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시대

에세이
자필수고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31 20:55
조회
7862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대화의 시대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대화의 시대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482 - 474 ( pages)
주제어 대화의 시대 침묵의 언어 하나님의 말씀 언어의 혼란

첨부파일: 대화의시대.pdf

대화의 시대

현대는 대화의 시대이다. 대화라는 말만큼이나 환영을 받는 말도 드물 것이다. 대화의 광장이니 대화를 통한 협상이니 하는 말도 어 떤 마술적인 힘을 가지는 것처럼 들린다. 왼통 장벽으로 둘러싸인 인간 관계 속에서 서로 특 터놓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 장벽을 제거 한다는 것도픽 후련하고 시원스러운 일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경 우에 따라서는 대화를 한다는 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서로가 알지 못했던 대립이나 이해 관계가 더 예리하게 부각되어져서 오히려 대 화를 하지 않았던 것보다 못하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분명 히 말이라는 것과, 말을 밑받침해 주는 마음의 문제를 미처 정리하 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고 하겠다. 하기야 대화를 진행시켜 나 가는 과정에서 어떤 자기 사색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들 하지 만 그래도 최소한자신이 대화에 임하는 기초적인 마음의 '자세에 대하여 기본적인 정리를 해 두어야만 할 것이다.

모든 대화의 배경에는 침묵이 있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대화는 그 깊이를 상실한 언어의 나열이 되고 말 것이다. 악보의 휴지부가 훌륭한 음악인 것처럼 인간의 생활 속에서 대화로서는 이 루어지지 못하는 침묵의 순간이 없다면 인간 사회는 마치 정신병 자들의 수용소와도 같이 될 것이다. 될 소리, 안될 소리를 함부로 늘어 놓기만 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까?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의 마음 속에 소스라치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는 파스칼의 말을 한번 다시 음미하고 싶다. 산간 벽지 나 농촌의 구석에까지 앰프를 통해 홀러 나오는 술한 방송의 광고 나 소음이 침묵에 잠겨있던 우리의 마을의 공간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다. 이제는 방송 내용보다도 라디오에서 홀러 나오는 소음에 젖 어버린 마음이길래 갑자기 정전이나 되어'서 방송이 중단되면 깝짝 놀라곤 한다. 소음에 놀라던 마음이 이제는 침묵에 놀라게 되었다 는 말이다. 만일 우리의 공간올 메우고 있는 방송의 소옴어가 우리 의 일상적인 대화의 본전이 된다고 하면 참으로 우리가 사는세상도 어처구니 없는 곳으로 바뀌어지고 말 것이다. 아득한 산올 배경으 로 하고 들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농부의 고독과 침묵온 그대로 벽지의 구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농민은 산과 들의 고독을 즉 자연 의 고독을 몸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그 산과 들의 고독이 그대로 농민들의 고독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고독의 구체성이 현대 매스콤 의 소음의 번거.로움에 침식올 당하고 있다. 언어의 만능 사상의 바닥에는〈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서적인 밑받침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과 창조의 긴장 관계를 다룬 신학이 몹시도 아쉽다. 컬럼비아 대학의 사회학 교수 2(1^30(1 II&11은 그의 저서〈침묵의 언어??7116 5116X11 !교!병패朗〉 에서 인간의 말 이외에도 시간과 공간의 언어가 있다고 지적했다. 언어가 아닌 언어가 오히려 말의 교환보다 더 근본적인 문화 현상 이라고 했다. 어떤 특정한 말에 대한 변동으로서 하는 말은 늘 가 시가 돋혀있다. 그런 말은 역시 고독한 말이 되고 만다. 현대의 우울증은 이러한 인간의 말을 침묵과 분리시켜 고독하게 만든데서 비롯된다. 침묵의 추방이 인간의 죄의 실상일 것이다, 투명하고도 아득히 넓은 침묵 이 말 자체를 투명하게 만든다. 구름과 같은 말이 침묵 위에 떠 있 다고나 할까 ?

인간은 침묵에서 태어나 또 다른 침묵을 향해 가는 어간에 살고 있다. 두 개의 침묵에서 오는 이중 반향을 가지고 있다. 순결하고 소박한 근원성을 지닌 말은 인간이 태어난 침묵에서 이 어 받고, 두서가 없고 하염없이 하는 연약한 말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돌입할 죽음의 참묵에서 받는 것이다. 잔 “ 폴은 인간의 말 속에서 이러한 순결과 소박한 혼척과 아울러 죽음을 위해서 준비하며 메아리차는 말의 부질없음을 지적했다. 침묵에서 이탈한 말은 이미 그 본래의 힘을 잃어버렸다. 바벨함 아래에서 언어의 혼란을 겪은 인간의 참 모습을 우리 자신 속에서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