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상생과 평화를 위한 3‧1혁명 100주년 기념 선언에 동참하는 1만 그리스도인 서명운동
금년은 ‘3·1혁명’ 100주년으로 전 국민적으로 그날의 함성의 의미를 되새기며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100년 전 한국교회는 3·1혁명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한국사회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한국교회가 3·1혁명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미래를 어떻게 열어가겠다는 입장문이 없이 한해가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여러 단체에서 크고 작은 기념과 문서를 내었지만, 한국교회가 신앙과 조직의 차이를 넘어서서 함께 하는 문서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최근 한국교회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거친 언사들이 마치 한국교회의 입장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는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여러 차례 회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초안 문서를 작성하여 한국교회에 회람합니다. 살펴보시고 동의가 되시면 발의자로 참석해 주시고 한국교회의 1만 명의 성도 이름으로 발표하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합의가 된다면 성탄절 전에 발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1혁명 100주년 기념 한국기독교회 선언 (초안)
-자유와 상생과 평화를 위한 성탄절 선언-
돌아보며-내다보며
100년 전 우리 민족은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불의한 식민지배에 대항하여 자유와 독립, 정의와 민주,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선언하는 3‧1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3‧1혁명은 오늘을 넘어 내일의 시대에 이르기 까지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기본가치로 우리 온 겨레의 혼과 얼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의 초대 기독교회는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믿고 이웃 종교인들과 함께 3‧1혁명의 과업에 적극 동참하였다. 나아가 이 땅에 복음전파의 사명을 띠고 활동하던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선교회와 모 교회들과 연대하여 큰일을 이루어 냈음을 기쁘고 감사하게 여긴다.
3‧1혁명의 정신은 1945년의 해방 이후에도 면면히 지속되어왔다. 이 정신은 4‧19 학생혁명, 6월 민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과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시대 굽이굽이마다 선혈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창조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꽃피어나고 있음을 우리 모두 경험하고 있다. 3‧1혁명정신의 귀중한 열매는 역사발전의 결과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국가들 중 우리 대한민국만이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급속한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도약을 성취하였다. 미래 경제의 선진 먹거리라 일컫는 첨단 기술문명을 최전선에서 당차게 이끌어 가는가 하면 우리들의 신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펼치는 한류와 문화예술을 통해 세계인들을 매력과 감동의 물결을 선사하고 있다. 우리는 배웠고 또 알게 되었다. 역경과 고난은 공동의 결단과 헌신을 통해 희망의 터전으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체험으로 습득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었다.
우리 기독교회는 하나님이 이 나라 백성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고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심을 믿는다. 성탄은 바로 이 구원의 주님이 백성들 가운데에 성육하신 축복의 날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역사를 통하여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듯이 이 나라의 하나님 백성들은 3‧1혁명을 비롯하여 이 땅의 온갖 혁명적 변화의 역사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의 해방 역사를 겸손하게 살피면서 하나님의 역사개입을 감사하려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들이 범한 허물과 오류도 솔직하게 반성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용서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이룩하시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갈구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뜻이 이 한반도에 성취될 수 있도록 그 길을 예비하는 일에 우리 동포들의 결단과 동참을 호소하자고자 한다. 이번 2019년의 성탄이 3‧1혁명 100주년의 감격과 맞물려 있기에 신앙적 애국 그리고 애국적 신앙의 마음을 모아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는 선언을 하고자 한다.
죄책고백과 소금과 빛의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하여
3‧1혁명은 자주독립, 자유민주, 평화적 인류공영의 나라를 꿈꾸었다. 이 꿈은 소중했으나 소중했던 만큼 그 실현에는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미독립선언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의 독립운동은 이념갈등과 함께 분열되었고 이를 악용한 일제 식민통치는 더욱 극악으로 치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해방을 맞았으나 외세의 책략과 민족내부의 분열 내지 결집된 역량부족으로 남북분단을 겪어야 했다. 뒤 이은 한국전쟁은 파멸적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 간의 적대적 냉전 갈등을 구조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전후의 상황은 악화의 길로 치달았다. 북의 공산독재와 남의 반공독재 사이에 벌어진 적대적 공생관계와 무한대결은 남북을 불문하고 국민들에게 심각한 인권 유린과 무고한 희생을 안겨주었다. 다행히 남한의 경우 수많은 항쟁과 의로운 희생의 결과로 이제야 진정한 민주공화국 체제를 정립할 수 있게 되었음을 뿌듯하게 생각한다.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방기한 죄책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고백한다. 우리 한국 기독교회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국내의 봉건체제와 식민외세 통치에 맞서서 분연히 저항의 불길을 당겼다. 고난 받는 백성에게 약속하신 정의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고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막상 해방과 독립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내적 독재체제와 외세 의존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당화하거나 편을 들어준 사실도 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나아가 한국 기독교회는 분단체제하에서 북한의 형제자매들에 대해 깊고 오랜 적대감을 품어왔다. 반공이념을 이웃사랑의 신앙 보다 앞세워 군부독재와 적대적 냉전체제를 정당화하는 죄를 범했다. 국제체제에서는 이미 한 세대 전에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운 무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국내에서는 생각이 다르면 용공 혹은 종북이라는 거짓 잣대와 허황된 주장으로 상대방을 매도하였다. 순진한 성도들을 혹세무민하여 정치적 광기의 광장으로 끌어내는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첫째 계명은 하나님 이외에 인간이 만든 어떤 이념이나 체제나 맘몬이나 권력일지라도 신앙의 이름으로 신격화하거나 절대화 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 중 일부는 지금 십계명에 반하는 반성경적이고 반 복음적인 폭거와 오만을 아직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지르고 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먼저 인간과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권이며 동시에 회개하고 돌아서는 자에게는 구원을 베푸는 주권이심을 우리는 함께 고백한다.
기독교회의 분열과 갈등에 대한 죄책
우리는 한국의 기독교회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과 함께 세계 근대 교회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급격한 양적성장을 이룩함에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여파로 세계 교회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교파 분열과 교회 분열이 있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탐욕적 교권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교회 선거의 부정과 타락, 이해 당사자 간의 고소 고발의 난무, 이권 집단화 등이 여기저기에서 발생하고 있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는 질타를 사회로부터 받고 있다. 이러한 일탈의 배후에는 신앙의 성숙이 아니라 교세의 양적 성장이 가치의 척도가 되는 타락한 번영신학이 흉물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번영신학 내지 성공신앙은 양적 성장과 물량적 재원축적과 정치 권력적 성공을 찬양하고 있다. 이 흐름에 도움이 안 되는 사회의 소수자는 소외되고 있으며, 성폭력과 갑질 행태는 가진 자의 일상이 되었고, 목회도 부와 권력을 따라 세습의 길로 치닫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국 기독교회가 복음의 기본으로 돌아가 십자가 고난의 신앙과 고난에서 승리하는 부활 희망의 신앙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촉구한다.
“소금”과 “빛”의 기독교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하여
이런 현실은 교회 자체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포기하거나 방기한 결과이다. 진실로 교회는 그 스스로의 존재이유나 목적은 없다. 다만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의 공동체로 살라하신 명령을 따르는 길만이 존재의 근거이다. 교회는 세상에 파고들어 세상이 썩지 않도록 희생과 회생의 역할을 해야 할 존재이다. 하지만 그 교회가 오히려 스스로 부패하고 맛이 없어져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거나 기피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도 버림받는 신세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소금이 못되니 자연스럽게 빛의 역할도 할 수 없다. 소금과 빛의 역할은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규정이 아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닮고 그 인격을 실천하라는 축복과 은혜의 선물이다. 소금은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소금이요, 빛은 십자가의 주님이 승리하고 새 피조물을 만드신 부활의 빛이다. 우리는 고백하고 결단한다. 우리 모두 맘몬주의의 교만과 가식에서 벗어나 십자가 사랑에서 보여주신 겸손과 희생의 공동체로 거듭나자. 세상의 권력과 지배이념이나 진영논리를 따르는 허황된 유토피아적 환상에 매몰되지 말고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의 부활 희망만을 믿고 전파하기로 결단하자.
자주독립 구현과 진정한 민주공화국 실현을 위하여
자유 민주와 자주적 공동번영의 의지
3‧1혁명은 자못 세계가 부러워하는 민주국가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는 불의한 일제 식민통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무능하고 부패한 왕정체제도 포기했다. 3‧1정신을 체화시켜 출범한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은 대한제국 대신에 대한민국을 설립했다. 이 대한민국의 국체는 민주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3‧1혁명은 강대국들이 전후 처리에 있어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게 만드는 역사적 근거가 되었다. 동시에 자주독립과 인류공영의 3‧1정신은 해방 후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로 계승되었다. 3‧1정신은 우리 민족의 핏줄에 면면히 도도하게 흐르면서 민족역사의 온갖 질곡을 헤쳐 나가는 기본 동력이 되었다. 나아가 이것이 전후 세계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급속한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의 견인력으로 작동했음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발 돋음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외세의존이 여전히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괴변을 쏟아내는 자들이 여전히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최근에 벌어진 한일 간의 갈등 와중에 매국적 주장을 내뿜는 무리들이 바로 그 실례에 속한다. 이들은 일제하 대동아전쟁기의 군수공업화가 전후 한국산업화의 기초라는 식으로 일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일본 국수주의적 망발에 동조하고 있다. 단언컨대 일제하 군수공업화의 잔재는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었다. 일제의 어떤 잔재도 전후의 한국 산업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완전한 잿더미로 변한 대지 위에서 우리 국민은 자립, 자주, 민주의 정신으로 불사조처럼 일어나 오늘의 민주화와 산업화를 일구어 낸 것이다. 이들은 일제가 저지른 종군위안부라는 극악무도한 성노예화도 이런 저런 망발로 정당화하려하고 있다. 주장의 자유는 인정하나 아직도 식민주의적 부역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집단들의 곡학아세가 가소로울 따름이다.
패배주의적인 종속에서 벗어나 열린 자주의 공동체로
강대국의 억압과 착취를 막고 자유롭고 평안하게 삶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민족 자주성의 확립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민족이든 이 자주성을 심고 아름답게 꽃피우려면 그만한 힘을 갖추어야 한다. 자주적 힘이 결여되었을 경우 순식간에 식민화와 종속으로 퇴락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민족자주의 힘이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기틀로서의 힘임을 믿는다. 민족자주의 힘은 삶을 풍요롭게 영위할 수 있는 경제발전과 경제민주화와 복지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으로서의 힘이다. 민족자주의 힘은 인류공영을 자신 있게 담보할 수 있는 상생의 평화공동체를 건설하는 기초로서의 힘이다. 우리는 3‧1혁명이 자주, 상생, 평화의 가치를 주창한 것은 프랑스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주창한 것과 일맥상통하며 세계인의 귀감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힘 있는 튼튼한 자주를 원한다. 그것은 약소국을 강탈하거나 착취하는 제국주의의 악한 힘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립갱생하면서 어려운 이웃 나라를 지원하며 그들이 인권과 정의를 세우도록 격려하며 세계적인 평화공동체를 수립하여 유무상통하는 힘을 기르고 강화해 나가는 바탕이다. 이로서 진정한 자주 선진국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힘 있고 열린 민족자주의 원칙을 오늘의 분단 현실을 극복하는 길에도 적용하려고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경이로운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발전이 매우 부정적인 분단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점에 주목한다. 분단을 운명적인 종속구조로 보지 않고 극복해야 할 아픔의 현장으로 또 변화시켜야 할 희망의 디딤돌로 생각하고 대처한 민족 내적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분단 때문에 강한 자극을 받았음도 인정한다. 3‧1정신으로 무장한 대한민국은 남북의 대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승리자의 사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군사적 대결이나 적대적 갈등을 고조시켜 무력으로 승리를 이루겠다는 군사적 방식이 아니다. 자유와 인권, 정의와 복지, 평화와 안보라는 가치관 경쟁의 방식을 선택한 결과라 믿는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분단을 현명하게 관리하고 극복해야 할 지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유엔군 및 주한 미군의 주둔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현재적 지위와 미래적 역할에 대해 우리는 슬기롭게 평가하고 결단해야 한다. 민족자주의 원칙에서 한국군으로의 전시작전권 이양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유엔군이나 주한미군은 지난날 냉전적 대결의 보호자 내지 첨병이었으나 앞으로는 동북아지역의 공동안보와 평화를 지키고 보장할 활력소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미군주둔비용 부담도 이러한 합리성과 자주성의 기초를 전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정착을 위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조속한 타결을 촉구한다. 이는 한반도의 당사자들 뿐 만 아니라 동북아체제에 관심이 있는 주변 국가들에게도 강력히 요청하는 바이다.
세계를 끌어안는 애국의 교회로
한국 땅에 자리한 한국기독교회는 이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교회이다. 이 한반도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라고 부름 받고 보냄 받은 사명을 감사한 마음으로 수용하고 성실하게 실천에 옮겨야 한다. 우리들 한국기독교회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나 폐쇄적인 국가주의에 함몰될 수 없다. 국수주의에 빠지면 나치나 스탈린주의 같은 반인륜적 흉악범죄에 빠져들 수 있다. 이런 흉악범죄에 직간접으로 동조하거나 정당화 하는 잘못을 범한 기독교회의 아프고 슬픈 역사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기독교회는 온 세계를 통치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파송 받은 공동체로 살아간다. 한국 기독교회는 한반도와 동북아 및 온 세계와 함께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를 심고 가꾸는 일에 연대하며 그 일을 위하여 공생 공존해야 한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본질적 사명이 있다. 기독교회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성경말씀을 존재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육신으로서는 애국의 교회이지만 영적으로서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기독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을 넘어 사는 종말적 공동체이다. 나라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나라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이 가고 하나님 편이 되어 살도록 기도하며 또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애국하는 길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다.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복지사회를 위하여
열린 시민사회의 등장
자주독립의 주체는 자주적 민주시민이다. 3‧1선언은 자주적 시민사회의 비전을 선포했다. 해방 후의 자주적 시민사회 수립을 위한 역사적 과정은 이 땅을 측은히 여기신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해방 직후 국민 대다수가 의존적 소작농이었으나 여러 해의 토지개혁조치를 거쳐 자주적 자영농으로 탈바꿈하는 혁명적 변화를 이룩하였다. 비록 과정이 더디고 굴곡이 많았지만 자주적 농민사회의 등장은 대한민국의 급속한 발전을 설명하는 핵심요인이다. 한국의 자영농은 산업화에 필요한 정치적 안정과 막대한 자본과 질 좋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주체이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군부독재 때문이 아니라 군부독재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고 말해야 한다. 자영농의 자녀들은 자주적 노동자이자 시민으로 성장하였고 이들은 민주적 시민사회 형성의 견인차가 되었다. 3‧1혁명정신에 바탕을 둔 헌법 하에서 민주적 주권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이들은 군사독재의 억압적 통치와 갖가지 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3‧1혁명이 꿈꾸던 자유민주 체제를 경제발전과 함께 이룩했던 주축 세력이었다.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공정사회를 위하여
현재 우리 사회는 성장과 분배의 조화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 양극화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수출대체산업화를 위한 재벌기업 중점육성 전략은 세계 시장의 극심한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목적이었지만 내적으로는 양극화의 위험을 근본적으로 배태하고 있었다. 나아가 인공지능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한 노동자 해고문제가 고조되고 있다. 다수의 젊은이들은 취업기회의 급속한 감소와 주변화로 시달리고 있으며 자주적 삶을 영위할 기초자료의 확보조차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커지고 있다. 노인 세대는 불평하고 젊은 세대는 분개하고 있다. 양극화의 질곡을 메꾸거나 완화할 중산층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양극화는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공동체의 유지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되고 있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과감한 제도개혁의 외침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개혁은 정부는 물론 기업과 노동현장, 대학과 종교사회에 까지 모든 관련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할 공공의 과제가 되고 있다. 구조적 위험이 증대한 이상 개인적 책임만을 따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민간단체와 정부당국이 공적 사회적 책임을 공유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 이제는 나서야 한다. 모든 소유권에는 개인적 기여분과 공동체의 기여분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공동체는 각각의 특성에 따라 공공성을 어떻게 실현에 옮길지를 고민해야 한다. 공공성에는 인간의 개발욕구 실현과 함께 창조질서 보전의 공공적 조화도 포함되어 있다.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자연의 파괴를 피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실천되어야 한다. 이 일에 우리 모두가 역사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 우리 후손들에게 피폐되고 파괴된 환경과 왜곡된 삶을 유산으로 넘겨주는 비극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회를 화해공동체로
한국의 기독교회는 두 가지의 화해 사역을 위임받고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 먼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켜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역이다. 개인의 영혼구원이라는 선교의 사명이다. 이 일에 모든 기독교회가 합심기도하며 헌신을 다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도 화해해야하며 하나님은 이 화해의 사역을 기독교회에게 맨 먼저 부여하셨다. 이것은 역사구원 내지 사회구원이라 일컫는다. 양극화는 인간 사이의 양극화만이 아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멀어짐이 더 근원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기독교회는 이런 두 가지의 화해를 촉진하기 위한 화해의 광장으로 변신되어야 한다. 화해의 기본 조건은 신뢰의 회복이다.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이 화해하려면 기독교회의 화해 사역 자격을 인정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개혁 및 사회개혁과 함께 교회개혁이 시급한 이유이다.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공간은 가치중립의 중립지대가 아니다. 화해의 궁극적인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화해를 내세우는 기독교회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세우는 공간이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를 중심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사회의 불공정을 질타하고, 비민주성을 고발하고, 온갖 압제와 차별을 비판하고, 파당과 당파적 대결을 거부할 때 그 중심은 하나님의 공의이며 이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예언자적 사명이다. 다양한 악기의 다양한 음이 서로 최선의 화음을 추구하여 아름다운 교향악을 만들어내듯이 기독교회의 화해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본으로 다양한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를 통해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역사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 기독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일에 앞장 서야 한다.
평화와 통일의 공동체를 위하여
먼저 평화 속에 공존을
3‧1혁명은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동북아 평화를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하는 혜안을 지녔다. 분단의 비극 60여년을 겪으면서 우리는 남북한의 통일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 국가들과의 평화공동체 형성과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먼저 평화로운 공존을 선언한다. 남북이 사상과 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하나의 민족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평화적 상생을 용납해야 한다.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선언했다. 바람직한 선언이다. 북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있고 남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남한이 북한의 체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도 북한이 남한의 체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도 시도하지 말아야한다. 무력적 수단에 의한 흡수통일이나 적화통일은 망상에 불과하다. 오늘날 핵전쟁 위협 속에서 전쟁의 결과는 공멸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평화공존의 과정을 시작하면서 전쟁이나 폭력의 대결이 아닌 평화적 경쟁에 나섬이 옳을 것이다. 양 체제의 공존이란 양 체제가 이제부터 상호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가치관 경쟁에 돌입함을 의미한다. 3‧1정신을 비롯하여 우리가 선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성취해 온 자주와 민주, 공정과 정의, 인권과 상생, 신앙의 자유를 포함한 온갖 자유, 복지와 행복, 교육과 훈련, 등 모든 가능한 분야에서 평화적 교류협력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평화공존의 취지이다. 당연히 그 과정은 공정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하며 평화적이어야 한다.
적대관계의 청산과 교류협력의 무대로
지난 시대의 세계적 냉전은 이미 종결되었다. 시장의 무한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의 새로운 대결이 판을 휩쓸고 있다. 국가 이기주의가 미국을 출발점으로 웅위를 떨치면서 세계 곳곳을 위협과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아쉽게도 남북 간의 적대관계는 오랜 과거이자 현실이다. 문제는 언제 까지 이런 적대적 대결을 끌고 갈 것인가이다. 북한은 북핵문제의 화약고를 안고 있으며, 남한은 주변 국가와의 갈등이 그치질 않고 있다. 남과 북은 민족공동체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미래 통일조국의 주체적 담당자로 공동의 살길을 진지하게 찾아야 한다. 끝없는 의심과 갈등으로 미래적 역량을 소모하기 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바탕으로 질적 경쟁을 하는 게 더욱 바람직하다.
지금 당장 지난 과거의 아픔과 분노와 대결의 역사를 한꺼번에 내려놓을 수도 없다. 먼저 현실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바탕위에서 과거의 원한을 해소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갈등의 잔재들을 보다 유연하고 철저하게 청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독일의 경우와 달리 동족상잔의 엄청난 전쟁후유증을 안고 있다. 기대하기로는 우리 대한민국이 경제발전과 정치적 민주화와 기술성장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용기와 지혜를 남북의 평화공존에도 선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기독교회를 평화공동체의 모범으로
한국의 기독교회는 두 가지의 사명을 지정학적 상황에서 부여받고 있다. 하나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복음화이며 다른 하나는 복음의 국제적 연대 확장이다.
본래 한반도의 복음화는 북한 땅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분단의 여파로 인해 남한 땅에서 중간 결실을 맺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의 뜻은 북한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임을 누구도 부인치 못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복음화의 과업은 남한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소명이다. 남한교회를 북한에 이식하는 것은 복음을 빙자한 흡수통일이라는 오해만 받게 된다. 그러므로 북한이 원하고 북한사회가 필요로 하는 도움의 손길을 한국의 기독교회가 공여하는 일부터 시작함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북한의 동네마다 모습은 있으나 실질기능이 부족한 군 단위 보건소를 한국교회가 맡아 개수하고 전문 인력을 파송하여 열악한 북한 주민의 건강을 살필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복지지향의 선교를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것도 평화공존 시대의 남북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동시에 한국의 기독교회는 이미 쌓아놓은 해외 기독교회들과의 국제적 유대관계를 심화 확대하여 평화공존의 후원부대를 튼튼히 해야 한다. 특히 동북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마중물로 주변 4강 국가들의 기독교회 공동체들과 동북아 평화와 안보의 민간차원 연대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한국기독교회가 지니고 있는 복음주의 세계교회들 및 에큐메니칼 진영의 세계교회들과의 연대를 효율적이며 지속가능한 협력의 틀로 정착하는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기독교회의 다짐
우리는 2019년 성탄을 맞이하여 3‧1혁명 100주년에 주시는 성탄의 은혜와 축복을 갈구하며 이 한반도에 평화와 공의의 주님께서 성육하시기를 기원한다. 이 축복의 마음을 담아 우리는 우리의 다짐을 엄숙히 밝히려 한다.
첫째, 한국기독교회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운명을 판가름하는 고비마다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우리는 1919년의 3‧1혁명이 내부의 봉건압제와 외부로부터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면서 민족공동체를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고 민족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었음을 감사한다. 이 길에 기독교회가 주도적으로 참여케 하심을 감사드린다. 이 역사적 부르심을 이어 받아 지난 군부독재 시절에도 분연히 일어나 이 땅의 민주화와 경제성장과 인권보호에 앞장서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감사한다. 이를 본받아 이 땅과 백성을 위해 시대마다 한국교회에 부여한 예언자적 사명을 성실히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둘째, 한국기독교회는 이 사회의 양극화 해소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공의와 평화가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일그러지면서 양극화라는 수렁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언덕을 깎고 계곡을 메우며 굽은 길은 곧게 하는 제사장적 사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이다. 양극화는 민족적 화합과 일치를 방해하고 극단주의로 치닫게 하며 분열과 적대적 갈등을 유발하는 악의 고리임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양극화를 해소할 복음의 메시지를 중심축으로 세우고 교회공동체가 먼저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 실천의 모범을 보이고자 한다.
셋째, 한국기독교회는 사랑과 평등이 바탕이 되는 평화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에 앞장 설 것이다. 우리들의 역사적 경험을 살려 먼저 약소국들의 애환을 들으며 위로의 연대활동을 펼칠 것이다. 강대국들과 약소국들과의 실질적인 화해와 평화 성취를 위해 우리의 지혜와 성실을 다할 것이다. 당연히 북한의 동포들을 위한 기본인권과 복지 혜택을 돕기 위한 일에 헌신할 것이다. 민족자결의 원칙을 지키며 모든 나라가 자주적 독립의 지위를 누리며 평화와 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성실하게 돕고자 한다. 우리 한국기독교회는 자주와 평화의 선봉장이 되어 살도록 우리 스스로의 갱신에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넷째, 한국기독교회는 동북아의 평화와 자주성 확립을 위해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한반도가 아직도 냉전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적 불안의 씨앗이 되고 있음을 통탄한다. 남북한을 비롯한 국제적 당사자들은 조속히 평화체제를 정착하기 위한 국제적 조약의 체결에 매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3‧1혁명의 자주독립 정신이 100년 후인 지금도 만족할 만큼 달성되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한국 정부는 한반도의 비핵화, 전시작전권의 회수,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와 주둔비용협상, 주변국들과의 정치경제적 갈등 처리에 있어서 자주독립의 자세를 굳건히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다섯째, 한국기독교회는 부와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적 기구들을 지원하고 또 필요한 기구들을 육성하는 일에 나설 것이다. 정부 당국과 시민사회 간의 비판적 연대와 협력의 길을 확장하여 선한 공권력이 뿌리 내리고 책임 있는 시민사회의 주체성이 화합을 유도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뜻을 같이 하는 시민사회의 여러 부문과 상호 협력하고 연대하는 일에 나설 것이다. 그것이 복음적 성육화의 한 모습임을 우리 모두가 확신한다.
우리는 3‧1혁명 100주년이 되기까지 이 땅에 변함없이 성육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주님은 항상 매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성육하셨다. 앞으로도 성탄에 주시는 성육의 은총을 사모하며 이 은총의 역사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동참할 것이다. 성탄의 축복이 온 세계만방의 백성들에게 크고 웅대하게 임하시기를 기원하며 함께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자 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자유와 상생과 평화를 위한 3‧1혁명 100주년 기념 선언에 동참하는
1만 그리스도인 일동
*현재까지 본 “3.1절 100주년 기념선언문”에 참여한 초안자 및 공동발의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강경민(일산은혜교회), 강대인(전 방통위원장), 김기석(성공회대총장), 김명혁(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병균(예장원로목사), 김병태(전 배제대교수), 김상덕(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실장), 김석봉(남북평화재단), 김성복(NCC인권센터이사장), 김성수(남북평화재단), 김성일(기장목사), 김영동(전 감리교사무국총무), 김영주(NCCK정의평화국장), 김영주(기사연원장), 김은섭(루터교총회장), 김종희(동남교회), 김필수(구세군사령관), 김하범(31절백주년사업사무처장), 김흥수(YMCA이사장), 나핵집(기장평화공동체 전회장), 남기평(EYC총무), 류장환(목원대교수), 문선경(창천교회권사), 민영진(전 성서공회총무), 박경조(대한성공회 전관구장), 박남수(기장의정부교회), 박덕신(감리교원로목사), 박만규(기독교서회전무), 박명철(기자), 박성용(비폭력평화물결대표), 박용례(기장원로목사), 박정민(감리교목사), 박종렬(기장원로목사), 박종천(전 감신대총장), 박종화(국민문화재단이사장), 박철(부산기독연대회장), 박화원(NCC실행위원), 박효식(좋은샘교회), 방인성(하나누리 대표), 배태진(전 기장총무), 백종국(기윤실이사장), 서광선(전이화여대 교수), 서재일(원주영강교회), 서정민(일본교토대학교수), 서진한(기독교서회사장), 서호석(NCCK국제위원장), 손달익(CBS이사장), 손봉호(전 서울대교수), 손인웅목사(예장통합원로목사), 송순재(전 감신대교수), 신경하(전 감리교감독회장), 안재웅(전 CCA 총무), 유경재(안동교회원로목사), 유성석(전 성결대학교총장), 유영완(전 충청연회감독), 육순종(기장총회장), 윤경로(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장), 윤길수(기사연 이사장), 이만열(상지대 이사장), 이문식(복음주의교회연합대표), 이민형(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용윤(남북평화재단), 이용호(전 고신총회장), 이홍정(NCCK총무), 임헌택(전 구세군사관학교장), 전병금(전 기장총회장), 정금교(전 목정평의장), 정지강(전 기독교서회 사장), 정지석(평화의씨앗들), 조부활(베델의집), 조창희(예능교회), 진광수(고난함께총무), 채수일(전 한신대총장), 최광훈(남북평화재단), 추교화(전 감리교여선교회회장), 태동하(영등포교회), 한국염(NCCK 전 부회장), 한지혜(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허원배(NCCK통일위원장), 황선엽(구세군역사문화관장)
*본 선언문 발표는 12/17 오후 4시, 정동제일교회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본 선언문은 초안이며, 수정 중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7 Responses to “자유와 상생과 평화를 위한 3‧1혁명 100주년 기념 선언에 동참하는 1만 그리스도인 서명운동”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자유, 상생, 평화를 지지합니다
동참합니다.
이 땅에 오직 하나님의 나라 만이 융성하게 하소서.
모든 껍데기는 가게 하소서.
3.1운동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운동 100년
새로운 100년에도 불타오르게 하소서
지지합니다
감격과 엄중함으로 읽었습니다. 민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자부심과 끊임없는 성찰의 의무 그리고 감당해야 할 책임을 일깨우는 선언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부분 오자가 있는 것 같아, 확인 부탁드립니다.
선언문의 두번째 단락 3번쨰 줄의 “선혈들의 정신”에서 “선혈”은 “선열”로 고쳐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정의로운 외침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 날이 빨리 오길 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지방에서도 이런 교회의 정의로운 외침에 참여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텐데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현재 조선대학교 경영학부 교수이면서, 통합측 광주 나눔과섬김교회에서 자비량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같이 자비량 목회로 동역하고 계신 조인선 목사님도 최근까지 전남대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시다 이번에 퇴직하셨는데, 가능하다면 저희 두 사람도 함께 참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