여의 길을 봉쇄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대학에서 간간이 있어왔던 항의와 스트라이크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조직해서 무엇에 저항한다는 일에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68운동 당시 중심에 섰던 베를린 자유대학의 학생회 선거 참여율은 오늘날 단지 12 %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의 분노는 점차 증가하고 있지만, 적절한 배출구를 찾지 못하는 형국이다.

유연화는 동시에 불안정성을 동반한다. 전 세계적인 경쟁, 공기업의 사기업화, 새로운 소통기술 등으로 과거에 사람들이 가졌던 직업 안정성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이제 더 이상 직장을 가정과 삶을 지탱시키는 기둥, 나의 천직으로 생각하지 말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 단지 노동시장의 요구에 맞추는 하나의 매개체 정도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력은 구직에서 점점 그 중요성을 잃고 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어차피 천직이란 없는 것이며, 내가 아닌 누구든 내 자리에 들어와 앉을 수 있다.

즉 내 일자리가 속해있는 조직의 안정성은 언제든 다른 무엇으로 교체될 수 있는 유연성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만일 내 자리가 위협받고 언제든 다른 이들로 내 자리가 대체될 수 있다면, 조직의 안정성이 아무리 단단한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열쇠는 결국 유연성과 사회적 안전망의 결합, 경쟁력과 사회적 보장간의 조화를 어떤 선에서 맞추어야 할 것인가이다. 중산층 전체가 몰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가, 아니 전 세계가 갖는 공동의 두려움이다. 지구화의 파도는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에 정규직 월급쟁이들을 비정규직의 불안한 상태로 밀어내고 있으며. 이를 막는데 필요한 정치적 압력은 아직 안전한 발판위에 서있는 이들, 즉 정규노동자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으로의 추락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으며 주변으로 떨어져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안전한 곳에 있을 때 주변부에 대하여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지난 1960년대 초 핵무장에 반대하여 시작된 독일의 전통적 부활절 평화행진은 80년대 초 미국의 퍼싱 II와 크루즈 핵미사일의 독일 배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평화행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고 있다. 당시 이들은 슈트트가르트 도심에서 울름까지 108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30만 명이 손에 손을 잡고 인간고리를 형성하면서 평화를 외쳤다. “복지축소 대신 군비축소”, “이란 공격 반대” 등의 표어가 걸린 금년의 부활절 평화행진은 83개 도시에서 약 12,000 여명의 참여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