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다시 길을 묻다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성찰해볼 만한 설교문을 공유합니다.)

 

다시 길을 묻다 

강대인

함께하는 예배공동체 예배설교 2020.5.10

 

  1. 성서일과 읽기

31:1~5, 15~16 탄원의 시, 탄원으로부터 구원(응답) 확신으로의 급전환이 4절과 5절, 13절과 14절에 나타납니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다. 나를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성이 되소서. 우리를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이 시의 메시지를 이렇게 읽습니다. 이 세계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문명의 발달도 자연의 재난 앞에서는 무력하기 끝이 없습니다. 인간사회의 역사도 마찬가집니다. 도처에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죽음의 덫을 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에서 낙오하지 않게, 우리에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의 성이신 그 분을 기립니다.

 

7:55~60 스데반의 순교,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의 순교의 장면은 예수의 마지막 장면과 흡사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젊은 사울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에 후에 그가 위대한 선교사가 된 사실은 우리의 선택과 실천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으로 이해해 봅니다. 스데반이 예수의 길을 따른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밷전 2:2~10 살아있는 돌(산 돌, living stone)과 하나님의 백성 –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베드로는 성도 개개인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 여러 가지 요소가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를 모퉁이 돌로 삼고, 각각 그 집의 한 부분이 되어 하나님의 집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건축에 사용되는 돌로 비유하고 ‘살아있는’이라는 형용사를 붙입니다. 자신을 생명이라 하신 예수의 말씀과 연계하면서 신령한 집을 지으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돌로 지어진 집에 거하기 위해 그 길을 가는 여정을 그려봅니다.

 

14:1~14 예수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

“나는 길(ἡ ὁδὀϛ)이요, 진리(ἡ ἀλἠθεια)요, 생명(ἡ ζωἠ)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고 그 생명에 참여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의 인격화시며 생명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가고 있는 그 길(죽음)을 제자들이 알고 있다고 하는데, 도마는 그가 가는 목적지나 길을 모른다고 응답합니다. 사실 11장 16절을 보면, 이미 도마는 예수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그의 죽음과 연관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답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는 단순히 길을 지칭하지 않고 그 자신이 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합니다. 진리는 신적 실재를 지칭하는 의미이며, 예수는 생명이기에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히브리서10:20의 말씀,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라는 말씀과 연계하여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1. 코로나19가 사회에 던지는 질문 – 우리 사회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했던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e)가 퍽 익숙해졌는데, 며칠 전 부터는 ‘생활 속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개념이 우리사회의 보편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코로나19의 최전선을 맡고 있는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책임자들은 생활 속 거리두기 지침준수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처음으로 가보는 길이지만,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는 또 하나의 화두를 다시 던진 것입니다.

코로나19(COVID-19)는 2020년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가야만 하는 인류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중국 우환의 재래시장 한 모퉁이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그토록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갔는가는 미스터리 같기도 합니다. 2000년 이후 발생했던 사스나 메르스도 같은 코로나바이러스였지만, 이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전 세계 213개 국가에 퍼져나가는 ‘초연결사회’(hyper connected society)의 놀라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초연결사회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입니다.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가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현재, 전 세계 확진자 수 404만여 명, 사망자 28만여 명으로 치사율이 거의 7%에 이르고 있습니다. 발생초기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확진자를 가졌던 우리나라는 38위로 밀려나 있고, 치사율도 2.4%로 가장 낮은 국가군에 들어가 있습니다.

젊은 물리학자이면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인 파올로 조르다노(Paolo Giordano)가 밀라노 한복판에서 코로나19사태를 분석하여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NEL CONTAGIO)는 책을 한 덜 전에 냈습니다. 소설가의 사유와 과학자의 엄정함을 잃지 않고 새로운 전염병이 불러온 현상을 예리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지금을 ‘전염의 시대’라고 진단하면서 어디에 있든 다층적으로 연결된 사회는 우리를 전염의 고리로 한데 묶었다고 말합니다. 국경, 지역, 문화, 인종, 나이도 초월한 전염 앞에서 모두는 공평합니다. 비록 누군가는 전염에 더 취약할지라도 결국 운명은 모두와 얽혀 있습니다. 항공, 교통, 통신 등 현대사회의 성취가 도리어 형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염의 시대는 또한 수많은 보편의 고독을 불러왔습니다. 집중 치료실에 격리된 환자, 마스크가 채워진 입, 의심의 눈초리, 뿌리 없는 소문, 침묵에 휩싸인 거리, 집에 홀로 머무는 시간, 우리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전염의 시대에 우리는 단일 유기체의 일부가 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인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모든 교통수단은 바이러스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75억 명의 인간이 동시에 돌아다니면서 이들 모두 빠르고 편안하고 효율적인 바이러스의 수송망이 됩니다. 전염의 시대에 우리의 능력은 자신에게 가하는 형벌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5월 7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위기와 기회’를 주제로 열린 문재인정부 3주년 국정토론회에서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의 발제가 있었습니다. 다소 길지만, 요약해 보겠습니다.

 

ILO 전문가 의견을 인용한 BBC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와 이동억제 등으로 인해 4월 초에 전 세계 33억 노동자의 81%가 일하는 수많은 직장들이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폐쇄되었습니다. 이 자료는 북중미·남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대륙까지 전 세계에 걸쳐 20~40% 수준의 많은 노동자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며, 신속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올해 2분기 말까지 최대 2억 명이 실직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 분야의 전망도 매우 어두워 보입니다. IMF는 4월초 2020년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이 -3.0%로 급락할 것이며 특히 독일, 스웨덴, 영국 등 유럽 권 국가들은 물론 미국, 일본의 경제충격이 매우 클 것으로 예상한 바 있습니다. 한국은 -1.2% 내외로 예측되어 상황이 생각보다 크게 나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87%에 육박하는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를 고려한다면 올 한 해 우리가 겪어야 할 경제·사회적 고통이 얼마나 클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장차 코로나19를 극복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지금부터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확실성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미래가 예상됩니다.

 

우선 ‘O2O 통합사회’의 등장입니다. 오프라인 활동은 최소화되고 온라인 활동은 최대화될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과 스마트 시대로의 급격한 도약과 점프를 통해 ‘ICT 기술의 전성기’가 도래할 것이며, 기존 오프라인 세상에서의 생산, 유통, 소비, 거래, 회의, 교육, 의료 등 대다수의 일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시대를 본격 맞이할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저성장과 저고용 시대는 장기화되고 AI, 로봇, 빅데이터 분석 등 첨단기술을 구사하는 계층과 국가와 그렇지 않은 계층과 국가 간의 극심한 불평등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심화된 사회적 단절과 배제로 인해 국내적으로는 사회적 차별과 인종주의·국수주의적 경향이 증가하고 국제적으로는 국가 간 갈등과 충돌이 확산될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쇠퇴와 함께 세계평화가 더욱 위협받게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기술·경제적으로는 전례 없이 고도화되고 첨단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정치적 측면에서는 더욱 분열되고 수많은 갈등에 휩싸이는 ‘두 얼굴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음 네 가지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첫째, 대량실업과 대규모 기업부도 등 미래의 예상되는 위험을 예방하고 새로운 기회를 선점하기 위해서 휴먼 뉴딜,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 한반도 뉴딜, 글로벌 뉴딜 등 다섯 가지 전환적 뉴딜을 선제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둘째, 4차 산업혁명과 스마트 투자를 통해 신경제 구조를 형성하되 국민의 창의적 역량과 협동역량을 증진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교육·고용·복지 전략을 병행함으로써 기술혁신이 지속적 고용 및 사회보장과 잘 통합되도록 하는 접근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와해되거나 약화되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Global Value Chain)을 복원하고 스마트 전략과 결합된 리쇼어링(Reshoring) 정책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기존의 협력 파트너 국가들과 국제협력을 활성화하되, 협력의 범위를 경제회복, 공동 연구개발, 인재양성 등으로 확대하여 지속가능한 포용적 국제협력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세계 포용국가 비전을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협력을 더욱 심화시키는 노력을 전개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력과 치사율이 높은 감염병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와 개인적 방역이 생활화되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강화하고 공동체의 통합성을 높이는 데 정부, 기업, 시민사회 모두가 나서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일은 엄청난 위험에 대한 도전과 자원의 재배분이 수반됩니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빈번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따라서 유연하고 원만한 사회경제적 이행을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와 협치가 필수적이라고 믿습니다. 이 대화와 협치야말로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경쟁과 갈등을 협력과 상생으로 바꾸는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노력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대한민국을 경제적 번영, 사회적 연대, 개인적 행복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혁신적 포용국가로 바꾸고 분열과 대결의 국제사회를 세계 포용국가 연합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실천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혁신적 포용국가’라는 국가비전을 채택하여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최고 수준의 국정운영 능력을 보여준 우리나라가 대내적 번영을 넘어 세계평화와 세계공익을 증진하는 데서도 적극적으로 글로벌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중대한 위기에 처한 세계가 한국에 대해 기대하는 역사적 사명이며, 우리 스스로 짊어져야 할 고귀한 시대적 소임입니다. 모두를 위한 혁신과 포용의 세상을 세계인이 함께 이루어나가야 할 때입니다.

 

○ 3주 전 국내 한 언론(조선일보 4윌21일)은 여러 분야의 글로벌 전문가 24명을 인터뷰기사를 싣고 앞으로 달라질 10가지를 요약하여 정리한 바가 있습니다.

 

① 탈세계화(deglobalization) – 사람, 자본 더 이상 국경 넘지 않는다. 각자 도생의 시대가 열린다.

② 거대 정부-전시 수준으로 코로나 통제하면서, 헌법 권한을 넘어서는 정부가 나올 수도 있다.

③ 세계의 일본화-미·유럽, 경제잠재력과 물가 동시 하락 – 일본식 장기불황 닥친다.

④ 유로존 위기-남유럽 지역(이탈리아, 스페인)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불안이 확산하고 있으며, 유로존이 다시 결별 공포에 쌓였다.

⑤ 중국의 위상-“미에 정치적으로도 우위 점할 것” vs “세계적 불신 더 커질 것” 등으로 의견이 나뉜다.

⑥ 포퓰리즘-기본소득은 시작이고, 더 센 포퓰리즘으로 경제약자들을 유혹할 것이다.

⑦ 탈오피스-의도치 않은 재택근무 실험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여성들의 경제활동 기회 늘어날 것이다.

⑧ 악수의 종말-사회적 표준 된 거리두기, 인류의 대면 관행 뒤바꿀 가능성이 있다.

⑨ 코로나 세대-금융위기시대 밀레니얼 세대처럼, 지금 20대는 장기 실업난 우려가 있다.

⑩ 환경존중-항공편 멈추자 온실가스 배출량 급감하고, 온난화 논쟁과 기후변화 논의가 새 국면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처럼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코로나가 인류 사회 각 분야의 흐름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보면서, 뉴노멀의 시대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민하게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우리나라가 개방성과 투명성으로 코로나19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한 결과,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우리스스로도 자긍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지난 150년 동안 한국인들을 지배해 왔던 ‘서구의 신화’가 종언을 고하고 있습니다. 자기비하와 자기 확신과 자존감으로 나를 보는 눈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역전시킨 것이 역설적으로 바이러스가 가져온 위기 상황입니다.

이제 우리를 포함하여 전 세계가 코로나19를 계기로 전 지구적·사회적 전환의 메시지를 읽어내야 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시대에 경제 분야에서 사용되었던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말이 최근 코로나19 국면에 더 확장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정상이라고 생각되었던 표준과 규칙이 와해 무력화되고 새로운 규칙과 기준이 된다는, 즉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세상 만물과 사람이 얼마나 서로 긴밀하고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확진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가를 보았고, 더욱이 슈퍼감염자의 경우 상상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엇 그제 용인에 거주하는 한 젊은이의 무분별한 행동이 다시 우리를 코로나 확산 공포의 위험으로 몰아넣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세계와 사회, 생명과 자연을 살리려는 큰 원력을 가진 좋은 슈퍼감염자 한 사람의 의식적인 노력이 얼마나 많은 세상과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반증해 주는 희망의 메시지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현상들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는 과연 무엇이 행복인지, 죽음이라는 것, 건강하다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인류적 각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이 엄청난 전 지구적 위기를 새로운 기회의 길로 바꾸어 놓을 전기가 될 것이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들 인류의 선택의 몫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1. 코로나19가 교회에 던지는 질문 – 우리 교회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2020년은 교회와 교인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21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을 치루면서 정치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던져졌다 생각했는데, 코로나19로 인해서 또다시 교회는 어떠해야 하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교인들은 어떤 자세로 이 전염병의 시대를 살아내야 할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코로나19는 발생 초기 확산을 촉발한 원인의 하나로 신천지와 깊게 연관된 것이 알려지면서, 교회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 사이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어 갔습니다. 물론 몇몇 교회의 상식을 벗어난 대응과 교회내의 집단 감염 사례가 나타나면서 교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비판과 싸늘한 시선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집단적 예배 모임을 자제해 달라는 정부 방역당국의 호소를 외면하는 교회의 수가 늘어나면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로 하여금 교회가 정말 무엇인지 다시 질문하게 합니다. 주일에 모이는 집단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로의 발돋움이 절실한 시기임이 분명합니다. 교회 조직이 진실한 공동체로 바뀔 수 있을까? 이것은 가능성의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과연 재난의 시대, 전염의 시대에 교회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예배공동체로 돌아가는 것, 예수 공동체의 회복을 통해 말씀의 묵상, 나눔과 섬김의 실천으로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의미하는 영어 ‘compassion’은 라틴어의 ‘함께’ 라는 ‘com’과 ‘고난당하다’라는 뜻의 ‘passio’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함께 고난당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복음서, 특히 누가복음 7:13에 나오는 ‘가엽게 여기셨다’는 헬라어 표현도 사실은 그 분과 ‘함께 아파하셨다’는 뜻입니다. 나인성의 사건이 아주 중요함은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가 아닙니다. 이 사건의 위대함은 예수가 여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깊이 느끼셨고, 그래서 그것이 생명의 활동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는 “나를 따라 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 9:23),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다.”(마11:29~30)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라는 초대는 아마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심오한 차원의 부름일 것입니다. 긍휼이란 주님만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과 함께 고난당하도록 초대받았다는 뜻입니다.

 

(https://blog.naver.com/heedaa77/221888686856)

아프리카 작은 나라 차드의 문인 무스타파 달렙의 이름으로 인터넷 상에 공유되고 있는 글을 소개해 봅니다. 실재하는 인물인지의 여부의 논쟁도 있어서 실재는 차드출신 프랑스 이민자인 Hassan Mahamat Idriss가 Mustapha Dahleb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이 글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이 전염의 시대를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여백을 갖기 원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에 의해 흔들리는 인류, 그리고 무너지는 사회…코로나 바이러스라 불리는 작은 미생물이 지구를 뒤집고 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나타나서 모든 것에 새로운 의문을 던지고 이미 안착된 규칙들을 재배치한다. 다르게…새롭게…

서방의 강국들이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얻어내지 못한 것(휴전, 전투중지)들을 이 조그만 미생물은 해 내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매연, 공기오염이 줄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이 갑자기 생겨 뭘 할지 모르는 정도가 되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으며, 일은 이제 더 이상 삶에서 우선이 아니고, 여행, 여가도 성공한 삶의 척도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화성에 가서 살고, 복제인간을 만들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던 우리 인류에게 그 한계를 깨닫게 해 주었다. 하늘의 힘에 맞서려는 인간의 지식 또한 덧없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확신이 불확실로, 힘이 연약함으로, 권력이 연대감과 협조로 변하는데는…인간은 그저 숨 하나, 먼지일 뿐임을 깨닫는 것도.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섭리가 우리에게 드리울 때를 기다리면서 스스로를 직시하자. 이 전 세계가 하나같이 직면한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에서 우리의 휴머니티가 무엇인지 질문해 보자. 집에 들어앉아 이 유행병이 주는 여러 가지를 묵상해 보고 살아있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자.”

‘존재’가 그 존재를 가장 강력하게 과시하는 때는 ‘부재’할 때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으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부모님의 고마움과 미안함, 우리 부모님이 있었음을 절감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번 코로나19에 즈음하여, 전 세계가 강제적으로, 혹은 자율적으로 ‘자가 격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삶을 유보당하거나 빼앗긴 이후, 역설적으로 일상의 소중함을 격렬하게 확인하는 것도 부재가 불러일으키는 역설적인 각성의 현장입니다. 일상의 부재 가운데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격리와 고립으로 인한 연결의 부재입니다. 그러기에 격리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을 통해 간단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여 기를 씁니다. 어떠신가요? 특히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배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누구와 어떻게 연결의 끈을 붙잡고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본질인 예수와의 연결의 끈을 붙잡고 있습니까? 그 분의 존재를 그 존재 자체로 바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이 부재의 시대에 조용히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 10:24-25) 히브리서의 말씀을 떠 올려 봅니다.

 

  1. 맺음 말

3년 전, 허리 수술을 받기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읽었던 책이 김기석 목사의 욥기를 사색한 책, [아! 욥]이었습니다. 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렵고,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고통이 함께 하는지에 대한 모든 이들의 질문이 바로 욥기의 주 메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드러나는 것 같은 시련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불경하다싶을 정도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묻고 또 묻는 질문을 반복합니다. 김 목사가 인용한 맹자의 고자장(告子章)에 나오는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몸과 피부를 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곤에 빠뜨리고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 전염과 질병의 시대, 고난과 고통의 시대에 그 시련의 밑바닥에 숨겨진 답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요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이 구절처럼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는 요한복음의 표현방식들은, 요 6:48 “나는 생명의 빵(ὁ ἂρτος τἠς ζωῆς)이다.” 요 10:7 “나는 양이 드나드는 (ἡ θὐρα τῶν πραβἀτων)이다.” 등에서 읽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은 우리를 구약, 출 3:14 “나는 곧 나다” I AM WHO I AM. (칠십인 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 지존하시고 영존하시며 완전하신 본질, 모든 존재의 근원자이심을 나타낸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김춘경 수녀의 책, <십자가의 길, 인간회복의 길>에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길을, 침묵의 길, 고통의 길, 자유의 길, 정의의 길, 사랑의 길, 인간회복의 길이라고 정리하여 우리를 묵상하게 하는 내용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어떻게 우리의 삶속에서 실현해 낼 수 있을까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 구절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창조가 하늘과 땅을 뜻하는 ‘샤마임’과 ‘아레츠’(실제는 관사를 붙여 ‘하샤마임’과 ‘하아레츠’)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 개역성경이나 새 번역 성경은 ‘천지’라고 번역하고, 영어성경 GNB는 ‘universe’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the heavens and the earth’로 옮기고 있습니다. 저는 ‘천지’라는 한 단어보다는 ‘하늘’과 ‘땅’을 구분하여 표현하는 것이 더 나아보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의 관심은, 그 후의 성경 기록들이 하나님이 땅과 함께 창조하신 하늘보다는 땅의 이야기들만으로 채워져 있는지 궁금합니다. 하늘은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거나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우리는 하늘을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하늘 역시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일을 잊고 오직 땅의 일에만 매달려 사는 우리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길을 따르겠다고 고백한다면, 그 삶은 땅의 규범과 기준으로는 살아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변화된 삶은 하늘의 규범과 기준으로 살아내야 하는 전혀 다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90편 12절,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구절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의 날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모든 날에, 특히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공백으로 여겨지는 이 날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가려져 있던 진실을 대면하게 하고, 인생의 우선순위를 직시하게 하고, 현재에 부피를 다시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 고통의 순간이 사라졌을 때, 우리의 깨달음도 증발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랑은 버릴수록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은 더 풍성해집니다.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전염병은 어쩌면 지금 꼭 필요한 ‘생각으로의 초대’일지도 모릅니다. 유예된 활동, 격리된 시간들은 그 초대에 응할 기회입니다. 무엇을 생각하여야 할까요? 우리는 단지 인간 공동체의 일부만이 아니라, 섬세하고 숭고한 생태계에서 우리야 말로 가장 침략적인 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들려오는 주님의 세미한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와 함께하는 오늘, 우리는 어느 길에 서 있으며,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묻습니다. 땅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길인가요? 아니면, 땅에 서있지만 하늘을 향한 길을 찾아가는 것인지요?

 

기도문

 

주님, 당신의 신비로운 길에 들어서려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곧 제자의 길이고 십자가에서 새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고백합니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평안과 가쁨의 길입니다. 이 길을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마음은 고난을 받아들이고, 생각은 깨달음에 열어두며, 의지로는 기꺼이 따르게 하소서. 힘든 일이 많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겠지요. 그러나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점점 더 빛 가운데로 나아갑니다. 제가 여기 있음에 감사하고, 주님이 제 하나님이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