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 김관석 목사

(雲山 金觀錫, 1922.7.27-2002.2.4)

운산의 약력

 

1949 한국신학대 졸업, 한국신학대학 조교수, 목사 안수
1952 - 1968 기독교서회 근무
1953 - 1954 미국 시라큐스대 저널리즘 스쿨 유학
1955 - 1956 연세대 법정대학 강사
1960 - 1967 기독교사상 주간
1965 - 1966 미국 유니온 신학교 유학
1966 - 1968 이화여자대학 강사
1968.4 - 1980.2 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1968 - 1980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사
1976.5 미국 이든신학교 명예신학박사 학위 취득
1979 - 1981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사장
1980 - 1987 기독교방송 사장
1983. 2 세계기독교언론협의회 아시아 지역 의장
1984. 10 한국기독교산업개발원 이사장
1987 - 1989 기독교방송 명예사장
1990.5 새누리신문 사장 취임
1992 - 2002 녹색교통운동 이사장
2000.10 정부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운산의 삶과 역사

1922년 7월 27일 (음력)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다.

1936년 3월


영생중학교에 입학한다. 영생중학교에서 5년간 다니던 중 기독교에 입문하여 세례를 받는다. 영생중학교 시절의 교회 경험은 평생의 신앙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토대이다.

1941년


일본 동경에 있는 일본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1942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운산은 잠시 고국 함흥으로 귀국한다.

1943년 2월


일본 니가다현 동부 23부대에 입대하라는 강제징집 통지를 받고 전쟁 학도병에 징집되어 시바다 동부 23부대에서 부대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일본 명치학원에서 공부하다 학도지원병이 된 박수형과 함께 군대탈출을 계획하였고 운산은 군사 훈련 중에 1945년 6월 죽음의 위기를 넘어 우여곡절 끝에 결국 탈영을 한다. 그리하여 운산은 일본 아키다 현의 한 탄광 한바에서 은신을 취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군국주의가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동경의 일본신학교에서 학업을 다시 시작하였으나 생계가 막연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그해 9월 고향 함흥으로 돌아간다.

1945년 12월


그는 고향 함흥으로 돌아와서 남부교회 전도사로 일을 한다. 그러나 고향 함흥이 소군정 지역에 들어가면서,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적으로 벌이다가 함흥형무소에 투옥된다. 운산은 한 달여의 수감기간을 보내고 1946년 1월 보석으로 풀려난 후 함흥의 YMCA 재건운동에 임한다.

1946년 10월 21일


운산은 어머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옥실과 1946년 10월 21일 혼례를 올린다.

1947년 여름


공산당의 감시를 피하고 자유로운 해방의 삶을 쫓아, 그리고 중단했던 신학공부를 다시 하기 위하여 1947년 이른 여름 어선에 숨어 탈출하여 주문진을 거쳐 삼팔선이남 서울로 내려온다.

1947년


동자동의 조선신학교를 찾아가서 장공 김재준 교수를 만나고 일본신학교의 수업 학점을 인정받아 1947년 가을 조선신학교 전입학을 허락받고 1949년 2월 졸업을 한다.

1948년


운산은 장로교가 기장, 예장으로 갈라지기 전 1948년에 승동교회에서 모인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는다. 운산은 졸업 후 일본 동경에서 교분을 나누었던 친구들과 더불어 ‘복음동지회’를 조직한다. 이 복음동지회에는 장하구,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지동식, 전경연, 전택부, 한철하, 박봉랑, 박대선, 유동식, 윤성범, 김용옥, 김철손 등이 참여한다.

1950년 12월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난다. 그때 인민위원회에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온양에 있는 국민방위군 훈련소에 입대한다.

1951년 부산


그러나 잠시후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1년 부산에서 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선신학교 재건에 참여한다. 동시에 운산은 부산 광복동의 기독교서회 편집부에서 교정 출판의 일을 한다.

1953년 1월


운산은 1953년 1월 미국 NCC장학금을 받아 뉴욕주 북부의 시라큐스 대학에서 저널리즘(신문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떠난다.

1955년 1월


운산은 미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다시 1955년 1월에 귀국하여 기독교서회에서 일을 한다. 운산에 있어서 기독교서회는 1952년부터 1968년까지 인생의 17년이라는 세월을 쏟아 부으며 일을 한 곳이기에 어느 곳보다 그의 인생의 많은 여정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 시기에 운산은 어린이잡지 < 새벗>과 < 기독교사상>의 편집 등등 다양한 문서선교의 과제를 수행한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구테타


1961년 5.16 군사 정변 구테타가 발생하고 운산은 기독교사상 6월호 권두언 “혁명과 교회의 각성”에 군사 구테타를 비판한 글을 쓴다. 바로 그 내용이 검열에 걸려 군사 검열당국에 끌려가 한차례 고충을 겪는다. 운산은 그 글에서 “우리나라에 어떻게 군사정권을 수립하려 하느냐, 그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비난한다. 결국 배포된 책자는 모두 회수되며, 운산은 권두언을 결국 다시 쓰고 기독교사상은 재발간된다. 운산은 이 사건을 처음으로 군사정권과 부딪친 사건으로 기억한다.

1965년 9월


운산은 1965년 9월에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공부한다. 그는 여기에서 기독교 신학의 사회학적 조명을 하는 시각을 배우게 된다. 1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다시 기독교서회로 복귀한다.

1968년 4월


운산은 1968년 4월, 이전 총무인 길진경 목사의 후임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전신인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로 선출(1968-1980)된다.

1968년 5월 28일


1968년 5월 28일 NCC 총무 취임식에서 선교관계를 광범한 관계로 확장하고 교회의 선교가 사회적인 문제에까지 관심을 갖도록 노력하는,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표방한 취임사를 시작으로 12년간의 NCC 총무직을 수행한다.

1973년 1월


1972년 12월 29일부터 1973년 1월 9일까지, 태국 방콕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선교대회가 열리고 그 주제는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이었다. 운산은 이 대회에 참석하고 많은 신학적이며 에큐메니칼적인 통찰을 얻는다.

1973년 4월


그는 1973년 4월 수원에서 NCC 주최로 열린 ‘오늘의 구원’ 협의회 개회강연을 통해 WCC 선교대회의 내용을 보고하면서 “오늘의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의 성격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힌다. 운산은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참여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NCC의 중요한 과제를 바로 분명하게 천명한다.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1973년 5월 20일)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1973년 5월 20일)은 1973년 동경에서 지명관, 오재식, 김용복 3인이 주축이 되어 작성된 문서이며 한국어·일본어·영어 3개국어로 동시에 작성된다. 오재식 선생이 전체를 주도하고 책임과 후원을 담당했으며, 한국어와 일본어본을 지명관 교수, 영어본을 김용복 교수가 작성한다. 제1차로 국내 동지들에게 이 선언서를 보내어 함께 선언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으나 당시 국내 사정상 불가능함을 통보받는다. 그러나 2차로 권유하여 국내 동지들도 동 선언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국내 사정이 어려워 미화 1,000불을 마련하여 함께 보내어 이 돈으로 동 선언서의 인쇄, 배포 비용 등에 쓰도록 한다. 이 선언서는 국내뿐 아니라 CCA, WCC 등의 국제 기독교 기구와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 교회, 기관, 미국 유니온 신학교 등 대학에도 발송된다. 특히 라인홀드 니버가 편집장으로 있었던 미국의 “기독교와 위기”(Christianity and Crisis)라는 잡지에 선언문 본문이 실리기도 한다. 운산은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의 국내 책임자로서 다양한 과제를 담당한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 (1974)


1973년 작성된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 “문서의 익명성을 벗어나 좀더 당당한 자세로 입장을 천명”하기 위하여 운산 김관석 목사를 포함한 한국의 신학자, 성직자 66명이 모여 서명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이 1974년 11월 18일 발표된다. 이 성명문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는 결코 교회의 본질을 벗어난 정치 참여가 아니라 교회의 근본적인 신앙과 신학에 근거한 행위와 참여임을 선명하게 천명한다. 특히 이 선언문에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 인권, 교회의 선교, 한국교회의 시국선언들에 대한 신학적 고백과 증언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선언은 1930년대 나치정권에 결부된 교회내적 도전에 저항하여 개혁교, 루터교, 연합교가 공동으로 대항하고 작성한 선언문인 바르멘 선언(1934년 5월 29-31일, 열린 고백교회 총회)과 같은 무게를 지닌 선언문으로 평가된다.

수도권빈민선교사건 (1975)


1973년의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과 1974년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성명 이후로 1975년 수도권빈민선교사건이 터진다. 이 수도권선교빈민사건의 핵심에는 운산과 NCC가 있다. 운산은 이미 초기부터 NCC 안에 “인권위원회”를 상임위원회로 설치운영(1974년 4월 11일)하기로 결의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성서적 신앙에 입각하여 선교의 자유를 수호하며, 인권의 유린을 방지 또는 제거하는 책임을 교회로 하여금 성실히 이행하도록 촉구하며 이에 필요한 사업을 수행함”(인권위 회칙 3조)을 목적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1974년부터 진행된 독일의 “세계를 위한 빵[세계급식선교회]”(BFW: Brot fuer die Welt)의 수도권빈민선교사업 지원을 계기로 벌어진 사건이다. 1972년 9월 18일, 운산은 독일 슈튜트가르트에 있는 BFW 기관을 방문한다. 이미 운산은 NCC가 독일로부터 100만 마르크(당시 약 1억 천만원)를 지원받아 자금을 은행에 예치하여 이 이자로 서울의 빈민지역을 위한 종합적인 사업을 실천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고 독일교회에 이 기획을 제시하였으며 독일교회도 긍정적인 검토를 한다. 그러나 9월 18일 김관석은 NCC의 이 제안을 독일교회에서 받을 수 없음을 확인한다. 그날은 운산의 생애 가운데 가장 힘든 날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당시 BFW 아시아담당 총무인 볼프강 슈미트(Wolfgang Schmidt)는 회고한다. 이후 독일교회는 백만 마르크의 지원 대신 BFW의 분배위원회(Verteilungsasschuss)가 수도권 빈민지역 사회선교 프로그램을 위해 20만 마르크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를 위한 독일교회의 이 지원은 결국 운산의 구속과 실형선고의 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미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목사는 1973년 남산 부활절 예배 내란예비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 1974년 권호경 목사는 긴급조치 1호로, 박형규 목사는 긴급조치 4호로 15년형을 받고 영등포교도소에 또 투옥되었다. 두 목사는 포드 미국대통령의 방한 직후 1975년 2월 15일 풀려났다가 두 달도 안 돼 이로 인하여 1975년 4월 다시 운산 김관석 목사와 함께 구속 연행된다.

이 사건의 핵심은 공안당국이 수도권선교위원회를 해체시키고 김관석 목사를 NCC에서 몰아내려는 동기에 있었다. 1975년 4월 3일 오전 10시 서울시경 소속 형사 4명은 4월 2일 전날 오후 검사 최명선, 판사 김창수 기명으로 발부된 압수·수색영장을 가지고 NCC 사무실로 몰려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사업에 관한 서류를 압수하는 동시에 11시에는 총무 김관석 목사를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교회협 회계 이창섭과 직원 이경배 등 2인도 함께 연행해 간 경찰은 오후에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위원장 박형규 목사, 수도권 실무자 권호경 목사,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 사무총장 조승혁 목사 등 3인을 추가로 연행한 뒤, 철야 심문한다. 경찰은 김관석 목사와 박형규 목사 등이 서독의 “세계를 위한 빵”(BFW: Brot fuer die Welt)으로부터 받은 203,000 마르크(2,700만 원)의 원조 자금을 극빈 아동 및 빈민 이외에 막연하게 선교 자금 명목으로 변칙 사용했음이 드러나, 이들을 일단 업무상 배임 혐의로 입건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교자금의 변칙사용에 대한 경찰의 주장에 대하여 자금을 지원한 독일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미 자금 지원의 책임을 맡은 BFW 핵심 담당자 볼프강 슈미트 총무는 이 자금이 협약 규정에 알맞게 사용되었음을 재판이 열리기 전에 한국교회 쪽과 검찰에게 분명히 알렸다. 그는 직접 6월부터 진행되는 재판의 법정에 출두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진실은 법정의 판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경찰은 근거가 없이 부당하게 이 사건을 몰고 간다. 이리하여 풍전호텔에서 그랜드호텔로 옮겨 철야 신문을 벌인 경찰은 4월 4일 새벽 5시경 이창섭과 이경배를 방면하였으나, 김관석, 박형규, 권호경 조승혁 등 4명의 성직자에 대한 조사는 계속 진행한 뒤, 4월 5일에 구속한다. 한국, 독일, 세계의 교회와 에큐메니컬 기관들은 이 사건을 예의주시하였으며 구속자들의 석방과 변호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75년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동 사건 진상조사차 세계교회협의회(WCC) 대표 및 독일의 바이체커 대통령 등 4명이 내한한다.

첫 공판은 1975년 6월 3일에서 세계의 진상조사단의 내한 시기를 피해 5월 30일로 앞당겨졌으나 결국 조사단이 한국을 떠난 후인 6월 10일 10시 제1회 공판이 서울지법 115호 법정에서 열린다. 이 날의 공판에는 함석헌, 강원용, 김정례 등 교회 관계자들과 외국인들, 특히 BFW로부터 공식 방청인으로 위임받은 나까다이라 변호사가 참석하여 방청한다. 6월 21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제2회 공판이 열린다. 특히 7월 5일에 열린 3회 공판에는 돈을 준 BFW의 사무총장 슈미트 목사가 증인으로 출석하여 “그 돈은 원래 인권운동에 쓰라고 준 돈으로 아주 만족스럽게 쓰였다”는 결정적인 증언을 한다. 당시 운산 김관석 목사 및 피고인들을 변호하는 변호인 이세중 변호사는 “BWF가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도 자금을 보냈다고 하는데 다른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당시 참여한 BFW 사무총장 슈미트 목사에게 하였을 때 슈미트 목사는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이다”라는 답변을 한다. 그만큼 이 사건은 제3세계에서도 보기 힘든 정부의 종교탄압과 선교에 대한 침해의 사건이기도 하다.

7월 25일 오전 10시 115 법정에서의 5회 공판이 지나고 8월 2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개최된 6회 공판에서 검찰은 김관석 징역 3년, 박형규 5년, 조승혁 4년, 권호경 5년을 구형한다. 운산은 그 자리에서 “이 재판은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벌어지는 재판이다”는 말과 함께 피고인으로서 최후진술을 한다. 선고공판은 구속 5개월이 지난 1975년 9월 6일 열리며 “선교비 횡령 및 배임사건으로” 김관석, 조승혁은 징역 6개월, 권호경은 징역 8개월, 박형규는 징역 10개월을 선고한다.

1975년 9월 25일 4명의 유죄판결에 대하여 구속자 가족들은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에 호소하는 호소문에서 이는 선교비 횡령 및 배임사건이 아니며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의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사용되었고 자체감사까지 마쳤으며 세계급식선교회(BFW)도 대단히 만족스럽게 집행되었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며 4명의 피고는 무죄임을 호소한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23일의 항소심의 판결도 거의 같았다. 김관석 목사는 1심에서 6개월을 받았으나 운산은 가석방 된다. 조승혁 권호경 목사는 2심에서 8개월만에 감옥에서 나오고 박형규 목사는 10개월 만기출소로 감옥에서 나온다. 박세경 변호사의 변론은 이 사건의 핵심을 말해준다. “9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3.1운동 시기, 신사참배 강요 시기 등에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했던 적은 있으나 4명의 성직자가 파렴치 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의 이 사건은 독일과 세계에 매우 큰 반향을 일으킨다. 세계의 에큐메니컬 지도자와 많은 인사들은 판결을 거부하고 이들의 석방을 위하여 한국을 방문한다. 독일의 리하르트 폰 바이제커 대통령, 서베를린의 큐르드 샤프 감독, 그 외 독일교회, 선교개발기구 지도자들, 그리고 세계의 많은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한국을 방문하고 관심을 갖았다. 이는 오히려 독일사회와 세계의 교회가 한국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인지하게 한 중요한 계기를 촉발하였다. 특히 이러한 한국의 열약한 상황에 영향을 받아 독일의 디아코니아 재단(Diakonisches Werk)이 “인권침해 피해자돕기” 기구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일본교회에서도 이 사건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사건의 배경과 재판의 경과를 70년대 일본기독교협의회 총무를 역임한 나까지마 마사아끼는 『복음과 세계』 75년 10월호에 400자 원고지 40매에 상세하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1975년의 운산의 감옥 경험은 그에게는 매우 큰 삶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다. 운산은 1975년의 출감 이후에도 인권문제를 주제로 하여 반유신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나가자 중앙정보부에서는 자주 직원을 NCC 총무실에 보내고 반정부운동을 중지해달라고 요청을 해온다. 운산은 그럴 때마다 민주화나 인권문제를 선교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지, 꼭 정치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완곡히 저들의 요청을 거절한다.

1970년대 격동의 시절을 보낸 그는 1976년 12월 12일, 부산에서의 인권주간설교에서 인권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한다: “1. 인간이 인간으로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기의 존엄성을 지켜가며 산다는 것이 옳은 일이다. 2. 자기의 생각을 자유로이 표현하고 남의 비판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남을 비판할 줄 아는 것은 옳은 일이다. 3.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노동의 댓가를 받을 권리가 있고 또 정직하게 일해서 일한만큼 수입을 받는 것은 옳은 일이다. 4. 어떠한 나라의 국민이든지 자기를 다스릴 사람을 스스로 선택해서 뽑는 것이 옳은 일이며 또 자신들이 지켜야 할 체제에 대해서 질서를 지키기 위한 발언과 비판을 하는 것도 옳은 일이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의 의견, 특히 양심적인 소신을 밝히는 것은 옳은 일이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1976)


운산은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도 한 역할을 담당한다. 1976년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 신도 700여명이 모여 3.1운동 57주년 기념 미사를 올렸으며 여기에서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된다. 이 선언서의 최종 서명자는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김관석, 은명기,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 12명이다. 이로 인하여 김대중, 문익환, 서남동, 이문영, 안병무, 윤반웅, 신현봉, 문정현, 문동환, 함세웅, 이해동 등 11명은 구속 기소되었으며 77년 3월 22일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는다. 또한 수도권위원회의 위원과 실무자 전원은 반공법으로 연행된다.

운산은 이 사건에 어떻게 관여되었을까. 1976년 초 어느 날 아침에, 문익환 목사가 NCC 총무실을 갑자기 찾아온다. 3.1절을 며칠 앞두고 “민주구국선언”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할 테니 서명을 하라는 것이다. 운산은 선언문 초안을 읽어보고 나서, NCC 실무자로서의 서명은 사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언문의 취지에는 전적으로 찬동한다고 운산은 말한다. 문익환 목사도 운산의 입장을 너그럽게 이해한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운산의 이름이 삭제된 선언문 사본과 삭제되지 않은 선언문 사본이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운산은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기독교의 사회참여운동을 선도하며 NCC 총무로 여러 과제를 수행한다. 운산이 NCC 총무로 취임한 해가 1968년이었으며 첫 재임은 1972년, 두 번째 재임은 1976년, 세 번째 재임은 1980년까지 수행하고 12년간의 모든 NCC 임기를 마친다. 운산은 그가 온 몸을 던지며 대면해왔던 1970년대의 시기를 단순한 폭정의 시대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창조적인 시대라고 종합적으로 술회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그리스도교적인 빛과 희망을 운산은 얼마나 신뢰하였고 확신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86년 10월, 1970년대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 “국민의 주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유를 희구하는 힘 앞에는 무력하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들릴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자유에의 희구는 생명의 힘에서 솟구쳐오는 것이요,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자라듯, 뿌리에서 싹이 나오듯, 생명의 어쩔 수 없는 힘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생명력의 발동에서 사람들은 낡은 형식을 버리고 새 질서를 창출하게 되고, 활발한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는 단순히 억압정치와 폭정의 시대라고 하기보다, 활달한 생명력의 창조적 시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지원 (1984.12)


운산은 에큐메니컬 기독교운동에 대한 관심과 활동을 넘어서서 한국의 민주언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미 70년대 중반 운산은 동아일보사와 동아방송에서 강제 축출된 160여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들로 이루어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구성과 지원에 물심양면으로 협력하였다. 운산의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서의 언론학 수학 경험, 그리고 CBS 사장의 경험은 이러한 언론 민주화를 위한 지원의 큰 자산과 바탕이었다. 특히 80년대 중반 군사독재정권에 협력하는 제도언론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민주, 민중, 통일지향적인 새로운 언론을 창조하려는 노력의 흐름이 형성된다. 이 새로운 언론운동의 형성과 투쟁에 있어서 운산은 중요한 기여를 한다.

운산은 당시 700만원(현재가 7000만원)을 심원 안병무 박사와 함께 독일 미세레오 재단의 협력을 받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동력을 위한 마중물로 지원을 한다. 이 지원을 통하여 1984년 12월 19일 분도회관 대강당에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탄생된다. 이 동력을 바탕으로 1985년 6월 15일 ‘말’지가 창간된다. 운산은 1987년 65세 정년으로 기독교방송사 사장을 퇴임하고 신임 이재은 사장이 기독교방송의 새로운 과제를 이양 받는다. 이후 운산은 명예사장으로 2년 동안 일을 한 후 1989년 명예사장에서부터 퇴직을 한다.

CBS 정상화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1986.5)


운산은 12년간의 NCC 임기를 마친 후 1980년 2월 초 기독교방송국(CBS) 사장으로 취임한다.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은 광주사건의 깊은 상흔을 남긴 채 다양한 방식의 탄압을 자행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80년 11월 25일 진행된 군사정부의 언론탄압이며, 문공부장관은 전국의 언론사를 통폐합한다는 발표를 한다. 이를 통하여 동양방송과 동아방송은 문을 닫는다. 그리고 신아일보가 폐간되고 지방지는 각 시도에 한 개씩 통폐합된다. 또한 전두환 정권은 기독교방송(CBS)에게 뉴스방송과 광고방송 금지를 명령한다. 이로 인하여 CBS는 1980년 11월 25일자로 뉴스방송이 중단된데 이어 11월 30일에는 광고방송이 중단된다. 이는 운산 김관석 목사가 CBS 사장으로 취임한지 10개월 후에 터진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운산은 CBS의 생존을 위하여 전국교회와 신자들에게 방송운영 경비의 조달을 위한 헌금을 호소한다. 당시 신자와 교회의 헌금은 연간 20억여 원이 모였다.

기독교방송의 기능정상화운동은 1984년 3월 12일 기독교방송 정기이사회에서 기능정상화를 당국에 건의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짐으로 촉발된다. 그리고 1985년 2월의 제34차 총회에서 기독교방송의 기능회복을 위한 건의문이 채택된다. 그리고 1986년 5월에는 “기독교방송 정상화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된다.

특히 당시 기독교방송 프로그램 중에 가장 특성이 있었던 것은 “월요특집”이었다. 매주 월요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전국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청취자들이 직접 전화로 자기 소신을 밝히는 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이 당시 방송매체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운산의 언론민주화를 위한 많은 노력들은 CBS 기능정상화 뿐만 아니라 동아투위사건, KBS 시청료 납부거부운동의 촉발과 지원 등 많은 부분에 기여를 하였다. 운산은 CBS 기능정상화운동을 위한 방향설정을 다음 3단계의 과정을 거쳐 추진한다. 첫번째 단계는 환경과 분위기 조성을 위한 CBS 기능정상화 호소 및 건의 단계이다. CBS재단이사회의 건의, 기독교의 각 교단이나 단체들의 건의, 요청 등이 이에 해당된다. 두번째 단계는 헌법의 청원절차에 따른 법적, 행정적 국회청원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행동단계로써 CBS 기능정상화를 요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이다. 특히 100만인 서명운동은 NCC와 연계되어 진행된다. 최초의 서명운동은 1986년 5월28일 전주 중부교회에서 971명의 성직자와 일반신자들이 연합예배 후 서명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이런 가운데 CBS 재단이사회 전폭지원을 받아 언론통폐합조치가 단행된 지 6년 8개월만인 87년 7월 15일 ‘CBS 저녁종합뉴스’를 내보낸다. 당시 운산 김관석 목사는 CBS 사장 퇴임을 보름 앞두었으며, 전두환 정권을 강하게 압박하기 위한 시도로 과감하게 뉴스를 기습 방송한다. 그 시점은 100만인 서명운동의 참여국민이 50만을 넘어선 시점이기도 하였다. 운산의 과감한 그리고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리더쉽, 그리고 국민의 CBS 정상화를 위한 성원이 모여 결국 전두환 정부는 1987년 9월 15일 “87년 10월 19일부터 시사뉴스 방송과 협찬광고방송을 허용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로 인하여 1987년 11월 28일 언론기본법은 폐지되고 방송법이 제정된다. 그리고 CBS는 1989년 1월 1일부터 방송허가의 환경이 언론통폐합 이전의 상황으로 복귀된다. CBS 기능정상화 운동은 3년 6개월 만에 결실을 거두고 막을 내린다. 이러한 CBS 기능정상화 운동, 특히 100만인 서명운동은 제5공화국 정부 출범 이후 정부정책에 대응하는 최초의 조직적인 대규모 시민 서명운동이자, 최대의 서명자 수를 기록한 성공적인 방송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새누리신문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92-)


그리고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새누리신문 창간과 함께 사장으로 일을 한다. 운산은 1990년 교파를 초월한 새로운 기독교정론지 주간 < 새누리신문>을 4월 15일 창간한다. 1월 23일 오후 2시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에서 3백 50여명의 창간위원의 참여로 창간대회를 진행할 때 새누리신문 편집인 운산은 “교회 중심에서 벗어나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진실을 규명하고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출범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창간목적을 밝힌다.

이후 운산은 통일문제연구위원장,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사장, 세계기독교언론협의회 아시아지역 의장, 새누리신문 사장, 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역임한다.

2000년 10월 24일


2000년 10월 24일에는 병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2등급)을 수여받는다. 문화부장관실에서 거행된 훈장 수여식에는 김옥실 사모가 참석한다.

2002년 2월 4일


운산은 2002년 2월 4일 오후 8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향년 82세로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헌신한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