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트의 80년과 매스콤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31 20:23
조회
8645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프로테스트의 80년과 매스콤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 프로테스트의 80년과 매스콤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412 - 423 ( pages)
주제어 독립신문 프로테스탄트 매스 미디어 사회구조 한성순보 기독신보 커뮤니케이션 그리스도교 리얼리즘

첨부파일:? 프로테스트의80년과매스콤.pdf

프로테스트의 80년과 매스콤

⑴ 한국에 있어서 참된 신문의 기능을 갖추고 시작한 것은 독립 신 문이었다는사실은누구나인정하고있다. 즉 근대적인 의미에서 보도의사명과문화적인계몽을 뚜렷하게내걸고안팎에서 오는 여러 가지 압력과 싸워가면서 신문의 구실을 다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독립 신문〉의 역사적인 의의를 충분히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 신문은 그 창간호에 다음과 같은 편집 방침을 천 명하였다.

"독립신문이본국과외국?경을 자세히 기록할테이요정부속과 민간 소문을 다 보고?: 터이라. 정치상 일과 농? 장? 의술상 일 을 얼마만큼식 이 신문상 미일 긔록富”

독립신문이 전 근대적인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합리적이며 능률 적인 법 시행을 강조한 것 중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한성 저판쇼 4?가 그견에 둘이 될 째에 민형?가 늘 밀넛뇨되 요?이는 ?나뿐이라'민형스 쇼송아 적여구산^고 저판쇼 대문 밧꾀 송민몃십명이 열입을흐엿스니 법부에서 쇽히 판?를내야 민 형 ?가 밀 리 지 안케 ?이 죠홀듯 흐더라(?八九六年九月?九日). 서재필 박사는 그의 저서 〈체미 50년〉에서 말하기를 독립신문은 외세에 아부하는 정객들을 욕설하고 조선의 민리, 민복만을 위하여 일하고 남의 굿에 놀지 않음을 의무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아놓든 1800년대의 말기에, 국운이 낙조처럼 기울어져 가는 시 기를 맞이하여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고 국민을 깨우쳐서 독립을 이 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선각자 중에는 그리스도교적인 의식과 사 명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 최 준씨의〈한국 신문사〉를 보면 다 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갑오경장 이후〈독립 신문〉을 비롯한 순 국 문지들이 들고 나섰던 국정 개혁과 보수 세력과의 대결에서 오는 혁신 운동을 1898년 독립 협회원 검거 사건을 그 정점으로 하여 점 차로 그 방향이 전환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첫째로는 갑신 쿠페타 이래 우리 나라 일부 양반 혁신 분자들에 의한 개화 진취와 국정 개혁을 꾀한 극대화 운동이 갑오경장을 거쳐 독립협회 운동 으로 발전되어 국민 대중을 발판으로 한 민중 운동으로 변해지자 사대주의자들과 보수파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무너졌다는 것을 들 어야 될 것이다. "(최 춘, 한국신문사 1960.卯. 75~7히 이러한 사실들은 초기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들이〈항거 엘 리트〉를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과〈현실 참여〉에 대한불퇴전의 자 세를 고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앞으로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마는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수 있 는 점은 즉 한국최초의 신문다운신문은항거한다는에스쁘리로 시 작되었고, 그 정신이 프로테스탄트의 프로테스트 즉 세속적 권위주 의에 대한 반항으로 그 바탕을 삼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것 은 한국에 있어서의 매스 코뮤니케이션과 저널리즘의 발전 및 성격 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로서 간주할 수 있다. 즉 문화적인 양립 성((:이패있죠아예의 매개의 구실을 하여야 할 매스미디어가 사회구 조 사이의 상호 의존 혹은 작용이라는 복합성을 위축시켜 오직〈독 립〉이라는한가지테마에만모든 언론 활동의 기능을집중시켰다는 점을 참작한다면,민족의 숙명적인 비극이 우리 나라의 매스미디어 의 성격마저 위축시켰고, 그것이 그대로 현재 한국의 매스 코뮤니 케이션에도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몇 해 전〈신문의 날〉의 표 어로서 한국의 신문이 내 건 말이〈신문의 독립〉이었다. 과연 무엇 으로부터의 독립이냐? 여기서 말하는〈독립〉이란 무슨 뜻인가?신 문이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부의 간 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독립인가?신문이 독립한다는 말을 언론의 자유를 차지하겠다는 말로해석한다면,그것은〈국민의 아는 권리 (?예히6,3 118111 40 1?;110〉의 주장이어야 하며,그 권리를 차지하려면 신문의 독립보다는 미디어가 한 사회 구조 안에서 차지 하는 상호 작용 및 와존도를 측정하여 자기의 본래적인 위치를 모 색하는 것이 더 온당한 일이 아닐까? 여기에 현대 한국의 매스 코 뮤니케이션이 탐구하여야 할 과제를 찾을 수가 있으며,이것이 또 그대로 한국의 프로테스탄트의 매스미디어 운영에도 큰 방향을 제 시하여 주는 것이다.

⑵ 세계에 있어서 매스 코뮤니케이션의 발생사를 아는 사람은 무엇 보다도 1540년 독일 마인쯔에서 포도주 압축기를 사용하여 이보다 50년 앞서 한국에서 발명한 것과 꼭 같은 활자로 인쇄를 하였다 는 것이 그 시초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얼마 후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이 고안되자 먼저 찍어낸 것이 42행의 성서였다. 즉 그실제 적인 용도가 먼저 교회 안에서 발달되었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맨 처음 도입한 인쇄 시설은〈한성 순보〉를 찍 ‘71 위하여 일본에서 김옥균과 복택유길의 알선으로 된 것이다. 다음에는 1836년에(헌종 3년) 모방 신부가한국에 포교를시작한 후 술한 수난을 겪어가다가 꼬스트 신부((:⑵떠가 리탤 신부의 명에 따라〈한불자전〉(내예아?^을 처음 편집하는데 참여하였고이 를 일본에서 인쇄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에 1885년(고종 23년)에 는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셀러가 한국에 입국하여 1889 년에는 중국에서 선교하던 오링거 박사가 배재학당에 와서 교내에 활판소를 시설하고 국문과 영문 활자를 주조하였다. 여기서 인쇄된 정기 간행물로서 1889 년에 시작된 주간〈죠선 그리스도인 회보〉그 리그 1896년부터 시작한〈독립 신문〉, 1897년부터는〈협성 회보〉그 리고 최초의 일간〈매일 신문〉이었다고 한다(배재사). 이〈죠선 그리스도인 회보〉는〈독립 신문〉보다 7년이나 앞서 난 한글 신문인데’ 그것이 순 한글로 인쇄된 신문으로서의 효시였 다. 그 창간 사설을 보면 근대화를 위한 긴급한 동의를 하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죠선 백성을 위하여 지식을 널리 펴려하난 것이니 지식을 말하 려 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턴지만물의 리치와 형상과 법을 아난 것 이오 모든 물건을 맨다난법을 아난것이라. 아모 생업이라도 각 의 문을 배혼 것이 유익지 아님이업사니 지식이라 하난 것은 각 사람 에게 자물노 유익게 함이니 나라에도 유익함이 되나니……‘ ”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한국에서 처음으로 근대화를 부 르젖은그리스도교회의 제안이었다. 얼마나 프라그마틱하고 의욕 에 넘친 글인가? 서재필 박사의 독립 신문보다 근 7년 앞서서 이 러한 대담한 주장을 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의 우리 나라 역사적 인배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용감한 외침이었다고 인증하 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후에 이 신문은 장로교의 〈예수교 회 ?보〉와 합칙서〈기독 신보〉로 발족하였는데, 그것이 1915년 12월 8일, 그러니까 처음 발간된〈그리스도 회보〉에서부터 약 25년 후 에 시작된 것이다. 이 신문에 관해서는〈기독 신보〉 (내예년 9월 24일자)의 논설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밧그로보아 경성의 중심인 종로통에 거지 150평 총 건평 7백 60여평을 4층으로 웅장하게 건축하는 중인데 공비는 2만원 가량 이나 되는데……사업의……비용은 과거 1년간 7천 1백 5십원십 5 전에 이르렀다……기독 신보에 대하여 1년간 경비가 1만 4백92원 5십전인데 대금과 기타 기부금서회에서 담당하였슴으로써다. ”

이 사설은 기독교 서회의 발전상에 대하여 언급한 것인데, 그 중 에 이'〈기독 신보〉에 소요된 비용이 1년간 1만4백92원이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금액으로서는 막대한 액수였다. 이 기독 신보도 일제의 압정이 극심해지고 언론에 대한 압박이 더해지자 정인과씨의 독단으로 흐지부지 소멸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초창기 한국 교계의 신문 역사를 간단하게 훑어보 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당시의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도 부푼 가슴 율 안고 넘쳐 흐르는 기개로써 천하를 논하고 교회와 국가, 민족의 장래를 말하는데 있어서 조금도?서슴치 않고 소신을 밝혔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1월 1일자기독 신보에는〈여자의 사회적지위〉 를 높이자고 체창한 조회염씨의 글이나 김활란씨의 여성『교양에 관 한 논설, 그리고 아동 대우에 관한 고찰을 한 김종만씨의 글은 정 말 선각자로서의 외침을그대로보여 주는글이라고 하겠다. 지면 관 계로 인용할수없으나 한 마디로 해서 당시 이 신문은(소수의 어용 신문은 제외하고) 거의 다 사회적인 아노미 현상에 대하여 정면으 로 도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대담하게 다 루었고(기독 중보1930년1월 1일 김준성) 종교와 과학 문제 등을 서슴 치 않고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살펴 볼 때,현재의 교계의 '신문에 비해서 초창기의 교계 신문은 현실적인 문제 즉 농업, 학술, 교양 전반에 걸쳐 거의 무분별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다각적으로 다루고 있었다는 사실 을 볼 수가 있다. 한국의 교회가 몹시 문학적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러한 신문에 나타난 논조로 보아 그렇게 단순하게 단정을 내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한다면 당시의 선각자들은 몹시 도 현세적이었으며 지상적인 생활의 계몽과 소망을 모색하는데 조 금도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시기에 어떠한 계기' 로써 한국 교회는 코뮤니케이션의 자기 폐쇄와 타성에 빠지게 되었 는가? 이것은 한국 교회사를 하나의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연구하 는데 좋은 과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간단히 언급 하여 본다면,한국 교회는 애당초부터 결코 타계주의나 묵시 문학 적인 신앙을고취하지 않았다는것.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현세적이 었으며 투쟁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실적인’ 출구가 점점 압축되어 그것이 초현실적인 비견으로 정화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아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이보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 하여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고찰은 한국 교회의 매스 코뮤니케이션 문제와는 무관계하다고 할런지 모르나, 그것은 문제의 이해를 넘어 서 해석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요, 또한 앞으로 이 문제를 연구함에 있어서 이해를 넘어 해석히는 일이 반드시 요청되는시기가 을것이 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결코 허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⑶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80년사를 훑어보고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 은 선교의 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서의 메시지에 대한 앵 글로색슨적인 해석으로 일관되어 왔기 때문에 그 신학적인 사고나 경향이 또한 앵글로색슨적인 색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다. 만일 과거에 있어서 한국의 어느 교파나 신학에서 대륙 신학 중, 특히 독일 신학의 사상을 참신하게 해석하고 한국 교회에 교시 하였다고 가정을 한다면,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느 모로나 달라졌으 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한낱 가상으로서 앵글로색슨적인 신 학 사상의 공과를 따진다는 일 자체가 아주 비현실적인 관념적인 유희라고 할른지 모르나, 어쨌든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앵글 로색슨적인 해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이웃 나라인 일본은 그 점에서 우리들의 경우와 다르다. 여 기에 덧붙여 초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사람들은 결코 우리가 상 상한 것처럼 고루한 보수주의자들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문서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여러 가지 일화를 통해 초대 선교사들 중에는 품격상위대한 지도력을 가졌으며 호탕한 기재를 가진 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분들의 선교 정열은 주로 미국 적인 프라그마티즘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의 숫자적인 성과를 준거 의 테두리로 삼아 왔었다. 여기서 성서적인 의미 에서 말하는 가치의 도착이 생겨지게 되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 한다는 일과 한 마리의 어린 양의 비유는 결코 근본적인 성서 진리에 있어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땅 끝까지 전한다는 선교의 본질적인 요청이 그대로 대교파주의의 오만을 정당화하여 주지 않 는다. 이처럼〈다수〉에의 의거가 진리의 도착을 가져왔고 이에 따 르는 숱한 분열의 비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땅 끝까지 전달되어야 하되 결코 숫적인 분량에 최후의 기준을 두 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앵글로색슨적인 프라그마틱한 사상의 영향 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포 분열 작용과 같은 교파의 분열이 끝끝내 분열로 서만 그치고 그것이 다원화의 지양이 불가능하게 된 이유가 어디 에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서구의 프로테스탄트는 분열된 대로 하나의 다원의 과정을 거쳐 기능적인 협조를 한다는 세계 교회 협 의 회 (짜. (:. (:. ? 같은 것을 조직 하였는데 비 해 서 분열 에 서 다원화를 거치는 과정을 가지지 못하는 한국 프로테스탄트는그 나름대로짜. (^(:. 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만만치 않은 문제성이 놓여 있다. 아 무리 짜.(:.!:.가 수퍼 처취가 아니라고 해도 한국 프로테스탄트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체가 분열을 알아도 다원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기에서 분열이 다원화로 지양되는 중요 한 핵심이 역시 주체성에 따르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4) 주체성 상실의 역사를 도그마티즘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보는 일 이 허용된다면,한국에 전래된 프라그마틱한 프로테스탄트가 어떠 한 도그마티즘에 사로잡혔는가를 고찰하여 보아야 한다. 한국의 현 재의 비극의 먼 요인을 이러한 도그마틱한 역사 의식에서 찾아 본 다는 일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개인이나 집단 ‘ 의 결 단 바탕에는 그 처해 있는 역사적 상황을어떻게 받아들일 것 인가 하는 사유로서 짜여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선교사를 통해 전 래된 프로테스탄트는 한국 고유의 문화전통과융합하는 반면, 비합 리적인 것의 합리화(소위 근대화)를 가차없이 수행하였다. 여기에 따르는 술한 일화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인 헤테로지 너 스한요소와 호모지너 스한요소가 결합되어 하나의 피상적인 것 같으면서 개인 행동을 지배하는 도그머가 바로 〈공산 주의는 무신론, 그런고로 지상의 마귀이다〉라는 것이었다. 초기 마 르크시즘의 교리 중에는 이러한 점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고 또 한 한일 합병 이후의 독립 '투사 가운데는 이러한 교리에 매혹을 느 끼어 공산주의적인 방법으로써 일제와 투쟁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철저한 교조주의자 외에는 방편상 조국 독립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하여 좌익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도그머에 사로잡힌 프로테스탄트로서는 리얼리스틱한 판단 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공산주의를 광적으로 신봉하던 자들 중에는 또한 〈종교는 아편〉이라는 도그머 의 포로를 면치 못하였다. 이렇게 종교적 교조주의와 공산주의적인 교조주의의 대립에서 니얼리즘을 상실하여 온 것이 우리 주체성 상 실의 역사 과정인 것이다. 공산주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한국의 프 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주체성의 문제가 곧 도그머 티즘의 지양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도그머티즘에 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개념의 혼란이 현재 한국 프로테스탄트가 직 면한 코뮤니케이션의 근본 문제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 하여 지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혼돈 분열화와 다원화의 무차별 수량적 가치 판단 등, 해방 이후로부터 현재까지의 사상적인 공백 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이러 한 현상의 특징은 각종 타부에 대한 강박 관념,그리고 내면적인 타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공허한 언어의 남용과 더불어 현 실적인 도전에 대한 무반응으로 일관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런고로 한국 프로테스탄트는 현재 비교적 거창한 매스미디어의 시설을 가지고 있지만 전달 대상에게서 빈약한 반응을 받는 이유를 이러한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가사없는 노 래를 부르는 것처럼, 메시지가 없는 허밍을 하고 있다.

(5)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프라그마틱한 선교 사상이 현실의 장벽 (일제의 압정이라는)에 부딪쳐 그 출구를 찾지 못하게 되자, 그것 은 하나의 카타르시스적인 귀의심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해방 전에 한국의 교역자들이 거의 다우리 민족 해방을 구약의 출애굽 기에 나타난 모세의 민족 해방 설화로써 음유하였었다는 사실을 기 억하고 있다. 민족 정신을 구약 성서적인 카타르시스 과정을 통하 여 한민족의 가슴 속 깊이 고이 간직하게 하였다는 것은 한국 프 로테스탄트가 가진 특징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라그마도!즘으 로부터 도그머티즘,그리고 프라타니즘의 경로를 밟아 현재까지 이 르렀다고 생각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급템포로 발전한 근대화는 현대식 무기로 싸운 6.25사변으로 더 촉진되었고, 여기에 따르는 일반 매스 코뮤니케 이션에서〈알아야 할 권리〉의 범위 ^대!0가 인구 중가 및 유동성과 더불어 기하학적으로 확대되자한국의 프로테스탄트는그리스도교의 메시지의 현실적인 타당성 (혜하태대) 과 무력에 대하여 곤혹을 느끼 면서 내부적으로는 도그머틱한 분쟁을 수습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 르렀다. 로빈손의〈표이^있 40 0 x 1 ?? 가 그다지도 서구 신학계에서 문 제가되고〈순교자〉가 문학적인 문제성 외에 신학적인 과제를 던 져 주어도,한국 프로테스탄트는유구무언이며 찔러도 아프다는 말 조차 하지 않는다. 언론 파동이나 한일 희담같은국민전체의 관심 사인 사건에 대해서도‘프로테스탄트가그래도 무어라고 할말이 있머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일체 입을 다물고 정체 불간여라는 구실로 도피하고 있다. 이러한 무반응,무감각은 오늘에 시작된 것 이 아니라 그 원인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는 끝내 실의로써 끝나지 않으리라 고 믿는다. 지나간 20년을 한국 프로테스탄트가 암중 모색의 시기 라고 한다면 이제부터 참된 의미에서 복음의 메시지의 해석과 전달 이 새로이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인 매스 코뮤니 케이션이 이러한 복음의 해석에 기반을 둔 사회 윤리 또는 그리스 도교적인 리얼리즘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울리는 팽과리 소리에서 끝나고 말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진지하게 연구 하여야 할 문제인 것이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의 매스미디어가? 당면한 문제를 방송 및 보도의 기술적인 제시라는데 중점을 두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 나 더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적인 사회 윤리를 해석한다는 일이 시급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매스 코뮤니케이션과는 별개의 문제이 기는 하지만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다. 최근에 특히 20세기 후반 에 들어서면서부터 전 세계의 매스 코뮤니케이션의 이론은 권위주 의,자유주의 그리고 소비에트의 신권주의를 지나서,사회 책임론 사으로 귀결점을 찾고 있는 실정에 비 추어 본다면 정의나 자유 같은 사회 윤리 문제에 대하여 풍부한 메 시지를 가지고 있는 프로테스탄트가 이러한 경향을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로서 당장 다루어야 할 것은 사회 윤리에 대한 해석을 그리스도교적인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 여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공 가운데서 실패를 보고, 실패 가운데서 성공을 보며 장점 가운데서 단점을,단점 가운데서 장점을 찾아내는 겸허한 태도는 오직 성령의 역사가 인간의 모든 사유와 행동에 앞서 그 상황을 바꾸어 중으로 인간의 판단도 이에 따라 좌우된다는 통찰에서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적인 리얼리즘의 특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