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코뮤니케이션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31 20:50
조회
9616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목회와 코뮤니케이션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목회와 코뮤니케이션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461 - 465 ( pages)
주제어 계시의 미디어 복음의 해석 사회의 가치관 형성 신앙적인 결단 커뮤니케이션

첨부파일: 목회와코뮤니케이션.pdf

목회와 코뮤니케이션

⑴ 신학적인 고찰
계시의 미디어는 자연 역사적 사건으로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코뮤니케이션의 미디어라고 한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의결과는 하나님의 3산1에 대한 인간의 자아의 응답이다. 이응답 이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전달의 성서적 인 사상에는 두 가지 테마가 있다. 하나는 (그(瓜!!!!!페예^! 86^6611 과 ?이!!!!피선예^! 0! 가 있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연 합을 위하여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이 코뮤니온에 관한 그의 염원 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코이노니야’ 공동체 속에서 ?1111 11(6를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크레이머는 "성서의 전달은 인간의 전달 능력에 의거하지 않 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효과적인 전달자는 성령이시다. 전달은 교 회의 생명의 피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 참된 해석적 인 코뮤니케이션을 수행하여야만 한다. 미디어 문제에 있어서 성령 의 역사가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의 신학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의 전달을〈무엇〉이라는 면과〈어떻게〉라는 두 가지 면에서 생 각해 야 할 것이 다. 전 자는 해 석 학적 인 문제 요, 복음을 구체 적 인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인간 실존에 해석해서 전달하는 일이며, 후 자는 복음을 듣고 결단을 내리게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면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라는 한 가지 사실의 양면인 것이다. 복음의 해석에는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 고 이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물음 속에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물음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반대로〈어떻게 전달하느냐〉는 물음 속에는 또〈무엇을 전하느냐〉는 문제가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렇게 복음의 선포를〈무엇을 어떻게〉라는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하 나의 대전제가 요청된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선포할 때 인간의. 불안, 죄책,그리고 구원을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죄 책,구원이 시대와 장소를 따라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의미와 내용? 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복음을 전달 받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 죄책, 구원을 우리 자신이 자신의 불안,죄책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는 전달할 수 없다. 불안,충돌, 죄책의 구조를 자신이 이해하는 사람의 메시지로써 전달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이해의 전달이 남에게 제 대로 전달되어져서 성공적인 ?코뮤니케이션이 되는가 하는데는 아무 런 확신성이 없다. 그러기에 전달은 언제나 모험이다. 말씀의 증거 와 전달에는 언제나 이러한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또 이러한 모 험이 따르기 때문에 전달자는 늘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전달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그것은 전달 이란 하나의 참여의 형식이다. 참여가 없는데는 전달이 있을 수 없 다. 그러나 우리의 참여에 제한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달도 제 한이 있다. 이렇게 전달자는 그 모험의 제한성에 대해서 늘 자각해 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각으로 말미암아 전달자는'참여와 비참여 의 시기를명확하게 구별하려고한다.

전달자는참여에의 항거를시도해야할경우도있다. 전달자는 참여보다 비참여에 더욱 노력과 용기가 필요할 경우도 있을 것이 다. 오늘날 코뮤니케이션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 형성과 아울러 중대 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매스콤 기구의 소유자로서 자랑으 로 삼는 기독교 전달 기관이 당면한 문제는 이러한 참여의 결핍에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의 결핍보다 앞서서 검토되어야 할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복음의 전달이 전달자와 피전달 자 간에만 국한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제3의 존재 즉 성령의 역 사가 있는 것인가? 기독교적인 설득에는 성령의 역사가 개재되는 것인가? 둘째로는 무엇이 최선의 전달인가? 기독교의 전달은 부 딪치는 돌이다. 최선의 전달이 반드시 성공적인 전달이 된다는 보 장은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세째는 마음의 완악함의 문제이다. 전달은 심리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라고 하는 이유는 이〈완고한 마음〉〈굳어진 심정〉이 어떤 전달 행위에도 수반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 매스콤의 신학적인 반성을 요청 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를 추구하는데 참 고가 되는 두 가지 그룻된 견해를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는 현대의 문화 현상으로서의〈대화의 단절은 반드시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116 1)11^6156 0조 01800111‘86 는 전체 사회 현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이러한 단절 의 원인은 현재 세계의 정신적 위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공 통한 언어가 공동체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전제로 할 뿐이다. 공통한 언어는 새 공동체에 서만 찾을 수 있다. 이상의 문제의 제기 속에서 우리는 한국의 현 실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전달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점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짜.슈람이〈매 스 코뮤니케이션의 책임〉에서 지적한대로서구의 코뮤니케이션 역사 에서는 권위주의와 자유 방임주의를 거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거쳐 새로운 코뮤니케이션 이론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이〈사 회 책임 이론〉이다. 이러한사회 책임 이론이 생기게 된 역사적인 과 정에는마르키시즘이나프로이드 심리학에서 비롯된 사회 과학과 사 회적 기준이 객관적 사실 보도에서부터 해석적인 논설로 전환되코 여기서 사회 책임적인 이론적 근거를 모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짜 슈람의 연구는 문화사적인 입장에서 코뮤니케이션의 이론을 구출하 자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입장에서 책임의 사상을 추구하려는 경향은 리차드 ‘니버의 책임적인'자아의 개념으로 해석 하고 그 신학적 윤리적 근거를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다. 틸리히의 참여의 신학에 있어서는 어떻게 하면 책임적인 참여 와 비참여를 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이것은 尺. 니버의 561^ 1100(1를 기독교적 인간 이해에서 새로운 각도로 다루어져야 한 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⑵ 사회적인 고찰
사회학에서는 코뮤니케이션의 과정을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표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미의 전달은 불가능하다. 다만 심볼의 잔달만 이루어진다. 의미는다만 피전달자가 그, 받은 메시지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전달 자극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동기적 불안에 적용된 다.〈5〉요소가 아무리 최선의 것이라 할지라도〈8〉요소가강력할 경우에는 적극적인 결단을 내리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8〉요소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러나〈3〉〈!0요소를 중가시키고 〈8〉요소를 감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쑈8頁 참조) 이것을 하나의 '인위적인 조작이라고 비난할 것인가?성서 구절의 선택, 설교 제목의 작성도 하나의 조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동기 조사단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의 결단을 내리면 언제나 그 결 단에 관련된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신앙적인 결단을 내린 사 람들은?자기 가족이니; 친구들이 지끼의 결단 조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려고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