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사랑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30 22:07
조회
4719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창조의 사랑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 창조의 사랑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199 - 204 ( pages)
주제어 고난 존엄성 그리스도교 자유 신앙 나와 너 창조의 사랑
첨부파일: ? 창조의사랑.pdf

창조의 사랑

〈그리스도교〉에 관한 이야기를 간추려서 쉽게 요약한다면〈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혹은〈내가 왜 예수를 믿는 가?〉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옛날에는 예수를 믿는다면 으례 〈천당에 가기 위하여서〉라고 대답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는다 는 것이 영원한 사후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과거와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덮어 놓고현실을 무시 하고 죽은 후에 저쪽 나라만을 바라다 보는 그러한 동기에서만 이 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죽은 후의 세상을 동경하는 만큼 이 에 못지 않게 이 세상 안에서 참된 인간이 되는 생활을 모색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참 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혼을 위해서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 몸, 또 이 몸을 담고 있는 공동체’ 국가’ 사 회,나아가서는 전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이십세기 후반기에, 세계 기독교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처럼 자기의.태어난고장, 공동체 속에서 형성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이 또 그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 는 것이다.〈그리스도〉교신앙에서는 공동체를 떠나 유리된 것으 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믿음의 주체가 되는 신앙인이 공동체 속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 신앙이 그 주어진 공동체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 다.

〈그리스도〉교는 한 마디로 해서 사람音 위한 중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돕는 것이 신앙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에 못지 않게 사람이 사람됨을 찾는다는 것이 주요하고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되는 길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신인 관계와 인간 관계,이 관계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를 떠나서는 사람이 사람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그리스도〉 교의 신앙은 이러한〈관계〉의 신앙이다. 즉 인간 관계에서 열매를 맺는 일, 창조적인 인간 관계를 맺는 일이〈그리스도〉교신앙의 근 본인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열매를 맺는생활을창조의 생활, 생산적인 생활이라고도 하겠다. 사람이 생산하려면 수족을 움직여 서 활동해야 한다. 이렇게 손과 발을 움직여서 눈에 보이는 물건을 생산하게 하는 근본은, 인간관계가 생산적이어야만 가능한것이다. 이러한 인간 관계가 비생산적이 될 때 사람은 일을 해도 즐겁지 않 ?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또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결과에서 생.산되는 것은 불안의 소산이 되어서 비뜰어진 생산만 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의 소위 인간소외 문제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리 스도교에서 죄와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인간 소외를 가 리키는 말이다. 죄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짓을 하는 일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 죽음이라 해서 반드시 몸이 죽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소외 현상 속에서 즉 창조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일을 죄요,죽음이라고 한다. 그런고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 도 이러한 비생산적인 인간관계에서 구원을 받는것, 소외에서부터 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싸움의 였 속이라고 볼 수 있다.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 들어 가는 동안까지 인간은 부단히 시련과 도전 그리고 경합을겪어야만한다. 현대의 한국 사회에는 특히 이러한 생존 경쟁에서 빚어지는 비극 이 속출하고 있다. 매일 신문의 사회면에 반영되는 한국의 사회면' 을 아는 사람은 사실을 부정할수없을 것이다. 적자생존은 인생의 법칙처럼 간주되고,약자는 자연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사회 풍조가 형성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생활 속에서〈크리스천〉이 자기의 진지성을 유지해 나가면서 인격직인 통합을 이룩하는 생활을 하기가 대단히 힘들게 되었다. 교회 생활은 한낱 경건을 위한 개인 구제의 장소가되고 교 희 밖에 나오면〈크리스천〉들도 이 사회 안에서 생존경쟁의 판국 에 뛰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얌체 정신, 새치기 정신은 이러한 사회 풍조에서 빚어진 하나의 생활 태도이다. 하이11111 은 이러한 태도를 비생산적인 태도라 고했다.. 비생산적이라는 말은 결코 경제적인 면에서만 쓰이는 용어 가 아니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비 생산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데서 모든 인간의 자기 소외가 시작되 는 것이다. 그러한의미에서〈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인간의 소외 의 관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하나님의 형상을 살려 나가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의 근본적인 성격 이다. 구원을 이룩한다는 것은 한 인간의 몸과 마음이 전체적으로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 도〉교 신앙은 대단히 모험적인 것이다. 자첫하면 하나님의 이미지 를 우상화하기 쉽기 때문이다.

수난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야 할 문제는 고난 저 쪽에 바라다 보이는 승리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신앙은 고난 자체 를 찬양하지 않는다.
금욕주의는 아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운명으로 받아 들이고 체념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자기 소외를 극복하고 구원을 완성하는 계기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아마도〈그리스도〉의 고난 이해일 것이 다. 고난은 그러한 의미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 의 주신 심판의 손을 그에게 응답할 수 있는 기희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난을 당한다는 일에는 깊은 신앙적인 뜻이 감추어져 있 는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연과 역사에서 받는 고 난이 있는가 하면〈너와 나〉의 인간 관계에서 받는 고난도 있다.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이러한 인간 관계에서 빚어지는 고난,즉 긴 장, 충돌, 좌절의 관계를 사랑으로 이기고 조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너와 나〉가 만남을 통해 서 자신의 자유임을 알고 그자유를 자각하는데서〈그대〉를 위해서 생산적인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생활인 것이다. 그러기에〈그리스도〉교의 사랑에서는 먼저 자신의 깊은 자 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용서함 을 받았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감격을 경험할 때, 자신에 대한 의식이 생겨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고 있다는 사실 에서 자기가 한낱 고난의 희생물도 아니요,운명적인 존재도 아닌, 존엄성을 지닌 피조물임을 알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그리스도;)교 에서는 이웃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고난’ 긴장, 충돌, 좌절을 경험 하고 또 이 경험에서 자기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이웃과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손 길을 보고 그의 신비스러운 역사를 보게 된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역사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관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사랑으로 이 에 대해서 응답을 표시하는 것이〈그리스도〉교의 사랑이다. 굶주림 과, 질병, 전쟁과 불행 속에 허덕이는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표시 하고 도와주며 돌보며 키워주며, 섬기는 생활이 여기서 비로소 시 작되는 것이다. 생존경쟁이 극심하고 먹느냐먹히느냐하는 투쟁 속에서 우리 에게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러한 사랑의 창조적인 생활 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창조의 생활은 사랑에서만 있을 수 있다.〈싸우면서 건설〉한 뒤에는〈사랑하면서 건설〉하자는 것이 더욱 창조적인 생활일 것이다. 싸움에는 언제나 파괴적인 요소가 있지만 사랑은 언제나 건설적이며 창조적이기 때문이다.사랑의 생 활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관찰하고, 그 관찰에서 새로움 ‘과 놀라움을 보는 눈을 뜨게 된다. 평범한 사건 속에서 신비스러운 것을 느끼게 하며 진부하고 고식적인 것에서 무언가 새삼스러운 것 을 보게 한다. 그리고 사는 일이 부담이 되지 않고,보람을 느끼며 생을 즐겁게 한다. 현대와 같이 모든 가차 기준을 물질과 금전으 로 바꾸어 두는 시대에서 다만 물질을 가지는 일에만 보람을 느끼 는 일이 흔히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삶 의 보람을 가지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보람과 뜻을 즐 기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물질 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사랑은 이러 한 삶의 질서를 알게 하는 힘인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이 없는 생 활은 언제나 이 세상에서 노예의 생활을 면치 못한다. 언제나 무 엇에 구속을 받고 얽매여서 산다. 아무리 풍부한 생활 속에서도 이 런 노예의 생활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소외인 것이다. 소외가 된 생활에서는 아무리 물질이 풍부하여도 사는 일 이 고달픈 것이되고 만다. 현대인의 구원은 바로 이러한 소의에서부터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간 소외에서부터의 구원은 다 만 사랑의 인식과 이 사랑의 인식에서부터 자아의 주체를 회복하 는데서 비로소가능한것이다. 사랑만이 인간에게 창조적인 삶의 뜻을 깨닫게 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러한 구원을 통해서 인간이 참 인간됨을 회복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