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그리스도교 강요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31 21:26
조회
9390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칼빈의 그리스도교 강요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칼빈의 그리스도교 강요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칼빈 그리스도교 강요 제네바 루터 성찬문제 칼빈주의
주제어 칼빈 그리스도교 강요 제네바 루터 성찬문제 칼빈주의

첨부파일: 칼빈의그리스도교강요.pdf

칼빈의 그리스도교 강요

군대에 정규군과 비정규군이 있듯이 신학자에도 정규 신학자와 비 정규 신학자가 있다고 한다. 이는 칼 바르트란 신학자가 칼빈과 루 터를 비교하여 한말인데, 그의 풀이에 의하면 칼빈은 어디까지나 정규적인 교의학자라고 하는 이유를몇가지 열거했다. 칼빈의 사상 은 조직적이고 체계가 정연하며, 하나의 완결된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에 비교해 본다면 비 조직적이며 완결되 어 있지.않고 결론이 언제나 개방적이다. 이처럼 칼빈의 사상 체계 는 정규적인 학문 체계를 갖추어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주축을 이 루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칼빈의〈그리스도교 강요〉는 현대 에도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고전으로 간주되어 있으며 신학의 요체 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칼빈은 1509년에 피카르디의 노용에 태어났다. 1523년부터 1528 년까지 파리에서 공부하고 아버지의 종용에 따라서 오를레앙과 뷔 르기스에서 법학을 연구했다. 아버지의 별세를 계기로 그는 파리 에 다시 돌아가서 고전과 히브리어를 전공하고 보수적인 종교 사 상에 항거하는 인본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1533 년에 돌발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종교 개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 때 만 하더라도 전통적인 카톨릭 신학의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그는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며 그의 사상을 전하면서 이를 체계적 으로 정리하기 시작했었다, 1534년에 그는 앙굴렘에서 이 책의 저 술을 착수했고 1536년에 바젤에서 완성했다. 그 후에도 여러번 가 필을 하여서 수정 보충을 거듭했지만 근본 주제는 별로 변화가 없 었다. 이〈그리스도교 강요〉에서 그는 과거의 카톨릭 신앙과의 완 전한 결별을 표시했다. 로마 법왕의 권위와 교회 그리고 여러 전통 을 등지고,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척도는 다만〈신구약성서〉에 두 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골자이다.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한 칼빈은 고전 문학 대신에 신학에 온 갖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신구약성서〉는〈그리스도교 강요〉 를 저술하는데 문장의 패턴을 이루어 주었다. 성서의 문구를 인용 할 뿐만 아니라 스타일에 있어서도 성서의 문체를 본 떴었다. 그는 평생 초대 교부들의 저서를 탐독했다. 어거스된은 물론이요, 암부 &스와 크리소스틈의 작품들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칼빈의 문체는 퍽 고상하다. 그리고 그의 프랑스어의 구사는 독 창적인 면이 많다. 그러기에 이〈그리스도교 강요〉가 유럽의 언어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라고 할 것이요, 칼 빈의〈그리스도교 강요〉와라벨레의 산문은 당시 프랑스 문학에 있어서 모범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1541년 프랑스어 판 을 일컫는 말이다.

그의 문체는 명백, 정밀, 위엄, 간결함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그의 문장은 산문체의 전형이라고 한다, ‘ 〈그리스도교 강요〉의 원본에는 세 가지 판본이 있다. 1617년의 제네바 판은 국판으로 7권이다. 그리고 제일 크고 완전한 판본은 〈개혁자 전집 『이"!)II8 ?쑈!제34이?!!!)〉전질 중에 29?87권까지 수록 되어 있다, 가장 훌륭한 라틴어 판은 바르트와 니젤이' 편집한〈칼 빈선집〉가운데 3~5권에 실려있다. 〈그리스도교 강요〉에는 세 가지 역본이 있다. 처음 영어로 번역 된 것은 1561년에 노르톤이 번역한 것이고 1813년에 알렌이 번역 한 것이 나왔다. 세번째로 베베리지의 번역본이 나왔다. 이것이 가 장 넓게 사용되는 영어본이었다. 1539년 판은 라틴어 판이며 1541 년 판은 프랑스어 판이 다.

칼빈은 본래 법학을 전공했었기 때문에 저술에 있어서도 정연 한 이론을 전개하여서 합리적인 사고에 젖은 휴머니스트들을 설득 시키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 입중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제네바에 서는 그를 받아 들이지 않아서 1538년 칼빈은 기용 파텔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 당했다. 파텔은 칼빈으로 하여금 종교 개혁에 헌신하도록 설득시킨 인물이었다. 칼빈은 바젤과 스트라스부르 크에서 3년간 보람있는 생활을 하였다. 주로 설교와 지술에 시 일을 보낸 칼빈은 1541년에 제네바에서 다시 복귀할 수가 있었 다.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엄격한 교회법에 기초한 정부 행정 의 개혁에 착수했다. 생활전반에 걸쳐 근면, 절약, 저축을 장려 하고 임격한 신앙 훈련을 시행하였다. 제네바의 헌법과 법를도 개 정하였다. 그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것은 아나바프티스였으며, 그밖에도 루터와도 성찬론을 중심으로 해서 의견을 달리했다. 미카엘 셀베티우스를 화형에 처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이 다. 제네바 도심지에 가까운 샤노안 거리 11번지는 칼빈이 평생을 보낸 집이었다, 여기서 칼빈은 비교적 단순한 생활을 하였다.

어떤 로마의 추기경이 제네바를 지나가던 중에 칼빈을 예방하고 상상외로 검소하고 평민적인 생활을 하는데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 다. 여기서 그는 쉴새없이 저술과 교회의 목회에 전념했다. 수차 친 구들의 권유로 결혼을 시도했으나실패하고, 결국 1540년 팔월에 이델레트 뒤 뷔르라는 과부와 결혼했다. 아이 둘을 가지고 재혼한 이 여인과의 결혼은 칼빈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칼빈은 당시에 소시민 층에서 형성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사상을 전적으로 받아 들였다. 상업 생산을 장려하면서도 낭비에의 탐닉을 엄금했다. 자본주의적인 번영의 정신은 사실 칼빈주의적인 사상의 뒷받침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자본주의 형성에 칼빈주의가 끼친 영향은막 중한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도 대단히 광범하다. 후 에 영국에 있었던 청교도 혁명도 칼빈의 사상에서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칼빈의〈그리스도교 강요〉는 1536년에 초판으로서 간행되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수정과 보충을 거쳐서 완성된 것은 1559년이었 다. 종교개혁의 근본 사상을조직적으로 서술한 것으로서 탁월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그리스도교 강요〉를 요약하면 신 지식 과 인 간 지식은 둘로 갈라서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가 신의 존재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인 간이 참된 자기의 모습을 알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타락 상, 부패, 불행, 무지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 인해서 신의 절대적 인 권능과 지혜, 그리고 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 한 자아 인식도 반드시 신의 완전한 본성에 대한 깊은 생활이 앞서 야만 가능하다고 칼빈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이 단순히 신격인 존재를 입증한 다는 데에 머물러선 안된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신적인 존재를 찾 는 소질을 타고 나기 때문에 다만 성신이 내면적으로 입증해 주는 〈성서^의 말씀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참된 신 인식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 그는 이〈그리스도교 강요〉에서 거듭 신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 다. '이 신의 주권 사상이 결국 예정론에까지 발전되어서 보든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신의 주권과 그의 예정 안에서 아루어 져 나간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인간의 자유와 책 임을 동시에 강조하는데 이 두 가지 주장은 하나의 역설적인 성격 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타락상도〈성서〉의 말씀에 비추어서만 알 수 있 다 한다. 이는〈그리스도교 강요〉의 둘째 테마이다. 잃어버린인간 성, 휴머니티는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다 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속죄 사상이 없이는 창조자로서의 신을 이 해할 수가 없다. 아담의 타락은 인간의 참 모습을 잃게 하였고, 인 간이 자신을 위해서 가져야 할 지혜, 힘, 신성한 것,진리들을 상 실할 뿐만 아니라, 자손들을 위해서도 죄의 흔적을 남겨 놓게 된다 고 한다. 인간의 타락이 아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칼빈은 어느 정도 인 간성의 죄악에 대한 숙명론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으리만큼 철저하다. 인간의 죄가 결국 인간의 자아 숭배나 인간의 신격화에' 까지 이르게 되면 거기서 죄악의 현실성이 더 뚜렷해진다. 이것은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을 노예의 처지에 몰아 넣게 된다. 인간 을 속박하는 질고와 멍에를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신의 은총 에 의지하는 일이라고 한다. 은총에 의해서만 인간의 구원이 가능 하다고 칼빈은〈그리스도교 강요〉에서 주장하였다.

칼빈의〈그리스도교 강요〉는 신학의 체계라는 범위를 훨씬 넘 어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고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영 국,, 미국의 퓨리탄 정신이 발생했고, 또 서구의 자본주의 사상과 문화 전반에 걸쳐 윤리적인 기반을 주어 왔었다. 특히 칼빈주의와 유럽의 자본주의 행정과의 깊은 관계에 대한 타우니의 주장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혼히 칼빈주의 신학이라면 칼빈의〈그리스도교 강요〉에 집약된 사상을 말한다. 이 칼빈주의는 처음부터 루터교와는 성찬 문제로 서.로 갈라져 있다. 그리하여 같은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도 루터교와 개혁 교희로 나누어지는데, 칼빈주의는이 개혁교회를 말하는 것 이다. 이 칼빈주의가 제네바에서는 교회가 다스리는 국가 행정을 실 시케 했으나 루터교는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다. 칼빈의 사장을 수정하는 학자 중에는 야콥스. 아르미뉴스가 있 어서 그는 칼빈주의를 수정하여 온건한 주장을 했기 때문에 감 리교와 침례교 일부에서도 이 아르미뉴스의 신학을 지지하기로 한 다. 칼빈의 사상은 유럽 전체에 걸쳐서 카톨릭교와 루터교를 상대로 긴장 광계를 육지해 왔었고 특히 스코들란드에서 칼빈干의늡 予세 하여 스코틀란드의퓨리탄 정신을고취시켰다. 이퓨리탄정신이 약간 수정된 것이 미국의 뉴잉글란드를 중심으로 해서 퍼진 요나 단-에드워드의 칼빈주의 신학이었다.

한국은 일찍부터 미국의 선교사들의 선교로 말미암아, 칼빈주의 특히 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형성되었던 뉴잉글란드의 칼빈주의 사 상이 영향을 끼쳤다. 이 칼빈주의는 막스 베버가 말한대로 현세적 이며 금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특히 퓨리탄 정신과 한국 고래 의 전통적인 사상과는 상반되는 점도 있었지마는 실생활 윤리면에 서는 대단히 비슷한 점도 많다. 현대에 와서는 칼빈주의라는 사상 이 일종의 보수주의 별명처럼 전해져 있으나 칼빈의 사상 체계 가 운데에서는 주로 도이칠란트와 스위철란드를 중심으로 강렬한 학문 적인 뿌리를 박은 신전통주의 신학도 있다. 칼 바르트,브르너 같 은 신학자들로 비롯된 소위 위기 신학은 칼빈주의를 퓨리탄적으로 만 해석하지 않고 있다.

최근 미국 웨스터민스터에서 발행한 고전 총서 제 20권과 21권 에 최신 영어판이 실려 있다. 맥네일(知뇨 丁.:!^抽미) 이 편집한 것 으로서, 현대적인 문체로 번역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서도〈칼빈 연구회〉에서 원본을 토대로 번역을 서두르고 있다.

칼빈의〈그리스도교 강요〉는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창조자인 하나님에 대한지식
2.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구속자인 하나님
3.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 양식
4.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시는 외적인 방식 등이다.