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의와 정치 윤리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30 22:02
조회
5240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사회 정의와 정치 윤리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 사회 정의와 정치 윤리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186 - 192 ( pages)
주제어 사회 정의 정치 윤리 현대 남미 정권 평화 교체 조용한 혁명
첨부파일: ? 사회정의와정치윤리.pdf

사회 정의와 정치 윤리

우리는 남미와 같은 폭발적인 혁명의 사태에 이르기 전에 사회 정의률 우| 한〈조용한 혁명〉즉 정치 윤리의 확립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분석하면서 비판하고여기에 건설적이며 창 조적인 제언을 한다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이번 6 . 8 선 거 문제만 하더라도 어떤 정치학적인 이론이나 문리학적인 분석에 앞서서 하나의 사회 정의라는 관점에서 이에 대한 비판과 항의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잘못은 잘못이라고 떳떳 하게 주장되고 비판하는 소리가 이 사회 안에 살아 있고, 위정자들 에게는 비록 그것이 비위에 거슬리는 소리일지라도 돌을 만한 소리에 귀를기울이는 아량이 있는 한우리의 정치적 악순환을 타개해 나갈 수 있다는 소망을 우선 가져보게 된다. 공화국으로서의 짧은 역사 속에 갖은 시련을 겪어 가며 정치적 부패를 수술하고 정리해 나가 는데 정부나 일부 위정자들의 법적인 조처가 효력을 가질 수 있지 만 그것도 역시 제한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 법 적인〈체킹〉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역시 부정과 부패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국민들의 도의적인 힘일 것이다. 이 도의적인 힘마저 어 떤 데마고구때문에 질식 당하는 경우에 극한적인 혁명의 사태가 빚어진다는 것을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1966 년 2월 15일 남미 컬럼비아의 반정부게릴터와 싸우던 정 부 ^ 은 카밀로 토레스라는 사람을 사살했다, 그는 봄디 카틀릭' 신 부였었는데 반정부 게릴터로 투신 했다가 무참히도 총살 당한 것이 다. 뉴스는 전 세계에 번갯불처럼 퍼졌다. 그는 이런 반정부 폭력 에 가담함으로써 신부의 천직을 배신했던가?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인간의 본래적인 휴머니티를 지키기 위한 순교자였던가?
“나는 혁명가이다. 왜냐하면 나는 신부이고 카톨릭이기 때문이 다.”라고 한 토레스는 국민과 더불어 사는 크리스천이 빠지기 쉬 운 낭만적인 환상의 회생자라고나 할 것인가?

토레스는 본래 부유한 귀족 가문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법조계에 진출하라는 집안의 권면을 물리치고 그는 신부가 되기를 결심했다.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1지1까!1111 에서 사회학을 전 공했다. 컬럼비아에 귀국한 그는 국립 대학에서 교수와 교목의 직 책을 받았다. 대학 재직 동안 그는 컬럼비아의 시정을 냉철하게 분 '석하고 이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 은 국민의 매일 생활과의 깊은 유대 속에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 는 주장했다. 원래 카톨릭 국가인 컬럼비아에 있어서 그는 교회의 형식적인 의식 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교회와 예배의 구극적인 목표이다. 또 사랑만이 현실을 변혁시킬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써 그는 추기경에게 질의서를 제출했다. 컬럼비아의 정부 부패,그리고 일부 부유충과 특권자들 의 착취 둥이 민생고를 날로 위태로운 지경에 몰아 넣고 있는데 교 회가 정말로 경제와 사회 기구의 변혁에 무관할 수 있느냐고 ? 그러 나 추기경에게서 받은 회답은 퍽 형식적인 것이었다. "혁명이란 것 온 다만 절대적인 독재 군주 밑에서만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사회 안에는 갖가지 문제가 있지만 교회는 늘 영원한 진리에만 관여하기 때문에 이러한사회문제에는참견하지 않는다."이러한 형식적인 회답에 토레스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혁명적인 행위는 기독교적 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성직자가 가질 투쟁이기도 하다.” 이렇 게 강경한 태도를 취한 토레스는 드디어 국립 대학의 직위에서 파 면 당하고 말았다.

현대의 남미는 혁명적인 상황의 좋은 본보기로 들 수 있다. 인구 는 이 현세기 말에 약 6억으로 증가하게 되어 미국 인구 증가 보다 배로 늘어날 것이라 한다. 현재 2억이 되는 남미 인구들은 기아선상에서 헤메이고 있다. 열 사람 가운데 네 사람은 열다섯 살 아래이다. 칠리 같은 나라에서는 전 인구의 13화되는 층이 국가 전 생산량의 10분지 2를 독점하고 있으며,특히 부라질에서는 인구의 396의 특권층이 농산물생산이 가능한 토지의 62화를 점유하고있다. 이처럼 비참한 형편에 있으면서도 남미는 현대 세계에서 뒤떨어지 지 않는 문화를 자랑하고 있다. 영화, 음악,운동, 그리고 패션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리오데자네이로,또는 멕시코시티의 찬란한 도 시 문화로 어느 유럽 도시에 못지 않게 흥청거리고 있다. 앞으로 과학 기술 발달과 근대화의 결과로 현재의 농산물 생산 보다 50배 나 되 는 생산이 가능하다고하며,지하 자원의 개발이 발달되면 굉 장한 경제 부흥의 소망도 엿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밝고 어두운 두 모습이 극한적으로 발전되는 데는 중산 계급이 없다는 슬픈 현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 가난에 만족하지 않고 한 마을 안에서 도 살찌고,화려한 저택에 자가용,탤레비를 구비하고 사는 사람들 을 보고 우리도 저렇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기대해 보는데 현 대 남미의 혁명적인 기운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기대의 혁명〉을 선동하는 것이 바로 씨어즈 루백의 상품 캐덜로그와 또 다른 편에서 오는 공산당원들의 선전문들이다. 서로 엇갈린 매흑으로오늘날의 남미 청년들의 마음을사로잡으려고 한다. 현대 남미 여러 나라의 대의 정치는 대개 사회 정의를 위한 노력 을 기울이는 세력을 누르고 현존의 경제적 불균형을 유지하는 데 이 용되고 있다. 소수의 특권 부유층이 정권과 결합하여 가지고 귀족 이나 지주들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수단에 동조하고 있다는 말이다. 최근에 있었던 산토 도밍고와 볼리비아의 선거가 이를 입증하고 있 다. 결국서민 대중들이 선거나 대의 정치에 대해서 불신하고 선거 는 한낱 겉치레 행사에 끝나고 마는 것이다. 남미의 현사태에 있어 서는 사회 구조와 권력의 분배에 대한 혁명적인 수술을 가하지 않 고서는 도저히 민주 정치를 지탱할 수 없게 되어 있다.벨기의 신부 ? 표 이 1 예 I 는 현대 남미의 혁명을 네 가지로 분류했다. ⑴ 유토피어적인 혁명 ⑵ 무정부적인 혁명 ⑶ 마르키시스트 혁명 (현재 남미에 있어서 강력한 조직으로 움작이고 있는 것.) 휴머니스트 혁명 (주로 카톨릭 자유주의자들이 주동이 되 어서 사회주의적인 색채로 폭력에 의하지 않는 혁명을 하려는 것.) 혁명은 공산주의자들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 정의의 확 청을 위한 조용한 혁명,기대의 혁명을 우리는 묵과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남미의 혁명적인 분위기와 사태를 묘사한 것은,한국의 사실에다 그대로 적용시켜 생각하자는 의도에서 한 것은 아니다. 남 미에는 형식상의 민주주의가 시행된다고 하지만,경제적인 착취 계 급아 이미 굳어져 버렀고또 이와 결탁한 의국의 자본가들의 밑받 침과 이해 관계가 엉켜 좀처럼 흔들리기 어렵다. 거기에 비한다면 한국은 한결 다행한 형편에 있다. 한국 국민 대다수가 문맹이 아니 며 교육 수준이 높아서 남미와 같은 부정이 기틀을 잡지 못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야 할 것은 남 미의 사태가 전혀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화국 초기에 있는 한국에서도 정치 윤리와 질서를 잡지 못하면 먼 장래에는 남미와 같은 혁명적인 사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집권자들의 권력에 대한 무제한 집착과 편협된 경제 정책을 시행함 으로써 중산 계급과 서민층의 살 길을 터놓아 주지 못하면 남미와 같은 악순환이 우리에게도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헌정 질서 와 법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바탕임을 누구나 부정하지 는 않는다. 그러나 그 헌정 질서나 법이 불의를 음폐하고 부패를 덮아 두는 구실로서 이용된다는 데 헌정 질서의 최대 위기가 있다. 사회 정의가 선행되지 않는 헌정 질서는 울리는 팽과리와도 같다. 집권당의 부정과 부패를 가리우는 데 쓰여지는 헌정을 연장하면 국 민들을 대의 정치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일종의 정치적 무관심에 까지 몰아넣게 하며, 이 사태가계속되면 남미와같은 처참한지경 에 빠지게 될 것은 떤한 일이다. 우리가 이번 선거의 진행과 그 결과를 보고 통탄히 생각하는 것 은 사회 정의에 뿌리 박은 정치 윤리가 결여되었다는 사실과 이러 한 정치-윤리를 집권당이 유린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 회 정의에 대한 국민의 항의와 비난에 대해서도 법으로 다스리겠다 는 말뿐,법 이전의 정치 윤리에 잘못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정치는 힘과 힘의 싸움이요, 어떤 윤리적인 요소가 개재될 여지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치열한 권력 투쟁도 국민에 대한 도의적 책임이라는 최소한의 윤리 의식은 남아 있어야 한다. 눅민들을 향해서 5개년 경제 계획을 3년 반에 치루겠다고 약속하 였던 것이 6년 흑은 7년이 걸렸다고 해도 그것은 국였을 속이는 일이 되지 않는다. 경제계획은빨라질 수도있고 경우에 따라서 늦 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정권을 내 놓는 한이 있더라도 헌정 질서 를 지키기 위해서 부정 선거는 아니 한다고한약속은 한푼에누리 없이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적인 약속이 아니라 국민 을 위한 도의적인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의 현재 정치 상황의 위기를 초래한 일차적인 책임을 집권당에 돌리고자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정치 풍토의 조성에 는 여 ‘ 야 를 통틀어 정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전혀 없다 고 장담할 수 있을까 ? 국회에 참석한 야당 의원들의 발언보다 왜 ?? X X 푸대접 위원희〉의 말이 더 효과적이었던가? 대의 정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국회 의원의 소리 보다 본고장 사람들의 소리가 더 비중을 주는 듯한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경륜이 없는 아귀다툼 속에서는 정치적 역량은 키워지지 않을 것이다. 국 민의 정당한 발언을 대신한다기 보다는 정권을 빼앗는 데에만 일 차적인 목적을 두는데서 야당에 대한국민의 실망이 싹트기 시작했 다. 국민이 품고 있는 불안과 의심 그리고 요구를 함께 느끼고 이 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색을 고취해서라도 정권을 잡고, 정치적 경 륜 보다도 싸움에 이기고 보자는 식으로 이루어진 야당의 선거태세 에 대하여 국민은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컨대 현재와 같은 악순환과 고착 상태를 극복하는 길은 목전의 이슈보다도,근본적인 정치 윤리의 확립과 사회 정의에 대한 디베이 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디베이트의 촛점은 아무래도 권력 의 균형과 분배를 통한 토착적인 정치 윤리의 앙양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헌정 질서는 결코 사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유지되고 계 승되어진다고 할 것이 아니라 다양적인 또는 다원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정치 윤리가 지배하는 가운데서 질서와 정권의 평화 교체 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다이나믹한 정치 윤리는 먼저 화해의 기술을 터득하는 일에서 시 작되어져야 한다. 대화를 나누고,영수급이 만나서 악수를 나누고 성명서를 내 놓는다는것도중요하겠지마는긴장과 대립 속에서는고 차적인 목표를 위해서 화해하려는 마음씨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사희정의에 대한 예민한 반응과 정치 윤리의 앙양은 정 치인들의 책임에다가만 돌릴 문제가 아니다. 정치는 일부 정치인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 보다도 정치는 함께 나누는 책임이라는 것을 국민 전부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학'이나 직장에서 자유로운 정치 활동이나 토론을 할 수 있게 길을 터 놓아야 할 것이다. 자유롭고 책임적인 정치 토론을 함으로써 각자가 자기의 주장에 컴미트하는 데서 정치 윤리의 형성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남미와 같은 폭발적인 혁명의 사태에 이르기 이전에 사회 정의를 위한 조용한 혁명, 정치 윤리의 확립을 치투어야할것 이다. 토레스 신부가 말한대로 "혁명적인 행위는 성직자의 투쟁이 다”라는 말은 사회 정의와 정치 윤리를 위한 조용한 혁명을 기대하 는 우리에게 전혀 무관한 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