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혁신을 위하여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30 23:15
조회
4744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신앙의 혁신을 위하여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 신앙의 혁신을 위하여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215 - 218 ( pages)
주제어
첨부파일: 신앙의혁신을위하여.pdf

신앙의?혁신을 위하여

우리 나라 말 가운데〈멋〉이라는 말이 있다. 풍치있는 맛, 사물 의 진미 흑은격에 맞는 일들을가리켜 멋이 있다고한다. 멋을나쁜 뜻으로 사용하면 좀 방탕한 기상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되어지는 것 이다. 그러나 이 멋이라는 말의 진의를 깊이 생각하면 거기에는 대 단히 깊은 뜻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멋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개성에서 우러나와서 표현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 에서 한 사람의 멋을 다른 사람이 모방할 때 대단히〈멋적은〉결과 로 끝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다. 멋은 참으로 개성적이다. 서부 활극에 나오는 주인공의 멋을 만일 한국사람이 흉내 냈다가는 그야 말로 남의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멋은 오직 한 번 뿐이 라고도 할 수 있다. 멋이 있어 보이는 일도 자꾸 반복하면 그 멋의 가진 맛이 감소되고 만다. 이렇게 멋이란 개성적이며 비반복성을 띄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넓은 교양과 깊은 사고를 하는 사람을 사귀면 사귈수록 그 사람의 멋을 이해하게 된다. 멋은 외형으로.나 타난 것만 가지고 따질 수 없다. 짙은 개성을 가진 사람만이 참다 운 성격적인 멋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금년 4월에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두번 다시 보기 힘든 멋있는 사건을 우리는 경험했다. 학생들의 데모가 점점 확대되어지자, 전 국민은 정성을 다해서 성원하였다. 겨레의 몸과 마음을 태워 버릴 듯한 혁명이었다. 멋이라는 데서 이 사건을 표현한다면 좀 경솔하 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충동시킨 사건이 며,과연 멋있게 치룬 혁명이었다. 연쇄 반응으로 일분과 터키에서 도 이 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일본의 사건은 좀 추잡 한 결과로 끝났고 터키에서는 종래에 군부의 구데타로 혁명을 완수 했다.

그러나 이보다도 우리의 신변을 두루 살펴 보면, 4 “ 19 이후에 5 백 여회나되는 큰데모, 작은 데모들이 발생하였다. 쌓이고 쌓인 과거의 울분과 억제에 대한 반감이 한꺼번에 터졌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이 옳고 그르고 보다도 주장을 표 현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천편일률적이다. 프라카드, 구호/ 연좌 데 모, 농성, 이러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주장을 표현할 수 없을까? 비개성적이며 반복적이었다는 의미에서 좀〈멋적게〉보여 질 때가 많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누가한가지 신기한 일을 시작하 면 그것을 시간과 장소의 차이를 가리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모방하 려고 하는 폐단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남의 멋을 덮어 놓고 되풀 이 하여 보자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

독창성이 없는 곳에서 멋을 찾아 보기는 힘든 것이다. 문제의 제 기에 독창성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그 해결 방법에도 독창성이 있 어야 한다. 비슷한 학교 분규, 노동쟁의에도 그 경우에 따라, 혹 은 해결하려고 하는 양측의 태도에 따라 해결 방법이 서로 다를 것 ,이다. 획일적인 사고 방식 때문에 뜻하지 아니한 종막을 보는 사태 를 우리는 가끔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 정세나 우리 나라의 정치 정세를 살펴 보면그야말 로 어 수 선 한 일 이 한 두 가 지 가 아 니 지 만 우 리 의 시 야 를 한 국 교 회 에만 국한하여 보아도 거기에는 허다하고 착잡한 문제가 엉키고 성 켜 있다. 한국 교회가 지금 당면한 문제들은 어떠한 각도로 보아도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양상을 띄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크리 스천다운 관용이라든지 겸손,양보,건덕, 협조의 정신 그리고 나 아가서는 교회가 뭉쳐서 하나의 힘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보겠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실천이 결여 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팽과리 소리 같은 설교의〈인플레〉인 것 이다.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만 하더라도 비록 근거는 박약 하였지만 신학적인 노선을 내 걸 고 교회는 피차 싸웠던 것이다. 그 터나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명분 없는 정쟁〉에 빠지고 말았다. 그 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요인을 한국 교회의 역사가 벌써 내포하고 있었다. 교파적 폐쇄성 때문에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는 거의 불감 중의 만성 고질 환자가 되어 버렸고 주체성을 잃은 타계적 신앙만 을 강조하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발언할 용기조차 가지지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한국교회는 하루라도 속히 순교 영웅주의 의 아나크로니즘올 탈피하여서 전쟁과 혁명의 한계 상황에서 대단 한 신앙적 용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러한 일을 소홀히 할 때 교회 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며 교회의 문전에는〈이가 봇〉이라는 명패가 붙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우리는 애끓는 심정으 로 참다운 지도자가 나오기를 갈구한 때가 과거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위기를 철저하게 의식하고 넓은 도량으로 포섭 할 수 있으며 옹졸하고 졸열한 잔 재주를 부리지 않는 참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아카데믹한 시니시즘’ 근본주의적인 과대망상으로 도 오늘의 위기는 극복은 커녕 더 악화시키고 말 것이다. 시대의 핵심을 신앙적으로 바로 파악하고 예 언자로서의 통찰력 을 가지고 대범하게 오늘의 죄악과 맞서 투쟁할 수 있는 참다운 지도자를 우 리는 갈구한다.

우리에게는 종교적 연막 속에서 우물쭈물하지 않고 사랑과 덕으 로 떳떳하게 복음을 이 세상에 전파할 수 있으며 학식으로나 신앙 으로나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한국 크리스 천의 사고방식의 새로운혁명이 일어나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함 에 있어서 독창성을 빌1휘하여야 하겠다. 그리하여 누구나 흉내낼 수 없고 되풀이 할 수 없는 참다운 신앙적인〈멋〉을 찾도록 노력하 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