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연리포트13호)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과 한국교회의 미래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과
한국교회의 미래
한국교회의 미래
채 수 일 / 경동교회 담임목사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가져온 변화는 너무 충격적이고 근본적이어서, 인류의 역사를 ‘코로나 이전’(BC)과 ‘코로나 이후’(AC)로 시대 구분할 정도가 된다. 변화의 충격은 교회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위기는 동시에 기회인 것처럼, ‘코로나19’시대는 인류와 교회에게 재앙이자 동시에 은혜의 도전이다.
1. 한국교회에서의 논의와 대응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에 대한 한국교회의 지금까지의 대응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비대면 예배와 집회를 온라인으로 대체 혹은 온-오프라인 병행, 헌금 감소로 인한 재정위기와 방안 모색, 임대료를 못내는 미자립 교회 지원, ‘온라인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교회 지원, 감염된 환자들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노숙자와 미등록외국인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후원 및 마스크 지원 등 대부분 ‘봉사’(디아코니아) 중심의 활동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에 대한 교회 안에서의 논의는 주로 모든 모임이 제약을 받는 현실과 그것의 부정적 영향에서 시작되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신천지’ 이단의 정체가 드러났지만, 교회를 몰상식한 집단이나 감염원으로 여기는 사회의 부정적 시각에는 ‘신천지’건 일반 교회건 차이가 없었다. 소금물을 입에 뿌리면 ‘코로나19’가 낫는다고 주장하는 교회, 신앙 훈련한다고 인분을 먹이는 교회를 세상 사람들은 특별히 구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갈수록 공신력을 잃어가고 있던 차에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의 개신교가 더 빠르게 몰락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모이기가 어려워지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지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모인다고 해도, 제한된 인원만 모일 수 있는 현실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큰 교회건 작은 교회건 모두 피해갈 수 없다. 헌금감소와 재정압박은 교회의 구조조정을 압박, 강요할 것이다. 인건비를 포함한 고정경비절감을 위해 인적 구조조정이 시행될 것이고, 모든 사업이 축소지향적으로 재검토될 것이다. 전통적인 공동체 예배형식, 면대면 교회학교교육, 교역자들의 역할도 변할 것이고,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될 것 같다. 헌금과 상회비로 유지되는 기관, 노회, 혹은 총회의 재정압박도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교회의 모든 영역에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영향만 끼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전 국민적으로,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온라인 소통이 실험되고 경험이 축적되고 있는 것을 꼭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모든 교인들은 아니지만, 온라인 예배가 오히려 더 좋다고 평가하는 교인들도 있다. 이미 ‘혼밥’, ‘혼술’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굳이 면대면 예배나 교육이 아니어도 불만스럽지 않은 것이다. 아직 온라인에 익숙하지 않은 아날로그 세대들도 학습과정을 거치면, 아래와 같은 긍정적인 변화도 빠르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1. 소셜 미디어를 통해 교회 안에서의 소통과 참여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1-2. 온라인 노회, 온라인 총회의 진행으로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선거에서도 총대중심의 간접민주주의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총회소속 모든 성도들의 대표를 뽑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1-3. 고령화, 저출산, 반기독교 정서에 더해 감염병의 유행으로 비대면 예배가 지속되면 교회의 재정위기와 양극화도 심화될 것이고, 상회비로 유지되는 노회나 총회의 재정난도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재정위기로 촉발되는 구조조정은 지금까지 스스로, 그리고 선제적으로 할 수 없었던, 아니면 ‘하지 않았던’ 교회의 자기개혁을 할 수 밖에 없는 장점이 될 수 있다.
1-4. 교회는 이제 ‘제2의 출애굽’ 시대로 들어섰다. ‘제1 출애굽’ 후, 광야에서 이동하는 ‘법궤종교’에서 예루살렘 성전 건축 후, ‘성전종교’, ‘공간의 종교’로 정착되었다가, 바벨론 포로기에 ‘책의 종교’, ‘시간의 종교’로 변한 유대교처럼, 한국교회도 ‘성전종교’에서 ‘제2의 출애굽’, 곧 ‘디지털 유목시대’로 진입했다.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예수님 이야기에서처럼(요 4,21-24), 어떤 공간도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종교개혁 정신이고, 중요한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니, 과연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디지털 유목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모색할 일이다.
1-5. 이미 상존하는 무임목사 외에도 앞으로도 무직목사들이 늘어날 현실에서 새로운 교회 형태와 목사직의 다양화가 더 확대되리라 생각한다. 목사의 이중직이 아니라 다중직이 허용될 것이고, ‘웹 처치’, ‘유튜브 교회’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이 생겨날 것이다.
1-6.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번영의 신학’ 대신에, 최초의 창조 후 하나님의 쉼을 시간화한 ‘안식일’(안식년, 희년)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새로운 창조를 시간화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의 신학적 의미를 숙고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가 될 것이다.1
기독교 신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재구성될 신학은 사실 ‘오래된 미래’처럼, 이미 있는, 그러나 교회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드려지고 실천되지는 않은 신학의 회복일 것이다. ‘희년신학’, ‘생태신학’, ‘생명신학’, ‘공공성 신학’, ‘에코페미니즘 신학’ 등이 이미 있다. 새로운 신학이론이나 담론의 결핍이 문제가 아니라, 신학실천(Theopraxis)의 문제라고 하겠다.
2.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인류와 교회에게 재앙이자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은혜인 이유는 무엇인가?
2-1.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재앙인 것은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지금도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에서만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지난 3개월 동안(2020년2월부터 5월까지) 10만 명을 넘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6월 1일 현재 사망자는 10만 6천여명). 이 사망자 숫자는 한국전쟁(1950-1953, 36,500명), 베트남 전쟁(1961-1975, 58,000명), 이라크(2003-2011, 4,500명)와 아프카니스탄(2001-오늘까지, 2,000명) 전쟁 등 총 44년간에 걸친 전쟁에서 사망한 미국 군인들 숫자보다 더 많다. 6월 1일 현재, 누적 확진자는 183만 여명, 수 백 만 명의 미국인이 직장을 잃었다. 불법체류자, 의료보험미가입자 등은 치료조차 받을 수 없다. 재해와 재난도 불공평한 것이다. ‘외신에 따르면 4월초 시카고에서는 흑인이 전체인구의 32%지만, 코로나19 사망자 중에서는 67%를 차지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뉴욕시에서도 5월 30일 현재 흑인과 히스패닉의 인구 대비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비율이 백인보다 두 배나 높다. 이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바이러스에 더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고, 의료보험 미가입자도 약 3천만 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침체로 지난 3월 말부터 10주 동안 발생한 미국의 실업자 수는 4,080만 명을 넘었고, 실업률이 20%에 이를 전망이다. 사라진 대부분의 저임금일자리들은 대부분 유색인종이 종사하는 직종이다.2
2-2. 2020년 6월 10일 현재, ‘코로나19’ 확진자는 전 세계적으로 720만 명, 사망자는 41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우리나라는 확진자 11,902명, 사망자는 276명. 이는 이전에 있었던 다른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한 치명율에 비추어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코로나19’ 그 자체보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에서 파생된 장기경기침체가 더 큰 문제다. 전문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4월 24일 현재, 공장가동중단조치와 기업의 대규모 일시해고 등으로 5주간에 2,650만 명이 실직했는데, 이는 대공황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3 우리나라도 고용충격에 취약한 노동자가 728만 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실업급여를 탈 수 없는 고용보험미가입자가 459만 명이다.4
2-3. 경제적 장기침체로 저성장이 일상화되고 구조화되면, 저물가, 저금리, 높은 실업률을 보이게 된다. 나라들은 저마다 국경을 폐쇄하고, 자국중심주의를 강화할 것이다. 그러면 경제위기는 세계적 규모로, 장기화될 것이고, 대량실업, 양극화와 인종주의는 더 심화될 것이고, 미등록외국인노동자, 난민 등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과 희생은 더 커질 것이다. ‘코로나로 죽든지, 아니면 굶어 죽든지’라는 불만은 과장이 아니다.5그런데 문제는 일국체제로는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을 막을 수도 없고, 경제위기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데 있다.
주로 수출에 의존하여 경제성장을 해온 한국의 사정도 우려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4월 고용동향을 보면 저임금 서비스산업과 임시, 일용직 중심으로 1년 전에 비해 취업자가 47만 6천명 감소했고, 실업자에 포함되지 않는 일시휴직자도 113만 명 증가했다. 이는 하위계층의 근로소득 감소로 이어졌지만, 고소득층의 소득은 오히려 증가했다. 1분기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상위 10% 가구의 소득은 전년에 비해 7% 증가했고, 하위 10%가구는 3.6% 감소했다. 재난으로 인한 고통은 주로 빈곤층에 집중되고 있고, 재난이 새로운 부를 축적하는 기회가 되는 사람도 있다.6
2-4. 그러나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역설적이게도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은 인류가 이제 모두 함께 죽든지 아니면 함께 살든지 해야 한다는 집단적 성찰로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재앙의 시대적 표징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재앙은 ‘은혜의 표징’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우리가 거리를 두고 사람과 사물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던 우리 자신과 이웃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명과 역사도 거리를 두고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잠시 멈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오직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 우리가 걸어온 뒤를 돌아보게 했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인류가 추구해온 지구적 규모의 약탈적 자본주의의 발전 패러다임이 지속가능한지 숙고하는 기회로 삼게 했으니 은혜이다.
‘코로나19’는 개인의 생명이 우주적 ‘온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생태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주었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김종철 교수는 ‘코로나19’ 사태의 원인이, ‘오로지 이윤과 성장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 무절제한 탐욕의 정신이 온 세상을 압도하는 바람에 야생생물들의 서식지를 포함한 생태계를 대대적으로 파괴한데’ 있고, ‘거기에 자본, 물자, 사람의 대량이동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논리까지 합세하여 전개된 파국적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곳곳에서 소비와 산업 활동이 일시적이나마 정지 내지는 둔화되자 대기가 청명해지고, 소음이 잦아들고, 자연 만물이 생기를 되찾은 것은 종래의 생활이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확연한 증표’라고 한다.7 일시적인 ‘잠시 멈춤’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했으니 이것도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는 지금까지 인류를 분리해온 모든 보이는 장벽,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계급적, 남녀노소의 장벽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이제 인류는 힘과 지혜를 모아, 사랑과 연대로 함께 살든지, 아니면 함께 죽든지 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으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와 거기에서 파생된 경제위기가 글로벌 위기인 것처럼, 인류의 대응도 글로벌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처럼, ‘인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분열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연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우리가 분열을 선택한다면 위기는 장기화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욱 큰 재앙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글로벌 연대를 택한다면,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상대로 한 승리가 될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모든 전염병을 상대로 한 승리가 될 것’이다.
3. ‘코로나19’ 재난은 분명히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를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변화가 더 크고 깊은 위기로 갈지, 아니면 인류를 새로운 깨달음과 공생의 기회로 이끌지는 전적으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학습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목숨을 걸고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달려가는 의료진들, 자기는 살만큼 살았으니 젊은이에게 산소 호흡기를 주라고 하고 세상을 떠난 할머니, 자기 몫의 마스크를 사지 않고 더 어려운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시민, 헌혈하고 성금을 모아 보내고, 해외에서 귀국하는 국민에게 기꺼이 자가 격리 공간을 제공한 시민들, 시도 경계를 넘어 환자들을 받아 치료하는 자치단체들, 임대료를 깎아주는 집주인들, 영세 상인들을 돕기 위해 착한 소비에 나선 시민들, 이름 없는 이들이 모두 진정한 영웅이다. 이런 시민들의 헌신과 연대야말로 과연 새로운 세상은 가능하다는 표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로에게 힘과 격려를 주는 이름 없는 시민들의 이야기들은 우리 가슴을 자부심과 감동으로 채운다. 지금 세계의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재기, 각자도생, 다시 강화되는 인종주의, 국경폐쇄, 자국중심주의 현상과 비교하면,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극복해가는 우리나라가 세계로부터 신뢰받는 모범국가, 우리 국민이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시민이 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이제는 단지 ‘K-방역’에서만이 아니라, ‘코로나 이후’ 세계의 생태계와 경제 질서를 새롭게 구상하고 만들어가는 일에서도 대한민국이 세계의 존경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바로 이 일에 한국교회가 참여하고 기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나 신학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비현실적인 당위적 주장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에 뿌리내린 공동행동이 필요하다. ‘생명 중심의 삶의 실천’, ‘반생명적 문화의 제어’가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서, 교회공동체 차원에서, 한 나라 그리고 지구적 차원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 정책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공정무역운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판 데러 호프 보에르스마 신부가 ‘현재의 병폐를 고치기 위한 믿을 만한 대안이나 분명한 제안이 없다면, 저항은 무의미하다. 현재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비판만 한다고 미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반대한다는 것은 제시하는 것이다.8 우리가 모델로 삼을 수 있는 다른 나라의 역사적 경험도 중요하고,9 ‘K-방역’처럼, 우리나라가 모델이 될 수 있는 ‘상생의 경제’, ‘사회연대경제’ 모델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것도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에 대한 전망, 강요된 부정적, 긍정적 변화에 대한 이런 저런 전망이 제시되고 있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결국 경제일 것이다. 장기경기침체가 동반하는 대량실업과 경제위기는, ‘긴급재난지원금’, 논의 중인 ‘기본소득’, ‘전국민고용보험’ 제도로 온전히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재원이 문제이고, 경기침체가 세계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국의 경제위기만이 아니라, 기후위기와 세계적 경기회복을 위한 재원마련을 위해서는 대규모의 군비축소를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남북의 평화적 관계유지가 필요하다.
4.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야할까?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기로 들어선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더 이상 양적 성장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교회의 양극화(부자교회와 가난한 교회, 도시교회와 농어촌 교회)도 심화될 것이다.
2019년 10월 ‘뉴스앤조이’ 보도에 따르면, 한국개신교의 전 교단에서 교인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교단별로 보면, 예장고신이 2006년 50만 1036명, 기장이 2007년 33만 7570명, 감리회가 2009년 158만 7385명, 예장 합신이 2009년 15만 6508명, 예장 통합이 2010년 285만 2311명, 기성이 2011년 59만 431명, 예장합동이 2012년 299만 4837명이었다. 그런데 2018년 현황을 비교해보면 총 128만 2,947명(16.2%)이 감소했다. 인원수로는 예장합동에서 33만 8,107명이 줄었고, 예장통합은 29만 8,084명, 감리회는 29만 8,074명이 줄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교세 감소 수치는 더욱 심각하다. 전체 교인 수는 2013년 28만 9,854명이었는데, 2014년 28만 4,160명, 2015년 26만 4,743명, 2016년 24만 109명, 2017년 23만 5,077명으로 감소했다가 2018년 23만 6,036명으로 처음으로 959명이 늘었습니다. 한 해에 적게는 5천명에서 많게는 2만 명이 감소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감소 추세가 고령화나 저출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공공성 상실에서 비롯되고, 지속적이라는 것이 더 심각하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지속되면, 한국교회의 위기는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모두 감안하고 우리 교회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면서,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을까?
4-1. ‘코로나19’ 사태에서 비롯된 예배 참석 제한과 경기침체의 장기화로 교인감소와 교회의 재정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개교회 안에서 재정운용의 원칙과 방향 정립, 노회와 총회 차원에서 신학교육의 제고, 교회폐쇄 혹은 통폐합, 교역자 실업대책, 교역다양성 제도화 등을 숙고해야 한다.
4-2. 전 국민의 온라인 학습경험을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온라인을 이용한 프로그램과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개교회 차원에서 하기 힘든 콘텐츠 제작과 공급, 네트워킹은 총회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
4-3. ‘코로나19’의 원인이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에 있기에 지금까지의 발전모델을 반성하고, 현대산업문명이 지닌 반생태적 성격에 대하여 성찰하면서 현대 산업문명이 작동하는 사회 시스템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식량과 에너지, 보건의료 영역에서는 지역 경제의 자족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 지역에 기반한 교회들이 지역순환경제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
4-4. 중국의 생태운동가인 윈톄쥔은 자연으로 돌아가 순리대로 속도를 늦추어 사는 생태마을, ‘슬로 푸드’,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고 그럼으로써 자연자원 소비를 줄이고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생계 방식을 제시했는데,10 이것은 삶을 본질적으로 바꾸는 일이기에 라이프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고백의 문제라고 하겠다.
4-4. 위기는 새롭게 문제를 설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원칙들을 치워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위기는 바로 낡은 것의 죽음 속에 들어 있기에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있는 법이다.11 우리의 과제는 위기를 어떻게 바로 잡느냐보다 먼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12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만, 그러나 모든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생각할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과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의지를 가진 개인 혹은 공동체에게나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을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보고, ‘디지털 유목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1)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 생태학적 창조론, 김균진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7, 435 참조.
2) 이강국(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교수),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한겨레신문, 2020년6월2일(화),31면 참조.
3) 국민일보, 2020년 4월 24일, 12면 보도 참조.
4) 한겨레신문, 2020년 4월 24일, 12면 참고.
5) 김창엽, 우리에게 코로나19는 무엇인가, in: 포스트 코로나 사회 – 팬데믹의 경험과 달라진 세계, 글항아리, 2020, 18.
6) 이강국, 같은 글, 참조.
7) 김종철,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 한겨레신문, 2020년4월17일(금), 22면 참조.
8) 프란시스코 판 더르 호프 보에르스마, 가난한 사람들의 선언: 사회연대경제, 아래로부터의 대안, 박형준 역, 마농지, 2020, 103.
9) 오스트리아는 전후 이념 갈등에서 벗어나 좌우가 협력해 국정을 관리하는 대연정, 합의제 정치를 발전시켰고, 노사정이 협의를 통해 경제 및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이른바 ‘사회적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오스트리아는 이런 두 겹의 합의 체제를 바탕으로 선순환의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백기철,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골든타임’, 한겨레신문, 2020년6월4일(목),22면 참조.
10) 안희경, 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다, 경향신문, 2020년6월11일.
11) 프란시스코 판 더르 호프 보에르스마, 가난한 사람들의 선언 – 사회연대경제, 아래로부터의 대안, 마농지, 2020, 28.
12) 프란시스코 판 더르 호프 보에르스마, 같은 책,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