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27 00:23
조회
4334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봉사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 봉사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36 - 46 ( pages)
주제어 봉사 복종 자유 양심 인간공동체
첨부파일: 봉사.pdf

봉 사

⑴ 봉사와 복종
봉사라는 말을 우리는/섬긴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즉 아래 사 탐이 자기보다지위나 나이가위에 있는 사람에게 어떠한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섬긴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봉건적인 사회의 연장으 로 생각한다면 어떤 주종 관계의 이미지가 이 섬긴다는 말에 붙어 다니는것이다. 신하가 왕에게, 머슴이 주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대하여 섬긴다. 이러한 사회 제도를 유지하고 방 어하기 위해서 조직된 군대에서도〈봉사〉혹은 〈섬긴다〉는 말은, 병사가자기 상관에 대해서 하는 헌신적인 행동을의미한다. 일본 의 군대 (태평양 전쟁 때까지)에 있어서도〈열사 봉공〉이라는 표어 가 군인 생활의 지상 목표로 되어 있었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 섬기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봉사의 대상은 상관이라기 보다 권위의 최고 상징인 천황을 위해서 섬긴다는 뜻일 것이다. 일 본군의 소총에는 황실의〈국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문장 때문 에 병사들은 소총을 다룰 때면 마치 신기를 만지듯이 소중히 여긴다. 적전 상륙할때에, 상륙선에서 뛰어 내리어 온몸이 물에 빠지、게 되 더라도 손에 쥔 소총만은 머리 위에 번쩍 들고 상륙하여야만 한다. 국화 문장에 물이 묻으면 천황의 하사품에 대한 불경이라고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절대군주주의적인 권위관에 있어서는 봉사가 한낱 명령과 복종이라는 소극적인 행동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에 지 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교훈을 받고 이해하여 온 봉사 개념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구조, 말하자면 권위주의적인 또는 획일주의적인 내용으로 한 것이다. 봉사 또는 섬긴다는 일은 논리적인 절대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때 문에 봉사를 하는 사람에게 대해서는 사회적으로는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봉사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정규하려면, 먼저 이를 복종과 구별하여야 한다. 하기야 봉사를 하는 사람은 으레 복종하게 마련 이지만 봉사 자체를 복종과 엇바꿀 수 없는 것이다. 복종은 주로 머슴이나 노예가,상전에게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봉사는 복종 이상의 인격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복종에는 인격적인 결단이 필요치 않다는 뜻은 아니다. 봉사의 바 탕에는 복종이라는 인격적인 결단이 있는 동시에 때로는 복종을 넘 는 적극적인 결단이 필요하게 될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⑵ 봉사와 자유 위에서 우리는 봉사와 복종의 관계에 대해서 상론하였다. 봉사 라는 것은 그 자체만을 고립시켜서 생각할 수는 없다. 인간의 논 리적인 상황 전체를 배경으로 하여서 생각하여야만? 그 참 뜻을 캐 낼수가 있는것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봉사도 인격적인 결단올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격적인 결단에 상관있는 자유와 봉사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의 실존의〈바탕〉은 자유이다. 이 자유는 온갖 인간 존재의 양상의 저변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유가 과연 어느정도로 우 리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지어 왔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한국 사회에 태어난 우리들은 해방,독립,자유라는 말을 염불처 럼 외고 있지만 사실 생활 주변에서 자유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만끽하여 본 일이 있는가? 3‘8선은우리의 제한된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 한국의 고뇌하는 현대 청년들은 마치 함정에 빠진 다람쥐 같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서든지 돌파구를 찾아 보려고 한다. 그러나 함정 속에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심신의 피곤만 더할 따름이다. 공산주의의 위협, 일본과의 국교에 따르는 불안 그리고미국 원조에 대하여 느끼는 심리적 컴플렉스 이런 문제 틀 조금이라도 건드리지 않고 의사표시를 할 수.있단 말인가? 우 리가 함정에 빠졌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우리가 생각 하던 자유도 한낱환상에 지나지 않았던가? 먹고자고자식을 낳는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그 자유만으로 인간의 존재 전체의 저변인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자유의 환 상의 포로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 이러한 함정에 빠진 것 도 자의 반, 타의 반인가 ? 이처럼 한국의 현실에 대하여 민감한 감촉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 구나 다 환상적인 자유에 희롱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 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한번 반문하여 보기로 하자.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란 대체 어떠한 내용을 시사하는가?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며 모든구속과 질곡에서 해방되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질구질한 생활을 청산하고 홀가분하자마 음대로떠돌아 다니는 것을 의미할까? 자유는주어진상황속에서 주어진 현실에 대하여 전인격적으로 대담하게 긍정을 하는데서 얻 어지는 것이다. 자유는 ( : “에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으로 의 자유〉가 되어야 한다. 무엇에서 자유하려고 하는 노력은 또 새 로운 형태의 노예의 자리에 자신을 몰아 넣는 결과에 빠지게 된다. 옛 상전을 버린 대신에 새 주인의 노예가 되게 된다. 그러나 무엇 으로의 자유는 멍에를 흔연히 지겠다고 나서는 자유를 말한다. 누 구의 권함이나 강요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현실의 밑 바닥에 발을 붙이고 밀어 닥치는 거센 비바람을 얼굴에 맞으면서도 〈메 !〉〈옳다〉고 대담하게 긍정하는 자유다. 이 자유는 이 세상 어 떠한 권력이나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자유를 주거나 빼 앗는 것이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사실은 사 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그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고 로 인간의 자유도 사람이 빼앗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어떤 폭군의 손으로 말미암아 박탈되어진다고 해도 그 자유는 폭군이 빼앗은 것 이 아니라 신이 우리에게 준 자유를 폭군의 손을 통해서 거두어 가 신 것에 불과하다. (비 봉사하는 자유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자유 쟁취의 역사이다. 자유를 잃은 민족 들은그 역사적인 상황속에서도언제나 다시 자유를되찾을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살펴 보면 열국의 사이에서 언제나 짓 눌려 살면서도 이 조그마한 반도에 자유롭게 사는 역사를 창조하여 보려는 노력으로 누벼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비록 제한된 자유라는 상황 속에 살지만 참된 내면적인 자유가 무엇인가 를 자각할 수 있는 좋은 시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전래적인 권위주의 가장 제도에서 생각하던〈섬김〉이라는 윤리와는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 나의 윗 사람,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니까 섬긴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 내 가 지 금 누구를 위해 서. 봉사한다는 것이 그가 나의 상전이거나 윗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와 동등하고 다만〈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에 있거나 내 자 유에 따라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외면적인 속박이나 권 유에 의해서 하는 봉사가 아니라 내가 자유로운 결단을 하여 봉사하 는 가운데 더 깊은 내면적인 자유를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까라마조프의 형제〉에 나오는 심문관과 죄인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자유에 대한 암시를 받는다. 스페인 셀 빌을 배경으로 하는 종교 재판소 안에서 심문관은 예수를 상징하는 이 방문자(죄수)에게 이런 줄거리의 이야기를 한다. "지난천오백 년 우리는 당신의 자유라는골치 아픈 문제 때문에 애태워 왔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끝장이 나고 말았다. 그대는 인 간이 워낙 선악의 선택을 하는 자유보다도 화평을 아니 죽음을 더 좋아하는 줄을 모르는가 ? 도대체 양심의 자유라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인간이 고,난을 겪는 이유 가운 데도 이놈의 자유라는 것이 제일 큰 이유이지 ! 사람이 또 안전하 고 확실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그런 알송달송한 막연한 자유를 원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야.. ?,’ 심문관은 방문자 앞에서 이렇게 인간의 자유틀 둘러싼 근본 문제를 파헤치고 방문자에게 던졌다. 사람은 자유를 희구하는 것 같으면서 또 한 편으로는 이 심문관의 말과 같이 화평과 안일을 가지기 위해서 자유를 점거하는 수도 있 다. 정말 인간에게 애당초부터 자유라는 문제가 없었더라면 아니 인간이 아예 노예로서 태어났다면, 자유를 위해서 고생하거나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피를 홀리거나 목숨을 던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이것은 "내가"세상에 태어 나지 않았더라면“ " "하는 가정법과 같은 말이다. 사람은 나면서부 터 자유를 희구하게 마련이고 또한 자유를 위해서 생존 투쟁을 하 여야만 살게끔 되어있다. ⑷ 자유와 양심 심문관의 이러한 이야기는 사람에게 숫제 자유라는 것이 없는 편 이 더 편하고 말썽이 없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여전히 우리가 자유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 눈 앞에 똑 똑히 보여 주고있다. 사람은 양심의 자유 때문에 오히려 더 고생을 하고 정력을 소모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말씀 대로 인간은 스스로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자유롭게 결단 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양심이란 무엇인가? 봉사에 있어 서의 근본적인 양심의 문제도 여기서 상고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서구 문명에 있어서 양심이란 말은 주전 5세기에 회람에서 시작 되었으며 사실상 프로이드에 이르러서 이 말은 끝장을내고말았다. 말하자면〈양심의 몰락〉과정에서 우리는 양심에 대한 새로운 해석 을 모색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양심의 몰락〉을 쉽게 풀이를 한다면 우리의 판단과 행동을 통해 서 자신의 생활 양식을 형성해야 할 양심의 힘이 그 설득력과 힘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낙〉(落)이라 함은 양심을 어떤 윤 리적인 행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저버린 양심아란 양심 자체가 아 니라 허물어져 가며, 시들어져 가는, 즉 몰락 과정에 있는 양심을 저버리려고 한다는 사실을 묵과하여서는 아니된다. 여기서 양심 문 제에 대한 제고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찾을 수가 있다. 양심이란 말 의 원 뜻은 무엇을 의식하고 안다는 기술적인 의미와 아울러 자신의 자아에 대한 증인이라는 도덕적인 의미도 있다. ?이 증인은 나라는 ‘ 자아를 위해서 증언을 하는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나에게 불리한 증 1 언을 해 준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고 한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순탄한 여행을 하면 우리는 기분이 상쾌하고 행복을 노낀다. 하지만 도중에 무슨 사고라도 생겨서 순탄치 못한 여행을 할적에는 우리는 부질없이 불행함을 느낀다. 양심이 언제나 우리의 이러한 순탄한 길을 가로 막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심리학 으로 세기적인 공적을 남긴 프로이드는 인간의 양심의 근원을 분 석하여 여기서 윤리적인'내용을삭제하거나말살하여 버리고말았 다. 그리하여 양심이란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치루어가는 댓가라 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이 프로이 드처럼 성적인 것으로만 해석해 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4 있다,문화의 발전을 위해 치루는 댓가가 양심이라면 양심 댓가를 위해서 치투는 댓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행동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윤리이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절해의 고도에서 혼자 로빈손 크루소처럼 삶을 유지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천애 고아라는 말이 있지만 그러한 고아라 도 말을 건넬 상대는 있을 것이다. 가족,직장,학교 둥 어떤 곳에 서든지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지 않고서는 사회에 존속할 수가 없다. 이처럼 사람은 나면서부터 공동체를 이루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공동체에는〈자유〉가 없이는 공동체 구실을 할 수가 없다. 개인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에 있어서도 자유가 허용 되지 않으면 참된 인간성의 발휘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면 사회 공동체 안에서의 자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 우리는 자첫하면 자유 세계라는 말을 무엇이든지 마음이 내키는대로할 수 있는 세계처 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자유 세계란 결코 방종의 세계라는 뜻은 아니다. 인격적인 존재가 양심의 자유에 따라 자유롭게 윤리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세계라는 뜻이다.'그러므로 자유 세계에도 질 서가 있고 구속이 있다. 그렇다면 자유 세계와 비 자유 세계와의 다른 점이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할런지 모른다. 여기에〈봉사〉의 중요한 국면이 드러나게 된다. 비 자유 세계에는진정한 의미에서의 봉사란 있을 ? 없다. 거기에는 오직 명령과 복종 아니 맹종이 있 을른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회에는 인격적인 즉,자발적인 봉사가 있다. 봉사야 말로 자유의 표현이다. 봉사가 없는 공동체는 자유가 없는 즉 노예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유로 운 봉사가 선행되지 않는 복지 사회를 찾는다면 그것은〈산에서 물 고기 잡기〉나 마찬가지이디-. 그-리나 이리한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봉사로 복지 사회를 이룩하 려면 우리는 한기-지 치투어야 할일이 있다. 그것은 권위주의 말하 자면 인간이 나면서부터 받은 자유와 정의를 희구하는 마음을 억누 르고 권위주의를 극복해야만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동등하게 신 의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다. 누구든지 신의 피조물로서 삶을 영위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유와 인권 위에서만 진정으로 질 서를 유지할 수가있을 것이다. 옛날 우리 나라의 계급차별에서 사 회적 지위의 존천에서 생각하던 질서도 역사의 발전과 아울러 해소 되고야 말 것이다. 이제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발적인 봉사를 함 으로 질서를 이루어 나가야 하겠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전개되는 모든 국민 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누구를 시켜 서 일을 하려고 한다. 스스로 몸을 던져서 봉사를 하여 한가지〈새 것〉을 창조하지 못한다. 봉사하는 일을 고스란히 남에게 이용 당하 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기야 요즘 같은 세태에 있어서는 남이 호의 로 하는 봉사를 염치없이 그대로 이용해 먹고 시치미를 때는 군중 들이 수두룩 하다. 그러나 풀 한 포기 가꾸며 물 한 방울 아껴 쓰는 일이 임시는 악덕인의 이용거리가되어 짓밟힐지 모르지만 진실은 종국에 가서 이기고 만다는 확신으로써 봉사를 하여야 한다.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매일 당하는 일 가운데 제일 불쾌한 일은 한국이라는 공동체에는 참다운 인격적인 자기 결단으로써 하는 봉 사 정신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여러 가지이며, 우선 먹을 것부터 모자라서 외국의 원조를 받게 마련이니 그 밖의 일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고 할런지 모르나 사실은 식량의 궁핍보다 도 더 우리에게 있어서 한심스러운 일은 역시 봉사한다는 생각이 없 으므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피차가 아귀다툼을 한다는 현실 이다. 누구든지 남을 넘어뜨리고 짓밟고 생존경쟁을 강행해야만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렇게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남을 위해서 봉사하느니 보다 자기에게 무엇이 생기느냐 하는 것으로써 서로 거래를 하게 된다. 점포나 거리에서, 버스나 합승을 탈 경우에도 절실히 느끼는 점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봉사한다는 마음가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관청에 가면 공무원들이 불친절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거니 와 영리를 위해서 한다는 상인들에게도 봉사한다는 정신은 손톱 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여행을 하거나 또는 직장에서 이러한 일을 당할 때마다 우리 국민의 마음 가짐이 얼마나 쓸쓸하 고 살벌한 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봉사〉의 근본정신을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는 것은 예수께서 제 자의 발을 씻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스승이요, 영적인 지도자로서 앙모를 받고 있었던 예수가 말로써 교훈을 하지 않고 친히 제자의 발을 물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섬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며 중 요한가를 시범하셨다. 이러한 시범이 지나친 인기 전술이나 아첨에 서 하는 것이 아니라 종래의 권위 사상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리며 사회의 계급과 가치 개념을 타파하는 인격적인 봉사의 힘을 보여주 는 것이다. 이러한 봉사를 감행하는 사람은 자기 비하나 비굴한 심 정에서 하면 아니될 것이며 또한 상대방에게 어려워 하며 송구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는 심리적인 작전으로 해서도 아니 된다. 최근에 상영된〈나자와 사자〉에서 군대 안에서 벌어진 인간의 갈등과 아울러 인간성의 모습을볼수가있었다. 지휘관으로 나오는 커밍 장군은 어디까지나 군대의 규율을〈두려움〉으로 유지하려고하 였다. 자기의 친구의 아들인 하안소위에게 인간적인친근미를 가지 고 접근하려고 하다가 결국 담배꽁초 사건으로 그의 마음 깊이 구 축하여 놓았던 권위 사상이 가면을 벗고 나타나게 되었다. 심한의 견 충돌에 격분한 이 지휘관은〈오만 불손〉한 이 자기 부관을 일선 수색대에 보내고 만다. 갖은 고초와 몇 차례의 일본군과의 교전 끝에 목적지까지 도달하 기 직전에 이 소위는 적의 복병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당한다. 이 중상을 입은 소위를 들것에다 실어서 처음 상륙하였던 해안선까지 후퇴하는 두병사는 평소에 동료들에게〈유태인〉이기 때문에 멸시를 받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몸과 마음의 쇠진함을 참고 자기 상관을 들것에다 들어서 무사히 후방에 이송하게 된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봉사가 결국 커밍 장군의 권위 사상을 무 너뜨리고 말았다. 플레이 보이로서 인간의 삶에 대한 아무런 목 적을 가지지 못했던 이 부관은 이러한 죽음의 ‘ 경험을 통해서 사랑 의 봉사가 두려움이나 공포보다 더 힘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군 대의 규율이 자첫 빗나가면 상관이 자기의 잘못을 덮어버리는 방 편으로 이 용되기 가 쉽 다. 빛 나는 견장이 나 몸에 찰싹 붙은 군복이 한 장교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책임이 있다는 상징이요,책임에는 언제나〈사랑의 봉사〉의 책임이 제일 먼저 선행하게 된다. 진정으로 부하를 사랑하고 아끼고 자발 적으로 봉사하게 되면 정말로 하극상과 같은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 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